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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쿠구구구구!!
갑자기 독고운천과 사도 할치올레이푸라를 둘러싸고 가공할만한 어둠의 막이 생겨났다. 합공을 하던 대웅제국측은 갑작스러운 현상에 뒤로 물러섰고, 어둠의 막은 약 백여 장이나 더 범위를 넓히다가 잠잠해졌다.
“저건 뭐지?!”
한백령의 외침에 천우진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심상치 않군. 저건 마력이 아니야.”
천우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뭔가 알고있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천우진은 시선을 받자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魔) 특유의 파장과 요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저게 시꺼멓긴 하지만 마력으로 이뤄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건 신력도 아니에요.”
우웅
서문혜가 힘을 내뿜어서 어둠의 막에 손을 대었지만 이내 수면이 출렁이는 듯한 흔들림이 일어날 뿐이었다.
“신력을 불어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군요. 반발하기는커녕 흡수해 버려요.”
“그런 속성의 신력이 따로 있지 않을까?”
“신력은 순수한 ‘힘’의 속성이니 2차적 변화가 어찌됐든 처음에는 힘의 파장이 충돌하게 돼 있어요. 이런 건 처음 봐요.”
“…….”
이어서 류진이 초능력을, 천우진이 환술을 써 보았지만 어둠의 막에는 모든 기술이 먹히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이 무(無)가 되는 듯 했다.
“이건 대체….”
뜻밖의 상황에 모두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사도와 독고운천이 어둠의 막에 둘러싸여 버리다니! 이것이 사도의 술수라면 독고운천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지만, 왜인지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것은 왜인지 예상치 못한 이변이라는 직감이 모두의 뇌리를 스쳐지나간 것이다.
그렇게 약 반 식경이 흘렀다. 다들 독고운천을 구출하기 위해 이것저것 능력과 기술을 발휘해 보았지만 눈 앞의 검은 막은 전혀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수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대로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너희 일행의 목적과 해야할 일을 되짚어 보지. 이번 탈환대의 목표는 수정석비의 탈환이었고 그걸 이루었으니 이제 귀환하면 되지 않는가? 그럼 작전은 성공이다.”
아수라의 말에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독고운천을 뒈지게 내버려두면 참 잘도 성공이겠다. 그리고 어차피 사도를 내버려두면 놈이 다시 힘을 모아서 공격할 뿐일 건데 지금 박살을 내야 유리하지. 인간계 최강 전력이 이렇게까지 모이기도 쉽지 않은데.”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저 장막은 방법이 없잖은가.”
“…….”
“나는 이해가 안 가는군. 너희는 왜 그리 동료의 목숨에 집착하는 거지? 이전에도 그랬지만 너희가 추구하는 선(善)과 정의는 너무 올곧아서 비현실적일 정도이다.”
“비현실적이라고?”
아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의 본심이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너희는 위선자들이 아니야.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상의 이치를 그 나름대로 깨달은 자들이지. 그런데도 마치 효율을 버리고 언제나 큰 길로만 나아가는 그 동기를 모르겠다.”
“왜? 그걸 알면 뭐 어쩌게? 헛소리 집어쳐.”
천우진이 으르렁거렸다.
“말해두지만 우린 널 아직 동료로 받아들인 게 아니다. 네놈이 마왕으로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으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후. 자업자득인가.”
아수라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서문혜가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당신은 창힐이 이 세상을 구원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팔부신중에 합류한 건가요?”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백웅이 모든 걸 구해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끝까지 그를 믿고….”
촤앗!
갑자기 서문혜와 아수라 사이에 벽이 생겨나서 소리를 단절시켰다. 술법을 쓴 천우진이 이번에는 진짜 살의를 뿜어내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저 놈을 어떻게 믿어?!”
“…….”
“빌어먹을! 하나같이 다 짜증나게….”
옆에서 지켜보던 한백령은 천우진이 괜히 신경질을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수라에게 백웅에 대한 걸 털어놓기에는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서문혜는 아수라를 믿고싶은 마음에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간 것이었고, 이건 동료들 간의 의견차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때였다.
“내가 백련교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면 날 믿어줄 수 있겠나?”
