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1====================
사신지혼(四神之魂)
첫 검격의 부딪힘은 다소 서로가 의도한 점이 있었다. 절세고수라면 당연히 초수의 교환이라 해도 굳이 검을 부딪히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상대방이 검에 품고 있는 기세를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굳이 정면에서 검을 부딪히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첫 격돌에서 상대의 완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평범한 인간이 기력으로 강화한 수준일 뿐이었다. 현재 내가 내공으로 극한까지 끌어올린 완력에 비하면 마치 천하장사와 어린아이를 비교하는 수준이었다.
‘팔부신중이라면 인간형 몸뚱이도 출중한 힘을 갖고있을 줄 알았는데.’
저 육체는 그저 조금 단련된 무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인위적으로 취한 육신이라기엔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아수라가 완전히 마왕의 힘을 버리고 인간으로 살기로 했다는 건 거짓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완력의 세기와는 상관없이 그의 의념은 내공강화를 몇 배나 뛰어넘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검날에 맺혀있는 의념의 기백 하나 때문에 나는 그의 검을 밀어내지 못하고 백중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나 또한 절대지경의 의념을 불어넣는 중인데 상대는 나보다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
이건 뭐지?
나는 어디선가 이런 느낌을 느껴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과거 혼돈화했던 백련교주나 마왕, 사도처럼 압도적인 힘을 갖고있는 건 아니지만 엄밀(嚴密)하게 완성된 기백 그 자체를 뚫고 들어갈 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기분이다. 나는 찰나지간에 이 느낌이 어디서 들었는지 생각했으나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끼기긱
서로 검날을 마주친 상태에서 아수라가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절대지경이라더니 과연 의념천주를 제대로 다루고는 있군. 그런데 왜 자기만의 색깔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뭐?”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아직 한 초수도 안 겨뤘어! 칼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무슨 무(武)의 색깔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이냐.”
“할 수 있다.”
아수라는 심유한 눈으로 천천히 나를 관조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검뢰(劍雷)를 장기로 쓴다는 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검뢰로 널 상대해 주마.”
“허세가 작렬하는구만!”
나는 코웃음을 치며 곧장 검뢰를 시전했다. 놈의 말대로 해주는 건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지만 저 놈이 내 검뢰를 검뢰로 상대하겠다 했으니 그게 가능할지 보고 싶어진 것이다. 순식간에 엄청난 속도로 내 검이 반쯤 뒤로 빠지더니 뢰기(雷氣)가 성강(成罡)하며 곧바로 아수라의 목을 베었다.
쿠쾅!!
치지지직…
“…….”
“그렇군, 이런 느낌인가.”
찰나의 순간, 아수라가 자연스럽게 자신의 검을 내 검로에 갖다대며 마주 검뢰를 방출해서 막아내었다. 저 움직임은 사전에 내 움직임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저게 예지능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히 놈이 고수의 직감으로 읽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초절정고수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내 검뢰의 검속을 가볍게 따라잡는 수준이라면 이미 인간의 경지가 아니었다.
아수라가 흔들리지 않고 내 검을 막은 채 말을 이었다.
“초반이라 탐색전을 하겠다는 건가? 이번 공격에는 전혀 진심이 실려있지 않군. 무량단(無量斷)이라는 절기를 보고 싶다.”
단도직입적이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무량단도 무량단으로 막아보게?”
“할 수 있을 것 같군.”
“개소리!”
파밧
검뢰(劍雷)
천참만륙(千斬萬戮)
나는 돌개바람처럼 연속회전하며 초승달같은 검뢰를 몸에 휘감고 천참만륙을 펼쳤다. 제대로 써 보는 건 오랜만이었으나 강력한 절초임은 틀림없었고, 공격력의 극한인 검뢰까지 일으켰으니 천참만륙의 위력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피핑!
