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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일렁이는 칠흑의 끈이 자신을 감싸는 순간 천우진은 자신의 몸통이 통째로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물리적으로 잘려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속해있는 공간만이 마치 오려나가듯이 사라지고 다른 곳으로 전이(傳移)하는 감각이었다.
스가각
끊임없이 우주의 확률이 변동하는 것을 전신으로 느끼는 감각은 소름돋기 그지없었다. 고통은 없으니 한 순간의 실수가 자신을 인과율채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공포가 천우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끌개’란 바로 혼돈(混沌)의 고정점(固定点)을 상징하는 가호였다.
파천의 가호와 달리 무위의 끌개는 혼돈의 법칙성과 불규칙성을 동시에 사용하는 모순(矛盾)의 가호라고 할 수 있었다. 혼돈이란 아무리 초기의 모든 조건이 같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진행되는 순간 불규칙성을 띄며 자유자재로 발산(發散)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만일 혼돈의 발산이 극한(極限)에 이르게 된다면 도리어 규칙성을 가지게끔 되어 있었다.
‘그리고 혼돈의 극한에서 나타나는 규칙성의 고정점…. 그걸 바로 ‘무위(無爲)’라고 한다.’
천우진은 자신이 과거에 망량선사에게 가르침받았던 혼돈의 이론에 대하여 되새겼다.
츠츠츠
천우진과 사공린을 둘러싸던 칠흑의 끈은 이윽고 고치처럼 둘의 몸을 칭칭 감았다. 언뜻 부자유스럽게 봉인된 듯 했지만 사실 그들 본인은 아무런 물리적인 속박감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천우진은 전신에 공허함과 부유감이 닥쳐오는 걸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무위의 끌개가 모든 혼돈의 권능을 무효화시키고 있다! 가호의 발현에는 성공했지만….’
무위의 끌개는 혼돈의 극한에서 일어나는 무위의 안정성을 이용해서 혼돈의 권능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정반합(正反合)의 가호였다. 이론상 무위의 끌개를 쓰면 아무리 [옛 지배자]의 권능이라 해도 모조리 무시하고 자기자신을 보호하는 게 가능했다. 최소한 망량선사의 권능을 넘지 못하는 존재는 그 누구도 무위의 끌개로 만들어낸 보호를 뚫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가호가 좋지 않은 점은 불안정하다는 점이었다.
가호의 시전자는 만일에 무위(無爲) 상태가 조금이라도 틀어질 경우 도리어 그들을 뒤덮은 칠흑의 끈이 먹혀서 사라져버리게 된다. 칠흑의 끈은 바로 이 세계의 혼돈 그 자체였으며 확률이기도 했다.
존재확률이 변동하여 무(無)가 되어버릴 위험을 감수하고 시전하는 절대방어막!
그것이 바로 무위의 끌개였다.
사실 이 가호의 존재는 망량선사가 자신의 제자들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가르치지 않았으며, 알려지는 순간 굉장히 수상쩍은 시선을 받게 되리라.
본디 [옛 지배자]들은 혼돈에서 태어나 우주의 법칙을 호흡하는 자들이었으므로 필멸자들에게 일부러 혼돈의 성질을 가르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질서에서 비롯된 고대신들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여태껏 그 누구도 혼돈의 성질을 학문(學文)처럼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전 우주에서 망량선사만큼은 유일하게 필멸자에게 알기 쉽게 가르치는 게 가능했고, 그 덕에 천우진은 술법에 혼돈을 응용해서 쓸 수 있었다. 본디 천계의 대라신선조차도 무위의 끌개를 쓰려고 하면 통제가 불가능해서 소멸할 것이 분명했다. 마치 시몬 마구스가 쓰는 [데미우르고스의 합일]처럼, 무위의 끌개 또한 전 우주에서 천우진만이 쓸 수 있는 가호나 다름없었다.
