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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시몬 마구스를 본 천우진은 곧장 환술을 시전했다.
‘거지같군. 결국 마왕에게 잡아먹힌거냐, 제갈사.’
천우진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자신이 진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하지 않았다.
환신(幻神)
천마앙복(天魔仰伏)
환신 천우진은 사실 환술을 쓸 때 특정한 기술을 따로 연마해서 쓰는 게 아니었다. 천우진은 천재였기에 5세 무렵부터 이미 보통의 술법사와는 달리 술법에서 주문(呪文)을 삭제해서 시전하는 게 가능했다. 보통 술법에서 인간의 집중력만으로는 술수를 시전하기 힘들기에 주문의 언령을 통해 힘을 빌려오게끔 되어 있었는데, 천우진은 인지가 트였을 무렵에 술법의 근원적인 체계를 이미 본능적으로 깨달았기에 주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 술법사는 수십 년을 수련해도 도달하기는커녕 올려다보기도 힘든 경지였다.
그리고 천우진이 망량의 손에 이끌려서 망량선사의 손에 맡겨졌던 무렵에는 그냥 의지만으로 모든 술법을 발현할 수 있었다. 이미 그 시절에 대륙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간술법사를 압도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천우진에게 남은 것은 그저 술법의 근원이 되는 [힘] 그 자체의 향상뿐이었으며, 그건 지루하고 반복적인 수련에 불과했다. 그리고 천우진은 그 수련을 하면서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서 농사를 지었으며, 농사를 짓는 와중에도 계속 경지가 상승하는 걸 느꼈다. 애시당초 인간을 초월한 차원의 술법이해력이 있는 이상 별개의 수련이 필요없었던 것이다. 그가 즐겨쓰는 급급여율령의 주문도 아무런 주문도 없으면 심심하니까 그냥 붙여본 것에 불과했다.
다만, 초천재 천우진조차도 망량선사가 환신(幻神)의 칭호를 주었던 무렵에 자신과 망량선사의 격차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천우진이 천재라 해도 진정 신이라 불리는 존재에 비하면 벌레에 불과한 것이었다. 천우진은 그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고, 그 결과 자신 또한 허공록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백웅의 실종 후 수백여 년이 되어가는 지금.
마왕의 격에 이른 백련교주를 견제하기 위해 별도로 연마를 해 온 천우진의 기량은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인간의 환술경지를 초월한지는 옛날이었다.
별도의 기술을 연마한 건 아니었지만 그는 환술의 영역에 마왕조차도 집어넣을 수 있도록 환상술의 차원을 높였다. 그리고 천마앙복이란 차원을 높인 환상으로 세계를 뒤덮는 것뿐이었으나 - 그는 이 기술만으로 충분히 마왕에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왓
그 순간 천우진의 환상이 마왕 시몬 마구스라 밝힌 자를 뒤덮었다. 시몬 마구스는 순식간에 자신의 팔다리가 떨어지고 전신이 폭풍에 갈려나가는 걸 느꼈지만, 이내 씨익 웃으며 받아쳤다.
[심연을 비장(祕藏)하는 눈.]
시몬 마구스 또한 천우진과 마찬가지로 주문을 비롯한 모든 마법의 요소가 필요없었다. 외신과 계약한 마왕으로써 마력만으로도 질서를 왜곡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천우진의 공격은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세계의 구조를 바꾸면서 공간을 뒤덮는 원리였으므로 그저 마력방출만으로는 대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외신과 계약하며 받았던 강대한 주문 중 하나를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츠아앗
시몬 마구스의 머리 위에 혈안(血眼)이 떠오르는 순간 시몬 마구스를 찢어발기던 환상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천우진에게 곧장 반격하지는 못하고 그저 대치상태를 유지했다. 천우진이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자 자칭 시몬 마구스가 입을 열었다.
“인간으로써 술법을 여기까지 연마할 수 있다니 대단하군. 아마 [세계의 기록]으로 향하는 징검다리를 몇 개 놓아뒀나보구나.”
천우진은 시몬 마구스가 자신이 경지를 향상시킨 방법을 일견에 꿰뚫어보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불쾌함을 느꼈다. 상대가 객관적으로 불가일세의 천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악한 마도의 무리였기 때문이다.
