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66화 (1,063/1,615)

1066====================

사신지혼(四神之魂)

전장(戰場)은 점차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크그그그

흉액(凶厄)을 머금은 폭왕의 숨결이 마치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공간을 진동시킨다. [옛 지배자]끼리의 사투에서 권능이 충돌할 때마다 시공간의 법칙이 물결치는데, 폭왕의 숨결은 물결치는 혼돈 속에서 한층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숨결은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의 권능을 상징하는 형이상학적인 재액의 발현이었기에 언뜻 피할 수 있는 것 같아도 회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스아아악

[오오오….]

마치 이계의 생명체와 코끼리가 뒤섞인 것처럼 생긴 [옛 지배자]가 괴성을 흘리며 폭왕의 숨결에 당한 고통때문에 몸을 떨었다. 고통이라기 보다는 상대의 권능이 자신의 본체를 잠식하는 불쾌감이었는데, 그 존재는 이윽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함을 알고는 눈을 번득였다.

[나, [화쟁(和爭)을 지켜보는 자]는 폭왕 너에게 극멸의 저주를 내리리라!!]

파앗!!

말이 끝나는 순간 지배자가 소멸했다. 그리고 동시에 폭왕의 이마에 저주의 낙인이 찍혔는데, 폭왕은 재빨리 그 각인이 새겨지자마자 언령을 발휘했다.

[극멸의 저주여. 시몬 마구스에게 옮겨가라.]

언령이 시전되자마자 시몬 마구스의 본체에 각인이 옮겨갔고, 짧은 순간이지만 시몬 마구스는 그 중압감때문에 몸을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아무리 시몬 마구스가 사법에 정통한 마왕이라지만 [옛 지배자]가 육신의 죽음을 겪으며 악랄한 비원을 담아 날린 저주를 쉽게 감당할 수는 없었다. 마력의 압박에 짓눌려서 비명을 지르던 시몬 마구스는 이내 자신의 몸을 꿈틀거리며 따라온 사공린에게 외쳤다.

[계약에 따라… 너에게 각인을 옮기노라!]

츠아앗…!!

그리고 시몬 마구스의 주문이 시전되는 순간 사공린의 이마에 각인이 일어났다. 시몬 마구스는 그 모습을 보며 클클 웃었다.

[인간이여, 최대한 버티거라…. 네 존재를 짓뭉갠 만큼 저주가 약화될 터이니.]

사공린을 희생양으로 쓰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시몬 마구스였다. 그러나 그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뭐지?]

사공린은 전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고통조차 거의 느끼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 그 자체였다. 또한 이상한 점은, 사공린의 이마에 새겨진 각인은 방금 전 폭왕과 시몬 마구스에게 새겨졌던 각인과 완전히 형태가 달라져 있었다. 한끝만 달라져도 주술적인 의미가 천지차이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시몬 마구스는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몬 마구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사공린에게 새겨진 각인의 변화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피려 했다. 그러나 이내 잘 모르겠다는 걸 깨달았다. 저 변화는 수천 년이나 영지주의의 종사로써 수만 권의 책과 마도서를 독파한 시몬 마구스의 지식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변화였다. 알아보기는커녕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공린의 입가에 머무는 희미한 미소.

그 미소에서 의혹과 불안감을 느낀 시몬 마구스가 말했다.

[너… 그 각인이 아프지 않은가?]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옛 지배자]가 죽어가며 남긴 저주라면 우주적인 힘을 담고 있는 사상최악의 저주나 다름없으니 본디 필멸자라면 몸이 녹아버려야 정상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사공린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폭왕이 싸우는 전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곧 끝나겠군.”

사공린의 말대로였다.

이미 세 명의 지배자를 결단 내버린 폭왕은 한층 기세가 등등해져서 요란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승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나머지는 언제 결말이 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옛 지배자]들은 패배가 확정되었음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콰광!!

