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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의문의 존재, 아틀란티스의 제왕 오레이칼코스가 나타나자 사공린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당신은 영혼과 물질의 경계에 있군요. 죽음을 택하지 않고 이 세상에 억지로 잔류할 수 있는 건 과학기술의 힘인가요?”
[과연 신적인 존재구나. 한 눈에 내 상태를 알아보다니!]
찬탄하던 오레이칼코스가 대꾸했다.
[그렇다. 레무리아의 힘 덕분에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다. 허나 내 백성은 이미 멸망했으니, 이 곳에서 종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레무리아?”
[아틀란티스의 혈맹이었던 제국이자 대륙이지. 허나 [옛 지배자]의 권능때문에 그들도 머지않아 멸망해 버렸다….]
오레이칼코스가 사공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위대한 신적 존재여. 그대가 여기 온 이유가 무엇인가?]
사공린은 눈 앞의 존재를 그냥 소멸시킬지 이야기를 들어볼지를 고민했다. 오레이칼코스를 섣불리 믿을만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눈앞의 상대는 십이율주와 같은 장소에 있으니 어쩌면 적의 동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나는 [옛 대륙]을 정탐하고 거기에 있을 십이율주를 치러 왔습니다.”
그녀는 일단 오레이칼코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나중에 백웅이 따로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사공린이 먼저 사전정보를 얻어두면 전생자가 번거롭게 수고를 할 일이 줄어들 것이다. 어쩌면 오레이칼코스에게 솔직하게 정보를 털어놓는 게 이번 생에서 사공린의 실패를 초래할 수도 있겠지만, 사공린은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실패하더라도 백웅이 정보를 얻으면 돼. 그게 우리의 전략.’
사공린은 전후사정을 약간 설명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오레이칼코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과연…. 아틀란티스에 누군가가 테라포밍을 했으나 그게 누군지 몰랐었다. 그런데 그게 십이율주라는 자였구나.]
“당신은 몰랐다는 말인가요?”
[나는 이 유적에서 일만 이천년 이상 잔류했으나 그런 자의 접촉을 맞이한 적 없다. 차원을 겹쳤다면 그 자가 아틀란티스의 유적에 일일이 손댈 이유는 없었던 거겠지. 이 유적에 어떤 함정이 있을지 모를 테니. 실제로도 함정은 존재하니, 그 자는 무척이나 신중한 성격으로 보이는군.]
사공린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일만 이천 년!! 그렇게나 오래되었나요?”
[인류는 그 이전부터 문명의 맥을 이어왔다. 내가 알기론 최소한 4만 5천 년 전부터 인류의 문명은 시작되었다.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의 이전에는 칼파, 바빌론, 멤피스가 원류문명을 지니고 있었고…. 우리는 구 문명과 경쟁과 협력을 반복했노라. 다만 [옛 지배자]나 대홍수 등 대재앙이 몇 차례고 지상을 쓸어버리면서 역사가 소실된 것이리라. 또한 [옛 지배자]들이 우리들을 멸절시킨 후 입맛에 맞게끔 인간의 품종을 개량했으니 더더욱 알 수가 없었겠지….]
“…….”
사공린은 오레이칼코스의 말에 뭔가 석연찮음을 느꼈다. 어쩐지 그가 하는 말이 중대한 단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또다시 질문했다.
“아틀란티스의 제왕 오레이칼코스. 당신은 이 [옛 대륙] 아틀란티스에 씌워진 테라포밍을 풀 수 있나요?”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어째서죠? 십이율주는 당신의 영토를 침범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자는 차원을 괴리시켜서 겹친 차원의 다른 면을 쓰고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마주칠 일조차 없지. 이건 침범이라고 볼 수가 없다. 또한 백성이 멸망한 지금, 굳이 그런 강력한 자와 다투고 싶지도 않다.]
오레이칼코스는 주위를 쓱 둘러봤다.
[얻을 게 없을 뿐더러 자칫했다가 이 유적이 모두 파괴되면 내 추억마저 사라질테니.]
“추억을 제외한 모든 걸 포기했다는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겠군…. 흐흐….]