“너와 술법론이나 얘기하고 싶지 않다. 네놈은 제갈사가 아니라 시몬 마구스냐?”
“그렇다.”
“제갈사는 어떻게 되었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놈을 먹어치웠지.”
“…….”
“믿지 못하는 눈이군, 흐흐.”
시몬 마구스가 음침한 웃음을 흘리자 사공린이 말했다.
“시몬 마구스. 방금 전 당신은 우리와 도전을 함께 한다고 했지요. 그 말은 이 아이테눔 문디에 도전할 의지 자체는 있단 말인가요?”
차가운 사공린의 말에 시몬 마구스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냉정을 찾았군. 제갈사를 내놓으라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설마요. 동료들 중 누구도 제갈사를 그렇게 걱정해주진 않습니다. 제갈사를 걱정해주는 것보다 무의미한 일은 없으니까요.”
시몬 마구스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내 제자답군. 형편없는 인망이야.”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를 말하세요. 그리고 육계(六界)에 도전하지 않고 인장의 방에서 대기하자는 이유 또한.”
사공린이 냉정하게 필요한 것만 따져묻자 천우진이 짜증을 냈다.
“사공린! 저 놈과 협력할 이유가 없다. 그냥 쳐 죽여도 모자랄 판에 무슨 협력을 논한단 말이냐?”
“아이테눔 문디를 뚫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나요? 폭왕의 소환자인 저 자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면 얘기조차 되지 않습니다.”
“누가 몰라서 하는 말 같아?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수백만 명을 인신공양하고 외신과 계약한 마왕을 믿고 같이 공략하자고? 그러느니 차라리 여기서 죽든살든 결판을 내는 게 옳아!”
천우진은 괜히 짜증을 내는 게 아니었고 백웅처럼 무의미하게 적의를 배출하는 게 아니었다.
마왕 시몬 마구스는 위험하다.
그리고 천우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마도의 존재는 결코 아군으로 삼아선 안 된다.
천우진은 방금 전에 백련교주라 해도 환상으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전력을 다해서 환술을 시전했었다. 그러나 마왕 시몬마구스가 외신의 힘을 빌린 주술 한 번으로 상쇄시켜버린 것이다. 그 말은 자칫하다가는 천우진도 눈앞의 마왕에게 당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며, 저런 위험한 마도의 존재에게 등 뒤를 맡기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뒤통수를 맞고 마왕의 노예가 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로운 꼴을 겪을 게 뻔했다. 마도(魔道)에 속하는 자들의 잔학함은 일반인이 상상하는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천우진이었다.
마왕 시몬 마구스가 말했다.
“너희 둘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라. 아니, 이 계약서를 보도록.”
휙
시몬 마구스는 천우진에게 양피지로 만들어진 계약서를 던졌다. 염력으로 허공에서 계약서를 받은 천우진은 그 계약서를 잠시 읽다가 인상이 구겨졌다.
“큭.”
“상황을 파악했나? 이제 얘기를 해도 되겠지?”
“무슨 일이죠? 그 계약서는….”
사공린이 질문하자 천우진이 대꾸했다.
“제갈사는 100년간 시몬마구스에게 자신의 육체를 넘기는 대신, 시몬 마구스에게 [옛 지배자] 폭왕 카르파도크의 소환자로써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할 것을 요구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저 놈은 그 계약에 따라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
“제길. 무슨 이런 일이….”
천우진이 씹어뱉듯 중얼거리자 시몬 마구스가 싱긋 웃었다.
“나는 마왕이니 계약은 지킨다.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에 협조해줬으면 좋겠군. 너희들의 목숨도 걸려있으니까….”
“웃기지 마라. 너같은 놈은 절대 못 믿어. 교언과 거짓말을 수만 번이고 해왔을 악랄한 새끼를 믿는 게 바보지.”
“술법의 극한에 이르러있으면서 마법은 잘 모르는군? 확실히 마도사와 마왕에게 거짓말이란 일상과 같지만, 계약서는 그 모든 마도의 전략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규약. 도리어 내가 마왕으로써 격이 높은만큼 나는 계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
“우린 절대 계약을 어길 수 없어. 한 번 정해진 계약은 우주가 끝날 때까지 지켜야 하지.”
