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70화 (1,06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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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세계 단일정부.

그 말에 담겨진 뜻을 생각하던 사공린이 눈을 감고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시길.”

사신단의 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현 세계의 판도의 큰 축은 귀국와 본국, 그리고 유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유럽은 마도(魔道)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중이라 큰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계를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건 두 개의 축. 그러므로 두 개의 나라가 힘을 합치게 되면 영원한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않습니까? 현재 지구상에서 인간의 발이 닿은 모든 대륙…. 그 모든 장소에 지배력을 확대하려면 결국 큰 마찰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게 동맹을 맺고 단일정부의 수립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그러나 사악하다.

황제 사공린은 단숨에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진의를 파악했다.

‘결국 이 세계를 둘이서 나눠먹자는 것인가….’

전해 듣기로 미합중국은 현재 미합중국의 남쪽 대륙을 공략중이라고 했었다. 그들은 아마 남쪽 대륙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대륙까지 손을 뻗칠 생각일 테지만 대웅제국이 걸림돌이었다. 그렇다 해서 대웅제국과 정면으로 충돌해서 좋을 게 없으니 차라리 손을 잡자는 게 이 제안의 진의였다. 대신에 대웅제국이 뭘 하든 간에 미합중국은 관여하지 않거나 도리어 동맹이라는 명목으로 도와준다는 게 맹약의 대가일 것이다.

사공린이 말했다.

“귀국은 현재 노예제도의 찬반때문에 많은 갈등을 빚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문제에 관해서는 이미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합의를 보았사옵니다. 때문에 향후 미합중국의 손이 미칠 모든 국가에도 노예제가 소멸될 것이옵니다.”

“…….”

“마치 황제폐하 아래 모든 신민이 동등한 귀국, 대웅제국처럼 말입니다….”

사공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며칠 기다리시오.”

“현명한 결단을 기대하겠사옵니다.”

사신단이 물러난 후 사공린은 간부회의에서 미합중국의 제안을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제갈유룡이 말했다.

“그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는 게 좋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우리 입장에서 받아들여봤자 남는 게 없기 때문이지. 지금 우리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은 기껏해야 남만까지이지만 유럽이나 천축국을 다시 칠 힘이 없어서 평화를 유지하는 건 아니잖은가? 실익(實益)이 없으며 과한 움직임이 이면의 세계를 자극시킬 수 있어서 자제할 뿐.”

본디 대웅제국은 팔부신중의 대란 당시에 천축대륙을 쳐서 무릎 꿇게 했으나 그 지배력은 고작해야 사십여 년이었으며, 이후에는 명목상 복속시키고 자치령으로 만들었다. 팔부신중에 상처입은 국력을 다스리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그 넓은 대륙까지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현재 천축은 대웅제국의 영토라고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맹을 맺자는 진짜 의미는 대웅제국을 최대한 미합중국의 개척여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미합중국의 힘이 궤도에 오를 때까지 우리의 간섭이나 침략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겠지.”

제갈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즉, 놈들은 우리와 동맹을 맺으면서까지 미합중국 남쪽 대륙을 아무 방해 없이 개척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순순히 동맹을 받아들여주기보다는 놈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확실히 알아낼 기회라 할 수 있다.”

“…미합중국의 남쪽 내륙이라. 남미 대륙이라고 할까요?”

“편한대로 부르면 되겠지.”

“그 곳에 대해 아는 것은 야만적인 원시대륙이지만 거대제국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문명 수준은 청동기를 사용하던 수준이라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어째서 개척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갈부가 끼어들었다.

“인신공양이다.”

장내의 분위기가 일시에 굳었다. 제갈부는 진중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인신공양을 매개체로 발달한 주술문명이 그 원시제국의 실체. 놈들은 원시제국을 합병하면서 인신공양의 제단을 손에 넣고, 그들의 주술도 얻으려는 생각으로 보인다.”

“제갈부.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죠?”

“파우스트 박사와의 교류 중에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구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더군…. 미리 보고하지 않은 건 그 정보를 어느 정도 검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불확실한 정보를 걸러서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 그렇다 해도 지금은 그 정보를 일단 들어볼 필요가 있겠군요.”

