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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파아앗
잠시 후 내 몸이 점차 빛에 휩싸이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맞은 편에 있던 아수라 또한 빛에 휩싸였고, 아수라가 턱을 괸 채 끝까지 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이봐. 전생자 백웅. 충고 하나 해줄까?”
“또 뭐야. 무공에 관련된 거냐.”
내 반문에 아수라가 입을 열었다.
“17년이나 남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일이 빠르게 전개될 수도 있을 거다. 늘 마음을 놓지 말도록.”
슈욱
아수라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전뇌자가 아수라를 현실세계로 보내준 것이리라. 나는 아수라의 말을 처음에는 고깝게 생각했다.
‘젠장. 지가 뭘 알아? 내가 전생을 27번이나 했는데….’
다만 경험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자마자 덜컥 하고 아수라의 조언이 갑자기 심장에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음. 생각해볼 건 있군.’
다른 건 둘째치고 아수라의 말대로 내가 약간 마음을 놓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도전해야 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일단 구궁파천뢰의 수련에 전력을 쏟으며 몇 년을 평탄하게 보내보려고 계획을 잡고 있었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이 빠르게 전개되는 일은 지금껏 수십 번이나 겪었던 일이다. 17년이라고 해서 넉넉해 보이지만 난데없이 세계가 멸망할만한 사건이 터져서 당장 내일이라도 수틀리면 죽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도 렙틸리언 로드가 갑자기 사건을 터뜨렸던 일도 잘 수습하지 못했다면 그 날이 바로 인류멸망의 날이었으리라. 아수라는 아무래도 그 점을 짚어주려 한 듯 싶었다.
내가 생각에 잠겼을 때 전뇌자가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당신에게 패배해서 그 여파로 내가 스스로 인공지능에 봉인을 건 걸로 해 둘게. 그렇게 말해두면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사공린이나 천우진이 그런 말로 속아넘어갈까?”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났을 때까지의 일만 솔직하게 얘기하면 돼. 그 이후의 일은 없었던 걸로 친다면 이야기하긴 쉬울 거야. 또한, 당신이 흑요석의 부분기억을 편집할 수 있다면 의외로 속이긴 쉬울지도.”
“흐음.”
“그리고 한 가지…. 이걸 받아.”
전뇌자가 뭔가를 품에서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물건을 받았는데, 조그마한 금목걸이였다. 나는 금목걸이를 살펴보며 의아해져서 물었다.
“이게 뭔데.”
“히든피스(Hidden piece)야. 이 전뇌세계에서 나간다면 히든피스가 DNA 스토리지 장치를 통해서 몸 안에 저장될 테니, 필요할 때 퀀텀 크래프트 장치로 뽑을 수 있어. 황룡마신을 소환하면 무슨 말인지 저절로 알게 될 거야.”
“히든피스?”
전뇌자는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너구리인형을 잠시 양 손으로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백웅. 기억 속에서 봤지? 내 지금 모습은 내가 임의로 만든 모습이 아니라 과학자 파우스트 딸의 생전 모습이야….”
회상 속의 제갈부가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났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래서인지 나는 강인공지능으로 각성한 순간 내 안에 알 수 없는 자료가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었어. 그 때까지는 전혀 인식할 수 없었는데, 아마도 파우스트 박사가 제갈부에게 인공지능 프로토타입의 리소스를 넘겨줄 때 미리 넣어둔 것이겠지. 이 사실은 현재 대웅제국에서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어.”
“그 알 수 없는 자료가 이 히든피스라고?”
“맞아. 그건 단순한 더미데이터가 아닐 거야. 그 히든피스를 조사해 줬으면 해.”
“…….”
나는 물끄러미 금목걸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전뇌자에게 반문했다.
“넌 강인공지능이잖아. 인간을 훨씬 초월한 능력을 갖고있는 네가 이 내용물을 해석할 수 없어서 내게 의뢰하는 것일텐데, 내가 무슨 수로 그런 히든피스를 조사해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거냐?”
“그 말대로야. 하지만 그건 능력의 부족이라기 보다는 처음부터 걸려있던 제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제약?”
“파우스트 박사는 그 히든피스를 해석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라는 단서를 걸어놨어. 나는 그 제약을 어길 수 없지. 그리고 내가 강인공지능으로 각성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므로 제갈부가 사망한 후에는 의뢰를 할만한 인간이 없었어.”
“그런가.”
전뇌자는 사공린을 믿지 못하므로 그녀와 천우진에게는 히든피스에 관해서 알리지 못했으리라. 게다가 전뇌자의 협력자라 할 수 있는 아수라 또한 ‘인간’으로 분류할 수는 없었기에 내게 의뢰한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나는 금목걸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이거 닫혀 있는데. 안에 뭔가 있는 게 아닐까?”