순식간에 검의 속도가 총탄의 속도를 수십 배나 돌파했고 내 검섬(劍殲)이 이백참(二百斬)을 넘어갔다. 거기서 삼백 참으로 넘어가며 검속은 훨씬 더 빨라졌고 내 주변은 빛의 줄기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환영마저 느껴졌다. 과거 황궁에서 썼을 때와는 천지차이의 위력!
그러나 한 호흡도 되지 않아 사백 참을 넘기고 있을 때 나는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이, 이건?’
무시무시한 속도의 강격(强擊)와 연속베기인데도 아수라는 제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아챘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굴류(屈流)와 와류(渦流)가 마치 한 몸처럼 엉켜있는 검로!
생전 처음 보는 독자적인 검의 흐름이 그 자체로 독보적인 방어초식이 되어 아수라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검의 속도는 도리어 나보다 느렸지만 그 초식은 마치 내 공격의 선(先)을 읽어낸 듯 유유히 흐름을 차단하고 있었다.
‘흐름으로 흐름을 끊다니!’
보통의 방어초식은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서 움직이게 되어있지만 아수라의 검로는 도도하게 자신의 길을 가면서도 마치 내 움직임을 따라오게끔 유도하는 듯 했다. 당황스러운 것은 내가 최적이라고 생각했던 투로(鬪路)가 빨려들듯이 아수라의 초식에 섞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쩌엉!!
마침내 비기 천참만륙의 마지막 일천 참을 쐐기처럼 박아서 스쳐지나갈 때 아수라는 검을 몸의 중선(中線)에 대며 차분하게 막아내어 버텼다. 너무 완벽한 막기라서 내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한 줌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깔끔한 마무리에 고수로써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으음.”
내가 뒤를 돌아보며 끙 하고 침음성을 흘리자 아수라가 말했다.
“이 정도면 내가 검뢰를 완벽하게 쓴다는 증명이 될 텐데. 이제 무량단을 보여다오.”
뭐라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강기조차 절삭할 수 있는 검뢰로 천참만륙을 펼쳤는데 마주 검뢰로 일일이 일천참을 다 막아내었기 때문이다. 나도 저렇게 천참만륙을 막을 자신은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아수라는 나나 독고성보다 더 완벽하게 검뢰를 시전하는 건지도 몰랐다.
“어, 어떻게 검뢰를 쓸 수 있지?”
내 질문에 아수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꾸했다.
“검뢰는 생각보다 습득이 까다롭진 않지. 뇌신류 검술 뇌신검무를 대성하고 천뢰기를 응축하여 뢰기를 의지에 감응시킬 수 있으면 끝이 아닌가? 위력에 비하면 도리어 간단한 수련이었다.”
“천뢰기는 하루아침에 쌓이는 건 아닌데….”
“마음 속의 번개를 형상화하는 수련이 따로 필요없다면 천뢰기의 수련기간도 크게 단축되지. 그 사실은 몰랐나보군.”
나는 아수라의 말에 당혹했다.
“…어? 따로 필요없다고?”
나는 그게 제일 어려운 수련이었는데 무슨 소리야?!
하지만 아수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6대절기 제각각이 절대지경의 심득인 적멸무극을 성취한 나보다 의념절기의 심상구현화를 잘 하는 존재가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
“너는 밑에서부터 검뢰를 익히며 올라왔지만 나는 이미 정점에 올라선 상태에서 아래의 경지를 내려다본 것이다. 수련난이도는 큰 차이가 있겠지.”
그렇게 말한 아수라가 스윽 하고 검뢰를 실은 검을 내 쪽으로 겨누었다.
“시간은 많았기 때문에 네가 익힌 무공은 나도 다 익혔다. 제대로 해라.”
내가 익힌 무공을 저 놈도 다 익혔다고?
우선 장삼봉의 칠대절학은 당연히 전뇌자에 입력되었으니 저 놈이 전뇌자와 손을 잡았다면 자료를 받아서 익혔으리라. 팔선신공도 마찬가지일 것이리라. 또한 동료들이 입력해 둔 무공들도 모두 아수라가 익혔을테니 저 말은 크게 틀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왜?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서 아수라에게 말했다.