뜬금없는 아수라의 말.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왜냐하면 아수라가 백련교주를 구하려고 제안했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천우진이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놈…. 무슨 생각이냐? 정말로.”
“너희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유대감을 얻을 기회를 다오. 독고성에게 진 빚을 갚고 싶은 마음이다.”
“믿을 수 없어.”
그 말에 아수라는 스윽하고 장막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왠지 내가 저 막을 벨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보통 수단으론 안 되고, 내 목숨을 걸어야 하지. 다만 이왕 목숨을 건다면 너희에게 인정받고 싶다.”
“하! 우리한테 인정받아서 뭐하게? 그러면 무신에게 좀 가까워지나?”
아수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뭐?”
저벅
“그럼 간다.”
아수라는 등을 돌려 장막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정신을 집중하더니,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희뿌연 영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수라는 검을 들었다.
고오오오….
묘진(妙盡)의 검예(劍藝). 아수라가 뻗어낸 일 초식은 그 한 마디의 묘사로 설명이 가능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해보이는 일획이었으나 그 한 줄기에 아수라가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역량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달인을 넘어선 그 위용과 기세는 천지아래 최고의 무(武)를 자부해도 될 듯 했다.
안 돼.
그러나 아수라는 그 일 초식을 쓴 순간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무(無)의 장막은 고작해야 그 정도로는 얘깃거리도 안된다는 듯 단단히 빗장을 걸고 있었다. 이 초식을 써 봐야 지금까지처럼 무반응일 게 틀림없다.
왜일까?
어째서 이 장막은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리는 것일까?
그리고 아수라는 자신의 직감을 구체화시킬 수가 있었다. 적멸무극을 써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이 장막의 정체는, 바로 혼돈을 넘어선 무언가라는 사실을.
‘내 검은 혼돈의 존재를 벨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절대지경의 의념. 그러나 그걸로도 아예 반응이 없다는 건, 이 장막이야말로 혼돈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라는 뜻….’
이 우주에서 가장 근원적이며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혼돈!
그 혼돈을 넘어선 속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있다…. 딱 하나… 있어.’
원래 혼돈의 마왕이었던 아수라라면 전혀 그런 발상따윈 하지 못했을 테지만, 그는 백여년 이상 혼돈을 스스로 제약하고 인간으로 지내온데다가 방금 전 천우진과 서문혜의 분석을 들었기에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리고 아수라의 예측대로라면, 눈 앞의 막을 벨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아마 한백령도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대업을 해내기에 그녀의 경지는 아직 낮아보였다. 사실 아수라조차 수천년 동안 천축무림의 지존이었음에도 자신이 생각해낸 방법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기자신을 우선 비웠다. 무예의 관념에서 ‘비운다’는 건 스스로 의식하는 게 아니었고 공(空)에 가까운 자연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이 정도는 초절정에 오른 자들이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아수라는 계속해서 자아를 비워나가다가 문득 식(識)의 경계에 도달했고, 자기자신의 형상을 정수리 위에서 관조하는 기분을 느꼈다.
이 지점이 바로 절대지경에서 느끼는 찰나의 관념. 이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 속도는 큰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절대적인 극속이 아닌 한 관념은 대개의 경우 물리적인 빠르기보다 훨씬 앞서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의 경지가 한층 깊어지면서 아수라는 자신의 근원적인 ‘인간’의 부분에서 무언가를 호소하는 걸 느꼈다.
울림.
마왕으로 살아왔던 기간이 9할 이상이었기에 인간으로 살았던 시절이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수라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인간의 마음을 새삼 알 수 있었고, 태허(太虛)에 가까워지면서 울림이 강해졌다. 그 울림은 결코 강하지 않았으며 마치 잔잔하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처럼 느껴졌다. 아수라는 지난 세월 동안 이 울림이 무슨 의미인지 계속 궁금해 했다.
아수라는 두 번째 초식을 펼쳤다. 방금 전과 달리 달인의 위풍이 없었으며 법칙조차 없는 조잡한 일검 - 맨정신일 때는 극한의 달인인 아수라가 실수로라도 펼치지 않을 때의 검초였다. 적멸무극은 물론이고 그가 터득한 수천 개의 무예 중에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수라는 만족했다. 왜냐하면 전에 없던 망아의 정경에 접어들었다는 증거였으며, 내부에서 ‘울림’이 더욱 강하게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근
‘끈….’
