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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시간이동?
나는 그 말에 반문했다.
“[작은 굴레]를 돌릴 수 있는 아티팩트란 말인가?”
그렇다면 확실히 대단하다. [작은 굴레]를 돌릴 수 있는 건 오로지 강대한 신적 존재들뿐이었으며, 그나마도 그들도 상당한 힘의 소모나 제약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자 내 말에 바토리가 대답했다.
“단 한 번이긴 하지만 그 시계의 침(針)을 이동시켰을 때 완전히 다른 시간대의 공간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시공간…. 그래서 시간을 이동하는 능력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측이란 건 확실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시계는 확장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숨겨진 법칙이 있어서 아직 완전히 다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 좀 더 연구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나한테서 시계를 강탈하려고 했구만.”
“…….”
“확장능력이 뭔지 말해.”
내 말에 움찔하던 바토리가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회중시계에는 초침과 분침, 시침이 있습니다. 그 3개의 침을 모두 12시에 모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달칵
나는 손가락으로 바토리의 말대로 3개의 침을 움직여서 12시에 일직선으로 모았다. 그러자 방금 전처럼 시간이 멈추는 현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기이한 빛을 내며 일렁거렸다. 현실의 윤곽이 사라지며 일렁이는 가운데 내 앞에 새하얀 빛의 문이 생겨났고, 나는 그 문을 통해 걸어들어갔다.
저벅
철그럭!
새하얀 문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회중시계가 커다랗게 변한 걸 깨달았다.
“헉.”
손바닥에 딱 잡힐 정도의 크기였는데 지금은 양 손으로 잡아야 할 정도로 커졌다! 그리고 거대해진 회중시계에는 빽빽하게 수많은 격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무려 7개나 되는 시침(時針)이 철컥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7개의 시계침은 서로 중복되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공간이 전혀 겹치지 않는 걸 보면 모종의 방법을 써서 내부공간이 중복되지 않게 투과되어 있는 듯 했다.
‘7개 라는 건….’
나는 시간의 개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보통 초분시일월년(秒分時日月年)으로 구분되었으니 사실 총 6개의 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 7개가 있다는 건, 초분시일월년을 제외한 하나의 시간개념이 더 존재한다는 뜻이다.
‘초분시일월년이 아닌 또 하나의 시간개념? 그게 뭐지?’
초를 쪼갠 극한의 극미시간인가?
아니면 연 단위로 잴 수 없는 장대한 시간인가?
나는 고민하다가 문득 시계바늘을 전부 일직선으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이한 공간에 들어올 때 3개의 침을 모두 12시에 모았으니 똑같은 방식으로 하면 뭔가 변화가 생길거라는 생각이었다.
끼기긱….
“악! 아파.”
나는 시계바늘을 움직이려다가 손가락이 베일 뻔 해서 순간 비명을 질렀다. 놀랍게도 내가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는 호신강기를 시계바늘이 가볍게 자르면서 손가락마디가 잘릴뻔한 것이다. 그것도 시계바늘은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이건?’
완력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신력으로… 으음…. 안되겠네.’
나는 음신지력을 써서 시계바늘을 움직여볼까 생각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흑웅이 있었을 때라면 가능했겠지만 흑웅이 없다면 신력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가능하기는커녕 음신지력을 창이나 검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서 그저 방출하는 방식으로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뭔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 기이한 공간이 사실 시계로 가득차 있는 백여 평 정도의 새하얀 방이라는 걸 깨달았고, 온갖 형태의 시계들이 째깍거리면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벽시계도 있었고 해시계나 물시계도 있었다.
째깍 째깍
“시계의 방인가.”
뭔가 저 시계들에 단서가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시계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시계를 한 번 주먹으로 가격해서 부숴볼까 생각했지만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다.
‘만에 하나 시계를 잘못 건드렸다가 평생 이 공간에서 현실로 되돌아가지 못하면 안 되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갔다.