폭왕이 앞발을 후려치자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의 동체가 크게 찢겨나가며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가 눈에서 쏘아낸 광선이 폭왕의 날개를 한차례 찢어버리고 말았다. 폭왕은 비틀거리다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너희야말로 왜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 것이냐? 법문이 대체 무엇이길래? 어차피 종말과 계시가 닥쳐오면 모든 게 끝이거늘 300여년의 알량한 시간이 무슨 의미란 말이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옛 지배자]에게 진정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은 후 부활할 뿐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투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애시당초 이기심과 극악의 화신인 [옛 지배자]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투지를 발휘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 정도로 힘의 차이를 확인했다면 진작에 손을 떼고 도망쳐야 정상일 텐데 수천수만 년의 굴욕적인 부활기간을 감수하고 죽어라 싸우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폭왕의 진심어린 의문에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가 대꾸했다.

[‘끝’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어떤 형태인가에 따라서 우리들 모두의 운명이 달라진다. 그 사실도 모르고 무작정 힘을 탐해 여기까지 오다니 정녕 어리석구나.]

[결말의 형태라고? 우주의 멸망보다 더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폭왕이여. 단 하나,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가…. 잘 생각해 보아라!]

[…….]

폭왕은 그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멈칫거렸다.

그러더니 더욱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너희가 교언에 속은 것뿐이다!]

[어째서 믿지 못하는 것이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더 이상 신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럴 바에야 나는 끝까지 내 마음대로 하겠다!]

쿠콰쾅

[크아아악….]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의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폭왕의 돌격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는 비웃음을 지으며 저주를 남겼다.

[크흐흐흐!! 가련하구나. 네 고통만 가중되리라!]

스아악

또 하나의 저주가 폭왕에게 옮겨갔고, 시몬 마구스를 통해 사공린에게로 들어갔다. 시몬마구스는 힐끔 사공린을 보았는데, 사공린은 여전히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다. 시몬 마구스는 이 기묘한 부조화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필멸자에게 [옛 지배자]의 저주를 두 개 이상 몰아넣으면 너무 빨리 죽을 거 같아서 일단 시몬 마구스가 임시로 저주를 갖고 버티는 중이었다. 이걸 동시에 사공린에게 다 몰아넣는다면 사공린에게 저주가 4개나 부여되는 셈이다. 지금 사공린이 여유롭게 버티는 걸로 보아서는 충분히 그래도 될 것 같지만 뭔가 수상쩍었다.

사공린은 어째서 여유가 있는가?

과연 저주를 사공린에게 몰아넣는게 옳은 선택인가?

시몬 마구스가 망설이자 사공린이 힘들다는 듯 말했다.

“더 이상 저주를 넘기지 마십시오. 버티기 힘드니까….”

[…그래? 버틸 수 있는지 봐야겠군!]

사공린의 그 한마디에 시몬 마구스는 자신의 미묘한 의심보다 상리적인 이치를 따르기로 했다.

필멸자가 [옛 지배자]의 저주를 많이 얻고도 태연할 리가 없다.

뭔가 신화적인 힘을 이어받아서 내성이 강할지는 몰라도 거기까지가 한계일 것이다!

그 이외의 경우는 너무나 말도 되지 않았기에 이성적인 시몬 마구스는 황당한 가능성을 배제해버렸다.

쿠와악

마침내 시몬 마구스가 보유하고 있던 저주 2개가 사공린에게로 들어가면서 사공린은 4개나 되는 저주를 갖게 되었다. 시몬 마구스는 조롱하듯 말했다.

[대웅제국을 위한 너의 희생이 참 값지구나…. 최대한 버티거라. 하하하….]

“…….”

시몬 마구스는 사공린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신의 이마를 감싸며 비틀대자 더 이상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가공할 싸움이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쿠콰쾅!!

약 반 식경이 지났을 때, 마침내 마지막 [옛 지배자]가 폭왕의 손에 당해서 쓰러졌다. 그리고 폭왕은 그 지배자의 저주를 옮기면서 크르륵거렸다.

[…힘들군….]

아무리 성좌를 파멸시키는 악몽같은 [옛 지배자]이자 재액의 흑룡인 그라고 해도 [옛 지배자]를 여섯이나 상대하는 건 생사를 건 결전이었다. 그나마도 외신의 주문인 [데미우르고스의 합일]을 이용해서 유리한 상태에서 싸웠기에 망정이지, 정상적으로 도전했다면 전원타도는 커녕 2계나 3계에서 폭왕이 되려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옛 지배자]들 또한 인과율의 제약으로 진령체 상태였기에 힘에 제약이 있었으며, 시간제한에 따라 제약이 풀렸다면 폭왕을 너끈히 죽이는 게 가능했었다.

