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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타난 것은 팔부신중 아수라였다. 아수라는 한동안 고요히 검을 든 채 독고운천을 바라보다가 문득 말했다.
“도망치는 중인가?”
[비켜라.]
“사도와 맞서 싸우진 않는가.”
마치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온 듯한 느낌이었다. 독고운천은 조롱당하는 느낌마저 들었기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우릴 방해하러 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쿠우우우!!
독고운천의 포효와 함께 그의 전신이 혼돈으로 이글거렸다. 원영신으로 혼돈화를 단시간에 이끌어낸 그는 순간적으로 달려들어서 아수라의 전면에 일 장을 날렸다. 가벼운 선공이었으나 천하에서 천마 사공린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와 정면승부를 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아수라는 그 일격에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투웅!
“큭…!!”
팔부신중 아수라는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십여 장 뒤로 날려갔다. 의념절기와 호신강기를 써서 막긴 했으나 원영신의 공격력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독고운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무리 아수라라지만 지금의 나를 상대로 인간형태로 버티겠다고? 노옴….’
현재의 독고운천은 팔부신중 본체와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며 그가 다룰 수 있는 태허의 양도 늘어났기에 도리어 요괴전쟁 당시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그런 독고운천의 원영신을 상대로 아수라가 인간변신 상태로 싸우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 때 선두에 있던 독고운천의 뒤로 동료들이 막 따라왔다. 그들은 뜬금없이 나타난 아수라를 보자 놀랐다.
“아수라!”
“저 놈이 왜….”
“……!!”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이윽고 동료들은 시간이 없다는 걸 깨닫고 합공을 해서라도 아수라를 물리치고 지나가야 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아수라가 왜 그들을 막아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야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등 뒤에 사도가 쫓아오는 상황에서 망설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전의(戰意)가 충천해서 아수라와의 전투가 시작되려고 하는 그 때였다.
“나는 너희를 도우러 왔다.”
아수라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그 말에 모두가 믿기지가 않아서 경악했다.
“뭐…?!”
기묘한 침묵. 대웅제국의 숙적 팔부신중이자 과거 요괴대전에서 격렬한 전투 후 실종되었던 아수라가 느닷없이 나타나서 돕겠다고 하는 걸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당연히 모두가 불신 가득한 기색이었고,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제갈부가 아수라에게 말했다.
“어떻게 돕겠다는 거요? 우리와 함께 싸우겠단 거요?”
아수라는 교주에게 일 장을 맞아서 약간의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왜?”
“그 싸움 이후, 내 자신에게 정말로 무신의 좌에 갈 자격이 없는지를 백수십년간 되묻고 되물어 왔다.”
그렇게 중얼거린 아수라가 검의 끝을 바닥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제 나는 목숨을 걸고 강적과 싸우면서 그 자격을 확인해보고 싶다. 너희를 도울 수 있다면 돕겠다.”
“웃기지 마시오.”
“뭐라고?”
제갈부가 이를 으득 악물더니 말했다.
“우린 당신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휘둘려오기만 했소. 천방지축에 안하무인, 그게 바로 당신의 본질이오. 그러므로 당신이 무의 극한을 추구하고 말고는 이제 우리가 알 바 아니란 소리요. 또한 당신때문에 죽은 동료의 원한도 있을진대 뻔뻔하게 우리와 힘을 합치겠다고?”
“…….”
“당신이 정녕 염치란 게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서시오! 그리고 꺼지시오!”
제갈부의 호통에 아수라는 주춤거렸다. 그는 잠시동안 번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풀썩!
“앗…!!”
성진이 놀라서 외쳤다. 놀란 건 성진뿐만이 아니라 독고운천과 한백령, 천우진 등 모두가 깜짝 놀란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수라가 그대로 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방금 전까지 서슬퍼렇게 아수라를 몰아붙이던 제갈부마저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천하에서 [옛 지배자] 다음 가는 강대함을 자랑하며 수천 년간 역사의 흑막으로 군림해왔던 강력한 마왕, 팔부신중. 그 팔부신중 중에서도 자존광대하고 오만하며 어마어마한 무력을 지닌 아수라가 인간들에게 무릎을 꿇을 줄이야?
아수라는 잠시 후 이마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독고성이 죽은 건 나 때문이니 사과하겠다.”
“…….”
“나는 그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러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내 무인의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다.”