시몬 마구스는 천우진이 조용해지자 말을 이었다.
“우선 사공린의 질문에 대답하지. 먼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방금 말했듯이 계약에 의해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 인장의 방에서 대기하는 이유는 외신(外神)의 주문을 써야하기 때문이다.”
“외신의 주문이라고?”
“큭큭큭….”
시몬 마구스는 흉소를 흘리다가 말했다.
“만일 이 자리에서 일계에 들어가서 폭왕 카르파도크를 소환한다면 놈이 아이테눔 문디의 수호자와 제대로 싸우려 하겠느냐? 너무 순진한 게 아니냔 말이다.”
“…….”
천우진도 사공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폭왕을 믿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던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천우진의 목표는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이 아니었기에 크게 관심가지지 않았었다. 여기에서 정보만 얻어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사공린을 데리고 도주하려는 게 천우진이었다.
천우진이 귀찮은 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시몬 마구스가 말을 이었다.
“제갈사는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대응할 방법도 알고 있었지. 그러나 그 놈의 지략과 달리 마법의 역량은 아직 지혜를 따라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게 몸을 넘긴 거겠지.”
“그런 건 관심 없다. 방법이나 말해.”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하면서도 기분이 계속 더러워지는 걸 느꼈다. 어쩔 수 없이 눈앞의 마왕 시몬마구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걸 인정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제갈사가 계약서까지 쓰면서 저 악랄한 존재의 도움을 얻으려 했다면 일단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간에 눈앞의 저 놈은 뭔가 공략법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몬 마구스가 말했다.
“중요한 건 폭왕이 전력으로 싸우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전력으로 싸우게 하되 속전속결으로 끝낼 수 있어야 하지. 그렇게 하자면 약간의 편법이 필요한데, 그게 바로 천하에서 나만이 쓸 수 있는 주문이다.”
“외신의 주문… 방금 네가 썼던 것 같은 주문인가.”
“크크…. 큰 주문이니 오랜 시간과 절차가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에 멈춘 것이지.”
“과연.”
천우진은 단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편법을 써서 속전속결인가. 그리고 그 편법, [외신의 주문]을 쓰기 위해 이 중앙의 인장실에서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이군. 시간제한이 시작되면 편법을 쓰지 못하는 거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정말로 중요한 ‘편법’인 [외신의 주문]이 어떤 것인지는 듣지 못했다. 천우진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시몬 마구스에게 말했다.
“외신의 주문으로 어떻게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할지 정확히 설명해라. 그 전에는 이야기도 되지 못한다.”
“그 정도야 설명해 주지.”
시몬 마구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의 설명을 다 들은 천우진과 사공린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외신의 주문에 그런 효과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그러나 천우진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외신의 힘을 빌리는 주문이라 해도 주문만으로는 방금 말한 정도의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협력을 구하는 거겠지.”
“그렇다. 환신 천우진, 네가 모든 힘을 다해서 나를 보조해줘야 한다.”
“…….”
“술법의 경지로 마왕에 대적할 수 있는 너라면 외신의 주문이 진행되는 동안 내게 걸리는 부하(負荷)를 완화시켜줄 수 있겠지. 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외신의 주문을 완성할 수 없다.”
“거짓말하고 있군. 믿을 수 없어.”
“크크, 선택은 너희 몫이니 알아서 해라.”
그 때 사공린이 말했다.
“시몬 마구스. 제갈사의 계약을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받아들인 이유가 뭐죠? 애시당초 당신들은 현실세계 바깥에서 싸우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경위를 알고 싶군요.”
“큭큭큭!!! 받아들인 이유? 그야 거저먹기니까….”
“거저먹기?”
“제갈사 놈은 내게 무한히 이혼대법으로 몸뺏기를 시도해 왔다. 놈이 쓸 수 있는 이혼대법은 나도 쓸 수 있으니, 끝이 나지 않는 지리한 몸뺏기가 계속되었지. 그러던 중 놈이 백 년의 육신대여권을 주면서 이번 계약을 제안한 것이다.”
시몬 마구스가 흉소를 흘렸다.