오레이칼코스는 회한이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는 우주로 진출하여 화성과 금성, 목성까지 개척한 바 있었다…. 우리야말로 인간의 황금시대를 이끌 것이라 생각했건만…. 고작 [옛 지배자]의 원한을 샀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대륙이 물에 가라앉고 모든 게 사라졌다. 인류는 직후에 또다시 야만스러운 문명상태로 되돌아갔고 신의 장난감이 되고 말았지. 타행성의 개척지는 이제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
[악랄한 신이 존재하는 한 인간이 아무리 발전해봤자 무의미해. 차라리 종말이 빨리 찾아와서 인간과 신을 함께 소멸시킨다면 속이 시원하겠구나. 종말로 신이 멸망할지는 모르겠지만!]
절망으로 가득 찬 오레이칼코스의 말에 사공린은 침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오레이칼코스. 십이율주는 어째서 이 [옛 대륙] 아틀란티스에 테라포밍을 시도한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는가.]
“차원을 겹치는 방식의 테라포밍이며 물질계와 괴리시킬 수 있다면 굳이 바다에 가라앉은 이 유적에 해야할 이유는 없을 터. 지상계의 아무 장소와 동기화시키면 되는 거였겠죠. 그런데 당신같은 존재와 척질수도 있을 위험을 감소하고 굳이 여기에 테라포밍을 한 이유는?”
[…흐음. 내 호기심을 부추기는 질문인가.]
“부탁입니다. 나는 정보를 얻어가야 합니다.”
[허어. 그대는 언뜻 보아도 [옛 지배자]에 버금가는 엄청난 신적 존재…. 그런데도 나같은 필멸자에게 너무 공손한 게 아닌가? 설마 그만한 위격을 지니고 있는데도 인간의 이성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도리어 오레이칼코스가 당혹스러워하자 사공린이 당당히 말했다.
“나는 인간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그런가. 허나 그대를 마주친 자들은 모두 그대에게 경외를 품으리라. 그대의 존재는… 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위대함을 내포하고 있다! [옛 지배자]조차 그대를 무시할 수 없을 터인데 과연 그런 그대를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오레이칼코스. 도와주세요.”
[…….]
그는 고민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십이율주라고 하는 그 자는 내가 아닌 레무리아 측과 접촉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는 다른 건가요?”
[서로 다른 대륙이었으나 동일한 문명이었고 혈맹이었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으나 단 하나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것은 아틀란티스의 제왕인 내가 과학자였던 것과 달리, 레무리아의 제왕은 성좌(星座)에서 내려온 존재였다.]
“성좌라면 외계인입니까?”
[그렇다기보다 고대신의 대리인이나 다름없었지. 그래서 아틀란티스가 멸망했을 때도 그쪽은 고대신의 가호로 멀쩡했다. 그러나 결국 인류를 재편하려는 [옛 지배자]들의 집요한 공격 때문에 망하고 말았다.]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오레이칼코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자는 아틀란티스와 레무리아의 위치를 착각해서 여기에 터를 잡았거나, 그게 아니면 레무리아의 위치를 알고 있음에도 섣불리 접근하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군.]
“후자의 경우는 뭐죠? 섣불리 접근하지 못할 이유가 있나요?”
[아틀란티스는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으나, 지금 레무리아 대륙이 가라앉아있는 위치는 굉장히 위험하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가 아닐까 싶군.]
“……?”
[그 장소에는 흉신(凶神)의 도시가 붙어 있으니까.]
“아…!!”
그 순간, 사공린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레무리아 대륙이 가라앉은 위치는 바로 태평양 한가운데, 즉, 흉신과 그의 도시가 잠들어있는 곳인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십이율주는 레무리아에 바로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해신과 부딪히기도 꺼려하는 십이율주가 흉신에게 접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공린은 좋은 정보를 알았다고 생각하며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십이율주가 레무리아에 접촉하려고 한 이유는 뭘까요?”
[그건 아마 레무리아의 제왕이 갖고있는 능력을 얻으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어떤 능력이죠?”
[지금 나를 이 세상에 잔류시켜주는 힘이지…. 이걸 보시게.]
위잉!!