“그, 그렇다 해도.”
제갈부가 혼란스러워서 말을 더듬자, 옆에 서 있던 독고운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갈부. 지금은 저 자를 받아들여주자.]
“무슨 말이오?! 그게 말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시오.”
[저 자가 무인의 명예를 입에 올렸다면 그건 거짓이 아니다. 같은 무인으로서 알 수 있다.]
“…으음.”
[천마 사공린이 없는 동안 대웅제국을 이끄는 건 그대이다. 또한 이번 탈환대의 수장도 제갈부 그대이니 그대의 결정에 따르지.]
제갈부는 크게 고민했다.
과연 뜬금없이 나타나서 아군으로 싸우겠다는 아수라를 받아들여도 될까? 사실 그가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아수라를 무시한다고 해도 아군중에 그를 책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과거 숙적이었던 아수라를 받아들이는 게 비현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인의 명예를 운운한다고 해도 마왕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지금도 성진과 천우진의 눈에는 강한 적의가 엿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 아수라를 공격하자고 해도 서슴없이 받아들이리라.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
양자택일의 상황에 고민하던 제갈부는 이윽고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다! 배신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그래.”
제갈부의 결정에 성진이 놀라서 그에게 외쳤다.
“미… 미쳤나?! 저 자를 어떻게….”
“미쳤소! 그러니까 닥치고 내 말에 따르시오! 지금 더 망설일 시간 없으니까.”
“으음.”
단호한 제갈부의 말에 성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심 생각했다.
‘저 자는 현장지휘관에 어울리는군….’
큰 계책과 틀을 짜는 망량이나 제갈유룡과는 달리 제갈부는 결단력과 냉철함을 무기로 전장에서 빠른 운영을 하는데 특화된 책사로 보였다. 무력으로 치면 아군 중에 그리 대단한 편이 아님에도 그가 지휘하는데 다들 반발이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수라. 우선 지상으로 가야하니 우리를 따라와라. 이 마궁 내에서 싸우는 건 적에게 한없이 유리하니 올라가는 게 좋다.”
“알았다.”
파밧
모두가 님펜부르크 마궁에서 빠져나왔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마궁을 빠져나오던 서문혜가 흠칫하더니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모두 도망쳐!”
쿠오오오오 -
할치올레이푸라의 석화광선!
그녀의 경고가 끝나는 순간 천지의 온누리가 회색빛의 섬광에 뒤덮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인지라 제대로 피하거나 막을 새가 없었다. 그리고 서문혜가 신력을 집중해서 정면에서 석화광선을 막아냈으나 이윽고 그녀의 양팔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쩌저적
“으윽…!!”
너무 석화광선의 위력이 강해서 서문혜의 힘으로도 막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서문혜는 이 순간 상대방의 힘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힘을 끌어모아서 시공간의 흐름을 왜곡했고, 석화광선이 허공에서 잠시 주춤거리게끔 만들었다. 성진이 그녀를 도우려고 술법을 시전했다.
자하귀령진(紫霞鬼靈陣)!
성진의 술수로 천지간의 귀기가 무려 오백 장이나 되는 부적에 모여서 나풀거렸다. 서문혜 주위를 뒤덮은 부적들이 결계를 만들자 성진이 수인을 맺으며 말했다.
“내 모든 술법력을 쏟았소! 낙혼별부에 못지않은 아공간 술법이오! 천지의 귀령을 불러모아 당신이 버틸 수 있게 도와주…….”
성진의 술수는 대라신선급이었기에 자하귀령진을 쓰면 서문혜를 크게 보조해줄 수 있었으며 공방력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성진의 말을 끊고 서문혜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새어나오듯 절규했다.
“피, 피해요. 그런 걸로는 감당 안돼요. 차원이 달라…!!”
“응? 무슨….”
후우웅
그것이 바로 성진의 유언이었다. 순식간에 자하귀령진이 부서져 버렸고 술자인 성진은 회색 섬광에 노출되자마자 즉시 석상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사도의 저주였기에 그는 종말때까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석상으로 지내게 되리라.
“안돼!!”
좀 더 뒤편에서 낙혼별부의 술수를 짜면서 후퇴하던 제갈부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사도의 위력에 전율했다.
‘천년이상 살아온 대술법사인 성진의 결계는 내 낙혼별부보다 강하다. 그걸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면….’