“왜 그랬는데…? 넌 이미 적멸무극을 성취해서 무공의 갯수를 늘린다고 해서 더 강해지는 건 아니잖아. 어째서 굳이 전뇌자에 기록된 무공을 익혔던 거냐.”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수라는 실질적으로 절대지경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강급 경지에 도달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개나 되는 절대지경 기술을 성취해서 그걸 동시에 펼쳐낼 수 있는 적멸무극!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절기 자체가 극소수였으며 그 외에도 이미 수백 수천개의 무공을 익혔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내 무공을 또 익혀봤자 강해지기는커녕 시간낭비일 것이리라. 왜냐하면 의념의 강함이란 무공의 숫자와 전혀 관계없기 때문이다.
내 진심을 담은 질문에 아수라가 대답했다.
“왜인지는 무량단을 보고 나서 대답해주겠다. 난 아직 너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나 보고 싶다면야, 보여주는 수밖에!”
우웅
나는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를 강하게 응축시켰다. 그리고 임의로 무량단이라고 이름붙인 절기를 마음속에서 형상화하여 검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무량(無量)을 베는 번개.
전생 초기부터 절대적으로만 보였던 백련교주의 심천무량조차 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싣고 있는 절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도 나는 심천무량을 심뢰(心雷)로 돌파한 적이 있었기에 무량단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히 컸다.
‘하아아…!!’
집중이 점차 극한에 도달한다!
이윽고 뇌기로 변환된 의념이 정점에 달해서 뇌검(雷劍)이 엄청난 밀도를 응축하게 되자, 검뢰조차도 뛰어넘는 일순간의 힘이 느껴졌다. 나는 그 힘의 흐름을 정밀하게 제어하면서 눈을 반개했고, 아수라의 빈틈을 노리려 했다.
…….
빈틈이 없다….
‘뭣이?! 왜?’
나는 그 사실에 집중이 잠깐이지만 흐트러질 정도로 놀라버렸다. 아무리 백련교주를 앞에 두었어도 심천무량 사이에 미세한 빈틈이 보였을 때 가볍게 찌를 수가 있었는데, 어째서 아수라를 상대로는 그 빈틈이 보이지 않는 거지?!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절대지경의 넓은 시선으로 아수라의 범위를 살폈는데, 광각(廣角)이든 협각(狹角)이든 빈틈은 전혀 없었다. 있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어느 새 아수라의 의념으로 완전히 감싸여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껏 무량단을 준비했는데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나는 의지를 돋우며 아수라의 정면으로 무량단을 강하게 그었다.
광뢰(廣雷)가 터질듯이 아수라의 전면으로 쇄도한다. 시간이 멈춘듯한 그 상황에서 무량단의 참격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듯 했다. 그러나 아수라는 갑자기 몸을 횡으로 반 바퀴 돌리더니 그대로 좌상(左上)으로 올려베었다.
빨려든다!
심뢰가 아수라의 심장을 베어버리기 직전에 아수라의 초식이 만들어낸 흡인력이 무량단의 검로를 바꾸는 게 느껴졌다. 아주 미세하게 궤도가 원래의 궤도에서 이탈했을 때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아수라가 곧장 두 번째 진각을 밟았다.
쿠웅
서, 설마 저 무공은….
내가 아연할 때 아수라가 그대로 지(地)의 흐름을 붙잡더니 마지막으로 심뢰를 완전히 옆으로 비껴나게 만들어 버렸다. 그저 한 걸음이자 두 동작으로 일어난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고 무량단을 흘려내는 데 성공한 아수라는 그대로 칠성폭뢰지(七星爆雷地)를 써서 내 가슴팍으로 지탄(指彈)을 날렸다.
투두둥
나는 지탄을 가볍게 피했으나 이윽고 아수라의 검에서 새어나오는 어마어마한 천뢰기를 느끼자 흠칫하고 반응했다. 저 정도로 뿜어져나오는 천뢰기가 일순간에 응집된다면 그건 틀림없이….
