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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
정말 오랜만이다. 누군가가 나를 제대로 엿먹이려고 대놓고 눈 앞에서 이런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장 화가 치솟아오르기보다는 신선한 기분마저 든 것이다.
‘그 동안 내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받은 동료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최근 전생하면서 맞닥뜨렸던 적들은 애당초 내 힘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강대한 놈들이라서 배신이고 뭐고 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일까?
이 상황은 차라리 재밌다.
나는 냉정함을 전혀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바토리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토리에게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성창 롱기누스가 정말 필요없나? 하긴 쳐다보고 벌벌 떨었던 걸 생각하면 네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긴 하군.”
“쓸데없는 말을 섞고싶지 않군요. 이만 나가주셨으면 해요.”
“나가지 않으면?”
“실력행사지요.”
스으으….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십여 명의 시꺼먼 두건망토를 쓴 자들이 양옆으로 걸어와서 내 근처를 포위했다. 명백히 적의를 담은 포위였으므로 나는 당장 죽여버릴까 생각했지만 일단 차분하게 지켜보며 말했다.
“이유를 모르겠군. 나랑 싸워야 할 정도로 파우스트의 회중금시계에 대단한 힘이 숨겨져 있었던 건가?”
“대답할 이유는 없군요. 하지만 당신의 거래에 끝까지 어울려줄 이유도 없죠.”
바토리는 과거의 일이 생각난 듯 살짝 분한 표정을 지었다.
“다짜고짜 본사에 쳐들어와서 힘으로 겁박하는 수상쩍은 괴인의 거래에 끝까지 응해주는 게 바보 아닌가요? 당장 꺼져요.”
“사정이 있다고 말했는데도 끝까지 축객령인가. 하지만 뭐….”
나는 바토리에게 말했다.
“회중 금시계는 나한테도 꼭 필요한 거라서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겠군.”
“쳐라!”
후와아악
말이 끝나는 순간 근처에 있던 괴인 두 명이 동시에 몸을 피빛 안개로 변화시키며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기이한 술수였지만 나는 그 습격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곧장 바토리의 목을 베었다.
퍼벅
“……!!”
바토리는 내 일검에 목이 끊겨서 날아갔지만 곧이어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먼 공간으로 순간이동해 있었다. 역시 인간이 아니라서인지 목이 잘려도 바로 죽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재밌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삼보절기를 시전했다.
쉬쉬쉭
피빛 안개는 내 발걸음을 전혀 막지 못했고 나는 또다시 바토리를 향해 전진했다. 그런 나를 향해 뒤이어 괴인들이 저마다 형태를 변화시키거나 무기를 들고 쫓아왔지만 나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바토리의 목을 또 베었다.
푸콱!!
“소용없어요!”
바토리는 목이 날아가자마자 몸뚱이를 통째로 핏덩어리로 변화시키며 또 다른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닐걸.”
“…컥!!”
바토리가 갑자기 몸을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녀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고, 목에서는 혈선(血線)이 그어져서 아물지 않았다. 방금 전 내가 베었던 일격의 상처가 그대로 남은 것이다.
목에서 선혈이 흐르던 바토리가 크게 당혹했다.
“어, 어떻게 일개 검격에 내 불멸의 혈체(血體)가….”
“처음에는 그냥 검기만 썼는데 이번에는 검뢰를 썼거든.”
슈콰콱
“이렇게 말이지.”
내가 대꾸하는 동안에 괴인 몇 놈이 날아와서 습격하자 나는 그대로 원(圓)을 그리며 습격자들을 한 번에 검뢰로 회쳐 버렸다.
[카아아악!!]
공격해오던 놈들은 검뢰가 몸을 가르자 날아오는 속도대로 몸이 오체분시되어 날아갔고, 더러 피안개로 변신해서 피하려 했지만 피안개조차도 번개에 베이자 일그러지며 원래 형태로 되돌아갔다.
하나하나가 힘도 속도도 초절정고수에 뒤지지 않는 놈들이지만 그렇다고 검뢰를 피할 순 없다.
‘역시 단순한 기의 결집체인 검기로는 잘 공격할 수 없지만 의념절기인 검뢰에는 타격을 입는군.’
일반적인 검으로는 해칠 수 없는 안개, 물, 화염, 암석 따위의 괴물이라고 하더라도 의념의 결정체에는 그 본질을 베이기 때문인 것이리라. 지금껏 이족들과 숱하게 싸우며 체득한 원리였다.