우우우우…
천우진은 필사적으로 천재적인 술법감각을 동원해서 혼돈의 변동점을 무위의 상태로 고정시키려고 했다. 혼돈의 발산은 무한한 불규칙성을 지니고 있으나 술자는 그 마지막 상태만 읽어내어서 확률을 고정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실수할 경우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하게 될 게 분명했다.
주륵
천우진이 긴장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내심 생각했다.
‘제기랄…. 혼돈이 난류(亂流)를 일으키는구나. 한계다….’
혼돈의 계(界)가 만들어내는 유역(流域)이 갈수록 방대해지고 광기(狂氣)를 내뿜기 시작했다. 천우진은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이상 이 가호를 절대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직감했다. 왜냐하면 수백억, 수천억 개의 돌발변수가 마치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관찰할 때마다 새로운 혼돈의 파동이 끈에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그 파동이 다시금 난류를 만들어내니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혼돈은 결코 인위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천우진은 고작해야 숨을 서른 번 쉴 정도만에 자신의 심력이 거의 다 고갈되어가는 걸 느꼈다. 망량선사가 ‘써먹기 힘든 가호’라고 평가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크헙! 허억… 허억….”
천우진의 전신에 구슬땀이 맺히며 땅바닥에 땀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쳐다보던 사공린이 말했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어떻게 돕는다는 거야. 이게 뭔지나 알아?”
“무위의 끌개라는 거겠죠. 망량선사에게서 받은 혼돈의 가호….”
“이름만 알면 뭐해. 이걸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신경 꺼.”
천우진이 거칠게 말했지만 그 순간 사공린이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스아악!!
그 순간, 사공린의 몸을 고치처럼 뒤덮고 있던 혼돈의 끈이 마치 빨려가듯 그녀의 오른손에 휘감겼다.
“……!!”
천우진이 눈을 부릅뜨자 사공린은 자연스럽게 혼돈을 휘감은 팔을 천우진의 어깨 위로 올렸고, 천우진은 그 순간 혼돈의 난류가 크게 가라앉으며 점차 고요하게 안정을 찾아간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헉… 헉… 후우….”
“한결 낫지 않나요?”
“…….”
한결 나은 정도가 아니라 구사일생한 기분이었으나 천우진은 복잡한 눈으로 사공린을 쳐다보았다. 천우진조차도 이 가호를 제대로 다스릴 방법이 없어서 휘둘리는 중이었는데 사공린이 가볍게 다스리다니!
“어떻게 한 거지?”
천우진의 물음에 사공린은 어리둥절해했다.
“그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라고 염을 보냈는데 이 끈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더군요. 아까 전에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이 들어서….”
“뭐…. 그건.”
“우선은 저 격전이 끝날 때까지 몸을 사리고 있죠. 그게 좋겠어요.”
“…그래.”
천우진은 뭔가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상황이라면 이미 사공린에게 따져봐야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순간 천우진은 자신이 이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사공린의 구출같은 걸 염두에 둘 상황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이 격전의 여파에 버티고 있을 때, 폭왕이 전방으로 거대한 입김을 뿜어내었다.
[별을 불태우는 일격을 받으라!]
후오오오오!!
광대한 범위로 용의 숨결이 뿜어졌고 이윽고 세계 전체가 숨결의 빛에 집어삼켜졌다. 지금까지의 격투 중에서 가장 강렬하며 드넓은 공격이었기에 일순간 폭왕을 합공하던 [옛 지배자]들이 움츠리며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파지지직!! 파지직!!
시공간이 깨어지면서 혼돈의 빛이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친다. 끝없이 허무의 기운이 깨진 시공간 사이로 넘실거리며 짙은 마력(魔力)의 바다가 인위적으로 생겨나는 듯 했다. 폭왕의 숨결이 세계를 휩쓸어버리는 걸 본 마왕 시몬 마구스가 중얼거렸다.
[체내에서 니힐라 임페리움(虛無之力)을 소환해서 뿜어낼 수 있단 건가…? 실로 상상치도 못한 일. 과연 일백 개의 별을 불태운 [옛 지배자]구나.]