휘이익
그리고 다시 내가 현실로 되돌아오자, 바토리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어떻기는… 그냥 시계의 방으로 갔을 뿐인데. 이게 어떻게 시간이동을 한다는 거야.”
“……네?!”
내 대답에 바토리가 경악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로 간 게 아니었나요? 시계의 방이라니.”
“…….?”
“시계의 반응과 별의 위치로 봐서 수만 년 후의 미래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녀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바토리에게 내가 봤던 걸 이야기하자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그 아티팩트는 사용자에 따라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역시 연구가 필요해요.”
“…….”
바토리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 크로노쿼츠, 히든피스에는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아직 이 회중시계의 비밀은 다 풀리지 않은 것 같군. 혹시 시간이나 시계, 연금술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그건 당연히 파우스트 박사입니다. 그는 본디 서방 최고의 천재로 불렸던 연금술사… 하지만 파우스트 박사가 실종된 지금이라면…. 저희 쿼츠 아겐투어의 최고기술자인 칼리오스트로겠군요.”
“칼리오스트로? 그렇다면 그 자가 이 회중시계의 뚜껑을 연 건가.”
“그렇습니다. 그가 뚜껑을 여는 방법을 제시한 후 나머지는 저희 쿼츠 아겐투어의 기술력과 마법력을 이용해서….”
나는 호기심을 느끼고는 바토리에게 말했다.
“그 자를 불러와 봐. 그리고 도망치거나 다른 짓을 꾸민다면…. 알지?”
“…알겠습니다.”
파앗
바토리가 공간이동으로 사라졌을 때 나는 힐끔 옆에 있던 소드마스터 한스 탈호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이군. 그간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내가 묻고싶은 말이군…. 나는 대마녀의 종자가 되면서 마술의식을 통해 장수(長壽)를 얻었소. 서방에는 검호가 많지 않으니 내가 자연사하는 걸 수호자께서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오.”
“그랬군.”
“백웅이여.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것이오? 당신은 어찌 500년간 전면에 나오지 않고 배후에서 대웅제국을 조종한 것이오.”
아무래도 한스 탈호퍼는 내가 죽은 게 아니라 배후에 숨어서 세상을 주물렀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긴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다만 이제 와서 세계정복을 목표로 하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
“종말이 가까운데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겠소…? 정말 중요한 건 말해주지 않는구려.”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마테오 리치는 지금도 살아 있나?”
“그는 수호자님의 영지에 들어갔소. 동방에서의 임무가 험했기 때문에 종말까지 거기에서 대기하는 중이오.”
“그랬군.”
나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소드마스터. 너는 무신(武神)의 존재를 알고 있나?”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대꾸했다.
“내 스승이신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님께서 언급한 걸 들은 적 있소.”
“…뭐?”
나는 순간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요하네스 리히테나워!
분명히 내가 처음으로 서양대륙 독일 근처에 갔을 때 천신경의 술법으로 소환해낸 영의 이름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통역이 필요해서 임의로 강력한 영을 소환했는데 우연히 그 자가 검술대가였던 걸 기억해냈다. 나는 그 영의 인상착의와 모습에 대해 한스 탈호퍼에게 설명했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 분이 틀림없소.”
“그가 당신의 스승이었다고?”
“뿐만 아니라 서양에서 가장 위대한 소드마스터 중 하나로 꼽히시는 분이오. 죽기 전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셨으나 부패한 1만 신성로마제국 혈룡기사단과 싸워 성을 지키다가 전사(戰死)하셨소…. 나는 그 분의 사후 마르쿠스 형제단을 이끌고 그들에게 복수했었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감은 한스 탈호퍼였다. 나는 의외의 사실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랬군.”
그냥 천신경의 술수로 불러낸 영혼 중 하나라서 대충 잊고 있었는데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었다니? 다음에 한 번 불러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랜드마스터라면 절대지경일 텐데 고작 1만 명과 싸워서 죽었단 말인가?”