쿠와아아악!!
내 공격에 중상을 입은 괴인들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다섯 놈은 피빛 날개를 지닌 염소같은 괴물로 변신했고, 나머지 다섯 놈은 근육질에 쇠도리깨를 들고 있는 반인반마(半人半魔)로 변했다. 놈들에게서 풍겨나오는 마력의 힘이 더더욱 강해지는 게 느껴지자 바토리가 갑자기 노성을 터뜨렸다.
[위대한 바알 클랜(Baal Clan)의 신관들이여! 저 놈을 없애라!]
바알 클랜? 신관?
콰과과광!!
다음 순간 갑자기 신체능력이 몇 배나 상승한 놈들이 엄청난 기세로 덮쳐왔다. 놈들의 육체에 가공할 농도의 마력이 덮어씌워지면서 인간을 초월한 신체능력을 발휘한 듯 했다. 나는 쇠도리깨, 낫, 창칼 등을 피하면서 괴물들의 공격을 대충대충 받아넘겼다.
‘어려울 건 없군.’
힘과 속도가 빨라졌다고 해서 대응하기 힘든 건 초절정 수준까지다. 절대지경에 이르렀으며 삼보절기를 포함한 유수한 대응기를 익혔으며 전투경험을 쌓은 지금, 고작해야 이런 투박한 공격에 당할 리는 없는 것이다.
슈슈슈슛!
나는 부상을 입어 쓰러져있는 바토리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회중 금시계를 내놓는 건 어때? 더 험한 꼴 보고싶다면 말리진 않겠다.”
바토리는 내 검에 목을 당해서인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텔레파시를 써서 외쳤다.
[웃기지 마라! 네가 신의 사도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엉?”
[지혜의 조(祖), 마왕 솔로몬이시여. 내게 위대한 육체를 부여하소서. 신의 가호로 갈가마귀의 날개를 떨칠지니!]
쿠와아악
바토리의 몸뚱이가 갑자기 인간의 형체를 잃더니 거대한 흑풍(黑風)으로 변했고, 그 시꺼먼 바람 사이에서 깃털이 뿜어져 나왔다. 시꺼먼 깃털을 떨치며 몸뚱이가 수십 배나 커진 바토리가 한 번 날개를 홰치자 사방의 공간이 터져나가는 듯 했다.
쿠쿠쿵
이미 이 장소가 이계화(異界化)되어서일까, 건물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어느 새 핏빛 세계의 평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까마귀로 변신한 바토리가 지평선 근처에서 나를 향해서 입을 벌리더니 핏빛 광선을 내쏘았다.
‘에라이, 귀찮다!’
나는 피할까 생각했지만 귀찮아져서 그냥 칼을 휘둘렀다.
스각!!
핏빛광선이 그대로 검뢰에 갈라져서 두 조각이 되어서 양옆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거대 까마귀, 바토리가 경악했다.
[아, 아니 어떻게 그걸 정면에서….]
애들 장난하냐?
마왕급에는 한참 미치지도 못하는 공격이었다고!
“흐음. 너넨 참 변신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아직도 나를 향해 죽어라고 달려드는 바알 클랜의 신관들을 한차례 쳐다보다가 생각했다.
‘이 녀석들 너무 망설임없이 덤비는데? 내가 그렇게 만만한가.’
나는 어딘가 괘씸한 기분이 들어서 지금까지 들고 있던 평범한 철검을 들어서 옆에서 달려들던 신관 한 놈의 이마 한가운데에 박아버렸다.
푸욱!
[커억….]
“그건 너 가져라. 지금부턴 제대로 싸워볼까.”
스릉
나는 이마빡이 뚫린 신관이 절명하며 쓰러지는 걸 쳐다보며 허리춤에 있던 수요를 뽑았다. 사실 그냥 평범한 철검으로도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쓸어버리는 건 가능했지만 왠지 짜증이 나서 철저하게 밟아버리고 싶어진 것이다. 일반철검과 수요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능차이가 있었으므로 한결 내 싸움을 수월하게 해 주리라.
“하압!”
나는 수요를 뽑자마자 그대로 정면에서 달려들던 두 놈의 몸통을 세로로 갈라버렸다. 지금까지는 대충 봐줬지만 이제 봐주는 건 없다!
츄왁
“으쌰!”