방금 전 폭왕 카르파도크가 뿜어낸 숨결은 태초에 우주가 생겨났을 때 파생된 허무 그 자체를 뽑아올린 것이었다. 정확히는 허무를 자신의 몸 안에 소환한 후 정제하여 내뿜는 것이었는데, 말이 쉬웠지 그 어떤 필멸자의 문명도 저런 걸 흉내낼 수조차 없었다.
위력은 엄청났다. 카르파도크의 이번 공격에 [옛 지배자]들 중 두셋이 상당한 부상을 입어서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난 것이다. [옛 지배자]인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 또한 자신의 동체가 절반 이상 훼손되는 바람에 잠시 차원을 옮겨서 도망쳤을 정도였다.
[크으으….]
[상당히 강하구나.]
상황이 폭왕의 우위로 흘러가는 듯 했으나 시몬 마구스는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라 생각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의 공격이라면 순식간에 십여 개의 별(별)을 휩쓸어서 터뜨릴 정도로 강력했는데도 [옛 지배자]들은 그저 부상을 입는데 그쳤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폭왕은 이번에 필살의 권능을 발휘함으로써 상당한 인과율을 소모했기에 다시 한 번 이 기술을 쓰기는 힘들었다.
수백 억의 필멸자를 학살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공격이라 해도 [옛 지배자]끼리의 싸움에서는 단순한 기술교환에 지나지 않는다. 시몬 마구스는 [옛 지배자]의 어마어마한 힘에 선망과 갈증, 탐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슬며시 폭왕에게 제안했다.
[폭왕이시여. 저에게 마력과 권능을 나누어 주시옵소서.]
[뭐라고? 미쳤느냐?]
[진심이옵니다. 외신의 주문으로 인한 인과율의 보조도 한계가 있는 법…. 차라리 술자인 제가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몇몇을 견제한다면 좀 더 승산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본디 마왕의 경지에 이른 저라면 그 마력을 활용해서 [옛 지배자]를 상대할 자신이 있사옵니다.]
합리적인 제안이었지만 폭왕은 코웃음을 쳤다.
[크크크. 네놈이 내 마력을 얻어먹고 도주해버릴 가능성이 크지. 내가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지는 게 낫다.]
[당연히 그리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면 법문을 순식간에 두 조각이나 얻게 되는데…. 그리되면 삼황오제가 사라진 이 세계에서 폭왕께서 차지하실 위치가 얼마나 높은지 상상하신 적이 있으시온지.]
[…….]
[흉신조차 실종된 지금…. 종말에 찾아올 [계시]에서 선두에 설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법문의 마력이라면 충분히 절대자, 황제 공손헌원급의 권능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찮군. 감히 나를 욕심으로 꾀려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요. 허나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라는 건 알고계시지 않사옵니까?]
폭왕은 침묵했다. 너무나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었으나, 폭왕의 탐욕이 이성적인 선택을 방해하고 있었다. [옛 지배자]들의 지성은 필멸자를 뛰어넘었으나 혼돈의 성좌로써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무한대의 탐욕과 사악함이 때때로 그들을 감정적으로 만들곤 했다. 특히 폭왕은 원래부터 호전적인 성격이었기에 그 탐욕이 더욱 솔직하게 표현되는 편이었다.
잠시 갈등을 하던 폭왕이 말했다.
[…계약서를 분할할 테니 네 영혼에도 계약서를 새겨라. 추가되는 계약조항은 배신 및 도주 불가능이다. 그럼 마력을 나누어 주지.]
[너무하시는군요. 그리도 신하를 믿지 못하시는 건지.]
[네놈을 내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 기회만 되면 뒤통수를 칠 놈이지. 그렇다면 차라리 서로 원하는 것만 거래하자.]
[후후… 좋습니다.]
스아악!!
