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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폭왕 카르파도크는 제갈사의 말에 약간의 흥미를 느낀 듯 했다. 그래서인지 흑룡의 몸을 살짝 앞으로 움직여서 파충류의 눈을 번득거리며 말했다.
[재밌군. 그 법문조각은 가져왔나?]
제갈사가 대꾸했다.
“사정상 법문조각을 봉인한 제단을 옮겨올 방법이 없사오나.”
제갈사가 눈짓하자 옆에 있던 백련교주가 무언가 마도의 언어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 마법을 즐겨 사용하지는 않으나 실제로는 마도의 소양을 출중하게 갖추고 있었기에 상급 마법도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문이 끝나자 전방에 조그마한 차원의 틈새가 만들어졌다.
쉬리릭…
“저기에 법문조각이 있사옵니다.”
빨려들 것만 같은 차원의 틈새 내부에는 백련교의 천암(天暗)의 제단이 비치고 있었다. 천리안과 차원왜곡을 응용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폭왕은 그 제단을 확인하자마자 히쭉 웃으며 말했다.
[잘 가져가마.]
폭왕이 선택한 것은 강탈!
인간과 교섭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우웅!!
폭왕이 갑자기 입을 벌리고 [옛 지배자]의 언령(言靈)을 시전했다. 우주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언령은 섭리를 왜곡시키는 힘이 있었기에, 한낱 물질계의 시공간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그는 곧장 법문조각과 제단을 통째로 자기 앞에 소환하여 가져갈 생각이 분명했다.
스스스 -
아니나 다를까 폭왕의 뜻대로 천암의 제단이 통째로 소환되었다. 폭왕은 실쭉 웃으면서 말했다.
[내게 보물을 갖다바친 게 갸륵하구나. 그 정성을 보아 고통없이 잡아먹어주마.]
“…….”
함께 따라온 사공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정말로 제갈사 말대로 교섭 한 마디 못 해보고 강탈로 흘러가게 될 줄이야!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에게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던 사공린으로써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저렇게 이기적이고 사악한가…. 저것이 [옛 지배자]의 행동양식인가.’
동시에 그녀는 모든 게 제갈사의 의도대로 흘러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제갈사야말로 모든 전생동료 중에서 가장 마도(魔道)의 길에 정통한 숙련자인 것이다. 그녀가 내심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콰지지직!!
[크으윽?!]
폭왕의 앞다리 두 개가 갑자기 뭉개져 버렸다. 천암의 제단에서 뿜어져나온 기묘한 마력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러자 폭왕은 급히 권능을 발휘해서 천암의 제단을 원래 장소로 되돌려보냈는데, 다음 순간 폭왕의 물질계 육신이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다.
쿠콰콱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이었다. 폭왕이 방비하려 해도 미처 그럴 여지가 없어보였다.
정적.
눈 깜짝할 사이에 [옛 지배자]가 사라지는 걸 보자 다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방금 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서 뒤틀린 어둠이 새어나오더니 폭왕이 다시 물질계에 육신을 현현했다.
우웅…
폭왕은 분노한 듯 흑룡의 입을 벌리며 외쳤다.
[감히 벌레들이 나를 농락하다니!! 모조리 죽여주마!]
당장이라도 폭왕이 아군을 공격하려는 찰나, 제갈사가 절묘한 시간차로 폭왕에게 말했다.
“폭왕이여, 저희는 천암의 제단의 방어작용을 해제하여 그대로 법문을 안겨드릴 수 있나이다.”
멈칫하고 폭왕이 굳었다.
잠시 후 폭왕은 파충류 특유의 눈을 번들거리며 말했다.
[자세히 설명해라.]
“천암의 제단은 달마가 제작한 것. 당시 달마의 마력은 삼황오제에 이르렀으며 그가 전력을 다해 봉인한 제단이옵니다. 방금 귀하를 공격한 것은 제단 내에 있던 법문의 마력 뿐만 아니라 제단의 마력도 합쳐진 것... 그러므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옛 지배자]라 해도 얻을 수 없으며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만 해제할 수 있사옵니다.”