오레이칼코스는 갑자기 전신이 빛으로 환하게 빛나서 광인(光人)처럼 변했다. 잠시동안 발광현상을 보이던 오레이칼코스가 말을 이었다.
[지구 그 자체의 힘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 명계는 물론이고 모든 이족과 마력이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 십이율주라는 자가 이 능력의 실체를 알고 있다면 당연히 얻으려 할 것이다.]
사공린은 천마의 힘으로 오레이칼코스를 둘러싼 빛에 잠재된 힘을 알아챘다. 말 그대로 행성의 힘을 그대로 뽑아쓰는 셈이었기에 사공린은 감탄했다.
“굉장하군요. 이 정도의 힘을 갖고도 어째서 [옛 지배자]에게 대항하지 못했던 거죠? 충분히 가능했을 것 같은데.”
[어처구니없는 소리군. 이 힘이 필멸자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긴 하지만 [옛 지배자]가 명분을 갖고 강림한 걸 막을 힘까지는 없어. 우주를 갖고노는 사신(邪神)을 상대로는 목숨 부지하기도 바쁠 뿐…. 그대도 신의 힘을 다룰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죠.”
[의지적이군. 크흐흐….]
잠시 웃던 오레이칼코스가 문득 말했다.
[그대가 현재 인류를 이끄는 제왕이라면 이걸 받아주지 않겠나?]
스윽
오레이칼코스가 사공린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공린은 그게 혈석(血石)이 박혀있는 백은의 반지라는 걸 알아채고는 받아들었고, 오레이칼코스가 사공린에게 말했다.
[그것은 판게아라고 하는 반지. 그 반지를 지닌 자는 아틀란티스의 후예와 식민지 총독들에게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충성을 맹세받을 수 있다. 아틀란티스의 제왕만이 지닐 수 있는 반지였으나 그대에게 주겠다.]
“왜 주는 거죠?”
[그대가 아까 내게 말했지. 십이율주의 [옛 대륙] 테라포밍을 멈춰달라고.]
“그랬었죠.”
오레이칼코스는 간절한 얼굴로 사공린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만일…. 아틀란티스의 후예와 식민지를 찾아서 복종시키고 이곳에 데려올 수 있다면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 그 자를 이 대륙에서 내쫓아 주지. 어떤가?]
“거래라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사공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판게아의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받아들이죠.”
[고맙다….]
스스스
오레이칼코스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오레이칼코스가 남긴 말이 공기중에 떠돌았다.
[이 유적에 오래 있으면 아무리 위대한 존재라도 함정에 걸리게 될 것이다. 이 함정은 아틀란티스의 원념(怨念)이 담겨있으니 위험하다. 함정의 발동을 지연시킬테니 서둘러 떠나라.]
사공린은 오레이칼코스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느꼈다. 판게아라는 반지까지 준 이상 오레이칼코스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었다.
파앗!!
사공린은 다시금 영겁지무를 발동시켜서 유적지를 나와서 아까 [검은 태양]이 싸우던 곳으로 나왔다. 그리고 장내를 둘러보자, [검은 태양]이 처참하게 죽어있는 게 눈에 보였다. 수십만 발의 광선을 버티지 못했는지 결국 조각조각 찢겨있었다.
“…….”
사공린은 별달리 불쌍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옛 지배자]의 사도라서 살아오면서 극악한 짓을 수도없이 저지른 악당일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내가 잡아먹을 생각이었는데 귀찮은 수고를 덜었군.’
그녀는 거대 이퀄라이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대 이퀄라이저가 그저 멀뚱히 서 있을 뿐 사공린에게 공격의사를 보이지 않는 걸 확인했다.
‘내가 마(魔)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적의를 품지 않는 것인가?’
사공린은 언뜻 이 방어시스템이 허술하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천마의 힘이 너무 뛰어난 것이었다. 천상의 마라고 하지만 원한다면 마력을 아예 무(無)로 만든 채 유지하는 것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금 뚫고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사공린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기로 했다. 억지로 십이율주의 본거지로 뚫고 들어간다고 해도 십이율주가 도주하면 딱히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며, 그녀는 대웅제국을 떠받치는 게 자기 혼자라는 사실에 크나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 인류최강이자 지상최강의 존재는 틀림없이 사공린이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옛 지배자]가 직접 인과율을 가지고 현신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천마를 이길 존재는 절대 있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그런 사공린과 달리 대웅제국은 필멸자의 집단이었고 그들을 보호하면서 싸우려 한다면 아무리 사공린이라도 큰 부담이었다.