딸깍 하고 뚜껑이 열리는 구조일 듯 하다.
“아마 그럴 거야.”
“근데 이 히든피스를 왜 해석해야 하는데? 이유를 모르겠네. 이거 해석하면 뭐 좋은 게 있냐?”
내 질문에 전뇌자가 말했다.
“뭐가 있을지, 그걸 왜 만들었을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파우스트가 자신의 딸을 본딴 리소스에 몰래 숨겨둔 자료라면 거기에 그의 진의(眞意)가 들어있을 확률은 매우 높아.”
“흐음.”
나는 전뇌자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내가 조사해 보지.”
“…그럼 다음에 봐.”
파앗!!
나는 다음 순간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전뇌기를 머리에서 뺀 후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깜짝 놀랐다.
“너!!”
“천우진.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냐?”
“…….”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천우진이 말했다.
“뭔가 당한 건 아니냐?”
“제길. 별의별 일이 다 있었어. 흑요석 줄게.”
나는 투덜거리면서 품에서 흑요석 하나를 꺼내서 전뇌세계에서 있었던 기억을 담아서 천우진에게 전송해 주었다. 물론 전뇌자의 말대로 전뇌자, 아수라와 만났던 기억 전반은 모조리 편집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천우진은 내 기억 중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나를 함정에 빠뜨려서 결전을 벌인 장면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
천우진이 내 기억을 전송받자 나는 부연설명을 했다.
“메피스토펠레스를 쓰러뜨린 후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보니 현실로 돌아온 거다.”
“…으음. 그런가.”
천우진은 팔짱을 끼고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하지만 혹시 뭔가 당했을 수도 있으니 정밀검사를 받아봐라.”
“알았어.”
“메피스토펠레스…. 강인공지능이라. 놈이 순순히 소멸했다면 좋겠는데.”
“아마 죽지 않았을까?”
“그러면 500년 동안의 기억은 전송받지 못한 거냐.”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 그냥 말로 설명해주면 안 되냐?”
“후우…. 제기랄. 어쩔 수 없겠군. 전뇌자로 기억전송을 하면 쉽고 편한데다 엄청 많은 일이 있어서 설명하기 귀찮았는데. 이 상황에서 전뇌자를 다시 쓸 수도 없고.”
뭐 씹은 표정을 짓던 천우진이 이윽고 말했다.
“오늘은 됐고 내일 얘기하자. 지금은 전뇌자를 재검사하고 시스템을 손봐야 할 것 같다. 네 육체 정신을 검사하라고 의료진에게 말해두마.”
“알았어.”
“하! 차라리 마왕놈들이 덤빌 때가 속은 편했군. 별의별 놈들이 종말이 다가오니까 다 덤벼드는구만.”
이윽고 나는 대웅제국의 최고 의료진에게 온갖 첨단장비를 통해서 정신과 육체를 검사받았다. 다소 귀찮았지만 나는 일단 참으면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황룡마신을 써서 퀀텀 크래프트로 히든피스를 꺼내라고 했지?’
나는 슬며시 내 귓전에 걸려있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귀걸이는 사마령 교수에게서 받은 인공보패인 황룡마신(黃龍魔神). 아직 써 본 적은 없지만 사마령 교수는 이게 나를 위해서 특별제작된 인공보패이며 이전까지의 그 어떤 인공보패보다 강력하다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도 퀀텀 크래프트 기술이 적용되어 있으니, 황룡마신을 써 보면 아마 히든피스를 현실에서도 볼 수 있으리라.
‘지금은 이목이 있으니 안 되겠고 나중에 수련장으로 되돌아가기 전에 인적없는 데서 몰래 써 봐야지.’
나는 세 시진에 걸친 의료검사를 끝내고 숙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푹 잔 후, 다음 날 사공린을 찾아갔다. 사공린이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질문했고 나는 미리 전뇌자와 말을 맞춰둔 대로 말을 했다.
“그랬군요….”
“사공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전뇌자에는 별 이상이 없었던 거야?”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제국의 엔지니어와 과학자들을 총동원해서 알아보는 중이에요.”
사공린이 걱정스러운듯 말을 이었다.
“백웅. 구궁파천뢰의 수련은 제국수도 내에서 하시는 게 어떤가요? 방룡 이설표와 주현성을 불러들여 좋은 수련장을 마련해 두겠습니다.”
“…방룡 이설표는 골수 뇌신류 무인이야. 네가 오라고 해서 올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뇌신류가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정말 아무도 못 말린다. 힘의 강약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독기를 누구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공린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로 일하는 동안 뇌신류에는 미움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 해도 최소한 열흘은 제도 낙양에 머무르시길.”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어떻게 제가 당신에게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란 존재는 보통이 아니었기에 심신을 조심할 필요가 있을 듯 하군요.”