그러나 결국 승자는 폭왕이 되었다. 폭왕은 자신의 힘이 4할 이상 손상되었으며 큰 부상을 입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조만간 그 부상은 법문의 마력으로 채워지리라. 그리고 계약에 따라 백련교의 법문 또한 폭왕의 것이 된다면 -

[크흐흐. 조만간 치우나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손에 넣는 건가….]

폭왕이 광소를 흘렸다. 힘겨운 싸움이었던 만큼 큰 보상이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여세를 몰아서 나머지 법문까지 모두 얻게 된다면, 그는 우주최강의 존재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때였다.

우우웅

[옛 지배자]들이 모두 소멸되자 허공에 반짝이는 인장(印章)이 소환되었다. 총 여섯 개의 인장은 서서히 움직이더니 중앙에 있던 음각(陰刻)에 날아와서 박혔다. 인장이 박히게 되자 중앙의 원형 회랑이 큰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이윽고 빛을 뿜어내었다.

파아앗 -

회랑의 위에는 조그마한 종이조각이 반투명한 원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종이조각을 본 순간 폭왕은 흠칫하고 뒤로 물러났다.

[……!!]

어마어마한 마력!

아무리 그가 부상을 입은 상태라고 하지만 [옛 지배자] 중에서도 강력한 편인 폭왕이 순간적으로 저 마력을 감당키 힘들 정도였다. 폭왕은 법문에 담긴 잠재력을 느끼자 침음성을 흘렸다.

[저것이 무생노모의 법문인가…?]

동시에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걸 얻는 순간 그는 우주의 지배자로 군림하고도 남는다는 사실을!

폭왕은 서서히 법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법문의 한 치 앞까지 손에 도달한 순간, 반투명한 원구 앞에 누군가의 환영이 나타났다.

괴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족(異族). 그 이족은 외계의 복색을 하고 있었으며 특이하게도 세 개의 뿔이 나 있었다. 이족의 환영과 눈이 마주친 폭왕은 그 환영을 보자 중얼거렸다.

[네가 법문을 봉인한 ‘대장로’라는 놈이냐?]

대장로의 환영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시련을 통과했다. 법문을 얻어야겠으니 당장 비켜라.]

[내가 만든 것은 시련이 아니라 봉인이오. 나는 침입자를 시험할 생각이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법문을 넘겨줄 생각이 없소.]

[크흐흐…. 어리석은 놈. 이제 와서 날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폭왕이 그대로 손을 뻗어서 환영을 꿰뚫고 법문의 구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을 주어 반투명한 구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콰칭!!

폭왕은 비웃음을 지었다.

[나름대로 강력한 마법이었겠지만 내겐 통하지 않는다.]

[…….]

[마지막 보호막이 사라졌군. 법문은 이제 내 것이다.]

[여기까진가….]

대장로가 이윽고 한탄하듯 말했다.

[내가 존재하는 이 현실이 마지막이길 바랬거늘…. 승천자가 오려면 아직 멀었단 말인가!]

대장로의 환영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폭왕은 크게 신경쓰지 않고 법문을 들어서 자신의 몸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마력과 권능을 발휘하며 법문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법문의 거대한 마력이 폭왕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폭왕은 방금 전 사투로 소모했던 힘이 모조리 채워지면서 자신의 내면이 충만해지고, 심지어 인과율마저 얻으면서 자신의 격(格)이 상승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오…!!]

[옛 지배자]로 탄생한 이래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양감과 전율! 태어날 때부터 이미 완성된 혼돈의 존재였던 그에게는 매우 생소한 느낌이었다. 더욱 고차원적인 존재로 변하고 있다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이윽고 폭왕이 법문을 모두 흡수하자 시몬 마구스가 폭왕에게 말했다.

[신이시여. 법문을 맛있게 드셨나이까?]

[이제 계약에 따라 백련교의 법문도 내 것으로 해야겠다. 당장 천암의 제단을 소환해라.]

[그리 할 수는 없겠습니다.]

[뭣이?]

[우선 그 법문은 제게 주셔야겠습니다.]