“놈은 실수한 것이다. 백 년이나 시간이 있으면 제갈사는 절대로 내게서 몸을 탈환할 수 없다. 원래 이혼대법이든 마력이든 모두 내가 훨씬 위였다! 결국 놈은 내게 법문을 안겨준 채 패배하는 것이지…. 크흐흐.”
“…….”
“지금도 제갈사의 혼백은 내 안에서 흡수되어 작아지고 있다. 이걸 거저먹기라 하지 않으면 뭐라 하겠느냐. 게다가 놈의 계책대로라면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랬구나.
지금껏 제갈사가 대등한 싸움을 하고 있었구나.
사공린은 내심 시몬 마구스가 하는 말 속에서 상황을 유추해 냈다. ‘거저먹기’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제갈사가 마왕 시몬마구스를 상대로 쟁탈전을 대등하게 이끌어냈다는 걸 의미했다. 시몬마구스가 결국 지리한 싸움을 이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제갈사가 내민 미끼를 덥석 받을 정도로 대등한 싸움이 아니라면, 시몬 마구스가 아이테눔 문디의 도전같은 위험천만한 제안을 수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들은대로라면 저 계약은 완전무결한 불공정계약. 제갈사에게만 철저히 불리한 계약이었지…. 여기서 뒤집을 수 있단 말인가? 불가능해….’
시몬 마구스의 말대로다. 원래부터 시몬 마구스의 실력이 훨씬 위였던 데다가 100년이나 혼백을 빨아먹히며 강제로 육체를 대여해 준다면 제갈사는 진 거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술사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역전이 불가능했다. 시몬마구스도 영리한 존재이니 당연히 앞뒤를 다 재어보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제갈사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야. 여기선 제갈사의 뜻대로 할 수밖에.’
그렇기에 사공린은 제갈사가 승부를 포기하고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바친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내심 씁쓸함을 느끼며 말했다.
“좋아요. 힘을 합쳐보죠.”
“너는 나와 천우진이 외신의 주문을 완성하는 동안에 혹시 이 인장의 방 바깥에서 방해가 들어온다면 차단하는 역할을 맡아라.”
“알았어요.”
이윽고 시몬 마구스의 주문이 시작되었다.
무려 7일 밤낮동안 계속해서 주문만 외울 정도로 기나긴 의식!
그리고 천우진은 옆에서 시몬 마구스를 보조했다. 보조라고는 해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주문을 외우는 시몬 마구스의 맞은편에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사공린은 그게 어째서 보조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정상급 술사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교감되고 있는 듯 했다.
또한 사공린은 시몬 마구스의 주문이 이어지는 동안에 그의 경고대로 인장의 방에 사악한 힘이 침투해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꿀렁…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줄무늬를 둘러싼 흑백의 무언가가 액체처럼 출렁이더니 덮쳐왔다. 그 순간 호법을 서고 있던 사공린은 그 ‘무언가’를 향해 유아독존을 발출해냈다.
투학
공간이 튕겨져나가며 어둠으로 재차 출렁이며 흡수되었고, 마치 늪에서 현실을 들여다보듯 무수한 수백 개의 눈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이런 ‘습격’은 쉴새없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보통 인간이라면 예전에 미쳐서 죽었으리라.
‘…사흘 하고도 열 시진째인가.’
사공린은 체력과 기력이 거의 다 소진되어서 정신력으로 움직일 지경이 되었다. 이런 상태로 7일을 버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녀가 절대지경에 숙련되어 있으며 수십여년 이상 강대한 내공을 연마했다 해도 한계는 있는 것이다. 사공린이 똑바로 일어서서 행공(行功)을 하는 동안 의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인간을 버려라…. 그 순간 모든 걸 얻을 수 있으리라.]
점차 선명해지는 목소리.
이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사공린이 고비에 처할 때마다 줄곧 유혹을 해 왔다. 그 유혹은 마치 천천히 알의 껍질을 벗기듯 사공린의 정신을 녹이고 있었으며 사공린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그러나 사공린은 코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얻고 싶은 건 나 자신이야.”
그렇게 다짐하자마자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사공린은 간신히 한 번의 유혹을 또 이겨내었으나 갈수록 버티기 힘들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는 단순히 들려오는 차원을 넘어서서 사공린의 영혼 자체를 옥죄는 것 같았다. 의지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으리라.