[방법을 말해라.]
“방법은 바로 제단에 다른 법문의 조각을 넣는 것. 쪼개진 모든 법문조각이 모일 때 제단이 법문을 복구할 것이며 완성된 법문이 출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달마의 안배이며 제단의 역할이옵니다.”
[호오… 그러느냐.]
제갈사는 슬그머니 폭왕에게 말했다.
“사실 대웅제국 황궁의 [지배자]께서도 저희에게 제안해왔습니다. 천암의 제단을 자기에게 주지 않겠냐고….”
[…….]
“허나 무작정 가호만을 위해 바치는 것은 안될 일. 저희는 자비로운 선택을 바라고 다른 분께 호소하러 왔나이다.”
[크크크… 감히 [옛 지배자] 사이의 경쟁을 유도하다니. 오만한 필멸자구나.]
폭왕은 껄껄 웃었지만 그리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제갈사가 한 말은 대부분 진실이었고 아직까지 폭왕에게 위해가 될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폭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와 이야기 정도는 해 주마. 원하는 게 뭐냐?]
“아까도 말씀드렸듯 저희는 이 제단과 그 안에 들어있는 법문 한 조각의 소유권을 귀하에게 넘기겠사옵니다. 그 대신에 아이테눔 문디에 존재하는 법문을 획득하는 일에 전적으로 나서주십시오. 저희는 귀하가 모든 법문을 얻을 때까지 모든 신명을 바쳐 섬길 것을 약속하겠사옵니다.”
[아이테눔 문디… 그래…. 그 곳에 법문조각이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후웅
폭왕은 중얼거리다가 잠시 날개를 홰쳤다. 잠시동안 고민하던 폭왕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 너희를 때려죽이기만 하면 소유권은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제단이 있는 장소는 알았으니 나머지는 차지하고 나서 생각해도 될 일.]
“원대로 하십시오. 저희는 저항할 방법이 없사옵니다. 허나 천암의 제단은 정해진 방법과 순서대로 진행하지 않으면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옵니다.”
[크크크… 내가 못 할 줄 아느냐?]
“저희 인간들은 벌레이므로 벌레처럼 행동할 뿐이옵니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십시오.”
[…….]
태연자약한 제갈사의 태도에 폭왕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무리 마도사라서 마력에 내성이 있다 하더라도 폭왕의 마력에 노출된 순간 정신력이 고갈되어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폭왕의 본체 앞에서는 아무리 광기에 젖은 마도사라고 해도 배짱을 튕길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눈 앞의 인간마도사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상함을 느낀 폭왕은 마법을 써서 제갈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제갈사의 실체를 알아채고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 네놈… 승격(昇格) 직전이구나. 인간인 척 하느라 수고가 많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백련교주와 사공린이 거의 동시에 제갈사를 쳐다보았으나 제갈사는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폭왕이 말했다.
[좋다. 그 계약을 받아들이지. 계약서는 갖고 왔느냐?]
“여기 있사옵니다.”
제갈사가 백련교주를 힐끔 바라보자 백련교주는 미리 가져온 인피(人皮) 계약서를 꺼냈다. 이것은 달마 시대부터 이어져내려오는 계약서로써 마도계약에서 꽤나 고급품으로 치는 물건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감도는 인피 계약서 위에 먼저 제갈사가 손가락으로 피를 내어서 계약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작성이 끝나자 폭왕은 한동안 계약서를 읽은 후 자신의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꿀꺽
폭왕이 계약서를 삼킨 후 안광을 빛냈다.
[계약을 어길 경우 너희는 생각했던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유념하고 있사옵니다….”
파앗!
폭왕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 물질계에 머무를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이계로 가 버린 것이다. 백련교주가 천암의 제단을 이어놓은 마법을 해제하자 제갈사가 그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찌어찌 고비를 넘겼군. 그렇잖은가?”