그리고 그대로 십자베기로 한 놈을 절단내고 당황하는 나머지 놈들이 주춤거리는 걸 그대로 목어검을 써서 어검술로 베어버렸다. 놈들은 내 검의 간격에 들어왔으니 아무리 몸뚱이의 속도가 빨라도 절대로 공격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퍼벙
사선의 참격이 스쳐지나가자 육편이 터지듯이 허공에 비산했고, 나는 그대로 어검으로 받아든 수요를 납검해서는 발도자세를 취했다.
스스스
천(天) 지(地) 인(人)!
나는 딱 세 걸음을 걸었는데, 마치 공간이 빨려들듯이 지평선 너머에 있던 거대 흑까마귀 바토리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삼보절기의 묘용으로써 그리 멀지 않은 공간에서는 축지법과 다름없는 효과의 경공술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토리의 코앞에 도달했을 때 나는 비로소 수요로 발검(拔劍)했다.
“합!”
뇌신류(雷神流)
팔황경천신공(八荒驚天神功)
지류단령참(地劉斷靈斬)
지난 수련기간 동안 습득했던 뇌신류 팔황경천신공의 절초 중 하나.
뇌신류의 검류(劍流) 중에서도 몇 없는 고류(古流) 절초이며 발검술.
오래 전에 실전되었던 지류단령참을 처음으로 의념절기로써 실전에서 꺼낸 것이다.
파앗 -
땅이 먼저 패이듯이 검참(劍斬)에 잘려나갔고, 뒤이어서 공기가 빨려들듯이 참격에 흡수되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바토리의 시꺼먼 몸뚱이에 지류단령참의 참선(斬線)이 새겨졌고 푸콱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몸이 쩍하고 세로로 갈라졌다.
주르르륵 -
피와 근골이 새겨진 단면이 비쳐 보인다. 단면에 뇌기(雷氣)가 파직 하고 감도는 게 보였고, 이윽고 두 개의 몸뚱이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웅
[크아아아아… 아아….]
대마녀 바토리가 쓰러져서 비명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역시 마(魔)의 육체라서인지 바로 죽지는 않는 듯 했다. 서서히 거대한 갈가마귀의 몸뚱이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실망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한 방이라니 시시하게….”
몸뚱이가 커다란 놈이라서 한 서너 번은 더 공격해야 쓰러질 줄 알았다. 예전에 수해에서 거대한 이족과 싸울 때는 대개 그런 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토리가 지류단령참 한방에 쓰러지자 맷집이 약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여하튼 뒈져라!”
나는 검뢰를 머금은 수요로 바토리의 목을 베려고 망설임없이 내리쳤다.
회중 금시계의 소재는 이 녀석을 죽이고 나서 이혼대법으로 대충 알아보면 되겠지!
콰앙
‘막혔다?’
갑자기 내 일격을 막은 검날!
마무리공격이라서 그리 힘을 싣지도 않고 설렁설렁 베긴 했지만 상대의 검은 정확하게 내 공격을 막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 또한 상당한 고수로써, 내 의념절기에 대항할 정도의 무술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검의 주인은 한 자루의 장검을 들고 있는 은빛 머리칼의 노인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이었으나 그의 전신이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으며 심상치 않은 투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바토리나 졸개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군. 엄청난 수양을 쌓았어.’
쿠구구구….
내 검을 막은 상태로 잠시동안 그와 나 사이에 의념의 대결이 있었다. 내 검을 막고 있던 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주인인 대마녀께서 우둔한 선택을 하셨구려. 한 번만 봐주시오, 그랜드마스터(Grand master)의 경지에 오른 자여.”
“그랜드마스터?”
“동방에서 일컫는 절대지경에 오른 존재. 그대는 내 평생에 처음 보는 절대적인 고수구려. 백련교주를 먼 발치에서 보았을 때 이상의 위압감이 드는군….”
“…….”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시오.”
상대는 강하긴 하지만 나에 비하면 손색이 있었다. 자신도 실력차이를 알고 있기에 내게 용서를 구하는 듯 했다. 나는 약간 마음이 풀리는 걸 느끼려 하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
어라…. 뭐지.
이 녀석 얼굴이 뭔가 낯이 익은데?
나는 기시감 때문에 어리둥절하다가 상대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본 적 있는 얼굴이라는 걸 알아차렸고, 잠시 후 녀석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너…!!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를 따라다니던, 그, 그 녀석 맞지?”
“……!!”
상대는 흠칫하고 놀랐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떻게 그때 일을!”
“너 이름이 뭐더라. 그러니까….”