“당신의 신성로마제국 기사단은 서방 최강의 기사단. 그러므로 거기에도 고수는 많았소. 서양에도 검기와 검강을 쓸 수 있는 자들은 꽤 있소. 되려 홀로 맞서 싸워 그들 중 대부분을 베어죽이셨으니 영웅적인 위업이셨소.”
“…….”
“어쨌든 그 분께서는 생전에 내게 검형을 가르치실 때 위대한 무(武)의 신(神)을 만난 이야기를 종종 해 주셨소…. 그 자는 향상심을 일깨워주며 마(魔)에 대적할 수 있는 용기를 줬다고 말씀하셨소.”
백련교주나 진소청, 장삼봉 등과 같은 이야기다. 그렇다면 아마 요하네스 리히테나워가 무신을 만났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리라. 나는 서방의 인물에게도 무신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신기함을 느끼며 말했다.
“너는? 무신을 만났는가?”
“만나지 못했소.”
“왜지? 경지가 부족해서?”
“그럴 리가… 나는 500여년을 살아오며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생전의 스승보다 더 강해졌소. 허나 한 번도 보지 못했지. 무신이란 존재는 아마 무공의 경지만으로 만날 수 있는 존재는 아닐 듯하오.”
그렇게 대꾸한 한스 탈호퍼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꽤 짓궂구려. 당신 스스로도 무신을 매우 만나고 싶은가보군.”
“흠… 그럴지도.”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무신의 정보를 알아내려고 한스 탈호퍼를 탐문했다는 게 그에게 들켰음에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도리어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신이란 대체 뭐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향상심을 심어주는 존재.
그렇다면 그 향상심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리고 요하네스 리히테나워는 무신을 만났는데도 망령이 되어 천신경의 소환에 응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 말대로라면 한 가지 사실이 증명된다.
무신을 만난 자들이 꼭 무신의 부름을 받은 건 아니며 무신의 좌가 예약되는 것도 아니다.
쉬익
내가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바토리가 두꺼운 안경을 쓴 갈색머리의 사내를 데리고 공간이동으로 찾아왔다. 갈색머리의 사내는 서양인 특유의 청색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백웅 폐하.”
“바토리가 내 정체를 말했나?”
“무례를 범하는 걸 싫어하시는 듯 하여.”
갈색머리의 사내가 자신의 두꺼운 안경을 매만지며 히죽 웃었다.
“감히 인사드립니다. 저는 쿼츠 아겐투어의 최고 기술자이자 조디악 멤버(zodiac member), 그리고 현 연금술사의 길드마스터인 칼리오스트로라고 하옵니다.”
“그렇냐.”
이 녀석도 서방 예수회의 최고간부 13인 중 한 명이라는 거군.
나는 칼리오스트로의 자기인사를 심드렁하게 넘기고는 팔짱을 꼈다.
“잡소리는 집어치고 본론부터 얘기하지. 바토리가 이 회중시계를 사용해서 미래의 황무지로 갔다고 했는데 나는 시계의 방으로 향했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거냐?”
“흐음…. 저와 바토리가 시험했을 때는 그런 시계의 방으로 간 적이 없었습니다. 실례지만 이번에는 폐하가 시계의 방으로 갈 때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좋아. 그래라.”
끼기긱
우우우웅…
나는 칼리오스트로를 데리고 다시 한 번 히든피스, 회중시계의 3개의 침을 12시에 놓아서 시계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계의 방 내부로 들어오자 칼리오스트로가 크게 놀랐다.
“ 음…!! 이럴 수가.”
“여기서 시계가 더 움직이지 않아. 물리적으로 힘을 써서는 시계의 시침을 움직일 수 없더군.”
“아마 그럴 것입니다. 법칙제어를 해놨을 테니.”
칼리오스트로가 시계의 방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파우스트는 폐하께서 저희 연금술사 길드를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문제를 제출한 것 같군요.”
“뭐? 무슨 말이냐.”
