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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사공린은 천우진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했다.
“백웅의 기억을 보았죠?”
“…….”
“백웅이 암천향에서 측천무후에게 했던 말대로예요. 간단하죠.”
사공린이 여상하게 대꾸했으나 천우진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백웅이 측천무후에게 했던 말.
[백웅이여. 그대가 보기에 여는 인간인가?]
[현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께서 스스로 인간이라 생각하면 인간일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백웅의 대답이었다. 암천향의 백성들을 이끌고 오랜 기간동안 인간의 정의에 대해 고민해 왔던 측천무후에게 내놓은 대답! 백웅답게 단순한 대답이었으나 실제로 그 대답은 인간의 영역을 광의(廣義)로 해석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또한 그 대답은 인간을 정의하는 기준이 인간성(人間性)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러나 천우진은 그 대답이 일반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대답이란 걸 알고 있었다. 천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와 백웅은 달라.”
사공린의 시선이 천우진을 정면으로 향했다.
“인간과 인간성이란 단어는 늘 선(善)만을 의미하지 않지. 혼돈과 절대악이 너무 명백하기에 상대적으로 선함으로 취급될 뿐, 인간은 태초부터 선악을 모두 품고 있는 존재. 인간성을 긍정한다는 건 거기에 품고 있는 인간만의 위선과 악한 성품 또한 긍정한다는 뜻이 되는 거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래서요?”
“백웅은 어째서인지 몰라도 인간과 이종족, 신에 대하여 근본적인 편견과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막연한 거리감은 있어도 놈은 공포 자체를 느끼지 않아. 그건 전생자 백웅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고, 제대로 된 기준으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이라고…? 백웅 말마따나 막연한 인간성의 긍정만으로 해결될만한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하는 한 그 기준은 절대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우리 자신이 인간을 정의한다면.”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묻지. 너는 지금 인간인가? 네 본질을 인간이라 생각하나?”
“…그런가요.”
사공린이 이해했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상관없다는 관점이군요. 정말로 비인간이라면 그런 인식을 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의 부조화를 스스로 느낄테니까.”
“그래.”
사공린은 훗하고 웃었다.
“천우진, 백웅과는 다르군요. 그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에요.”
“빌어먹을. 백웅과 꼭 생각하는 게 같아야 하나? 나는 그 놈의 부하도 추종자도 아니야. 게다가 이런 개 같은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인간의 범주를 늘려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현실적인 문제인가요.”
“이 우주에서 인간이 벌레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백웅 같은 사상은 그저 오만할 뿐이야. 신조차도 때로는 벌레취급 당하는 상황에서 인간족 동포의 범위를 늘려서 대체 어쩌자는 건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천우진이 말했다.
“정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싫다면 다른 질문을 하지. 널 각성시킨 존재가 지금 네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인가?”
“…아뇨. 지금은.”
“대답이 느리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건가.”
“네.”
“어째서지?”
그 순간 사공린의 눈에서 황금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의 한쪽 손으로 눈을 가렸고, 숨을 크게 고르는 듯 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천우진은 눈썹을 꿈틀거렸고 사공린이 말했다.
“시도때도 없이 [힘]이 발현되려고 해요. 제어하기가 힘들군요.”
천우진이 유심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재차 물었다.
“제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배가 고파질 것 같아요. 그리고 이 [힘]은 그럭저럭 누를 수 있는 반면, 허기가 한번 치솟아 오르면 제 의지로는 허기를 멈출 수 없어요.”
“…그렇군. 이해했다.”
천우진은 ‘허기’가 중요한 단서라는 걸 즉시 알아챘다.
‘사공린이 지닌 힘의 속성은 만마(萬魔)를 먹어치우는 것. 당연히 먹는 행위를 초래하기 위한 동인(動因)은 배고픔일 수밖에 없겠지. 사공린이 힘의 발현을 함으로써 배고픔이 2차적으로 촉발되고, 결국 폭주하게 되는 구조인가….’