[정말 미친 짓이었다. 저 정도로 호전적인 [옛 지배자]가 현신해 있는데 대등하게 교섭을 추구하다니…. 제갈사, 너는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지?]
백련교주의 의문은 지당했다.
제갈사의 책략은 바로 천암의 제단의 속성을 이용해서 폭왕을 끌어들이는 교섭을 하는 것! 법문 조각을 다 바치는 대신에 [옛 지배자]를 끌어들여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하는 전략이었다. 비록 이쪽의 법문조각을 잃게 되겠지만 이이제이를 추구할 수 있으므로 굉장히 효율성이 높았다.
다만 이 전략의 문제점은 호전적인 [옛 지배자]가 언제든 교섭따위 무시하고 이쪽을 공격해서 학살하거나 법문부터 강탈하고 볼 수 있다는 거였는데, 제갈가 책사들에게는 이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백련교주라 하더라도 진짜 [옛 지배자] 앞에서는 벌레에 지나지 않았기에 무력으로 제지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지배자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제갈사는 이 미친 전략을 실행해서 성공시켰다. 백련교주로서는 그 비법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가 대꾸했다.
“세계에서 가장 미친 혼돈을 엿먹일 수 있다는 게 짜릿하지 않나? 마도사로서 누릴 수 있는 극상의 체험이라 할 수 있지. 크크크….”
[…….]
백련교주가 침묵하자 사공린이 말했다.
“제갈사. 아까 저 존재가 승격이라고 했던 건 무슨 말이죠? 당신이 설마 [옛 지배자]가 된다는 말인가요?”
“그렇게 초월자가 되는 게 쉬우면 세상의 마도사들이 무슨 고생을 하겠냐? 우주의 악(惡)을 지배하는 성좌가 되는 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다만 승격에 대해 몇 마디 해주자면, 내가 시몬 마구스와 겨루다가 본의 아니게 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자세히 설명해요.”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어. 아직도 나는 싸우는 중이라서 비밀을 엄수해야할 게 많거든….”
스스스
말이 끝나자 제갈사의 몸이 서서히 흩어졌다. 또 다시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기다려!”
사공린이 급히 그를 막으려 했으나 백련교주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제지했다. 사공린이 그를 돌아보자 어느 새 제갈사는 사라져 있었고, 백련교주가 말했다.
[같은 마도사로서 이해할 수 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모든 걸 잃게 되는게 흉험한 마도의 세계지. 하물며 이 세계에서 영지주의 마도사의 극점에 도달한 마왕과 겨루는 일이면 우리가 어설프게 끼어들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제갈사는 너무 수상해요. 그가 우리에게 필요한 책략과 정보를 전해주는 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상황에 딱 알맞은 것만 갖고 올 수 있다는 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
백련교주는 사공린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백련교주도 내심 제갈사를 의심하고 있었지만 그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 백련교주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고 보는 자는 아마 없으리라.
그러나 백련교주는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판단하고 움직이면 굉장히 큰 손해를 본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자였다. 또한 그걸 티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공린의 말에 담담히 대꾸했다.
[지켜보자. 제갈사를 믿는다는 건 저 자 본인을 믿는 게 아니라 백웅을 믿는 것과 같은 문제니까….]
“…알았어요.”
그들은 이윽고 대웅제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전력을 정비해서 아이테눔 문디에 도전할 인원을 추렸는데, 제갈유룡이 나서서 말했다.
“결코 전원이 모든 걸 걸고 도전하는 형태가 되어선 안 된다.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은 물론 전생자 백웅을 도와주는 궁극적인 목표지만, 우린 거기에 모든 걸 걸 순 없다. 아무리 [옛 지배자]의 도움이 있다 하더라도….”
[이해하고 있다.]
“어차피 [옛 지배자]가 전면에 나서서 공략하는 형태가 된다면 우리 필멸자의 힘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인원을 최대한 줄이는 게 도리어 낫다고 본다.”