제갈부는 순간적으로 전신에서 오한이 일어났다. 자신이 아무리 목숨을 걸어도 최강급 사도의 앞에서는 벌레나 다름없다는 걸 즉시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헤어나올 수 없는 공포심이 그의 마음속을 지배했고, 그는 안색이 새파래져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윽… 으으으.’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다.
이성으로 도저히 몸을 통제하지 못하겠다.
진정한 우주적인 공포를 깨달았기에 제갈부의 정신이 이윽고 광기로 오염되기 시작했다.
“간다!”
그러나 그런 제갈부의 모습을 맞서싸우겠다는 응전의 의지로 받아들인 것일까?
“하아아앗!!”
뜬금없이 그의 옆에 있던 아수라가 검 한 자루를 든 채 도리어 광선을 향해 돌진했다. 모두가 서문혜가 시간을 벌어주는 틈에 피하려고 하는 절망적인 순간에 되려 뛰어드는 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수라는 천지를 가득 채운 회색 섬광을 향해 크게 검을 상하로 그었다.
적멸무극(寂滅無極)
귀일(歸一)
암야참(暗夜斬)
구우우우…!!
아수라의 일 참이 쏟아진 순간 석화광선으로 가득찬 공간의 단면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어둠으로 만들어진 실선이 종횡무진 뿌려졌고, 이윽고 육륜(六輪)으로 변해서 석화광선을 헤집어버렸다.
츠카카칵
석화광선이 갑자기 분해되어서 사방으로 마구잡이로 날아가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행 모두가 휩쓸릴 뻔한 위기에서 탈출할 수가 있었다.
[…….]
아수라의 절기를 옆에서 목격한 독고운천이 육합전성을 써서 한백령에게 말을 걸었다.
[한백령. 저 자의 절기가 변화하는 양상을 보았는가?]
[봤소, 교주. 바퀴가 거꾸로 돌았소.]
[나와 같은 것을 보았군. 지금의 일참을 반드시 기억하라.]
[알았소.]
절대지경의 무인인 그들 둘은 아수라의 귀일암야참이 어떤 오의를 담고 있는지를 즉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오의의 가치를 알아보았기에 지금의 아수라가 과거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회색빛의 섬광이 모두 사라졌다. 할치올레이푸라의 습격을 한 번 퇴치한 것이었다. 넋을 놓고 있던 제갈부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천우진! 환술을 써서 성진의 석화를 없던 걸로 할 수 있나?”
천우진이 성진의 석상으로 다가가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저주는 없던 걸로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 해도 내 힘을 모두 써야 하는데, 그럼 할치올레이푸라와 상대할 때 승산이 없어진다.”
“…알았다. 포기하지.”
제갈부는 성진의 소생을 단념했다. 그리고 할치올레이푸라의 석화광선에 한 번 당하면 즉사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시시각각 동료들이 갈려나가는 걸 느끼자 압박감이 증대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부는 끝까지 정신줄을 잡으려고 노력하며 지시를 내렸다.
“대신에 서문혜의 석화를 회복시켜라. 그녀가 가장 중요하다.”
“알았다.”
“도주하려 했지만 그럴 순 없겠군…. 이 자리에서 맞서싸울 수밖에.”
제갈부가 고대보패를 꺼내서 언령을 외쳤다.
“금강법패, 곤륜대역사(崑崙大力士) 소환! 진(陣)을 만들어라.”
쿠구궁!
언령이 터지자마자 사방에 네 명의 거대한 거인이 나타났다. 그것도 보통 크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수백 장 높이의 산만한 크기였다. 선복(仙服)을 입은 거인들은 제각기 검, 창, 언월도, 활을 들고 있었는데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동서남북 사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꿇어앉으며 신령스러운 술법을 시전했다.
피이잉 -
선복거인 네 명의 몸을 중심으로 정육면체 모양의 결계가 만들어졌다. 주황빛의 결계 내부는 모든 마력이 차단되고 아군의 힘을 강하게 해주는 곤륜산의 영험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곤륜대역사들이 시전하는 이 진은 굉장한 방어력과 보조능력이 있었기에 제갈부는 이 안에서 싸우면 승산이 높아지리라고 예상했다.
‘정작 훔쳐간 팽조는 마도에 몸을 담는 바람에 마력의 반발력으로 이 금강법패를 쓸 수 없었지만…. 매우 유용해.’