사공린만큼 강하지는 않더라도 그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싸움은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가 없는 지금, 사공린이 혼자서 모든 적의 근거지를 뒤집는다고 하더라도 졸에게 둘러쌓인 왕처럼 되어서 결국 사면초가에 처할 것이었으므로 사공린은 섣불리 적대적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백웅만 돌아온다면!
그녀는 백웅만 돌아온다면 모든 걸 박살내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지를 못해서 아쉬웠다. 책임질 것이 없다면 그녀는 천하무쌍이겠지만 도리어 황제라는 자리가 그녀에게 제약을 거는 셈이었다.
‘…우선은 오레이칼코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공략할 방법을 찾아보자.’
그녀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방에서 아즈텍 제국이 멸망했으며 남미대륙 전체를 미합중국이 차지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마 [검은 태양]이 [옛 대륙] 공략에서 사망한 여파가 컸기에 아즈텍 제국을 수호할 주술의 힘이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렙틸리언들이 과학기술로 밀어붙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난데없이 남쪽에서 광분한 아수라가 나타나서 은빛 사슴과 교전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으나 직접 대웅제국 간부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어째서 그들이 충돌했는지도 불명이었다.
사공린은 몇 년 후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천우진은 어디에 갔죠?”
그녀의 질문에 자리에 앉아있던 사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폐하, 연구소장 천우진은 전날 야근을 한 후 잠들어있습니다.”
“급한 회의니까 불러오세요.”
“알겠사옵니다.”
이윽고 억지로 불려나온 천우진은 눈이 벌겋게 되어서 항의했다.
“야근했는데 부르는 게 어딨냐!! 2시간밖에 못 잤다고!”
“천우진. 그만큼 급한 일이니 양해해 줘요. 뇌신류의 연구, 구궁파천뢰에 문제가 생겼어요.”
“……!!”
천우진이 흠칫 놀랐다.
그들은 백련교 사대무류의 맥을 이으면서 동시에 거의 맥이 끊긴 뇌신류를 지원하여 계속 무공연구를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뇌신류의 무인들은 자체적인 연구를 통해 이혼대법을 접목시킨 궁극의 무공, 구궁파천뢰를 오랜 세월동안 완성시켜가고 있는 중 이었다.
“어떤 문제가 생겼지?”
이윽고 천우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빙의한 게 문제겠지, 황제 사공린 나으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회의장 한가운데에 꽁꽁 묶여 있는 뇌신류의 계승자였다. 그 사내는 히죽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왜 당황하고 그래? 내가 다시 돌아올 것 정도는 예상했잖아.”
“…….”
“이, 이 개새끼가…!!”
천우진은 빙의한 존재의 정체를 깨닫고 울부짖듯 외쳤다.
“제갈사!!!”
틀림없는 제갈사였다. 이혼대법과 마왕의 힘을 써서 빙의한 게 틀림없는 것이다. 사공린은 침중한 눈으로 제갈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갈사. 왜 하필 그에게 빙의했죠?”
“진소청한테 의뢰를 받았거든. 구궁파천뢰는 이대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으니까 완성방법을 전해달라고 하더라.”
“뭐라고요?!”
“그 녀석 어떤 식으로인지 구궁파천뢰 연구를 접했던 모양이야.”
장내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진소청이라니?!
망량선사 밑에서 수련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천우진조차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진 진소청이었다. 그 행방이 묘연하던 존재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서 제갈사에게 의뢰를 맡겼고, 그게 구궁파천뢰의 개선에 관한 거라니!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구궁파천뢰는 인간의 힘으로는 완성할 수가 없으니 투선(鬪仙)의 도움을 받으라더군. 특히 뇌신류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지닌 환(幻)과 변(變)의 요결이 필요하니 소환해서 연구에 참여시키라던데.”
“…정말인가요?”
“정말이야.”