[흐음…. 내가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에서 빠지기를 원하는가?]
속내를 알아차린 백련교주의 물음에 제갈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 그대는 이 제국의 구심점이자 정점. 그대가 죽는 순간 대웅제국은 끝이나 다름없다.”
[그럼 어느 정도의 전력이 필요하지.]
“초상기인, 제갈사. 끝이다. 더 이상은 안 된다.”
[…거의 아무것도 들여보내지 않는건가. 정말로 폭왕 카르파도크에게 모든 걸 맡기는 식이군. 초상기인은 상황을 간접적으로 살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거고.]
“그렇다. [옛 지배자]도 위험한 장소에 뭐하러 우리가 주전력을 넣어야 하는가? 실패하더라도 정보만 얻는 걸로 끝낼 수 있으니 이게 가장 옳다.”
[…….]
제갈유룡의 계책은 옳았다. 기껏 제갈사를 통해서 과감한 교섭으로 [옛 지배자]의 조력을 이끌어냈다면 당연히 아군 전력을 아끼는 게 이득인 것이다.
백련교주는 심사숙고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아니. 그걸론 부족하다. 너무 몸을 사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조직 수장으로서 나의 감이다.]
제갈유룡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교주! 단지 감만으로 지옥같은 장소에 귀중한 자원을 털어넣겠다는 건가?”
[우리는 정공법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예전부터 모험에 모험만을 거듭하고 있지. 제갈사의 전법이 기책(奇策)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그 책략에 맞춰줘야 할 것이다. 그 정도는 그대도 알고있을 터.]
“알고는 있다. 허나 실행하는 건 다른 문제다. 백웅이 오기 전에 다 죽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백련교주의 안광이 빛났다.
[그렇다면 너희를 대신해 내가 결단을 내리겠다.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에 도전하고 싶은 자, 자발적으로 지원하라! 그 지원까지 막지는 않으리라.]
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옛 지배자]조차 감당하기 힘든 지옥같은 시련에, [옛 지배자]와 동행하며, 악몽같은 이계의 시련을 시간제한 내에 공략! 말 그대로 죽으러 가는 거나 다름없기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어요.”
손을 든 것은 바로 사공린이었다. 사공린을 향해 장내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 해야한다면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겨우 그런 이유인 건가? 죽음의 길이라는 걸 제대로 이해한 것인가? 목숨을 거는 게 아니라 버리러 가는 거라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터. 모든 공략은 폭왕이 진행할 것이며 거기에 끼어들어 개죽음만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교주의 반문에 사공린은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위지혼에게서 얻은 이 목숨을 언제 버릴지 선택하는 것 정도는 스스로의 의지로 하고 싶습니다.”
[…마치 백웅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군.]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사실은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사공린 또한 백련교주와 마찬가지로 모종의 감으로 이번 도전에는 충분한 모험이 있어야 대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 감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으나, 아무래도 사공린이 얼마전부터 듣고 있는 [목소리]가 은연중에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는 느낌이었다.
[좋다. 마음대로 하라. 다른 지원자는 없나?]
그 때였다.
홀연히 장내에 나타난 청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도 간다!!”
[천우진.]
천우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공린. 너 때문에 나도 지옥에 가게 된 거다. 알겠냐?”
“그것 참 고맙군요.”
“제기랄!!”
천우진은 마침내 욕지기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설마하며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는데 결국 동료가 알아서 죽으러 가는 걸 지켜보게 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선택이 장기적으로 전생자의 패배를 유도하리란 걸 알았기에 기가 막혔다. 서문혜든 사공린이든 죽게끔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의 목표는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이 아니었다. 바로 이런 자살행위에 희생될 자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백련교주가 말했다.
[출발은 삼 주야 후로 하겠다. 제갈사가 폭왕과 약속한 때가 그때이니.]
천우진은 내심 생각했다.