잠시 후 폭왕이 입에서 양피지 계약서를 뱉었고 그 계약서를 시몬마구스가 자신의 몸속으로 다시 흡수했다. 그들은 필멸자가 아니라 초월적 존재였기에 이런 방식으로 직접적 계약을 나누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나누는 순간 폭왕은 시몬마구스에게 자신의 마력 중 일부를 떼어서 그에게 양도했다.
쿠구구구…!!
[오오오오…!! 이 정도로 강력한 혼돈의 힘이…!!]
시몬 마구스는 환희로 몸을 떨었다. 마왕이라 자처하던 그조차도 생각해본 적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마력! 단지 폭왕의 힘 중 일부분일 뿐인데도 그의 격을 상승시키는 게 대번에 느껴졌다. 폭왕이 강대한 [옛 지배자]에 속하는 점도 있었지만 지금 펼쳐져 있는 외신의 주문이 마력의 흡수율을 더욱 높여주고 있는 덕분이었다.
이윽고 힘을 모두 얻은 시몬 마구스는 흥이 났는지 당장 신화시대의 주문을 외워서 자기 근처에 있던 [옛 지배자]를 공격했다.
쿠콰쾅
[크으으…!!]
결과는 놀랍게도 [옛 지배자]의 부상이었다. 본체의 힘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옛 지배자]에게까지 송곳니를 들이밀 수 있을 정도로 시몬마구스가 강해졌음을 의미했다. 시몬 마구스가 외쳤다.
[어설프게 우주의 균형과 유지를 외치는 혼돈의 성좌들이여! 이 세계는 본디 파멸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으니, 구원자가 되려는 그 오만함이 그대들 스스로를 심판하게 되리라.]
콰광! 쾅!!
시몬 마구스가 전장에 끼어들자 단번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옛 지배자]들 쪽이 여섯이나 되어 수적으로 유리했으나 시간제한의 법칙으로 그들의 본체에 걸려있는 인과율 제한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폭왕의 마력을 나눠받은 데다 외신의 주문으로 보조받고 있는 시몬 마구스의 공격력과 힘은 충분히 [옛 지배자]급에 이르러 있었기에 폭왕측이 크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새 상처를 치유하고 복귀한 ‘비탄을 오르는 자’가 노한 듯 외쳤다.
[우리가 우주의 균형과 유지 때문에 법문을 지키는 줄 아느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벌레같은 마왕 놈아!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고 있거라!]
[흐흐. [옛 종족]이라고 하지만 결국 필멸의 종족. 그런 종족의 꾀임에 넘어가 어울리지도 않는 수호의 업을 짊어지는 게 어찌 [옛 지배자]로써 수치가 아니겠소?]
[…법문이 무엇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찾아왔구나. 어리석은….]
[당장 우주가 파멸한다 해도 알 바가 아니오. 결국 천상에 올라 데미우르고스가 되면 그만일지니…. 흐흐흐!!]
[…….]
‘비탄을 오르는 자’는 시몬 마구스의 그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 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크흐흐… 그래…. 뭔가 편한대로만 생각하는 놈이었군. 헛똑똑이가 제일 이용해먹기 쉽다더니 딱 그 짝이군….]
[헛소리 집어치우시오!]
쿠구구구…!!
대결은 계속해서 격화되었다. 어느 새 한 시진째를 넘어서서 격돌이 가속화되었고, 시공간이 일그러지고 터져가는 게 가시화(可視化)되어버렸다. 아무리 [옛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흉험한 싸움을 하다보면 한계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콰곽
[죽어라!]
폭왕이 마치 머리 세 개 달린 뱀처럼 생긴 [옛 지배자]를 물어서 목을 으스러뜨렸다. 그 [옛 지배자]는 발버둥치다가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안광을 빛내며 생멸의 저주를 날렸다.
[나 ‘푸른 륜(輪)을 머금은 자’, 너에게 약화의 저주를 내리노니!!]