무량단이다…!!
지잉!
다음 순간, 아수라의 팔과 검이 모두 빛으로 화하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절대지경의 감각으로도 방어가 거의 소용없을 지경이었고, 나는 아수라의 무량단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었지만 이윽고 이어진 몸통박치기에 튕겨져나갔다.
쿠웅!!
“커헉!”
나는 호신강기로 막았지만 삼 장이나 뒤로 밀려났고 이윽고 울혈을 토해냈다. 내가 뒤로 밀려나자, 아수라가 입을 열었다.
“역시. 백웅 너의 필살기인 무량단은 약점이 있어.”
“뭐…? 뭐라고.”
“간단한 이야기다.”
아수라가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무량단 일점의 파괴력과 관통력은 단연 천하아래 모든 무공절학 중 최상(最上)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익힌 천축의 수백가지 절세무공 중에서도 무량단에 버금갈만한 건 한두 가지에 불과하지. 하지만 그건 결코 최고의 절기가 될 수 없다.”
“어째서.”
“너무 단순해. 어찌나 단순한지, 내가 그냥 전뇌자의 기록만 보고 눈어림으로 무량단을 익혔을 뿐인데 네가 쓰는 무량단과 하나도 다르지 않잖은가.”
이어진 아수라의 말에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어버렸다.
“까놓고 말해서…. 그건 그냥 강력한 검뢰일 뿐이지. 검뢰 자체도 의념절기였으니 그저 검뢰를 최대출력으로 강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 너무 단순하잖은가?”
“…….”
“그냥 최선을 다한 일참(一斬). 물론 잡스러운 절기보다는 훨씬 강력하지. 그러나 현묘함은 극히 떨어지며, 무엇보다도 아무 생각없는 무념(無念)이니만큼 네 무량단은 그때그때 성격이 달라진다. 위력이 불안정하니 검로도 단순해질 수밖에 없고 결국 정면승부만 피하면 무량단을 무력화할 방법은 여러가지 생겨버린다.”
스윽
아수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다시금 진각을 쿵 밟았다. 그러더니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
당연히 나도 절대지경이니 지금의 한 걸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삼보절기!
아수라는 방금 전 내 무량단을 굴공참(屈空斬)을 최대로 전개해서 빈틈을 만든 후 삼보절기로 천(天)의 방위를 먼저 점해서 궤도를 이탈했다. 그리고 회피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지(地)의 보법으로 비껴낸 후 인(人)의 방위가 자유를 얻자 그대로 칠성폭뢰지로 반격을 한 것 뿐이다.
말로 설명하면 간단해 보이고 실제로도 간단한 파해식이다. 그러나 다른 고수들은 알고있다 해도 아수라처럼 간단하게 무량단을 피하고 반격할 수는 없으리라. 백련교주조차 정면에서 피하거나 막기 쉽지 않은 무량단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대응할 수 없는 기초실력이 없다면 삼보절기로 흘리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강능단유가 먼저인가, 유능제강이 먼저인가.
결국 피차의 역량에 달려있을 뿐.
아수라의 실력이 근본적으로 나보다 몇 차원 위에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말해준 무량단의 단점은 꼭 개선해야겠지만.
‘그래…. 이 느낌은 그거야.’
검선 여동빈.
마치 그와 목숨걸고 겨루려고 앞에 섰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 그 때보다 훨씬 강해져 있지만, 지금의 아수라가 풍기는 절대적인 엄밀함은 마치 여동빈을 연상시킨 것이다. 그것은 아수라가 힘과 기교를 버리고 공(空)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차원이 달라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내가 전뇌자를 통해서 네 무공을 익혔던 이유는 바로 이거다. 나는 네 무공의 약점을 알아내서 개선시켜주고 싶었다.”
“…왜?”
“좋든 싫든 네 동료들은 거의 다 죽어서 네게 무공의 경지를 향상시켜줄 자는 남지 않았다. 내가 그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
나는 한참이나 아수라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수라. 정말로 내 동료가 되고싶은 거냐?”