그리고 사공린 또한 눈치챘으리라.
배고픔 때문에 폭주하는 사공린이 점차 이성을 잃어갈수록 사공린을 각성시켰던 [목소리]가 그녀에게 영향력을 행세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사공린은 황금안의 발현 자체를 막으려는 것이다.
‘위험해. 하지만 아직은 안정되어 있는 상태다.’
천우진은 지금 자신이 그녀에게 해야할 말이 딱 하나뿐이란 걸 알고 있었다.
법문을 이쪽으로 달라고.
아직까지 사공린이 폭주하지 않을 때 할 일을 해놓는 게 합리적이다.
그러나 섣불리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방금 전 마왕을 산 채로 잡아먹었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폭주하여 천우진을 공격한다면? 천우진 또한 희생양이 되어 아이테눔 문디에 뼈를 묻게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대범한 천우진이라지만 방금 전의 그런 광경을 보고도 선뜻 말할 수는 없었다.
천우진이 크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후와아악!!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사공린 대신에 그 자리에 거대한 마(魔)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금빛의 갈기를 두르고 있는 ‘무언가’는 마치 아직도 갈증에 목메이는 듯 흉포한 소리를 흘렸고, 쳐다보기만 해도 악몽을 느낄 것 같은 시선을 천우진에게 보내고 있었다. 언뜻 용을 닮은 듯 했으나 자세히 보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기수(奇獸)의 모습이었다.
천상의 마(天魔).
“……!!”
그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천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환술을 시전했다.
츠앗
천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세계를 환영으로 뒤덮어서 사공린에게서 멀리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맹세컨대 천우진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순수한 ‘공포’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술수를 쓰는 건 이번이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공린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장소로 도망쳤을 때, 천우진은 덜덜 떨면서 마음이 꺾인 것을 느꼈다.
“…헉…. 허억.”
무리다.
사공린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저것은 이미 각성(覺性)해버린 상태다. 사공린의 이성이 유지되는 것과 관계없이 저 본질은 이미 생생하게 깨어서 활동하는 중인 것이다. 천우진이 방금 느낀 것은 일종의 ‘경고’였으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사공린에게 좀 더 접근할 경우 참극(慘劇)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천우진은 천재였으므로 더욱 생생하게 그 경고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여기가 천우진의 한계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사공린의 판단에만 맡기고 천우진만 아이테눔 문디를 탈출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 선택은 너무나 무책임했다. 사공린이 설혹 마왕 이상의 존재로 각성했다 하더라도 사공린 또한 이계(異界)를 탈출할 능력이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자칫했다가는 사공린과 법문만 아이테눔 문디에 남겨버려서 다른 의미로 참혹한 결말이 다가오리라.
바로 그 때였다.
파지직!!
머나먼 장소에서 시꺼먼 번개가 나타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번개가 잠시 후 인간의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고, 다음 순간 나타난 존재를 본 천우진은 깜짝 놀랐다.
“…제갈사?!”
틀림없이 제갈사다!
천우진은 그 순간 공포를 잊고 빠르게 제갈사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제갈사가 출현한 곳에 도착했을 때, 제갈사와 사공린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사공린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제갈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제갈사. 젊어졌군요.”
“크크크…. 원래도 그리 나이들지는 않았었다만?”
“갓 스물이 된 청년같군요.”
그 말 대로였다.
아이테눔 문디에 뜬금없이 출현한 제갈사의 얼굴은 평소의 나이대보다 훨씬 젊었으며 앳된 청년의 모습이었다. 제갈사는 잠시 흉소를 흘리더니 옆에 찾아온 천우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천우진. 너는 왜 돌아온 거냐? 기껏 좋은 선택을 해 놓고.”
“뭐…? 잔말 말고 지금 상황이나 설명해라.”