퍼벙
그 말이 끝나자마자 ‘푸른 륜을 머금은 자’의 몸뚱이가 터져나갔다. 그것은 폭왕이 터뜨린 게 아니라 스스로 자폭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폭을 함과 동시에 폭왕의 이마에는 선명한 저주의 인이 새겨졌다. 아무리 폭왕이 [옛 지배자]라고 하더라도 같은 지배자가 죽음을 감수하고 날린 저주는 당할 수밖에 없었다. 폭왕은 되려 흉소를 흘렸다.
[크크. 저주가 어쨌다는 것이냐? 어차피 네놈은 종말이 다가올 때까지 죽어서 부활기간동안 기어다니기나 할 것을….]
합공의 일각이 무너지자 이후로는 폭왕이 계속 유리했다. 그는 잠시 후 또 하나의 지배자를 물어서 소멸 직전의 상태로 만들었다.
콰곽!!
[크아아아!!]
이번에 물린 [옛 지배자]도 마찬가지로 폭왕을 저주하며 소멸되었다. 그리고 소멸의 각인이 2개나 새겨지자 폭왕은 그제서야 부담을 느끼는지 크게 비틀거렸다. 전신이 부서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크… 크하악…. 으아아아악!!!]
사실 [옛 지배자]들끼리 싸울 일은 거의 없었다. 싸워봤자 승패가 쉽게 나지도 않고 죽여봤자 수천 년 후에는 부활해버리는 불멸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권속들을 이용해 대리전쟁 정도는 하는 편이었으나 본체끼리 싸워봐야 별로 남는 게 없었으므로 이렇게까지 목숨걸고 싸울 일 자체가 수억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었다. 그래서 폭왕 또한 지금 자신에게 새겨진 저주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의 각인으로 인해 생긴 중압감은 매우 강력했다. 폭왕은 그제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이, 이 정도일 줄이야…. 힘은 그리 세지 않은 놈들인데 어째서….]
폭왕이 혼란을 느끼고 있자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가 그를 비웃었다.
[멍청하긴…. 차라리 우리와 싸우지 않고 꽁무니를 뺐다면 현명했을 터…. 끝까지 억지를 밀어붙이다가 자멸하는구나.]
[웃기지 마라. 오늘 여섯 개의 각인을 얻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를 모두 잡아먹겠다.]
크오오오
폭왕이 포효하며 재차 달려들었다. 그 가공할 공격성에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가 질린 듯 말했다.
[영겁을 살아가는 지배자가 이토록 호전적이라니….]
푸콱!!
폭왕이 혼란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전황은 더욱 폭왕에게 유리해져 있었고, 폭왕은 다시 한 번 [옛 지배자] 하나를 살해하여 목을 물어뜯을 수 있었다. 벌써 세 마리째를 사냥한 폭왕은 세 번째의 각인이 새겨지자마자 눈에서 흉광을 빛냈다.
[저주를 옮기노라!]
슈슉
그 각인은 폭왕의 이마에 새겨지다 말고 마왕 시몬 마구스의 이마에 새겨졌다. 졸지에 [옛 지배자]의 죽음의 각인을 얻은 시몬 마구스가 흠칫했다.
[이게 무슨 짓이옵니까?!]
[넌 아까 나와 계약서를 나누었다. 당연히 너와 나 사이에 진한 인과율이 생겼으니 나는 상급자로써 네게 저주를 이전할 수 있지…. 크크크.]
[어차피 제가 소멸하면 당신도 타격을 입으니 결과는 같습니다. 돌려막기가 무의미하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같이 죽기 싫으면 이 저주를 완화시킬 방법을 빨리 생각해내라. 간교한 마왕이여.]
[…….]
시몬 마구스는 자신이 폭왕을 너무 쉽게 보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성질을 못 이기고 [옛 지배자]를 마구 물어죽이다가 자멸할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자신에게 저주의 각인을 먼저 떠넘겨서 희생시킬 생각이 분명했다.