“이 시계의 방의 배치는 유서깊은 마도서 티타노마키아(Titanomachy)에 수록된 것과 같습니다. 마신 크로노스가 신화시대에 무저갱에 유폐될 때 천계에 보물을 숨겨둔 악몽의 미로…. 시간계열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들은 이 미로를 해석하면서 [힘]을 얻게끔 되어있지요. 그래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저희 연금술사들뿐입니다.”
칼리오스트로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사방에 널려있는 시계들의 시침을 하나하나 미세하게 조정하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수십 개의 시계를 꼼꼼하게 움직이던 칼리오스트로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못 풀겠습니다.”
어?!
풀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야! 풀 것처럼 열심히 하더니 이게 뭐야!”
칼리오스트로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제 실력은 선대 마스터인 파우스트에 많이 미치지 못합니다. 파우스트의 자리가 공석이 되어서 반쯤 억지로 떠맡은 거라…. 시간의 마도술식 문제인데 너무 어렵군요.”
나는 ‘문제’라는 단어에서 뭔가 연상되는 게 있어서 반문했다.
“그러니까 동방의 팔괘 같은 거냐?”
“거의 비슷합니다. 신적인 힘을 품고 있으니 이공계열의 지식이 필요하지요. 다만 팔괘는 삼황 복희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만 우리쪽의 시간계 마도능력은 고대신에게서 빌려오는 거라…. 일단 팔괘를 알고 있으면 저희쪽 마법도 쓸 수 있긴 합니다. 이론적으로 다 통해있으니까요.”
“티타노마키아인지 뭔지 안 봐도 돼?”
“…원리에 달통했다면. 하지만 그 정도 되는 팔괘의 달인은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말끝을 흐리던 칼리오스트로가 말했다.
“어쨌든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제 실력으론 이 문제를 못 풉니다.”
“…제길. 왜 자꾸 빙빙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
나는 중얼거리고는 칼리오스트로에게 말했다.
“그래서 결국 이건 뭐야? 왜 나만 시계의 방으로 온 것인지 설명은 되나?”
“아무래도 파우스트는 폐하에게만 시계의 방으로 오도록 설정해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간들은 사용해봤자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가도록 해둔 것 같군요. 다시 말하자면 파우스트가 낸 시계의 방, 이 문제를 풀어야만 시계의 능력이 해금(解禁)된다는 뜻입니다.”
“해금된 능력이 바로 시간이동인가?”
“그건…. 아닐지도 모릅니다.”
“뭐? 미래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잖아.”
“바토리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만 사실 그 황무지의 미래는 좀 이상합니다. 시간상으로는 분명히 수만 년 후의 미래였지만 [작은 굴레]가 돌아간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설을 세워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가설은 뭔데?”
“아직 확실하지 않습….”
“아 됐어 됐어!! 모른다는 말이잖아?”
나는 짜증을 내듯 외치고는 말했다.
“이 문제가 팔괘같은 거라면 방법이 있지.”
머릿속에 방법이 떠올랐다. 내 직감이긴 하지만 조금만 더 파고들면 이 히든피스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서 문제였다.
‘이 고생을 하면서까지 히든피스의 비밀을 풀어야 할 가치가 있나?’
[작은 굴레]를 돌리는 능력이라면 대단하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파우스트가 내 전용으로 히든피스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이유가 왠지 더 중요하다는 직감이 든 것이다. 왠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나중에 피를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익!!
그 때 내 수요와 화요에서 동시에 정령들이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으앗 깜짝이야! 니들 갑자기 왜 나와?!”
“헉! 정령이라니….”
옆에 있던 칼리오스트로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을 때 수요의 정령이 진중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백웅이여! 이 장소에는 강대한 정령이 봉인되어 있는 듯하다. 위험하다.]
옆에 있던 화요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래 있으면 좋지 않을 것 같다. 아무래도 틀린 답을 제시했기 때문인지 정령이 분노한 기색이 느껴지는구나.]
“뭐? 정령이 분노한다고?”
[같은 정령으로써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봉인된 정령은 매우 강력한 존재이며 그다지 자비롭지 못하다.]
“음.”