폭왕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시몬 마구스가 흉소를 흘렸다.

[크크큭. 크하하하! 이렇게까지 내 뜻대로 될 줄이야….]

반의를 드러낸 시몬 마구스와 폭왕의 눈이 마주쳤다. 냉막한 폭왕의 눈에서 살심이 크게 일어났다.

[…어이가 없는 놈이군. 내가 법문을 얻은 이제 와서 흉심을 드러내봐야 무슨 소용이겠느냐.]

그를 가소롭게 여긴 폭왕이 언령으로 명했다.

[죽어라.]

…….

그러나 폭왕이 전성기 이상의 힘을 얻었는데도 [옛 지배자]의 언령은 마왕 시몬 마구스를 없애지 못했다. 없애기는커녕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폭왕의 권능은 작용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면….]

폭왕은 어찌된 일인지 의아하게 여기며 숨결을 일으켜서 법칙을 변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폭왕이 장기로 여기는 폭왕의 숨결조차 생성되지 않았다. 폭왕이 뜻밖의 사태에 주춤거리자 시몬 마구스가 말했다.

[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외신의 주문 [데미우르고스의 합일]에는 또 하나 숨겨진 능력이 있지. 인과율을 [대여]한 후 이자(利子)를 받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이미 그 능력을 발동시킨 상태이다.]

[네놈…!! 설마!]

[크크크, 폭왕이여. 신나게 잘 싸웠는가? 설마 아무리 외신의 주문이라지만 아무 대가도 없이 그 막대한 인과율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가? [옛 지배자] 6명을 쓰러뜨릴 정도로 막강한 인과율을 대가없이 부여할 수 있다면 난 예전에 이 우주를 정복했을 것이다.]

[…….]

[이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는 법.]

시몬 마구스가 미친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나의 이름은 시몬 마구스, 사마리아의 채권자(債權者)이니라! 지금껏 소모된 인과율만큼 이자를 받겠다. 위대한 허공록에 수록된 이자율에 따르면 이자는 네 모든 마력의 12할 2푼 5리!!]

[뭐… 뭐라고!!]

[채권자로써 명령한다. 채무자 폭왕은 빚을 당장 상환하라!]

쿠우우우 -

그 순간 폭왕의 머리 뒤편에 거대한 어둠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폭왕은 그 존재를 느끼는 순간 뻣뻣하게 굳어서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존재의 격이 그를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었다.

단지 일개 화신일 뿐인데도 현재의 폭왕을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힘.

설마 이 존재는 -

[외신이여…!! 이런 사기계약을 옹호할 셈이란 말인가!! 나는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니 빚은 무효이다!!]

폭왕이 시몬 마구스와 계약한 외신의 화신에게 항의했으나 폭왕의 뇌리에 위대한 자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해도 이미 빌려쓴 것은 갚을지어다

슈아아악

다음 순간, 폭왕의 머리 뒤에 떠올라 있던 화신이 눈을 빛내었고 폭왕이 지닌 모든 혼돈의 마력이 시몬 마구스에게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폭왕은 힘을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외신의 권능에는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작 마왕 따위에게 내가… 크아아악!!]

[크하하하!! 법문은 잘 받겠다.]

[으으으으!!]

엄청난 속도로 힘이 빨려들어가던 와중, 폭왕은 급히 자신의 몸에서 법문을 떼어내려고 했다. 가슴의 피부가 찢겨나가면서 흡수되었던 법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행동에 도리어 시몬 마구스가 놀라고 말았다.

[이미 주문의 인과율이 성립했는데도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저런 말도 안 되는….]

푸확!

폭왕의 가슴팍이 뜯기고 법문이 튀어나가자마자 폭왕이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두고보자!]

그리고는 재빨리 시공간을 열어서 도망쳐 버렸다.

쿠구구구….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흥, 도망쳤나. 그러나 이 시공간을 벗어난다 해서 폭왕, 네 채무가 변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법문부터 받아놓고 나중에 남은 마력을 빨아먹어 주지….]

시몬 마구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크크크!! 계산대로구나. 이로써 [옛 지배자]의 마력 중 7할 이상을 얻고 법문까지 내 것이 되었다. 이것이 어찌 승리가 아니겠는가.]

그 때였다.