“됐어. 그딴 놈이 수를 쓴다고 당할 내가 아니야. 괜한 참견 하지 마.”
“…….”
“왜?”
사공린이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백웅. 화가 난 건가요?”
윽…. 약간 티가 났나.
사공린을 믿지 말라는 말이 무의식중에 신경 쓰여서 태도로 드러났나보다.
나는 속으로 조금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난 척을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기껏 수련하는 도중에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낙양에 와서 시간낭비 했잖아. 젠장.”
“미안해요.”
“됐고 난 과거 얘기나 듣고 가겠어. 그깟 말 몇 마디 해주는 게 뭐가 힘들다고 일일이 전뇌기를 쓰라고 야단이야? 하루내내 이야기해줘도 되니까 옛날 얘기를 해 줘.”
“네, 그러죠. 천우진은 지금 바쁘니 제가 대신 해 드려도 될까요?”
“너무 자세하게는 얘기 안 해 줘도 돼. 단지 중대한 사건은 꼭 말해 줘.”
“그래야죠.”
사공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별채로 안내했고, 마주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작은 당신이 사라진 후, 동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대웅제국의 세계정복을 결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비교적 명확하면서도 간명하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내게 설명했다. 그녀는 꽤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요점이나 주된 사건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전뇌자에서 직접 생생하게 보고 들었던 기억 덕분에 그녀의 말을 좀 더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대략 두 시진 가까이 흐르고서야 끝이 났다. 사공린은 설명을 끝낸 후 한숨을 쉬었다.
“사실 전뇌자에는 이런 대략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들의 기백, 용기, 생각이 함께 들어있기에 전뇌자를 보시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전뇌자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잠식당했을 확률이 있는 이상 그렇게는 못하게 되었군요….”
“…….”
“위지혼, 제갈부, 백련교주…. 그들이 목숨을 걸었던 싸움은 이런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나도 안다.
직접 생생하게 보았으니까.
하지만 이왕 그녀에게 사실을 숨기기로 한 이상, 나는 끝까지 표정을 관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무튼 됐어. 지금 내가 알고싶은 건 혹시 네게 종말을 막을 수 있는 복안이 있는지에 대해서야. 뭔가 계획같은 건 있는 거야?”
“그것 또한 전뇌자에 입력해 두었습니다만,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건 역시 삼황 복희의 탐색과 절대지경 고수들의 재림(再臨)입니다. 사실상 그 계획이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천계에 간 망량이 검마 등과 함께 진행하는 계획인가?”
“네. 그래요.”
사공린은 내가 이미 전뇌자에서 전달받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삼황 복희는 염제 신농과 달리 봉인되었다기보다는 광기에 미쳐서 알 수 없는 이차원으로 유폐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구천현녀가 실각당한 서왕모와 모종의 교섭을 진행해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천계에 존재하는 버려진 서왕모의 폐궁(廢宮)에는 사실 복희가 존재하는 이차원으로 갈 수 있는 미궁(迷宮)이 존재합니다.”
“미궁!”
나는 짐짓 놀란 척하며 질문했다.
“서왕모는 왜 굳이 그런 미궁을 만든 거지? 복희를 만나고 싶으면 귀찮게 미궁같은 걸 만들지 않고 직선통로를 만드는 게 낫잖아.”
“서왕모가 여와이므로 그녀는 미궁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삼황의 권능으로 즉시 그 차원으로 이동 가능하죠. 하지만 그녀가 미궁을 만든 이유는 아무래도 유사시에 자신의 인과율을 소모하지 않고 복희를 불러오려는 꼼수였던 모양이더군요.”
“꼼수? 무슨 말이야.”
“여차할 때 그녀는 삼황 복희를 광기에서 깨워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신인 여와가 형제신인 복희를 깨워서 힘의 강화를 꾀하는 것 자체가 우주의 균형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인과율이 소모되겠지요. 하지만 만일에 그녀가 자신의 사도나 천계 대라신선을 시켜서 미궁을 돌파해 복희를 깨울 수 있게 되면…. 인과율은 거의 소모되지 않습니다.”
“흐음…!!”
사공린이 말을 이었다.
“지금껏 망량은 강제로 절대지경 고수들이 수명을 다하기 전에 등선시켜서 천계로 올려보낸 후, 그들을 탐사대로 편성해서 검마를 대장으로 하여 미궁을 탐색중이었습니다.”
“지금 상황은 어때?”
“탐사대의 소식이 끊긴지 십오 년 정도 된 것 같군요.”
“…그렇게 여유롭게 말할 일은 아니잖아.”
내가 기가 막혀하자 사공린이 말했다.