나는 기억을 더듬거리다가 문득 녀석의 이름을 깨닫고는 외쳤다.
“소드마스터라는 한스 탈호퍼! 맞지?”
내 말에 노인이 황당해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수백 년 전의 일이거늘.”
“너 나 모르냐?”
“내가 어떻게 당신을 알겠소. 나는 마녀님의 목숨이 위험해지자 자동소환된 것인데.”
“아 맞다.”
황룡마신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
나는 얼굴 근처에 있는 버튼을 눌러서 황룡마신의 얼굴가리개를 벗었다. 그리고 내 얼굴이 드러나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멍하게 중얼거렸다.
“…배…백웅… 황제. 대웅제국의 초대황제…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역시 너였군. 옛날에 얼굴 본 적 있지? 마테오 리치가 나한테 은봉황 조각 줄 때 뒤편에 서 있었잖아.”
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고 있소.”
한스 탈호퍼!
다두왕국에 와 있던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그를 수행하던 서양의 검호(劍豪)!
과거 대웅제국을 만들 때 마테오 리치를 설득해서 은봉황 조각을 모두 얻어 발해열왕의 무덤을 재차 열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의 호위로 와 있던 한스 탈호퍼와도 당연히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예전 일인데다 그를 크게 신경쓸 일이 없어서 언뜻 기억이 안났지만 얼굴을 보니까 한스 탈호퍼란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수요를 납검하며 말했다.
“너는 예수회 소속 아니었냐? 어쩌다가 마녀의 쫄따구나 하고 앉았냐.”
“으음…. 이럴 수가…. 설마 당신이 그 때 그 모습으로 살아있을 줄은…. 500년이나 지났는데.”
“똑바로 대답해. 난 지금 바토리 죽이고 싶은데 널 봐서 일단 참고 있다.”
내가 살기를 담아서 말하자 한스 탈호퍼가 움찔하더니 말했다.
“바토리 또한 서방 예수회 소속이오. 예수회의 최고간부 13인인 조디악 멤버(zodiac member)의 한 명이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대마녀 중 한 명. 나는 마테오 리치의 호위가 끝나고 복귀한 후 그녀의 종자가 되어서 호위중이었소.”
“뭐? 이 녀석도 예수회라고?”
“그렇소.”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바토리라고 하는 대마녀가 예수회 소속이었다니! 그렇다면 한스 탈호퍼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할 게 없었지만 의외였다.
“예수회라고 하면 예수 믿는 놈들 아니었냐? 마녀가 왜 예수회 소속이야.”
“명목상 그렇게 이름붙이긴 했지만 사실 서방의 고대신 및 수호자를 따르는 세력의 연맹이나 다름없소. [옛 지배자]와 마(魔)에 대적하는 모든 단체가 가입되어 있으며, 바토리는 룬마스터(Rune master)의 동료이므로 딸려오듯이 가입되었소.”
“허참…. 그런 거였군. 마테오 리치도 조디악 멤버냐?”
“그렇소. 그 또한 13인에 들어가오.”
“그래서 네가 호위로 따라왔던 거군. 넌 조디악 멤버 호위 전담이었던 거고.”
나는 이제야 서방 예수회의 구조를 대충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화가 풀린 건 아니었으므로 한스 탈호퍼에게 말했다.
“나는 바토리에게 회중 금시계를 열어줄 것을 의뢰했다가 배신당했다. 회중 금시계를 돌려주지 않는다면 바토리를 죽일 수밖에 없어. 그건 내가 꼭 해내야 하는 일이니까.”
“…….”
“한 번 나를 막아보겠나? 소드마스터.”
내 질문에 한스 탈호퍼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500년 전에도 당신은 해신을 물리친 인류 최고의 영웅이었소. 감히 나 따위 칼잡이가 당신에게 대적할 순 없소.”
“그럼 비켜. 목 벨 거니까.”
“이런 건 어떻겠소? 내가 바토리에게 당장 돌려주라고 설득하겠소. 만일 그녀가 당신이 백웅이란 걸 알았다면 절대 이런 식으로는 대처하지 않았을 것이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조디악 멤버라는 걸 믿고 나한테 깝친 거 아니냐? 이런 녀석 가만 놔두기 싫은데.”
“그건 아닐 것이오. 그녀는 바알(Baal)의 교단과 손을 잡고 독자적으로 이번 일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소. 원래 회색 기질이 있던 간부라서.”
“뭐 어쩌라고. 내 알 바야?”