“그 마력을 이용해서 마왕에서 [옛 지배자]로 승격할 생각인가요?”

시몬 마구스가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에는 무표정한 사공린이 서 있었다. 시몬 마구스는 그녀의 존재를 깜박 잊고 있었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확신하는 시몬 마구스에게 있어서 사공린은 그리 대단치 않은 존재였으므로 그는 여유작작하게 대꾸했다.

[글쎄. 네게 말해줄 이유는 딱히 없겠지만…. 승격을 하고도 남을 마력이지. 하지만 승격할 생각은 없다.]

“어째서지요?”

[이 힘으로 승격을 해봤자 구(舊) 오제(五帝)급의 존재에서 멈추게 된다. 그러나 그 정도 힘으로는 다가올 종말의 때에서 결코 승리를 쟁취할 수 없지. 그러니 이 힘을 전략적으로 써서 진정한 데미우르고스의 자리를 노릴 것이다.]

사공린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는 재차 질문했다.

“데미우르고스란 뭔가요?”

[크크크…. 네게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만 죽거라, 가련한 희생양이여!]

번쩍!

시몬 마구스가 안광을 빛내며 사공린을 공격했다. 이제 써먹을만큼 다 써먹었으니 필요가 없어져서 처분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배자의 마력을 7할이나 얻고 법문까지 가진 시몬 마구스의 저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구웅

그저 저주의 여파만으로 시공간이 크게 뒤틀리며 사공린이 서 있는 자리가 총천연색의 혼돈으로 변화했다. 설령 마왕급 존재라 해도 저주만으로 전신이 녹아들어갈 정도였다. 시몬 마구스는 이 일격으로 사공린을 죽였다는 걸 확신했다.

치지직…

[……?]

시몬 마구스는 황당함을 느꼈다. 도리어 자신의 눈에서 불꽃이 일어나며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공린은 멀쩡했지만 그 자신의 눈알이 불타고 있는 상황이니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몬 마구스는 급히 마력을 불어넣어서 불꽃을 끄려고 했으나 쉽사리 사그러들지 않고 그의 생살을 지졌다.

치지직

[크으윽. 이건 뭐냐!! 어째서 이런 현상이….]

사공린은 대꾸하지 않았다. 시몬 마구스는 당황해서 아무런 소리나 지껄였다.

[네가 설마 내 권능을 반사한 것이냐? 아니… 그런 주문을 외우는 기색은 없었는데. 반사를 했다면 내가 알아챘을 터.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면 그건….]

“…….”

[마력의 격차…? 역해(逆害) 현상!]

시몬 마구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황당했다.

그렇다.

지금 이 상태는 역해 현상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마력을 지닌 혼돈의 존재 사이에서 서로간의 마력이 큰 격차가 날 경우, 굳이 별개의 방어술이나 가호, 주문을 쓰지 않아도 공격이 저절로 무효화되는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패한 공격은 인과율 때문에 술자에게 해가 되어 되돌아온다. 강력한 혼돈의 존재에게 인간마법사가 대항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했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기초적인 상식이나 다름없는 현상이었으나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시몬 마구스는 이 가능성을 언뜻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부터 하급 신의 반열을 훨씬 뛰어넘었던 강력한 마왕 시몬 마구스가, 폭왕의 마력과 법문까지 손에 넣은 지금 상태에서 그의 마력을 뛰어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심지어 마력 무효화 및 역해현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웬만한 차이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으며, 전투조차 성립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가 존재해야 한다.

저벅

사공린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아무런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아요.”

[……? 무슨 소리를….]

“아니, 그 전부터였을지도 모르겠군요. 혼돈에 몸을 담고 있는 게 마치 물 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의념(意念)을 다룰 때와 비교해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없었죠.”

스윽

사공린이 한쪽 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아까 천우진이 발현했던 무위(無爲)의 끌개가 사공린의 팔을 휘감으며 소환되었고, 사공린은 지체없이 그 팔을 휘둘렀다. 시꺼먼 인과율의 끈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퍼억!!

[커헉.]

뜬금없이 시몬 마구스가 사공린에게 얻어맞아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시몬 마구스가 비명을 지르듯이 주문을 외쳤다.

[어둠의 정소(精素)여, 위대한 별의 파멸이여! 시공을 파(破)하여 저 자의 심장을 쪼개소서.]