제갈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설명이라…. 하지만 네놈이 백웅도 아니고 그럴 필요까지는 못 느끼겠다. 너라면 대충 지켜보면서 알아들을 테니, 나는 일단 내가 해야할 일을 하지.”
투웅
제갈사가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갑자기 사공린을 둘러싸고 거대한 흑암의 원이 생성되었고, 원에서 뻗어져나온 혼돈의 사슬이 사공린의 팔다리를 즉시 묶었다.
철그렁!
사공린은 물끄러미 제갈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대부분 잘 되었다. 다만 모든 게 내 계산대로 되진 않았어.”
제갈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과거 시몬 마구스가 내게 협박을 해왔을 때 내가 선택한 방식은 바로 무한한 몸뺏기 싸움이었지. 그게 가능했던 건 시몬 마구스의 본체에 이미 이혼대법의 각인을 박아놨기 때문이었고, 서로가 서로의 몸을 이차원(異次元)에서 뺏으면서 계속 싸웠다. 이론상 이 방법대로라면 무승부가 가능하지만 시몬 마구스에 비해 실력이 부족했으니 장기전에서는 내 패배였지.”
“그 얘기까지는 들었던 것 같군요. 그런데 그것과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관이죠?”
“조금만 들어 봐. 크크.”
제갈사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공린을 둘러싼 혼돈의 사슬이 무려 열 개나 늘어났고, 사공린은 이제 움직이기도 버거워보였다.
쿠르륵…
천우진은 자신이 사공린을 구해야하나 망설였으나 그는 뭔가 다른 공기가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방금 전 사공린에게서 느꼈던 어마어마한 공포심이 상황판단을 하게 도와준 것이었다. 천우진이 일단 지켜보기로 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그러던 중 나는 법문의 존재, 그리고 그 법문을 봉인하고 있는 장소인 아이테눔 문디에 대해 알게 됐다. 그리고 져주는 척 시몬 마구스에게 이번 아이테눔 문디행을 의뢰하는 계약을 했고, 놈은 끝없는 싸움에 지쳤는지 얼씨구나 받아들이더군.”
“제갈사, 당신….”
“내 계획은 시몬 마구스가 외신의 주문을 쓰면서 [옛 지배자]의 소환자로 싸워서 아이테눔 문디를 폭왕과 함께 공략해주는 거였다. 사실 내가 볼 때 그 방법 외에는 이 지랄같은 난이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지. 공략법 자체는 나도 알고 있지만 알아도 힘이 부족해서 실천할 수 없었어. 아마 다음 생부터 백웅이 개지랄을 해도 여기를 뚫기는 쉽지 않을 거야….”
“…….”
“뭐, 운이 좋아서 여기까진 잘 풀렸어. 나는 나름대로 꽤 운이 좋은 놈이더군. 하지만 마지막 뒤처리를 하려고 와 보니, 엉뚱한 결말이 나 있었던 거지.”
제갈사가 히죽 웃으며 사공린을 쳐다보았다.
사공린은 그 시선을 담담히 받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뒤처리라는 건…. 원래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한 후 시몬 마구스가 폭왕을 배신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나는 시몬 마구스의 수제자야. 당연히 놈이 생각하는 방향이나 전략, 전술은 훤히 알고 있지. 그리고 놈이 쓸 외신의 주문에 대해서도 수십년 이상 사투를 벌이며 대충 알아뒀으니까 그렇게 흘러갈 거란 건 알았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뭐가?”
“시몬 마구스가 폭왕을 배신하고 그 모든 마력을 얻는다면 [옛 지배자]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리라는 걸 알았을 터. 그런 시몬 마구스를 어떻게 쳐서 없앤다는 거죠? 그리고 그 자와 맺은 계약내용을 보면 철저히 당신에게 불리한 계약이었는데 무슨 수로 살아남아서 이 자리에 나타난 건가요.”
사공린의 의문은 지당했다. 제갈사는 무슨 수로 불리한 상황을 역전한 것인가?