제갈부에게로 시선이 쏠리자, 그는 힐끔 천우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전에 미합중국을 최초로 정탐했을 때 천우진이 미합중국 대표 3인을 만났다고 했었지.”

“왜 날 보냐?”

천우진이 심기가 불편한듯 째려보았지만 제갈부는 무시하고 말했다.

“그 당시에 마주쳤던 [검은 태양]이라고 하는 인물. 그 자의 칭호는 이름이 아니라 아즈텍 제국의 최고 제사장에게 붙여지는 칭호였다. 또한 검은 태양이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아즈텍 제국에서 섬기는 신(神)이며, 그 신의 이름을 감히 빌려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는 뜻이지.”

“신…!!”

사공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 눈치 챘겠지만, 아즈텍 제국의 수장은 [옛 지배자]와 연결된 존재이며 화신이거나 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는 미합중국의 대표로 나왔으니 미합중국의 시원(始元)은 아즈텍 제국과의 결탁이자 동맹…. 아주 수상한 상황이다.”

“미합중국 측에서 먼저 동맹관계를 깨고 아즈텍 제국을 공격한다…? 그건 좀 이상하군요.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해서 득이 될 건 없어요. 하물며 [옛 지배자]와 연결된 제국을 침범한다는 건 굉장히 위험합니다.”

사공린의 말이 옳았다. 백련교의 전성기에 함부로 황궁 세력을 치지 못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던 것이다. 일개 필멸자 제사장 세력 정도는 해치울 수 있겠지만 그들이 자멸을 각오하고 [옛 지배자]를 소환하면 감당이 되지 않기 일쑤였다.

“발상을 전환할 필요가 있지. 동맹관계는 유지되지만, 어디까지나 [검은 태양]과 [옛 지배자] 추종세력과의 동맹. 국가로서의 아즈텍 제국을 고스란히 미합중국에게 넘겨주지만 그 대가로 [검은 태양]은 또다시 뭔가를 얻어내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피해는 아즈텍 제국의 수뇌부가 아닌 일반 민중들에게 넘어가겠지.”

“…….”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일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엄청난 인신공양 혹은 참극이 예상되는군. 인신공양 쪽으로 넘어간다면 놈들이 노예제를 유지시키냐 아니냐는 큰 상관이 없기도 하고….”

제갈부의 예상은 다소 비약된 점이 있었으나 장내의 대웅제국 간부들은 그의 예측에 큰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공린은 침묵한 채 생각을 거듭했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참극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 일이 아니고, 우리는 전생자도 아닙니다. 공연히 그 일에 손대다가 대사(大事)를 그르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

“하지만 현실적으로 미합중국의 승천하는 기세를 막지 않으면 향후 큰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 그러므로 우선은 제대로 된 정밀조사가 필요합니다.”

사공린이 제갈유룡과 제갈부를 차례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들에게 모든 제국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즈텍 제국과 미합중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부탁합니다. 지금까지는 국력발전과 과학기술 발전에 중점을 두었으나 이제부터는 대외세력의 견제를 주 방침으로 하겠습니다.”

“존명.”

“존명.”

“사신단은 우선 돌려보내지요. 그럼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회의가 끝나자 사공린은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 일입니다.”

“…….”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천우진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자기 목 뒤에 있는 마왕의 각인을 보여주며 항의했다.

“또 뭐?! 뭔데?! 이거 보라고 이거! 나 마왕한테 저주받아서 술법을 다 잃어버렸어! 이제 일반인인데 억지로 회의에도 참석시켜놓고 무슨 일을 시키겠다는 거냐!!”

천우진이 발악하듯 외쳤으나 사공린이 태연히 말했다.

“제 권능을 부여하면 일시적으로 각인의 효과를 지우고 원래 힘을 되찾는 게 가능하죠. 다소 힘을 소모하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일해준다 생각하면 감당할 만합니다.”

“아니… 그냥 하지 마…. 딴 사람 시키라고….”

“아뇨. 당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공린의 눈이 번득하고 빛났다.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게 환술을 걸어서 본국으로 납치해 오세요.”