제갈부가 말했다.
“곧 할치올레이푸라가 나타나면 맞서싸운다. 여의치 않으면 내가 모두를 퇴각시키겠다.”
[…놈의 치환능력에 대응할 방법이 마땅찮건만. 어떻게 할 수 없겠나?]
“어쩔 수 없다. 신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놈이니…. 다만 놈 또한 핵(核)이 있는 존재이니 핵을 부술 수 있으면 우리가 이긴다.”
[핵을 치환시킨다면….]
“그건…. 작전을 세울 수 없는 문제다. 그저 최선을 다해 다오.”
[후후. 백웅의 전생에 따라간다는 건 이런 느낌인 건가….]
문득 독고운천이 즐겁다는 듯 말했다.
[절망 그 자체지만,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보고있다는 것만으로 끝까지 도전하고 싶어지는군.]
“벌써 감상을 말할 때는 아니다, 독고운천.”
퉁명스럽게 대꾸한 제갈부가 아수라에게 말했다.
“방금 전에는 잘 했다. 이제 인간이 아니라 마왕형태로 변신해서 놈과 싸워 다오.”
“아니, 못 해.”
“그래. 마왕의 형태가 되면 마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지니 치환능력을 버티기 쉽지. 네가 아군이라고 전제를 깔고 책략을 세웠기에 이 자리에서 맞서싸우는 선택을……. 뭐? 뭐라고? 이 새끼야 다시 말해봐.”
제갈부가 순간적으로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나 당황한 그가 멍하니 아수라를 쳐다보자, 한 자루 검만 들고 있던 아수라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요괴대전 이후 나 자신의 무(武)를 상승시키기 위해 스스로 마력과 변신능력을 봉인시키고 인간의 모습으로 백수십년간 살아 왔다. 그 제약은 절대 풀 수 없게 되어있으니, 나는 계속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가.”
“이… 이런….”
제갈부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의 구상에는 서문혜와 아수라가 전방에서 할치올레이푸라를 상대로 버텨내고, 독고운천과 한백령이 유효타를 넣는 전략이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아수라가 마왕의 힘을 쓰지 못한다면 방어력이 처참할 정도로 낮아져 버리기에 도저히 작전이 성립하지 않았다. 도리어 아수라를 보호해주기 위해서 힘을 써야 했으므로 승산이 더 낮아졌다.
어째서일까?
늘 바보취급했던 백웅의 얼빠진 모습에 공감가는 걸 느낀 제갈부였다. 전생도중에 쉴 새 없이 예측 밖의 사태가 터져 나오는 바에야 재능이 천재든 둔재든 무의미한 것이다. 누군들 이따위 상황에 처하면 당황하지 않겠는가!
독고운천이 나직이 말했다.
[온다!]
츄와아악
허공에서 공간이 열리며 거대한 나무줄기만한 촉수가 대여섯 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촉수와 함께 저 너머에서 서서히 전신이 말라붙은 듯한 눈없는 인간형의 무언가가 기어서 촉수를 타고 나오기 시작했다. 언뜻 평범한 성인남성의 모습처럼 보였으나 그 존재의 양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창백한 불빛이 마치 살아있는 나무줄기처럼 그의 팔뚝을 올라타고 있었다.
잠시 후 기어다니던 눈없는 괴인이 서서히 촉수를 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영언을 써서 일행에게 말했다.
[나는 사도 할치올레이푸라. 위대한 존재의 명으로 너희를 벌하리라.]
지극히 인간미 없는 삭막한 의사전달. 상대가 인간형을 하고 있으나 인간의 정신이나 문명체계와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는 우주적 존재임을 의미했다. 제갈부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공격해!”
화아악
그 순간 대기하고 있던 독고운천, 한백령, 아수라 등이 동시에 할치올레이푸라를 공격했다. 할치올레이푸라는 그 순간 자신의 손바닥에서 빛의 나무줄기를 뿜어내어서 땅으로 박으며 언령을 외웠다.
[너희와 나는 같은 공간에 있으리라.]
우우웅
제갈부는 다음 순간 자신 주변에 있던 모든 동료들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이 백색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치, 치환능력! 설마 공간을 복사해서 붙여넣기한 후 아군을 모두 아공간으로 떨궈버렸… 말이 되는 건가?!’