사공린은 물론이고 천우진조차 제갈사가 전생자 백웅을 위해서 희생해 버렸다고 생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공린을 묶어놓을 정도로 강대한 마력을 사역하며 느닷없이 등장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제갈사가 웃었다.
“이봐. 방금 전에 네가 먹어치운 시몬 마구스의 몸뚱이, 뭔가 이상하지 않던가? 인간 치고는 너무 맛있지 않았어?”
“…….”
“나는 무한한 이혼대법의 싸움을 하면서 중간에 [초상기인]을 끼워넣었지. 그래서 나와 시몬 마구스는 서로 몸뺏기 싸움을 하되, 완충지대가 존재했어. 즉 일대일로 계속 몸을 교환하는 게 아니라 영혼은 2개이지만 갈아탈 몸은 3개였던 상황이었단 거야. 물론 시몬 마구스는 내게 또 하나의 몸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설마.”
“그래. 시몬 마구스가 계속 [제갈사]인 줄 알고 죽어라 바꿔치기 했던 몸은 이미 초상기인이었다. 나는 진작에 나랑 똑같이 생긴 특제품을 만들어서 이혼대법을 미리 시전했던 상태였어.”
“마왕을 속였단 말인가요?”
“그래. 그리고 이혼대법에 필요한 힘이 부족하면 잠시 진짜 몸으로 되돌아가서 회복기를 가지기도 하고, 진짜 몸만 따로 움직여서 어둠의 세계에서 경매에 참여하거나 정보를 모으거나 했지.”
“…….”
“좀 복잡하니까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이번 계약도 사실 무효나 다름없어. 초상기인이라는 가짜 몸이 전제가 되었기에 진짜 본체를 지닌 나는 책임질 게 없었거든.”
뜻밖의 진실!
사공린은 그 말을 듣고서야 지금까지 제갈사가 아군 측에 뜬금없이 점멸식으로 출현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갈사가 아군에게 나타날 때는 늘 진짜 몸이었으나 가짜 몸인 초상기인을 둘러싼 이혼대법 사투가 격렬해지면 이차원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싸웠던 것이다.
제갈사가 초상기인을 끼워넣었다는 전략 자체에 대해서는 아군에 설명해 뒀으나 제대로 그 상황을 이해했던 것은 오로지 망량과 제갈부 정도였다. 그나마도 망량은 부상을 이유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제갈부도 쓸데없이 정보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사공린이나 천우진 등은 자세한 사정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몬 마구스를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유. 그건 사실 나도 이미 놈을 등쳐먹은 상태였거든.”
“무슨 말….”
“뒤통수에는 뒤통수. 폭왕한테 했던 짓을 똑같이 해뒀다 이 말이야.”
스윽
제갈사가 손을 사공린의 이마로 뻗었다. 사공린이 물끄러미 제갈사를 쳐다보자 제갈사가 흉소를 흘렸다.
“왠지 마음대로 안 되지? 방금 전까지 날뛰던 황금안의 힘이 억제된 것 같지? 안 그러냐? 방금 전 시몬 마구스를 잡아먹었던 괴력이면 지금의 나 정도는 쉽게 해치울 수 있을 텐데.”
“제갈사. 무슨 짓을 한 건가요.”
“크크크크…. 이런 식으로 상황이 흘러갈 줄이야.”
제갈사가 천천히 사공린의 코앞까지 얼굴을 갖다대었다. 그리고 한 줌의 감정도 없이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나는 마왕 시몬 마구스의 채권자(債權者). 놈이 소모한 마력의 이자와 원금을 함께 받는다면 25할 3푼 6리겠군. 사공린 네가 놈을 잡아먹음으로써 놈의 체내에 있던 계약서 또한 네게로 이전되었으니, 이제부터 너를 채무자(債務者)로 간주하지.”
“…….”
그 순간 제갈사의 말을 들은 사공린과 천우진의 얼굴이 동시에 경악으로 물들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우진이 기가 막혀서 외쳤다.