‘…스승님의 가호를 조금이라도 얻어야겠어.’
그의 목표는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이 아니었다. 헛된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안전하게 탈주하는 것이었고, 그 탈주는 현재 천우진의 역량만으로는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천우진은 이 생각 때문에 망량선사를 찾아가게 되었다.
“어이. 따라와.”
천우진이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사공린에게 말했다.
우웅
천우진은 사공린과 함께 망량선사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망량선사의 마을에 들어오는 순간, 천우진은 자신의 스승이 눈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승님을 뵙니다.”
마치 흐르는 듯한 아지랑이.
백웅이 보는 것처럼 고양이 형태는 절대로 아니었다. 천우진은 줄곧 꿈 혹은 환몽과 같은 세계에서만 스승인 망량선사를 보아왔으며 그나마도 형태가 정해져있는 일은 없었다. 망량선사는 천우진이 자신을 찾아오자 말했다.
[제자야. 네 운명을 점쳐보았다.]
“……?”
[너는 종말의 그 때까지 마치 소처럼 일을 하게 될 것이다….]
“…….”
천우진은 참혹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스, 스승님. 그런 예언은 듣고싶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다. 그게 너의 운명이다.]
천우진은 무릎을 꿇고 통한의 눈물을 쏟았다.
놀고 싶은데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게 너무나 분했다.
“크흑!!”
[어째서인지 아이테눔 문디에 도전하는 것보다 더 슬퍼보이는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가호를 받고 싶으냐?]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예언은 미래를 읽는 것이니, 제가 소처럼 일하려면 일단 살아남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자야. 미래의 필연성을 맹신하지 마라. 신들이 인과율을 읽을 때 가장 실패하기 쉬운 이유가 필연성을 맹신하는 것 때문이니까.]
무언가 준엄한 경고를 한 망량선사가 말을 이었다.
[천우진. 네게 줄 가호는 이미 정해두었다.]
“파천의 가호는 아니겠지요.”
[당연히 아니다. 대신에 무위(無爲)의 끌개를 너에게 부여하노라.]
파앗!!
빛이 번뜩이더니 이윽고 불규칙한 무질서의 원이 제멋대로 난무하며 천우진의 몸을 감쌌다. 천우진은 무질서의 원이 이윽고 시꺼멓게 변하며 허공에 함묵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스승이시여. 끌개를 잘 응용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건 너무나 높은 차원의 힘입니다.”
천우진은 천재였으며 술법사의 극한에 이르렀기에 한 눈에 무위의 끌개가 어떤 힘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너무 고차원적인 원리이기 때문에 즉시 써먹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심지어 환술의 대가인 천우진조차 이 가호를 제대로 쓸 자신이 없기에 우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응용할 방법이 사실 마땅치 않지. 파천의 가호보다 약하면서도 사용하는 게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에 인과율을 준수한 상태에서 네게 내려줄 수 있는 최선의 가호이다. 그 이상의 가호를 줄 방법은 없다.]
“…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또한 사공린은 너의 가호에 영향을 받을 테니, 미래는 네가 정한다고 봐도 좋다.]
“우주의 미래에 대한 선택권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저에게 주셔도 우주의 인과율이 영향받지 않습니까?”
[상관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전생자가 귀환한 후에 모든 게 시작되기 때문이지….]
“…….”
[너희의 행위는 필연이지만 과정일 뿐. 결과를 정할 능력은 없다.]
“잔혹하시군요. 결국 이 모든 게 목숨을 건 삽질일 수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제자이기에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게 더 낫지.]
“아뇨.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 주십쇼. 일을 하기 싫어요.”
[싫어.]
“…….”
정말 스승이 싫다.
그렇게 생각한 천우진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진소청은 요즘 뭘 하고 있습니까? 그를 제자로 들이셨는데 예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말해줄 수 없다.]
“왜입니까?”
[이미 인과율에 엮여버렸기 때문이지. 그는 먼 미래에 ‘결과’를 선택하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알겠습니다. 더 여쭙지 않겠습니다.”