그런 사공린의 상태를 알아챈 것일까? 가만히 앉아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천우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사공린. 왜 이런 생지옥에 도전했나? 너 때문에 나도 죽게 생겼잖나.”
“이유는 전에 말했어요.”
“인간으로써 죽고싶은 자리를 찾고싶은 거 같더군. 무언가가 네게 [부름]을 하고 있는 거겠지.”
“…….”
“부르는 게 누구인지 혹시 모습을 볼 수 있나?”
“볼 수 없어요. 그저 먼 곳… 아주 먼 곳에서 목소리만 들려오지요.”
“전형적이군. 흥. 신들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 쓰는 전형적인 방식이야.”
천우진은 비웃듯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사공린. 정말 인간으로써 죽고싶다면 언제든 내게 말해라. 내가 환살(幻殺)로 고통없이 죽여주마.”
“환살?”
“네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언제지? 환술으로 그 시절을 무한히 반복하게 해 주겠다. 신의 꼭두각시가 되어서 고통과 절망을 겪는 것보단 낫겠지.”
진심이다.
사공린은 천우진이 놀리거나 도발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죽여주겠다고 말하는 걸 깨달았다. 천우진은 신의 제자이기에 신이 인간을 타락시킬 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죽는 게 차라리 구원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차라리 천우진 자신이 고통에 빠진 사공린을 죽인다면 백웅의 충격이 덜하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비와 동정의 마음을 느낀 사공린은 혹하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지요.”
“왜?”
“제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절같은 건 없었으니까요.”
“맘대로 해라.”
그리고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백웅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군.’
차라리 죽는 게 구원이라는 기분.
하물며 전생능력을 갖고 있는 전생자라면 얼마나 큰 유혹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백웅은 지금의 사공린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고통을 버텨내며 자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사공린은 백웅의 등에 짊어진 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하며 생각했다.
‘이것이 삶이라는 걸까.’
그리고 얼마 후.
시몬 마구스의 주문이 모두 완성되었다. 시몬 마구스는 주문을 완성시키자마자 양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나, 위대한 어버이이신 산양의 이름을 빌어 여기에 세계의 다섯 요소를 부른다.
모나드(monad)에서 태어난 영지(靈智)여, 그대의 이름은 원초(Initium)이니라.
소피아(sofia)의 부름을 받은 신비여, 그대의 이름은 청뢰(fulmine)이니라.
해(解)를 소망하는 전서여, 그대의 이름은 침묵(silentium)이니라.
적혜(積慧)를 기록하는 사서여, 그대의 이름은 겸양(pudor)이니라.
위신(僞神)을 숭앙하는 우자여, 그대의 이름은 충만(Plenitudo)이니라!]
쿠와아앗
그 순간, 시몬 마구스가 뒤집어쓰고 있던 ‘제갈사’의 가죽이 몽땅 날아갔다. 그리고 영지주의의 마왕(魔王)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마치 예전에 백웅이 보았던 것처럼 수많은 모래같은 마소(魔素)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끔찍한 괴물처럼 보였다.
흉물스러운 이계의 덩어리 근처에 책처럼 생긴 촉수덩어리가 떠다녔고 어둠의 주언(呪言)이 마왕의 위용을 뒷받침했다.
[나 시몬 마구스, 다섯 요소를 기둥으로 하여 위대한 외신의 힘을 소환하나니….]
시몬 마구스의 눈에서 혈광이 뿜어져 나오며 마지막 주문이 영창되었다.
[데미우르고스여! 아이테눔 문디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합쳐주십시오!!]
쿠구구구!!
그 순간, 인장의 방을 둘러싸고 있던 여섯 개의 세계와 거기로 통하는 문이 몽땅 하나가 되고 말았다. 정확히는 [옛 종족]의 마법으로 인해 봉인되어 있던 경계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신의 주문, [데미우르고스의 합일]!
오로지 외신 산양과 계약한 마왕 시몬마구스만이 시전할 수 있는 주문이었으며, 그 효과는 모든 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려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주문을 쓴 이유는 시간제한 때문이었다. 하나하나 쓰러뜨리다보면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차라리 폭왕의 힘을 믿고 한방에 다 쓰러뜨린다는 간단한 전략!
츠아아앗!!