아수라는 다음 순간,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조그마한 끈이 느껴졌다. 그의 평생에 이런 끈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 끈은 이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저 한번 꼬여있는 듯 했다.
끈보다 조금 더 큰 것들이 존재했으며 그것들은 빛의 구체처럼 생겼고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끈으로 가득찬 세계 속에서 자기자신도 극미(極微)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윽고 아수라의 의식세계 속에서 끈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동(振動)!
끈의 진동과 동시에 방금 전의 고동이 아수라의 전신을 크게 일렁이게 만들었다.
두근!
두근!
마치 심장박동처럼 조그마하던 고동이 해일의 파동보다 더욱 거대한 장력을 펼쳐내며 그의 몸을 쥐락펴락했다. 모든 것이 실체를 잃고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아수라는 자신이 가느다란 실처럼 변해서 찢어지는 듯한 환영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동안, 시계(視界)의 저편에서 누군가 삿갓을 쓴 존재가 비쳐보였다. 그러나 환영이었는지 잠시 후 사라졌다.
‘지금이다!’
그리고 아수라는 끈의 힘이 검극(劍戟)에 모이는 한 순간, 모든 적멸무극의 무예를 모아서 일점(一點)에 펼쳐내었다!
귀일무극참(歸一無極斬)
촤아악
“아니…!!”
“베었어!”
물길을 베는 듯한 손끝의 감각과 함께, 아수라는 마지막 삼 초식으로 무의 장막을 돌파했다. 극한의 집중을 통해서 절대지경을 넘어선 ‘어떤 경지’에 살짝 발을 디딘 것이었다. 그것은 아수라가 지난 백수십년 동안 내내 궁구하던 수련의 결과이기도 했다.
뒤에서 보던 자들이 깜짝 놀랐지만 그 놀람의 외침도 잠시, 아수라는 천지사방이 고요함으로 가라앉았음을 알아챘다.
정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어둠은 아니야. 회색의 세계인가.’
혼돈은 흔히 검은빛을 띌 때가 많았기에 암흑의 세계를 생각했으나 의외로 무의 장막 내부는 옅은 회색빛의 세계였다. 안개보다 희뿌연 무언가가 감돌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사악함이나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수라는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발을 내딛자마자 조그마한 길이 안개 너머로 뻗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동요하지 않고 서서히 앞으로 걸어갔고, 잠시 후 이 안개에서 무언가를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편안하다….”
마치 어머니의 품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왕시절에 숨 쉬듯이 겪었던 혼돈 또한 자연스럽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지만 그것과는 뭔가가 달랐다. 이 세계의 근원요소인 혼돈과는 달리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포용의 힘이 느껴졌고 아수라의 심신이 점차 아득한 안정감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저벅…
우뚝.
아수라는 이윽고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멈춰섰다. 그리고 자신의 눈 앞에 서 있는 존재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백련교주 독고운천.”
[…….]
“무사한가?”
상대는 대답이 없었으나 분명히 백련교주 독고운천 본인이었다. 혼돈화된 육체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고, 이 혼연 속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그가 원래 쓰고 있던 무면탈이 진작에 깨져서 마치 이족과 인간이 혼합된 듯한 기이한 얼굴이 드러나 있다는 점이었다.
스스스
“얼굴이…!!”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족과 동화된 독고운천의 얼굴이 이족의 성질을 완전히 버리고 인간이었던 시절로 되돌아온 것이다! 독고운천의 인간 모습은 다소 창백한 안색의 준수한 사내였고, 유약해보이는 얼굴과 달리 눈에는 강한 안광과 의지력이 서려있었다. 저것이 바로 독고운천이 원영신과 계약을 맺기 전 그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백련교주 독고운천은 정신을 차렸는지 아수라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이곳을 뚫고 올 자가 있다면 오로지 너뿐이라고 생각했다. 해냈구나.”
“독고운천. 무슨 일이지? 사도는 어떻게 되었나.”