내 반응이 좋지 않자 한스 탈호퍼가 급히 제안했다.
“그럼 진심어린 사과도 시키겠소.”
“그게 되냐? 너는 이 대마녀의 종자라면서 그것까지 요구할 수 있어?”
“나는 명목상 그녀의 종자일 뿐 사실 수호자님 직속에 있소. 그저 간부호위를 전문으로 할 뿐이니 사실 그녀와 대등한 위치요.”
하긴 그럴 수도 있겠다. 한스 탈호퍼의 현재 실력이면 바토리보다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었기에 단순한 간부 호위라기엔 역학관계가 이상하긴 했다.
‘흠. 어쩌지….’
나는 고민하다가 한 번 정도는 예전 인연을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절대지경에 올라있는 존재의 말이라면 들어줄 가치가 있다.
“…깨워 봐.”
잠시 후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바토리가 깨어났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한가운데에는 내가 지류단령참으로 벤 참상이 길게 흉터처럼 새겨져 있었고, 그녀는 나와 한스 탈호퍼를 보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으으….”
“바토리. 회중 금시계를 내놔라. 그리고 나한테 사과해라.”
“네, 네놈….”
그러자 옆에 있던 한스 탈호퍼가 그녀에게 말했다.
“대마녀 바토리. 그의 말대로 하시오.”
“소드마스터! 당신이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그는 백웅이오. 대웅제국의 초대황제이며 해신을 물리친 대영웅이오.”
“……!!”
바토리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은 표정이었다.
“당신이 처음부터 무례하게 굴 수 있는 자가 아니었소. 사과하지 않는다면 나도 당신을 더 이상 호위해주진 못하겠소.”
한스 탈호퍼의 말에 바토리는 믿기지 않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말로 당신이 대웅제국의 초대황제… 인가요?”
나는 열받아서 외쳤다.
“아니면 어쩌게? 사람 봐가면서 공손하게 굴려고? 이걸 진짜 확!”
스릉
내가 수요를 뽑아들자 바토리가 확 움츠러들었다.
“윽.”
나는 바토리에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다짜고짜 찾아온 건 미안하다고 해두지. 근데 그러면 처음부터 의뢰를 받지 말던가, 아니면 못 하겠다고 되돌려주면 그만이었잖아. 왜 내 시계를 강탈하고 지랄이야?!”
“죄, 죄송합니다.”
바토리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재차 무릎을 꿇으며 사과했다.
“그 회중 금시계가 너무 귀중한 아티팩트라서 욕심에 눈이 멀었습니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흠, 이 정도면 됐으려나?
나는 힐끔 한스 탈호퍼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됐고 금시계 뚜껑을 열었으면 당장 내놔. 그럼 한스 탈호퍼의 얼굴을 봐서 한 번은 봐주지.”
“여기 있습니다.”
촤라락
바토리가 허공에서 소환한 회중 금시계가 내 손으로 빨려들듯이 날아왔다.
딸깍
나는 회중 금시계의 뚜껑을 힘주지 않고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낡디낡은 흑백의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너구리인형을 안고 있는 귀여운 소녀.
전뇌자의 외모와 같다.
“…….”
예상했던 대로의 내용물이었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뚜껑의 맞은편에 있는 사진은 그렇다 치고 안쪽에 있는 시계의 초침이 천천히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윽고 약 10여 초가 지나자, 주변의 시간은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러나 회중 금시계의 초침은 계속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다시 회중 금시계를 닫자,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화악!
뜻밖의 효과에 나는 놀라서 말했다.
“이건 시간을 정지시키는 아티팩트인가?”
내 말에 바토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종류의 아티팩트를 저희는 크로노 쿼츠(Chrono Quartz)라고 부릅니다. 최고의 실력을 지닌 시계장인만이 제작할 수 있고, 연금술사와 마도사의 힘도 필요하기에 전 세계를 통틀어도 크로노 쿼츠는 몇 개 되지 않습니다. 또한 그 금회중시계는 크로노 쿼츠 중에서도 최상급입니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게 이 크로노쿼츠의 능력인가.”
시간정지의 능력이나 술법 자체는 살면서 여러 번 보아왔으므로 크게 새롭진 않았다. 내가 다소 실망한 듯 중얼거리자 바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 그건 파우스트의 특별한 제작법으로 만들어져서….”
바토리는 뭔가 아깝다는 듯 간절한 눈으로 내 손에 있는 금회중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시간을 이동(移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티팩트도 가지지 못한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