“제갈사, 네 녀석…. 설마 시몬 마구스한테 외신의 주문을 걸었단 말이냐!!”
제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정확히는 계약서에 마도서의 힘을 빌려서 안 들키게 숨겨진 항목을 집어넣었거든. 그 항목에 따르면 이번 전투에서 시몬 마구스가 행한 외신의 주문으로 마력을 수확하면, 내가 고스란히 그 효과를 이어받아 최종채권자로 변한다.”
“허… 허어….”
“물론 이중채무니까 이자율도 급상승하지. 흐흐.”
천우진은 기가 막혀서 몸을 떨었다.
폭왕은 시몬 마구스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그러나 그런 시몬 마구스 또한 제갈사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용당한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뒤통수치기!
제갈사가 사공린의 이마를 잡은 상태로 외쳤다.
“자, 마력을 내놔라!!”
슈와아아아악!!
잠시 후, 사공린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그 마력을 얻은 제갈사의 전신에서 광폭한 힘이 난류처럼 마구 엉켰고, 제갈사는 한참동안 마력을 통제하며 자신의 내면에 갈무리하는 듯 했다.
숨을 열 번 쉴 정도의 시간 후 - 제갈사는 모든 마력을 받아낸 듯 했다.
“이제 풀어 드리지.”
그리고 제갈사는 마력을 갈무리하자 사공린을 묶고 있던 혼돈의 사슬을 해제했다. 사공린은 비틀거렸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제갈사가 눈에 이채를 띄면서 말했다.
“역시나. 그만한 마력을 빨아들였어도 별로 큰 타격이 없군. 무서운 능력이야.”
“제갈사…. 설마 네가 빚을 받아내려 했기 때문에 황금안의 권능이 주춤거렸단 말이냐?”
“눈치가 빠르군. 뭐, 그 덕에 저 괴물같은 힘을 억제하지 않았나?”
“흠.”
“아무리 사공린의 권능이 강대해도 그 기원이 외신의 채무계약마저 초월할 순 없다는 뜻이겠지.”
천우진의 예상대로였다.
원래대로라면 제갈사가 강림해서 시몬 마구스의 피를 빨아먹으려고 했던 채무계약. 그러나 그 계약은 도리어 막대한 마력을 빨아들이면서 사공린의 혼돈의 권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볼 일이 끝났으면 꺼져.”
천우진은 그렇게 말하며 사공린을 부축하려 했지만 제갈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싫은데?”
투웅!!
“크윽!”
천우진은 그 순간 제갈사의 손가락 튕기기에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급히 자신을 방어한 천우진이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할 때였다.
쿠구구구…!!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사공린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황금안이 빛나면서 그녀의 심장 바로 앞에 법문조각이 떠올랐고, 이윽고 법문조각이 사공린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아…!!”
슈우우욱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사공린은 잠시 후 쓰러져서 기절했다. 제갈사는 쓰러진 사공린을 씁쓸한 듯 쳐다보았다.
“본체의 마력이 부족하다 여기니 법문을 흡수해서 보충한 건가…. 크큭. 실로 천마(天魔)라고 할 만 하구나. 인간이 만든 활강시나 악마 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군….”
“법문이… 흡수된 거냐?!”
“보고도 모르나? 사공린과 한 몸이 되었군.”
“막지 못했던 거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방금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저 마력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냐. 차원이 다른 힘이군.”
“빌어먹을…!!”
천우진은 욕지기를 내뱉었지만 방법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희미한 전조를 알아챈 제갈사가 천우진을 구해준 것이었고, 제갈사의 힘으로도 방금 전 사공린과 법문이 합일하는 건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흐음, 계획과는 완전히 달라졌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잠시 후 제갈사가 말했다.
“천우진. 내가 마왕이 되어서 계약을 이용해서 사공린 내면의 천마를 억누르겠다. 그 대신 네 힘도 같이 봉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