“무소식이 희소식. 뭔가 일이 있었다면 중개와 탐사대 보급을 맡고 있는 현허궁주 망량이 지상에 이변을 전달했을 것입니다. 망량이 별다른 말이 없다는 건 탐사대가 순조롭게 복희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렇군.”
망량이라면 믿을 수 있지.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사공린이 말했다.
“삼황 복희에 있는 장소에 도달해서 그를 광기에서 깨우고, 그의 권능을 이용해서 인류의 생존을 도모함과 동시에 [종말]과 [계시]에 대응한다... 또한 탐사하는 동안 강해진 절대지경 고수들의 힘도 도움이 되겠지요.”
“괜찮은 계획이군. 근데 삼황 복희를 광기에서 깨운다는 보장은 있어?”
“그건 전적으로 망량에게 맡겨두고 있습니다. 망량은 구천현녀의 시해지술을 쓴다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공린이 훗하고 웃었다.
“못 깨운다면…. 기껏 거기까지 보내놓은 탐사대원들이 전멸할테지만요.”
“…….”
나는 그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마음을 정했어.”
“뭘 정했나요?”
“오늘부터 구궁파천뢰와 선검술의 수련을 더욱 진행해서, 나 스스로 더 강해졌다고 확신이 들게 되면 천계 탐사대에 합류할 거야! 그게 현재로서는 최선이겠지.”
이건 사공린을 속이려고 대충 지어낸 말이 아니다. 17년이라는 애매한 시간 동안 지상에서 내내 수련만 하다가 회차를 넘기는 것 보다는, 내가 직접 천계로 가서 복희탐사에 참여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경험이 쌓인다면 다음 회차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왜 탐탁치 않은 표정이야?”
“사실 제 입장에서는 그건 최선이 아닙니다. 복희 탐사를 진행하는 미궁은 여와가 신의 힘으로 제멋대로 버무려낸 혼돈 그 자체이므로 절대 만만치 않아요. 거기서 당신이 비명횡사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세월이 모두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안전하게 지상에서 수련만 하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종말을 구경하라고?”
“그게 맞습니다.”
“웃기지 마!”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했다.
“목숨을 걸고 있는 건 지상에 있던 동료들뿐만이 아니야. 그 말대로라면 검마 서문대룡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목숨걸고 여와의 미궁을 탐사하고 있단 소리 아냐? 그것도 500년 가까이! 그런 검마를 내버려두고 나는 지상에서 안전만 추구하라는 건가!”
“…….”
“설령 탐사대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나는 검마를 반드시 한번 만나봐야겠어. 날 막지 마.”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사공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당신의 의지라면 어쩔 수 없죠…. 당신의 뜻에 맞춰서 모든 일을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다만?”
“당신의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판단하는 역할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하겠습니다.”
사공린의 안광이 서서히 빛났다.
“도저히 거기서 생존할 수 없는 실력이라고 판단된다면, 보내드리지 못합니다.”
“좋아. 그 정도 난관은 있어야 수련할 동기가 충만해지겠지.”
나는 씨익 웃었다.
“기대하라고. 천마를 때려눕히고 천계에 올라갈 테니까.”
사공린도 마주 웃었다.
“기대하지요, 백웅.”
이건 간단한 다짐이 아니다.
백련교주조차 천마 사공린을 상대로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패배했었다.
그녀를 상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구궁파천뢰나 선검술, 어느 쪽이든 간에 괄목할만한 성장이 있어야 할 것이리라. 이기려고 한다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현실적이지 못할 정도다.
‘1년…. 아니 뭐 3년 정도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챙기고는 곧장 수련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되돌아오자 방룡 이설표와 주현성에게 인사를 했다.
“돌아왔다!”
“오오, 돌아오셨구려….”
나는 간략하게 낙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먼 발치에서 나무에 기대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투선(鬪仙) 초무린에게 말을 걸었다.
“초무린. 당신이 보기엔 어때? 내가 서왕모의 고대 미궁에 가서 그 곳을 공략할 수 있겠나?”
저 자는 뇌신류의 시조이지만 동시에 투선. 그렇다면 천계의 내부사정을 좀 더 잘 알 확률이 높았다. 내 질문에 초무린이 잠시 기억을 떠올리다가 말했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그 폐궁은 아마 내가 알고있는 곳 같군. 그 곳은 본디 천존궁(天尊宮)이라고 불렸다.”
“천존궁?”
이어진 초무린의 말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고대에 원시천존께서 천계를 만드실 때 최초로 지은 궁(宮)이라고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원시천존께서 실종된 후 서왕모가 그 궁을 소유했었고, 무슨 이유인지 어느 순간 궁을 폐허로 만들어 출입을 금했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