시몬 마구스는 침착하게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저기서 구경하고 있는 필멸자 놈들에게 저주를 옮겨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저 놈들은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가호에 보호받고 있다. 난 물론이고 네놈도 저 놈들을 건드릴 수 없다.]
[그렇지요. 그러니 알아서 가호를 풀게 만들겠습니다.]
[빨리 해라. 외신의 주문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대화를 끝낸 시몬 마구스가 갑자기 천우진과 사공린 앞으로 갔다. 그러더니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이여. 나와 계약을 하지 않겠나?]
“꺼져라.”
천우진이 시몬 마구스에게 침을 퉷하고 뱉었다.
[가호를 풀고 우리 편에 선다면 제갈사의 몸을 돌려주고….]
“아 좀 꺼지라고.”
[너희들에게 법문도 주겠다.]
“안 사요!! 꺼지세요!”
[…….]
그를 잡상인 취급하는 천우진의 단호한 태도에 시몬 마구스가 멈칫거리자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희 마도놈들과 교섭할 때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 무슨 개소리를 하든 씹어버리고 쫓아내는 거다! 이쪽에서 안 움직이면 너희는 아무것도 못 한다. 개새끼야!”
[후후, 이것 참 정곡을 찔러주시는군.]
흉소를 흘린 시몬 마구스가 말을 이었다.
[좋다. 가호로 지켜지는 네놈들은 멀쩡하겠지만…. 이번 싸움이 끝나고 나서 내가 너희 대웅제국을 공격해서 멸망시킨다면 어떨까? 괜히 내 화를 돋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느냐.]
천우진이 시몬마구스에게 손가락으로 욕을 했다.
“웃기고 있네. 네놈이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놈이냐? 어차피 제갈사 때문에 죽어라 싸운지라 약이 오를테로 올라있어서 대웅제국을 공격할 거 아니냐. 어디서 선심쓰는 척 하고 있어.”
[크크크…. 계약은 멋으로 있는 게 아니지. 너희가 우리 편에 서서 싸운다면 계약으로 대웅제국을 절대 공격하지 않음을 맹세해 주마.]
천우진은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외쳤다.
“응 안 해!”
[…….]
“꺼져~~~!!”
천우진이 눈과 귀를 막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시몬 마구스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당황해서 말했다.
[…마왕급 경지에 오른 술사가 어찌 이리 유치한가? 좀 진지하게….]
천우진은 재미가 들렸는지 히죽거리며 약을 올렸다.
“좋다. 진지하게 안 산다! 사기꾼은 꺼져라!”
[이 빌어먹을 놈…!!]
시몬 마구스가 화를 버럭 내려는 그 때였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사공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시몬 마구스가 화색이 돌아서 급히 말했다.
[오오! 지금 너희는 수락한 거나 다름없다. 계약은 성립한 것이다.]
“……!!”
천우진은 그 순간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위의 끌개가 서서히 사라지는 걸 알아채고는 경악했다. 시몬 마구스의 말대로 계약에 응하는 자세를 취하는 순간 법칙에 의해 가호가 소멸되는 것이었다.
“야 미쳤어?!”
“아니요. 미치지 않았어요. 저도 전장에 뛰어들 거예요.”
“그런 걸 보고 미쳤다고 하는 거라고!”
“천우진….”
사공린이 천우진 근처를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천우진에게 살며시 속삭인 한 마디에 천우진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
천우진이 그 미친 한 마디를 듣고도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
그것은 아마 사공린의 눈에서 잠시 번득이던 황금안(黃金眼)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좋아, 임시 구두계약은 이렇게 해 두고 따라와라.]
“가지요.”
[크크크크크!!]
파앗
천우진은 마왕 시몬 마구스와 임시로 구두계약을 하고 멀리로 날아가는 사공린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조금 전, 천우진에게 속삭였던 한 마디를 다시 떠올렸다.
모든 걸 얻을 생각이에요.
그는 자신이 대세의 흐름에서 무언가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 사공린의 변화일 가능성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