갑자기 하늘이 밝아졌다.
[나오시오, 폭왕이여.]
그리고 시몬 마구스는 그대로 폭왕을 소환해 내었다. 폭왕은 소환되자마자 의아한 듯 말했다.
[이건 대체 무슨… 여기는 어디인가?]
[아이테눔 문디이옵니다.]
[뭣… 그럴 리가. 내가 권속들에게 전해들은 것과는 전혀 다르구나.]
그 때였다. 거대한 흑룡이 당황하고 있을 때 성좌의 별빛이 가득한 듯한 시꺼먼 우주로 변한 이공간(異空間)에서 꿈틀거리면서 무언가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기어나오는 듯하던 그 무언가는 바로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기형 괄태충이었다.
그리고 기형 괄태충은 한 쌍의 촉수처럼 생긴 눈을 뻗어서 이 쪽을 바라보며 의사를 전달했다.
[[옛 지배자]인가…. 세계파멸의 법문을 얻으려고 기어코 본체까지 아이테눔 문디에 도전하는 일이 발생했는가?]
[네놈은….]
폭왕은 기형 괄태충을 보자 경계하듯 몸을 움츠렸다. 형태는 꼴사나워보였으나 폭왕이 얕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저 존재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가공할 마력은 분명히 마왕급을 초월해 있었다.
[지금의 우리에게 버거운 상대같으나 대장로와의 계약에 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구나.]
[뭣…!!]
[네가 우주 어디에 있던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고 인정해주지….]
스르르륵
스르륵
천천히 사방에서 다섯 개의 균열이 추가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형(異形)의 괴물들이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폭왕은 그답지 않게 긴장한 듯 몸을 꼿꼿하게 세우는 모습이었다.
[나는 ‘비탄을 기어오르는 자’. 우주의 멸망을 방지하기 위해 은하의 저편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왔노라.]
기형 괄태충이 자신의 촉수눈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법문에 세계파멸의 권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옛 종족] 대장로의 권유에 의해 법문을 수호하기 위해 모인 자들…. 네게 여섯 명의 지배자를 이겨낼 힘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어리석은 자여!]
[……!!]
폭왕은 잔뜩 마력을 응축한 채 강대한 살의를 뿜어내었다.
[이 놈들!! 숫자만 믿는 거냐? 너희 하나하나는 내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폭왕의 마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포위한 여섯 명의 존재들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압박받는 기색이 아니었다.
[네가 숫자를 이겨낼만한 놈도 아닌 것 같군.]
[…….]
[어디 붙어 보자.]
도리어 아이테눔 문디의 수호자들은 폭왕을 향해 서서히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폭왕은 시시각각 몰리는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천우진은 멀리서 그 광경을 쳐다보다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미쳤군. 정말 미친 봉인이었잖아.”
“천우진. 어떻게 된 거죠?”
“보면 모르나? 최악의 상상이 현실이 된 거지. 우리는 아이테눔 문디의 육계를 수호하는 게 [옛 지배자]의 화신이나 사도 정도이길 원했는데….”
천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저 놈들 전부 [옛 지배자]다. 빌어먹을…!! 씨발!”
“……!!”
그랬다.
아이테눔 문디의 실체는 바로 6명이나 되는 [옛 지배자]들이 직접 지키는 절대봉인!
칠요의 시련과 달리 애초부터 그 어떤 존재가 찾아와도 법문조각을 가져갈 수 없게끔 만들어놓은 구조였던 것이다. 아무리 폭왕이 삼황오제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어도 저 정도로 많은 숫자의 [옛 지배자]를 상대로는 승산이 낮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실로 절망 그 자체인 난이도!
과연 백웅이 다음 생에 아이테눔 문디를 뚫는 게 가능할지조차 의문이었다. 천우진이 허탈감과 절망을 느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사공린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저들 모두가 온전한 힘을 갖고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힘의 크기로 보아 전력의 절반 이하가 아닐까요? 충분히 승산이 있을지도….”
그 말에 천우진이 사공린을 쳐다보았다.
“뭐? 무슨 미친 소리야. 당연히 본체의 전력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절반의 힘을 발휘하는 진령체(眞靈體)가 소환되어 있잖나. 폭왕도 조건은 마찬가지니까 그럼 별로 다를것도 없어.”