[본디 오답을 낸 즉시 그 정령이 징벌하려 했겠지만, 우리가 그 정령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막아두었다. 이 틈에 빨리 탈출하는 게 좋다.]
수요와 화요가 이런 식으로 내게 탈출을 권유할 정도라니!
나는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튀자!”
파앗
나는 재빨리 칼리오스트로를 데리고 시계의 방을 나왔다. 그리고는 칼리오스트로를 곱지 못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런 제기랄…. 너 때문에 죽을 뻔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앞으로 내 부탁은 뭐든 들어줘야겠어. 당연한 말이지만 너희 셋, 나를 만났다는 걸 어디 가서 누설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살기어린 시선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자 그들은 동시에 움찔했다. 그리고는 부복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좋아.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지. 그리고 이 성창 롱기누스가 어떤 효과를 갖고있는지만 알려주고 가라.”
내가 슥 하고 성창 롱기누스를 꺼내서 말하자, 옆에 있던 바토리는 겁먹은 기색이었지만 칼리오스트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두꺼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성창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창으로 찌른다고 해서 신이 죽지는 않겠지만, 이미 쓰러진 신체(神體)를 공격하면 확실히 죽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창 롱기누스의 효과입니다.”
“뭔 소리야?”
“이미 쓰러져서 봉인상태나 중태에 빠져있는 신적 존재에게 확실하게 괴멸적인 피해를 주는 게 바로 그 창입니다. 그 창은 서방수호자의 화신을 찔러죽인 탓에 분노를 사서, 고대신의 저주가 실려 있기 때문이죠.”
“……!!”
“다만 신적 존재와의 정면대결에서 그 창은 거의 효과가 없다는 걸 유념하시길….”
오호라!
나는 칼리오스트로의 말을 이해하고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거, 써먹기 나름이겠구만!’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들 다음에 보자고!”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수련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히든피스에 대해서 많은 사실을 알아냈다는 사실에 내심 만족하며 생각했다.
‘바로 지금이 천신경의 술법을 쓸 때겠군.’
팔괘의 해석능력이 있어야 풀 수 있다면, 제갈일족이 바로 해답일 것이다!
하지만 망량은 천계로 가 버렸고 제갈유룡은 사도 할치올레이푸라에게 당해서 혼이 파괴당해 버렸다. 게다가 제갈사는 마왕이 되어서 현실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으므로 남은 건 제갈부뿐이다.
‘제갈부의 영혼을 찾아서 소환하자.’
제갈부라면 어쩌면 팔괘를 응용해서 히든피스를 해석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제갈부가 죽었던 전장인 뮌헨으로 갔다.
파앗
나는 뮌헨에 도착해서 천신경의 술수를 써서 강력한 영혼을 탐색했다. 그러나 빨간색 영혼들이 더러 느껴졌으나 그 중에서 제갈부의 영혼은 없다는 걸 알아채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제갈부가 없다고?”
제갈부 정도로 강력한 영혼이라면 무조건 천신경의 술수로 불러낼 수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이내 다른 가능성을 깨닫고는 황망해졌다.
“…….”
제갈부는 사후에 천신경의 술수로 부를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 말은 - 사후에 그냥 저승으로 가 버렸다는 뜻이다.
지상에 잔류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마 그의 영혼에게도 천신경의 사도가 찾아와서 제안을 했을 텐데도 거절해버렸다는 뜻이다.
“왜… 왜?”
나는 제갈부의 선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계에 그냥 가 버리게 되면 영혼이 [옛 지배자]의 뱃속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을텐데 어째서?
제갈부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수수께끼다.
뭔가 내가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전뇌자의 기억에 제갈부가 죽은 후의 선택까지 입력되어 있을 리가 없으니 이건 전혀 모르는 영역의 일이다.
“…….”
아무래도 혼자서 움직이는 건 슬슬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되새기며 마음먹었다.
‘이제 슬슬 전뇌자에게 가 볼까.’
전뇌자와 접촉해서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공유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