“…….”

“모든 방해요소는 제거하면 됩니다.”

“개… 개소리 마. 태연한 얼굴로 무슨 짓을 시키는 거야! 딱 봐도 평범한 인간이 아닐 거고 렙틸리언 외계인은 물론이고 온갖 놈들이 방해할 게 뻔하잖아! 그런 위험한 임무, 난 못 해!”

천우진이 고개를 휘휘 저었지만 사공린이 방긋 웃으며 그의 목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각인에 백옥같은 손끝이 닿는 순간 천우진의 봉인이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사공린은 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혹시 300년 내내 일하고 싶으신가요…?”

“……….”

“저 같으면 잠깐 일하고 말 것 같아요, 천우진.”

기나긴 침묵.

잠시 후 안색이 새파래진 천우진이 입술을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것만은.”

사공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낸다면 쉴 수 있게 해드리죠.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으으으으.”

“가세요!”

파앗

천우진의 신형이 사라졌다. 천우진에게 일을 시킨 사공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어둠 속을 향해 말을 걸었다.

“한숨 돌렸군요. 본래 당신을 보내려 했지만…. 정말로 몸이 안 좋아보이네요.”

“면목 없습니다, 폐하.”

“이리 와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서문혜였다. 머뭇거리며 다가온 서문혜를 끌어안은 사공린이 황금안을 빛냈고, 이윽고 서문혜의 몸에 강대한 마력이 흘러들어갔다. 서문혜는 움찔거리다가 이윽고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지었다. 사공린이 말했다.

“천우진과 마찬가지로 내 도움을 받는 동안에는 [목소리]의 부름을 편하게 넘길 수 있을 거예요.”

“폐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힘을 소모하는 건 폐하께서 도리어 [목소리]에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서문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사공린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사공린이 빙긋 웃었다.

“도리어 그걸 바라고 있어요.”

“네?”

“[목소리]를 만났을 때 깨달았어요. 천마란 단순히 [옛 지배자]의 화신같은 게 아니에요. 좀 더 복잡하면서도 밀접한 관계죠. 그러므로…. 그 존재와 대면했을 때, 제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에요.”

“…….”

“제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서문혜는 그 말의 뜻을 잘은 알 수 없었으나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목소리]의 힘이 너무 강대해서 버티기가 힘들었지만, 어쩌면 서문혜 또한 사공린처럼 단순한 관계가 아닌 건 아닐까?

며칠 후.

“헉… 허억…. 자… 잡아왔다!!”

천우진은 전신에 피칠갑이 된 상태로 숨을 몰아쉬며 한 명의 중년사내를 사공린 앞으로 잡아왔다. 다만 그건 천우진의 피는 아니었으며 모두 그를 막아서던 이족이나 외계인들의 피였다. 며칠 사이에 무려 수십 번이나 되는 연전을 치른 천우진은 천하에 더없이 기괴하고 독랄한 전자함정이나 초과학 무기를 마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공린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천우진에게 말했다.

“정말 잘 했어요, 천우진.”

“이제 된 거지…? 더 이상은 일 안 시키지?”

천우진이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사공린이 대꾸했다.

“좋아요. 한 10년 정도 맘껏 쉬세요.”

“…응? 10년이라니? 나는 더 일 안 할 건데. 은퇴할 것….”

“은퇴라니 농담도… 백웅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런 거 없어요.”

“…….”

“쉬는 동안 모든 편의를 봐드리죠. 지친 심신을 치유하시길….”

“자, 잠깐.”

파앗

천우진은 이윽고 강제로 자택으로 이동되었다. 그리고 천우진을 돌려보낸 사공린이 중년사내에게 말했다.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 단적으로 묻겠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뜻밖에 잡혀왔는데도 담담한 표정이었다. 사공린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사공린이 말했다.

“혹시 십이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려, 대웅제국의 황제여.”

“우리는 미합중국의 기원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인 당신이 외계인이나 이족과 대등 이상의 관계를 구축하는 건 모종의 세력이 당신을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

“우리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차분히 당신의 뒷배를 알아낼 여유가 없지요. 미안하지만 솔직히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미합중국 또한 무사할 수 없을 테고요.”