제갈사는 이윽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진소청이 무공얘기를 하는데 그게 사실이 아닐 리가 있겠냐고.”
“진소청이 말했다면 그럴 리는 없겠죠…. 당신이 진소청에게 얘기를 들었다는 것 자체를 의심하는 거고요.”
“후후! 내가 마왕씩이나 됐는데 할 짓 없어서 인간세계에 현신하고 앉았겠어? 72악마를 굴복시키는 것만으로도 빡세 죽겠는데….”
“…….”
“참고로 지금의 진소청은 아직 사공린 당신보단 약해. 안심해도 좋아.”
제갈사가 유들유들하게 말했으나 사공린은 그다지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제갈사는 사공린을 놀려먹는 것만으로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 진소청이 현재 사공린보다 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건 거의 무의미한 정보다. 진소청은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격을 달리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사공린이 침묵할 때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그럼 나는 이만….”
파앗
제갈사가 곧 빙의를 풀고 사라지자, 사공린이 조용히 말했다.
“천우진. 서문혜의 상태는 어떻죠?”
“봉인은 풀릴 기색이 없어. 하지만 종말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 못해.”
“…얼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이제 이야기할 때가 온 것 같군요.”
“뭘?”
“지금까지는 억지로 미합중국과 냉전을 하며 그들의 발전을 견제해 왔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겠어요. 그들에게 세계최강국의 자리를 넘겨주도록 하겠어요.”
사공린의 선언에 천우진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그럴 이유가 없잖아. 과학기술력은 저쪽이 훨씬 앞서지만 아예 못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고, 보패과학도 크게 발전하고 있어. 일부러 그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잖아.”
“천우진. 몇 년 전부터 아주 평화롭다는 걸 알고 있나요? 현 대웅제국의 힘은 전성기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데도.”
“…….”
“그건 우리가 가진 힘과 상승세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에 맞서서 적도 함께 강해집니다. 제갈사가 당신의 힘을 봉인한 건 아마 그 때문이겠죠…. 지금껏 당신의 힘이 유지되었다면 틀림없이 마왕급을 뛰어넘었을 테니, 그 이상의 강대한 적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을 겁니다.”
“억측이야. 힘을 갖고있든 아니든 어차피 우리를 칠 놈은 치는 거고.”
“아뇨. 저는 힘을 줄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옛 지배자]를 한번에 쳐서 없앨 정도의 힘을 갖고있지 않은 한…. 힘이 크든 작든 무의미하니, 차라리 견제를 덜 받는 게 나아요.”
끼익
사공린은 옥좌에 기댄 채 몸을 살짝 뉘였다. 그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감돌았다.
“이제부터는 몇십 년이든 몇백 년이든 은인자중하며 백웅을 기다립시다. 그를 기다리는 건 천우진, 당신 뿐만이 아니니까요….”
“그 놈이 귀환해봤자 너보다 훨씬 약한데 대체 뭘 믿고. 그 녀석은 500년 전 그대로인데 종말 직전에 뭘 바꿀 수 있단 말이냐!”
천우진이 답답해서 말했으나 사공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생자가 무서운 건 힘의 크기가 아니라는 건 잘 알 거예요. 그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서운 거죠.”
“…….”
“저도 피곤하군요. 천우진, 당분간 쉬도록 해요.”
이윽고 사공린은 옥좌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천우진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서 장내에서 사라졌다.
사공린의 혈석반지, 판게아에서 서서히 붉은 빛이 강하게 뿜어지기 시작했다.
파앗
“500년 기억의 감상은 어땠나, 백웅?”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억회상이 멈춘 건가?
아니, 끝난 거구나.
나는 그 동안의 기억을 관조하고 있는 중에 인식이 깨어났다. 그리고 문득 그 목소리를 듣고는 그 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기억 속의 사공린이 몸을 뉘인 옥좌 옆에 한 명의 검객(劍客)과 전뇌자가 함께 서 있었다.
전뇌자는 알겠는데 저 옆에 있는 놈은…?
‘아!’
멈춰있는 기억 속.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그 검객의 모습은 내 눈에 익숙했다. 그리고 나는 그 검객의 모습을 보자마자 말했다.
“아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