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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계획을 수립한지 사흘 후.
우우우우 -
백발의 초상기인이 짙은 백야(白夜)의 대지에 순간이동으로 나타났고, 그 뒤에 대웅제국의 간부들이 나타났다. 백발의 초상기인은 잠시동안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앞으로 엎어졌고, 제갈부가 초상기인을 부축했다.
백련교주가 힐끔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 남극까지 정말로 순간이동할 줄이야. 그것도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대단한 초상능력이다.]
" 하지만 한계다."
제갈부는 백발의 초상기인의 동공을 잠시 살펴보다가 말했다.
" 과거 백웅의 전생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백발의 초상기인, 진(秦). 그 놈의 완전체를 본따서 여산의 신혈을 최대한 높은 농도로 우겨넣어 만든 게 바로 이 녀석이다. 하지만 겨우 능력을 한 번 썼다고 뇌사(腦死) 상태에 이를 뻔 했군."
[ 뇌사라고? 그 정도로 부담이 크다면 본국으로 되돌아갈 땐 곤란하겠군.]
" 근처의 전이문까지 가는 수고 정도는 해야겠지. 다만..."
제갈부가 한숨을 쉬었다.
" 역시 아무리 선천적 초상능력이 강하다 해도 이 수준까지 올리게 되면 상위마법의 영역이라서... 인간의 형태를 남긴 채 능력만 올리는 건 너무 어렵다. 특화형 초상기인은 오행활강시보다 더욱 무모한 도전일 듯 하다."
[ 시간은 충분하다. 종말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차분히 해라.]
그렇게 대꾸한 백련교주가 말했다.
[ 접선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지?]
" [안내자]가 곧 우리를 찾아올 거다. 우선 백야의 빛을 피할 곳부터 찾자."
[ 그래야겠군.]
백야(白夜)는 자연현상이지만 동시에 음차원과 이계의 힘을 강성하게 만드는 마력현상의 성질또한 있었다. 백야의 희미한 빛에 오래 노출될 경우 사악한 이족의 힘에 대한 저항력이 낮아지기 때문에 빛을 피하는 편이 좋았다.
화륵
근처의 큰 설빙산의 동굴까지 들어오자 제갈부가 화염술으로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일행이 따뜻한 불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자, 태을신군(太乙神君)이 말했다.
" 실감이 나지 않소. 절대지경에 이른 후 천하를 좁다하며 무위를 떨쳤는데, 내 힘으로도 벌레처럼 죽을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곤륜파 장문인, 태을신군 곽정무(郭晶茂).
그는 50년 내 대웅제국에서 키운 절대지경 2인 중 한 명으로써 곤륜파(崑崙派) 출신의 고수였다. 본디 26세라는 어린 나이로 초상승 경지에 이르러 곤륜파의 장문인이 되었는데, 그 뛰어난 재능이 눈에 띄어 대웅제국의 수도로 소환된 후 명룡자 및 신승의 지도 아래 10여년만에 절대지경에 발을 디딜 수가 있었다. 그 이후 강호에서 정파의 영도자 역할을 하며 강호지존으로 살고 있었는데 이번 남극대륙 탐사에 동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태을신군의 말에 옆에 있던 천귀마살(天鬼魔殺) 우수백(優樹柏)이 대꾸했다.
" 태을신군! 당신은 나와 달리 이면의 세계를 접한 적이 없다. 지금의 그 말은 너무 현실을 모르는 말 같군..."
" 뭐라고."
" 정신차려라. 우리는 이 곳에서 제일 약하다. 그대는 무림정파의 지존이고 나는 사파의 지존이지만, 이 곳은 그런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다."
" 으음..."
천귀마살 우수백의 경고에 태을신군 곽정무는 끄응하는 소리를 냈지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천귀마살 우수백 또한 태을신군처럼 대웅제국에 의해 인위적으로 키워진 절대지경 고수였으며 현 사파의 최고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본인들과 대웅제국 간부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었으며 알게모르게 제국에서 강호를 통제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련교주가 생각했다.
' 태을신군은 무림정파를 다스려야 하기에 이족과 이면세계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천귀마살은 종종 이면세계의 어둠과 사악한 이족을 잡는데 써야해서 자주 동행시켰지. 그 때문에 인식차이가 심하게 나는군. 아마 그로 인한 실력차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백련교주가 직접 천귀마살 우수백에게 수신류의 비전무공을 몇 수 가르쳐주기도 했다. 아마 천귀마살과 태을신군이 겨룬다면 삼백 초 이내에 천귀마살이 어렵지않게 태을신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을신군도 천귀마살과 대등한 재능을 지닌 천재이기에 이면세계에서 싸우게 했다면 큰 실력향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면세계를 접할 경우 사악한 이족과 접하면서 정신력이 깎여나가며 사기(邪氣)가 침투하여 정파지존에 걸맞은 풍도를 보이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그 때였다.
[ 인간들이여. 그대들을 아이테눔 문디까지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노라.]
동굴 바깥에 몸크기가 일 장을 훨씬 넘는 새하얀 털거인이 와 있었다. 털거인의 전신은 은빛 털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기이한 영기(靈氣)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몸의 크기보다는 도리어 그 기이한 이계(異界)의 기운이 인간을 위압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털거인을 향해 제갈부가 걸어나가서 말했다.
" 안내인이여. 안내료를 지금 내도 되겠습니까?"
[ 상관은 없다.]
" 그럼 이것을..."
제갈부가 불완전한 현자의 돌을 꺼내서 털거인에게 내밀었다. 털거인은 그걸 받자 흡족한 듯 말했다.