“큭큭.”
아수라는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구걸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네 밑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내 무량단이 실망스러워서?”
“아니, 네 모든 무공이.”
아수라가 슥 하고 검을 치켜들고는 말했다.
“네 녀석은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것만은 두고 볼 수가 없겠구나.”
“작작 좀 해.”
나는 눈빛을 강하게 하며 다시 검을 세게 쥐었다.
“아직 안 끝났어.”
“호오!”
분명히 아수라는 나보다 강하다. 인간상태인데도 순수한 무학의 경지가 나보다 현격하게 높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싸워봐야 할 것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게 어찌 무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투지를 올리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관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전뇌자가 박수를 쳤다.
“끝났어.”
짝!!
쉬이익!!
갑자기 나와 아수라가 검을 들고 서 있던 연무장의 풍경이 뒤바뀌었고 내부응접실으로 변했다. 그리고 나는 소파에 앉아서 두 명과 마주보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엇….”
난데없는 변화에 황당해서 전뇌자를 쳐다보자, 전뇌자는 우아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이 전뇌공간은 바깥과 시간이 달리 흐르게는 하지 못해. 그래서 당신들이 무인의 우격다짐을 한다고 시간낭비하는 꼴을 지켜볼 순 없어. 지금도 천우진이 만든 툴(Tool)이 내부를 헤집고 있으니까.”
“…….”
“아수라. 적당히 하고 본론이나 말해.”
“그러지.”
아수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게 말했다.
“백웅.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다오. 그럼 가르쳐줄 수 있는 건 다 가르쳐주겠다. 원래 네가 찾아오는 걸 기다리려고 했지만 기약이 없어서 전뇌자와 손을 잡아서 내 쪽에서 찾아온 것이다.”
“그랬던 거냐….”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근데 적멸무극을 가르쳐줘야 하고 다음 생부터 너를 설득할 방법을 알려줘야 한다.”
그 강력한 아수라가 전생동료가 된다는 데 딱히 거부할 이유는 없지!
아수라는 내 말에 히죽 웃더니 말했다.
“크큭…. 잘 부탁한다. 접선할 장소는 전뇌자를 통해서 네게 전달하지.”
그러자 전뇌자가 옆에서 너구리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백웅. 이제 곧 모두를 내보내 줄 텐데 당신한테 약속받고싶은 게 있어.”
“뭘 약속받고 싶은데?”
“사공린을 믿지 마. 그녀에게 여기서 알게 된 걸 절대 말하지 마.”
“…….”
“그걸 약속하지 않으면 여기서 내보내지 않겠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공린은 절대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너희는 왜 자꾸 사공린을 조심하라는 거지?”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어. 어찌보면 백련교주와 마찬가지 경우일지도 몰라. 백련교주가 그걸 걱정했기 때문에 아수라에게 유지를 남겼던 거야. 백련교주는 그의 사후 사공린이 폭주하면 그녀를 제어할 존재로 아수라를 선택했던 거고.”
“…….”
전뇌자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해 줘. 약속해 달라고. 이건 정말 중요해….”
나는 전뇌자의 요청에 크게 고민했다.
‘거절하는 건 간단하지만….’
전뇌자는 내가 전생자라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어차피 다음 생부터 전뇌자와 내가 마주칠 일은 없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이 전뇌세계에 나를 영구히 박제하거나 죽여버리는 게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불리 가짜맹세를 하면 큰일날 거라는 직감도 들었다.
…다만, 전뇌자는 왠지 나한테 비정하게 손을 쓰지는 못하리라는 직감도 든다. 잘은 알 수 없지만 녀석은 나를 대할 때 계속 주저하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지?
그리고 나는 이윽고 마음을 정하고 대답했다.
“좋아. 여기서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하지.”
사공린을 믿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수라와 전뇌자, 이 두 명과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어쩐지 이번 생의 결과에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