사공린의 말에 조지 워싱턴이 이윽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뭐가 웃긴가요?”

“기원을 알아내면 뭘 할 생각이오? 미합중국을 쓸어버리고 전세계를 통일할 셈이오?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군. 하하하하….”

“세계통일을 할 생각은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하하하…. 그런가…. 솔직하군.”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조지 워싱턴이 말했다.

“그럼 나도 솔직히 말해주지. 나를 도와주는 세력은 총 4개가 있소. 하나는 렙틸리언이라 불리는 파충류 외계인들이고, 또 하나는 [검은 태양]을 위시한 아즈텍 제사장들이오.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그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온 미래인. 그리고 사해문서(死海文書)와 묵시록의 주인이시오. 이렇게 말하면 되겠소?”

“…….”

“못 믿겠지? 뭐 고문을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오. 나는 솔직히 얘기해 줬으니까요.”

“믿습니다.”

사공린은 한 치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글쎄. 더 해주고 싶어도 그 분께서 내 정보누설을 허하실지 모르겠군. 나는 예전부터 내 생사를 신에게 맡겨두고 있었으니 지금부터는 그 분의 뜻에 달려있소.”

다음 순간.

조지 워싱턴의 근처에서 아무런 낌새도 없이 은빛 사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은빛 사슴은 바로 팔부신중의 대전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였고, 은빛 사슴을 감지한 순간 사공린은 그 사슴을 향해 권능을 사용했다.

영겁지무(永劫之舞)

사공린의 영겁지무가 펼쳐지자 은빛 사슴은 막으려는 듯 눈을 빛냈다.

[CCLF 2식 마력왜곡포자장 방출.]

파칭!!

은빛의 막이 사슴과 조지 워싱턴을 둘러쌌다. 그러나 사공린의 손에 어느 새 잡혀있던 황룡의 검이 순식간에 찰나를 가르고 은빛 사슴의 목을 베었다.

퍼엉

은빛 사슴은 허망하게 터져나가며 그 모습이 소멸되었다. 사공린은 자신이 은빛 사슴을 해치웠다 생각했으나 이윽고 삼 장 밖에서 멀쩡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은빛 사슴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불특정 양자중첩상태 확인. 카오스 헤리티지(chaos heritage) 울티마 레벨(ultima level). 목표물과 함께 도주 시도 시퀀스.]

은빛 사슴이 재차 달려들면서 조지 워싱턴의 몸 주변에 새하얀 빛입자가 떠올랐다. 은빛 사슴이 자신과 동귀어진하면서 조지 워싱턴을 도주시키려는 걸 알아챈 사공린의 황금안이 번득였다.

천마멸광진(天魔滅光陣)

삼라만상, 천마의 빛에 멸하리라.

스스스

은빛 사슴과 함께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사공린은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다 생각해서 눈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 했으나, 그 때 조지 워싱턴의 눈이 새하얗게 변하면서 사공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덥썩

조지 워싱턴의 입에서 신언(神言)이 흘러나왔다.

[그만하라, 천상의 마여.]

슈우우….

언령이 터짐과 동시에 은빛 사슴이 사라졌고 사공린의 황금빛 힘 또한 사라졌다. 사공린은 물끄러미 조지 워싱턴을 쳐다보았는데 그 눈동자에 잠재된 어마어마한 배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당신이 바로 사해문서와 묵시록의 주인이십니까?”

상대는 사공린에게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는 듯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천상의 마(魔)…. 위대한 자의 의지를 대행하는 존재여.]

“조지 워싱턴에게 강신하면서까지 그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

잠시 후 그 존재가 말했다.

[적어도 그대가 그대인 한 말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대는 [큰 굴레]의 승천(昇天)이라는 무대에 올라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군요. 그렇다면 제가 아닌 다른 인간에겐 말해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정보조차 그대가 알아낼 수 있는 이상 알려줄 수 없다. 그대가 모든 걸 아는 순간, 인류는 더더욱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

[이런 연약한 인간의 몸에 강림해도 천상의 마인 그대를 이길 수 없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인과율을 우습게 보지 말라. 미합중국을 만든 것은 바로 그대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니까!]