외신의 주문

심파(心破)의 일언(一言)!

파아앗

본디 시몬 마구스가 외신의 주문을 쓰고자 한다면 오랜 주문영창 시간과 막대한 대가가 필요했으나 그는 엄청난 마력을 흡수한 상태였으므로 단숨에 주문을 발동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옛 지배자]조차 없앨 수 있는 강대한 외신의 주문이 발현되며 사공린에게 날아들었다.

심파의 일언을 맞으면 [옛 지배자]조차 마력이 쪼개져서 무한대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시몬 마구스는 사공린을 이 공격을 끝장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그 순간 사공린의 눈이 황금안(黃金眼)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찰나의 순간, 사공린의 정신은 무한대로 확장되어 신(神)의 영역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사공린이 정신세계 허무의 공간에서 떠돌고 있을 때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였구나, 사공린.]

아주 머나먼 곳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공린은 그 존재가 거대한 황금의 옥좌에 앉아 있으며, 제관을 쓴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양옆에는 한 마리의 용과 한 명의 선인(仙人)이 서 있었다. 그 존재들 또한 굉장히 강력해 보였다.

[나는 당신에게 진 게 아니야.]

[진 게 아니라고? 한 번 알을 깨 버리면 두 번 다시 원래대로는 돌아갈 수 없지.]

[단정짓지 마.]

사공린은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굴강한 절대지경의 정신력은 아직 죽은 게 아니었다. 그런 사공린의 의지에 되려 [목소리]는 흥미를 느낀 듯 했다.

[특이하군. 정말로 이성이 남아있는가? 그렇다면 대웅제국의 동료들을 보호하고싶다는 마음 때문에, 인간성을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인가…. 후후후.]

[…….]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한 듯한 그 말에 사공린은 멈칫했다. 사실 사공린이 이 도박같은 한 수에 매달리게 된 것은, 시몬 마구스가 대웅제국을 위협하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 환신 천우진은 그런 마도의 협박따위 아무렇지 않다 생각했으나 사공린은 정말로 더 이상 대웅제국에 위협이 다가오면 감당할 수 없다 여긴 것이다.

[어쨌든 좋다. 창힐같은 실패작이 아니라 너는 진정으로 내가 인정한 마중마(魔中魔)로써 거듭날지니.]

광기어린 미소를 흘리던 의문의 [목소리]가 말했다.

[천마(天魔)가 된 것을 환영한다, 사공린.]

그리고 다음 순간, 이 세상에 진정한 천상의 마(天魔)가 강림했다.

빠직!!

사공린의 손이 자신의 심장 앞에서 무언가를 붙잡았다. 무형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면서 발버둥을 쳤으나 사공린은 황금안을 빛낸 채 냉막하게 그 무형의 존재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시몬 마구스가 경악해서 외쳤다.

[외… 외신의 주문을 현실에 구현화시켜서 붙잡는다고?! 말도 안 돼!!]

주문의 가시화(可視化)!

엄청난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사공린이 붙잡은 것은 전 우주적으로 최상의 저주라 할 수 있는 외신의 주문, 심파의 일언이었다. 영지주의의 종사인 시몬 마구스조차 저런 괴물같은 짓이 가능하다고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사공린은 잠시 후 주문을 잡은 손을 들어올려서 천천히 씹어먹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드득

[…먹는다?! 주문을 먹는다고?!]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행동!! 사공린이 주문을 구현화시켜서 씹어먹는 걸 본 시몬 마구스는 평정을 잃고 허둥대고 말았다. 자신이 상상을 초월하는 진정한 우주적인 공포를 맞닥뜨렸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사공린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주문을 먹어치운 후 입가를 쓱 닫으며 중얼거렸다. 그 눈에는 허기가 감돌고 있었다.

“배가 고프군요….”

잠시 후 사공린이 황금안을 빛내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투확!

그러자 시몬 마구스의 몸뚱이가 그대로 사공린에게 붙잡혔다. 마력으로 방어같은 건 할 새도 없었으며, 어떤 원리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크으윽, 대체 무슨….]