백련교주는 말없이 약간 떨어진 장소로 손가락을 향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안개가 잠시 사라졌고 거기에는 사도 할치올레이푸라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시체를 본 아수라가 말했다.
“네가 혼자서 해치운 건가…. 어떻게 된 거냐.”
“해치운 게 아니다. 사도 할치올레이푸라는 내 원영신을 폭주시켜 혼돈의 옥좌를 열어놓고 내 자멸을 바랬지만, 정작 본인이 혼돈의 옥좌에 존재하는 성질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가 죽었지. 하긴 혼돈의 옥좌가 어떤 장소인지는 오로지 달마밖에 몰랐으니 혼돈의 존재라면 누구든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뭐? 이게 원영신이 폭주한 공간이란 말인가?”
“후… 후후. 정말 모순이군…. 설마 내 최후를 지켜볼 이가 너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건만.”
백련교주는 허탈하게 웃더니 문득 고개를 돌려서 어떤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수라. 너는 왜 혼돈을 스스로 봉인했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수라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과거에 독고성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 썼던 절기는 한순간 내 적멸무극을 넘어섰었다. 그의 수련시간은 나보다 훨씬 짧았고 나보다 경지가 낮았는데도…. 나는 그와 같은 상태가 되어서 필멸자의 약함 속에서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제 너는 그 힘의 실체를 알게 되었겠군.”
“…그래.”
“기분이 어떤가? 천하제일의 무인이 된 소감은.”
백련교주의 질문에 아수라는 웃을 수가 없었다. 웃기는커녕 머리가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득함을 느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마왕의 힘에 취해서 시간낭비를 너무 많이 했었다. 종말까지 너무 시간이 없는데, 이제야 무신(武神)에게로 향하는 출발선에 섰다니…. 후회스럽구나.”
“그런가.”
“백련교주.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 이 장소는 우주창조의 혼연이 뭉친 장소같다. 오래 있어서 좋을 곳이 아니니 빨리 빠져나가자.”
한참 침묵하던 백련교주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나갈 수 없다. 원영신의 폭주는 현재진행형이니까. 나는 이미 원영신의 계약에 따라, 옥좌를 지키는 수호병이 되어버렸다….”
“뭐라고?”
뜻밖의 대답에 아수라가 눈을 부릅뜨자 백련교주 독고운천이 서서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찾아와줘서 고맙다, 아수라. 좀 더 해줄 말이 많다…. 쿨럭!”
치지직
그가 입에서 기침을 토하자 갑자기 그의 전신에 혼연의 힘이 감돌았다. 그 혼연은 마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절망과 같았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려면 아직 힘이 약할 때 나를… 그대가 날 끝장내줘야 해. 부탁한다….”
후두두둑!!
독고운천의 옷이 찢어지며 그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수라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저것이 바로 원영신의 폭주가 가져온 말로(末路)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좋다.”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
아수라가 들어간지 약 한 식경이 지나 있었다. 모두들 애가 타서 어둠의 장막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초조해하고 있는 천우진에게 류진이 말했다.
“나치제국의 마물대군을 상대하고 있는 아군의 피해가 점차 커지고 있군요. 제가 지원하러 가겠습니다.”
“큭… 빨리 가! 더는 어쩔 수 없겠군.”
“그럼.”
파밧
류진이 공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서 다같이 마물대군과의 전쟁에 참전해야 대웅제국군의 희생이 덜했겠지만, 정체불명의 장막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지금까지 대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군이 전멸해버리면 그것또한 큰 손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초상기인 류진을 보내서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류진이 빠지더라도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과연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까.
최악의 경우 더욱 더 강화된 사도 할치올레이푸라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리라.
쿠와아앗
“……!! 열렸다!”
“독고운천은 어디….”
그러나 잠시 후, 장막이 열리면서 나타난 광경은 모두의 사고를 정지시켰다.
스각
백련교주의 목을 막 날리고 있는 것은 바로 팔부신중 아수라의 광검(狂劍).
흔들림 없이 빠르고 정확한 일검이 마치 종잇장처럼 피륙을 절단한다.
투두둑….
백련교주의 목이 땅에 떨어져서 굴렀고, 그 목이 천우진의 발치에 데굴데굴 굴러왔다.