폭왕 또한 완전한 본체가 소환된 게 아니다. 천우진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기에 좌절을 느낀 것이었다.
“그렇죠. 남은 건 인과율 싸움인 거겠죠. 그리고 저 간사한 시몬 마구스가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못했을 것 같진 않아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너. 뭔가 ‘다른 게’ 보이는 거냐?”
“…….”
순간 천우진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사공린은 어떻게 저 [옛 지배자]들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란 걸 알고 있을까?
인간이란 본디 [옛 지배자]를 보면 미쳐죽거나 간신히 버티기만 해야 정상일텐데 사공린은 일견에 [옛 지배자]가 지닌 잠재력과 힘의 정확한 [크기]까지 측정해낸 것이다. 천우진이 설마하는 눈으로 사공린을 보고 있을 때였다.
마왕 시몬 마구스가 소환된 폭왕에게 나직이 말했다.
[신이시여. 이 공간은 [데미우르고스의 합일]이라는 주문에 의해 통합된 공간이옵니다. 그리고 이 주문은 검은 산양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이 안에서 술자와 소환된 존재는 고스란히 가호를 이어받사옵니다.]
그 말을 들은 폭왕이 솔깃하는 기색이었다.
[…그런가? 하긴, 인과율이 몰려드는 게 느껴지는군.]
[해볼 만 합니다. 인과율을 지원받는다면 숫자의 불리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폭왕이 분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크크크… 그러나 내가 존재를 걸고 싸우는 흉험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싸움이 끝나면 소환자인 네놈을 그대로 먹어치워 주마.]
[이기고 나서 말씀하심이 좋겠군요. 제가 보조하겠습니다.]
마왕인 시몬 마구스라면 [옛 지배자]들의 격전 사이에서도 충분히 살아남으며 신의 전투를 보조할 수 있었다. 사법에 능하기 때문에 권능에 대응하기도 쉬운 것이다. 바로 이것이 술자가 인간인 제갈사일 때와의 본질적인 차이였고 간신히 승산을 논할 수 있는 이유였다.
사실 수호자가 죄다 [옛 지배자]인 경우는 시몬마구스조차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경우였다. 자신있게 얘기는 하고 있었으나 시몬 마구스도 나름대로 각오를 하는 중이었다. 그의 평생 최대규모의 마도결전이었다.
[좋다…. 싸워보자!!]
번쩍!!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섬광이 터짐과 동시에 폭왕과 여섯 명의 지배자들이 동시에 겨루기 시작했다. [옛 지배자]들의 권능이 쉴새없이 발현되면서 시공간이 왜곡되었고, 멀찌감치 피해 있었던 천우진과 사공린도 그 싸움에 휘말릴 뻔 했다.
쿠구구구…!!
천우진은 천법 환신을 써서 자신과 사공린을 보호하다가 시공간이 파괴되는 흐름과 역장을 도저히 못 이길 지경이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필멸자 수준에서는 더 이상 환술경지를 상승시킬 수 없는데… 어쩔 수 없구나!’
천우진이 힐끔 자기 뒤에 있던 사공린을 뒤돌아보며 외쳤다.
“지금부터 스승님께 받은 가호를 쓸건데 죽어도 나 원망하지 마라!”
“알았어요. 원망 안할 테니 서둘러요.”
“…응?”
너무 태연해서 도리어 천우진이 당황했다. 사공린이 그런 천우진을 재촉했다.
“여유가 없어요.”
“아, 알았어.”
왜 사공린한테 부림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천우진은 알쏭달쏭해하면서도 전력을 다해서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망량선사에게서 받은 가호를 쓸 때가 온 것이다.
‘이걸 쓰면, 적어도 권능에 휘말려 죽진 않겠지….’
하지만 확률의 세계에 휩싸여 죽을 가능성이 있다. 천우진은 생사를 건 모험을 하는 감각에 눈을 그만 질끈 감고 말았다.
무위(無爲)의 끌개
다음 순간, 차원을 넘어선 사변(思辨)의 세계에서 새까만 선이 불규칙하게 움직이며 천우진과 사공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실재(實在)와 비선형(非線型)을 엉키게 하는 혼돈의 끌개가 소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