그 말에 사공린이 깜짝 놀랐다.

“당신은 분명히 [옛 지배자]와 동급 이상인 존재, 고대신. 그런 당신이 주도하여 미합중국을 만드셨단 말입니까?”

[그렇다. 나를 비롯한 고대신과 영험한 자들이 하늘이 되어 미합중국을 지원할 것이다. 더 이상 이 세계의 주도권이 그대들 대웅제국에게 넘어가는 걸 방치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어째서입니까? 우리는 마도를 적대하며 인신공양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거늘.”

[…천상의 마여. 그대 같은 존재가 그런 이상과 이념을 가진 건 정녕 놀라운 일이구나. 본디 그대는 마땅히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할 존재, 아니 원래 그래야 할 것이다. 홀로 천지의 마를 발 아래 둘 수 있는 존재. 헌데….]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던 그 존재가 말을 이었다.

[우리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대들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존재. 조지 워싱턴을 해친다면 우린 더욱 강경대응에 나설 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아틀란티스에서 온 자들 또한 당신의 부하인지요?”

[그들은 가장 이질적인 존재들. 필멸자와 불멸자의 경계에 있노라. 나의 권속은 아니다.]

“…….”

사공린은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종말의 때에 인류를 구원할 방법이 있으신지요?”

[지금으로서는 없다.]

“그럼 미합중국의 설립은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비록 대승적 판이 ‘그 자’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언제나 반역의 의지는 존재하는 법이지…. 적어도 나는 그 자의 뜻대로 되어가는 건 볼 수 없다. 마지막에 그가 만들어놓은 판을 뒤집고 말리라.]

그 신적 존재가 눈을 빛냈다.

[허나 그대들이 인도(人道)를 지키는 한, 나와 내 권속도 그대들을 적대하진 않으리라! 이것이 천상의 마인 그대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다.]

“좋습니다. 그 중재를 받아들이지요. 제 이름을 걸고.”

[가련한 자, 천마여. 부디 그 파멸의 운명에 한 줄기 빛이 함께하길….]

파앗

이윽고 조지 워싱턴의 몸에서 그 존재가 떠나갔다. 조지 워싱턴이 이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표정으로 일어나자, 사공린이 말했다.

“조지 워싱턴. 앞으로 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대웅제국은 귀국과 항구적인 동맹을 맺으려 합니다. 우리는 혈맹이 될 것이며, 어느 한 쪽이 배신하기 전까지 이 맹서는 제 이름을 걸고 지켜질 것입니다.”

“…위대한 신께서 다녀가셨나 보군. 당신은 그 결과에 납득하시오?”

“납득할 수밖에요. 저에겐 동료를 지킬 책임이 있으니.”

그렇게 대꾸한 사공린이 말을 이었다.

“허나 아틀란티스에서 온 미래인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군요.”

그 날.

대웅제국과 미합중국은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맹우이자 혈맹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렇게 수십여 년 동안 별다른 일 없이 세계는 평화롭게 발전하는 듯 했다.

“큰일났습니다, 폐하!”

전령이 화급히 황궁에 급보를 가져왔고, 재상이 그 급보를 받아서 사공린 황제에게 보고했다.

“유럽에 나치라고 칭하는 새로운 제국(帝國)이 출범했사옵니다. 출범한지는 약 석 달 정도 되었사오나 정보수집이 잘 되지 않아 보고가 느려졌사옵니다….”

“큰일인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그것이….”

재상은 말을 더듬으며 믿기지 않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순혈(純血)으로 이루어진 독립제국을 주장하면서…. 근처 국가를 침략하는 중인데… 점령지의 모든 인간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며… 학살당한 자들을 이용해서 마도병(魔道兵)을 만들어내고 있사옵니다.”

“…….”

“정찰부에서 보고하기로, 현재까지 소환된 마도병의 숫자는….”

재상이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공린이 재촉하듯 그를 쳐다보자, 이내 믿기지 않는 숫자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 만(千萬) 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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