그리고 잠시동안 눈이 마주쳤다. 마왕 시몬 마구스는 그 순간 사공린의 눈이 먹이를 보는 눈이라는 걸 알아채 버렸다. 또한 설마하는 순간에 사공린의 입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와직!!

우드득!!

우드득!!

시몬 마구스는 서서히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청혈(靑血)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핏물마저도 눈앞의 상대가 꿀꺽거리며 맛있게 먹어치우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크으으… 으아아아아!!]

사공린의 황금안이 번뜩이면서 점차 고통이 간헐적으로 찾아왔고, 그 때마다 몸이 가벼워진다.

그렇다. 그는 지금 산 채로 잡아먹히고 있었다.

생전 처음 겪는 무시무시한 상황에 시몬 마구스가 급히 주문을 계속해서 전개하며 발악했다.

콰과광!

콰광!

그가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며 익혔던 모든 강력한 주문이 포화처럼 퍼부어졌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짜 소멸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일까? 시몬 마구스는 설령 팔부신중이라도 태워죽일 정도로 미친 듯이 주문을 외워 사방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스스스스

그러나 사공린의 황금안이 빛나는 동안에 그녀의 몸 주위에는 황금의 막이 떠올라서 보호하는 중이었고, 모든 주문은 황금의 막에 닿자마자 소멸해 버렸다. 아니, 소멸한다기 보다는 [먹힌다]는 게 옳은 표현이었다. 주문이 부딪힐 때마다 사공린의 힘은 도리어 계속 강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공린이 다시금 덥석하고 혼돈을 베어물었다.

와득!

와드득!!

마력이 생생하게 사공린에게 흡수당하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잡아먹힌다…!!

열심히 자신을 먹고 있는 사공린을 쳐다보던 시몬 마구스는 엄청난 공포 때문에 마치 생쥐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문득 사공린의 이마를 쳐다보고 뭔가를 알아차렸다.

[가… 각인… 어째서 없는 거지?!!]

[옛 지배자]들이 폭왕에 당한 후 죽어가며 남겼던 6개의 각인.

그 각인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저주였기에 폭왕조차 감당하지 못해서 임시로 사공린에게 몰아주었다. 그 각인을 쓰레기통처럼 사공린에게 몰아넣는다면 그들이 받는 피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사공린의 이마에는 그 6개의 각인 중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깔끔한 이마였다.

사공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몬 마구스는 순간적으로 비상한 두뇌를 회전시켜서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설마 ‘저 존재’는 [옛 지배자]의 저주마저 먹어치운 것인가?

급격히 강력해진 이유도 설마?

사공린이 잠시 후 입에 묻은 청혈을 천천히 닦으며 중얼거렸다.

“맛있었어요.”

어느 새 몸뚱이는 모두 사라졌고 시몬 마구스의 머리통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인간의 입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으나, 시몬 마구스는 사공린의 입 대신에 그녀의 몸에서 치솟아오른 황금빛 기운이 대신해서 [입]의 기능을 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굳이 육체적으로 먹어치우지 않아도 마(魔) 그 자체를 먹어치울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제발… 제발.]

시몬 마구스는 마도사의 평생에 두 번 있을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덜덜 떨었다. 아무리 외신과 계약한 마도사라지만 자신이 산 채로 잡아먹힐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사공린에게 하소연했다.

[제발 살려다오. 그러면 네 하인이 되어 종말까지 뭐든지 하겠다. 살려만 주면….]

“…….”

[부탁이다! 살려다오.]

“안돼요.”

사공린의 황금안이 차갑게 번득였다.

“당신은 너무 위험해요.”

[안돼…!!]

와득!

우드득!

우득

…….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사공린은 이윽고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좀 배가 차는군요….”

우우웅

땅에 떨어져 있던 무생노모의 법문 조각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을 힐끔 쳐다보던 사공린은 법문 조각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잠시동안 손에 들고 있다가 말했다.

“천우진. 왜 떨고 있나요?”

“…….”

천우진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나 사공린이 죽으려 하면 구해주려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사공린이 산 채로 시몬 마구스를 잡아먹는 광경을 보자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저건’ 대체 무엇인가?

천우진은 잠시동안 자신을 침식하는 광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 광기와 공포를 정신력으로 이겨낸 후, 사공린에게 말했다.

“사공린. 당신은 지금 인간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