천우진은 멍하니 그 목을 내려다보다가 아수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수라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백련교주는 내가 죽였다.”
“…네놈….”
“이제야 창힐 님을 위해 큰 공적을 세웠구나. 하하하….”
“아수라!!!”
콰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아수라를 공격했다. 그리고 아수라는 그 합공을 빠르게 피하고 걷어내더니 외쳤다.
“나중에 내게 복수하러 와라. 꼭 백웅을 데리고 오는 게 좋을 것이다!!”
파밧
아수라는 그대로 도주해 버리고 말았다.
“저 개자식…!!”
그리고 천우진이 화가 나서 그를 추적하려 하자, 급히 한백령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천우진이 한백령을 돌아보자, 한백령이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저 놈을 쫓을 시간에 대웅제국군이 일만 명은 죽는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라.”
“…제기랄!!”
“목은 내가 수습하지.”
“…….”
한백령은 천천히 품속에 있던 보를 꺼내서 백련교주의 목을 감았다. 그녀는 잠시 후 목을 들어올리며 생각했다.
‘터무니없는 짐을 떠안기고 갔군, 교주.’
이제 그녀는 종말까지 계속 수련하며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인지 슬픔보다는 그에 대해서 복잡한 감정이 더욱 맴돌았다. 그녀는 이윽고 감상을 접고는 말했다.
“나치와의 전쟁을 끝내러 가자.”
그 날, 나치제국은 멸망하고 그들의 야욕은 분쇄되었다.
역사에 기록된 이 전쟁의 발단과 결말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이 날 뮌헨의 결전 이후에도 나치의 잔당들이 남아서 미합중국이 참전하며 마물분쇄에 협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 그리고 끝난 후에도 아수라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군요.”
약 100여일 후, 수면상태에서 깨어난 사공린은 천우진의 보고를 듣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사공린은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그 동안 마왕의 저주가 더욱 강해졌군요.”
“그래. 망할 제갈사놈이 그 때 내 제약을 풀어준답시고 해놨던 게 결국 더 낙인을 강하게 만들어서….”
“…이젠 제 힘으로도 낙인을 억제하는 건 힘들겠어요. 마력을 먹어치워봤자 계속 중복봉인이 걸리는 식이라, 더 손을 대는 게 도리어 위험하겠어요.”
“그 말은… 이제 쉬어도 된다는 거지?”
천우진의 간절한 말을 무시하고 사공린이 말을 이었다.
“천우진. 이제 당신의 힘은 완전히 봉인된 겁니다. 다만 과학의 힘으로 당신의 연명치료와 불로불사를 도울 수 있도록 해 보죠.”
“…….”
“앞으로는 선진과학기술을 익혀서 과학기술발전을 도우세요. 제갈부가 하던 일을 이어받는 겁니다. 당신의 원래 두뇌도 천재이니 충분히 가능해요.”
뜻밖의 말에 천우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항의하듯 말했다.
“제길…. 전쟁까지 참전했는데 휴가는 안 주는 건가…!!”
“무슨 말이에요? 휴가기간 동안에 공부를 하시면 될 겁니다. 제국의 힘으로 공부환경을 만들어 드리지요.”
“…으어어….”
씨알도 안 먹힘을 느낀 천우진이 털썩 주저앉아서 신음성을 흘릴 때 사공린이 말했다.
“너무 피해가 크군요….”
상처뿐인 승리.
대웅제국이 과연 종말까지 버틸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사공린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미합중국의 비밀사신이 그녀의 처소로 찾아왔다.
[만마를 발 아래 두는 천상의 마, 대웅제국의 황제를 뵈오.]
뜻밖에 그녀 앞에 나타나서 무릎을 꿇은 존재를 보자, 사공린이 대꾸했다.
“[검은 태양]. 당신이 내게 무슨 일로 찾아온 거죠?”
[…….]
상대방은 바로 아즈텍 제국의 대제사장이자 [옛 지배자]의 사도인 [검은 태양]이라는 존재였다. [검은 태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천마여. 나는 [옛 대륙]의 위치를 알고 있소…. 우리와 손을 잡고 그 곳을 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