[그럼 가 보거라.]
후와악
이윽고 천우진은 사공린과 함께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천우진은 나오자마자 사공린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사공린. 당신이 사흘 후까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
“무엇이죠?”
천우진이 못미더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쉴 새 없이 대련이다. 환술을 쓰는 나를 한 번이라도 벨 수 있어야 합격이야. 이걸 못 하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그리고 사흘 후.
특훈을 끝낸 천우진과 사공린은 본진으로 복귀했고, 이윽고 초상기인의 힘으로 남극에 있는 아이테눔 문디까지 갈 수 있었다. 아이테눔 문디의 접경, 링구아 디아볼리에 도착하자 이윽고 그들 앞에 제갈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 예상대로 망량선사의 가호를 받아서 나타났군. 설마 네가 공략에 참여할 줄은 몰랐다. 교주한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말이야….”
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지같군. 어쨌든 네놈이 폭왕의 계약자이니 문디 내에서 그를 소환할 생각이냐?”
“물론. 링구아 디아볼리에서 소환하면 당장이라도 고기를 먹으려고 날뛸 테니.”
“…안되면 바로 도망칠 거다.”
“왜 굳이 물어보나? 어차피 도망치지 말라고 해도 도망칠 거면서.”
“재수없는 새끼.”
“크크크.”
이윽고 그들은 링구아 디아볼리 내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옛 종족]이 그들 앞으로 가로막았는데, 제갈사가 [옛 종족]의 언어를 구사해서 외쳤다.
[우리는 아이테눔 문디에 도전하러 온 자들이오.]
그러자 수호자들 중 한 명이 걸어나오더니 말했다.
[[옛 지배자]와 계약을 한 자로구나. 어설픈 짓을….]
[정식도전은 막지 못하게 되어 있을 텐데.]
[물론이다. 허나 너희같은 시도를 한 게 처음은 아니라는 걸 말해두마….]
두웅
이윽고 수호자들은 그들 셋을 아이테눔 문디의 입구로 안내했다. 수호자의 우두머리가 주문을 외웠고, 그들은 잠시 후 아이테눔 문디 내부로 진입하게 되었다.
슈와앗
내부로 들어오자 제갈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총천연색의 무한공간이군. 그리고 저기가 바로 육계의 인장이 있는 장소인가.”
그들은 육계의 인장을 꽂는 장소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사방에 6개의 문이 생겨나는 걸 알 수 있었다. 1계에서 6계까지의 관문을 모두 공략하고 인장을 얻어내야만 아이테눔 문디를 열어 법문조각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제갈사. 어디를 먼저 공략할 셈이냐?”
“…….”
이윽고 제갈사가 충격적인 한 마디를 선언했다.
“공략은 하지 않아. 여기서 끝이다.”
“뭐… 라고?”
천우진이 반문하자 제갈사는 그 자리에 털썩 걸터앉더니 히죽 웃었다.
“육계의 공략, 그 시간제한이 시작되는 건 바로 하나의 계에 진입해서 도전하는 순간. 달리 말하면 여기에 있는 한 시간제한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칠요의 시련과 다른 점이지.”
“편법이군.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공략을 정말 하지 않을 거라면 여기에는 뭐하러 들어왔냐는 말이다.”
“큭큭큭. 아직도 눈치 못 챘나.”
“뭐?”
스스스스 -
다음 순간, 제갈사의 모습이 뒤틀리며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이윽고 완전히 모습이 바뀌었는데, 그 모습은 고대의 법복을 입은 한 마도사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천우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천우진은 경계태세를 취했고, 사공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습을 나타낸 그 존재가 웃었다.
“필멸자들이여. 이번 도전을 함께 하게되어 반갑다.”
그 모습은 마왕 시몬 마구스.
제갈사의 스승이자 지금껏 줄곧 제갈사가 승기를 잡고 있다고 주장해 왔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