아무리 사도라지만 신도 아닌데 이 정도 능력을 시전할 수 있을 줄이야! 게다가 지금 이 공간은 고대보패로 수호받는 공간이라서 마(魔)의 속성을 지닌 능력은 모조리 반감되게끔 되어있는데도 이런 위력이란 뜻이었다. 마궁 안에서 싸웠다면 최소한 이것보다 두 배는 강했으리라.
실로 대라신선조차도 엄두도 못낼 가공할 초능력이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사도의 능력에 기겁한 제갈부였다. 그리고 급히 백우선을 들어서 자기자신을 방어하려는 순간, 할치올레이푸라의 손이 등 뒤에서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푸콱
“……!! 컥….”
윙윙윙
할치올레이푸라의 창백한 손 주변에 빛의 나무줄기가 마치 촉수처럼 꿈틀거린다.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사도의 손이 현실성이 없었다.
‘심장이.’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린 제갈부가 마치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입에서 선혈을 흘리자 할치올레이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벌레들을 모두 죽인 후에 잠들어있는 천마의 목을 치러 가겠다. 벌레의 목을 늘어놓고 놈을 조롱하고 싶구나.]
설마 사공린이 회복상태란 것까지 눈치채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승산따윈 없었던 게 아닌가.
쓔욱
그런 생각을 하던 제갈부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졌고, 이윽고 할치올레이푸라의 손이 가슴팍에서 빠져나갔다.
풀썩
제갈부가 쓰러지자 그의 기척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무리를 할 필요조차… 없단 건가….’
기습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싸웠어도 3초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심장이 터진 제갈부는 서서히 죽어가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비참하다.
아무리 뛰어난 책략을 짜 봤자, 절대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도대체 이런 싸움을 어떻게 이기는가? 수천 수만번을 싸워도 승리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의지를 돋우며 싸워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물며 할치올레이푸라는 우주적 존재 중에서 그리 서열높은 이가 아니라는 게 제갈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
제갈부는 이대로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일어나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부의 눈이 서서히 감겨가는 순간이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는 문득 백웅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아까 이십만 대웅제국군 앞에서 연설했던 게 생각났다. 그들이 대웅제국과 백웅을 위한 부품으로서 죽어가고 있다는 현실이 머릿속에 생각난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편하게 죽어버리면 그들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들에게 잘난 척 의미를 부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인가?
과연 죽고 나서 대웅제국의 장병들에게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크으으윽!! 윽!!”
제갈부는 몸을 꿈틀거리며 발버둥쳤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살기 어려울 거 같았지만 그래도 의식이 돌아온 김에 최선을 다해서 움직였다. 제갈부는 얼굴이 피범벅이 된 상태로 필사적으로 품속에 있던 현자의 돌을 꺼냈다.
“흐으, 흐으, 으아아아아아!!”
푸콱
그는 자신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현자의 돌을 박아넣었다. 그러자 고통과 더불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에워싸면서 한층 더 이성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저질렀군….’
그리고 자신이 연금술에 있어서 사상최악의 금기(禁忌)를 범해버렸음에도 차분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꼈다.
생명을 강제로 연장시킨 제갈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류진(劉珍). 처음으로 주는 육체가 이런 거라서 미안하구나. 다 죽어가는 몸뚱이라서.”
그러자 제갈부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괜찮습니다. 하하하.]
“초상능력은 발동할 수 있겠나?”
[상단전의 능력을 끌어내는 중입니다. 충분할테니 걱정 마십시오.]
목소리는 도리어 즐겁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디 사도랑 싸우러 가 볼까요, 창조주님! 하하하핫!]
위잉
잠시 후 제갈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팔이 움직이면서 전방을 향해 자신의 손이 초상능력을 뿜어내는 걸 알아챘다. 상단전의 재능이 없었기에 제갈부는 초상능력을 그리 잘 쓰지 못했으나 지금의 제갈부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초상능력을 강하게 각성한 대가의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촤좍
공간절단 능력을 써서 가볍게 할치올레이푸라가 만들어낸 이공간을 벗어난 제갈부는 콜록하고 기침을 토했다. 그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의지를 다잡았다.
‘이대로 죽진 않아. 설령 전생자의 부품에 지나지 않더라도…. 절대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지금이라면 사도에게 한 칼을 먹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제국 결전병기(決戰兵機) - 특화형 초상기인 제 1호 류진과 동화한 상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