[ 꽤 귀한 것을 가져왔군... 좋다. 특별히 그대들에게 '길'을 열어주리라.]
우웅!!
털거인이 손을 옆으로 내밀자, 갑자기 허공에 새하얀 눈이 뭉쳐서 허공을 향해 뻗어오르는 조그마한 길이 생겨났다. 길은 마치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는 것 같았다.
[ 따라와라.]
털거인이 앞장서자 대웅제국의 간부들이 그를 뒤따라갔다. 그리고 약 오십여 장쯤 '길'을 따라걷자, 갑자기 주변 풍경이 뒤바뀌더니 걷잡을 수 없이 현란한 이계의 빛이 영롱하게 비치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의 현란한 빛을 본 태을신군이 그만 경악해서 외쳤다.
" 오... 오오오...!! 이, 이것은 대체."
그러자 천귀마살이 나직이 경고했다.
" 태을신군! 이 빛을 직시하지 말라. 이계의 광기가 함축되어 있으니 오랫동안 보면 정신이 오염된다."
" 세상에 어찌 이런 장소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 잔말말고 눈이나 감아라. 여기 정도는 애교니까..."
" 아, 알았다."
태을신군이 떨떠름하게 눈을 감고 공간을 의념으로 탐지해서 걷기 시작하자 그의 정신오염은 한결 덜해진 듯 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사공린이 제갈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제갈부. 태을신군은 여기에 동행하기에 너무 경험이 적고 약합니다. 그를 왜 데려온 거지요?]
[ 후... 곤륜파 역사상 최강의 고수라 불리며 정파지존인 절대지경급 고수인데 그를 더러 약하다는 소리가 나오는군. 우리 일행이 너무 수준이 높은거지 태을신군 곽정무는 충분히 강력한 고수요. 하나의 손이라도 아쉬울 때인데 배부른 얘기를 할 순 없소.]
[ ... 암천독존 당산을 다시 데려오는 건 실패한 건가요.]
[ 그렇소. 놈은 완전히 숨어버렸소. 게다가 무형지독을 쓰는 놈을 생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그냥 포기했소.]
[ ......]
[ 그만 잊어버리시오. 이게 최선이니까.]
정말 그런 걸까?
사공린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대로 도전하면' 무조건 전멸한다는 알 수 없는 직감이 계속해서 그녀의 내면에 감돌고 있었고, 그 직감대로라면 이 장소에 태을신군이 와 있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길의 끝에 도착하자 털거인이 서서히 문을 열었다.
끼익
문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괴물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거대한 협곡같은 비경(秘境)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보기만 해도 흉험하기 그지없는 사악한 장소라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비경의 끝에는 새파란 관문 사이로 어둠의 불빛이 지직거리며 끊임없이 불타고 있었는데, 저게 바로 아이테눔 문디로 들어가는 길이 분명했다.
안내자인 털거인이 말했다.
[ 이 곳이 바로 아이테눔 문디의 접경인 링구아 디아볼리(Lingua Diaboli). 링구아 디아볼리에는 [옛 종족]의 수호자들이 곳곳에 있으니 더 접근하면 무조건 싸우게 될 것이다. 다만 정식도전의사를 밝힌다면 그들이 도리어 너희를 아이테눔 문디 안으로 안내해 주겠지.]
" 설명 감사하오."
[ 그런데 정말로 도전할 것이냐? 어리석은 짓이거늘...]
털거인의 말에 제갈부가 훗하고 웃었다.
" 여기서부터는 우리 일이니 알아서 하겠소... 고대의 대마도사 제논이여."
[ 제갈사가 내 정체를 말했나 보군.]
" 글쎄? 여하튼 우리의 거래는 끝이오."
[ ... 이윽고 별이 떨어지는 종말의 시대가 오겠지. 세상에 어둠이 가득해 지겠구나.]
후웅
말이 끝난 순간 털거인 제논이 사라졌다. 그는 원래 고대부터 마법의 비술을 이용해 생존해 왔던 인간족 대마도사였는데, 법문이 전 세계로 흩어졌던 당시에 법문의 획득을 노리고 남극까지 왔었다. 그러나 쟁탈전 와중에 저주를 받아서 털거인의 모습이 되자 아이테눔 문디로 가는 안내인의 역할을 하며 살게 된 것이었다.
그 때 천우진이 말했다.
" 이제 그만두자. 너무 비현실적인 도전이다."
[ 천우진.]
천우진이 질린 표정으로 지평선 근처에 있는 아이테눔 문디의 새까만 흑염을 쳐다보았다. 최강의 환술사인 그의 눈에는 저 흑염이 품고 있는 말도 안되는 광기와 마력이 느껴졌다.
" 저걸 본 순간 깨달았을텐데? '저기'는 인간이 도전할만한 곳이 아니다. 백웅이 있다면 신에게 떼를 써서라도 어떻게 하겠지만 우린 전생자가 아니야.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고 되돌아가자고. 서방의 폭왕은 미호를 불러서 처리하면 되잖나."
[ 미호의 소환은 미래에 되돌아올 백웅을 위해 아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에 성공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다.]
" 빌어먹을... 천하의 백련교주가 언제 이렇게 어리석어 진 거지? 뭘 그리 초조해하냔 말이다."
[ ......]
백련교주가 입을 열었다.
[ 천우진. 폭왕의 소환이 우연한 것이라 생각하는가?]
" 그건 모르는 일이지. 인위적일 가능성도 있겠지."
[ 나는 놈들이 하나의 의지에 의해 통솔된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우리의 발목을 잡는 모든 움직임... 그 배후에는 뭔가가 있다. 설령 이번에 미호소환을 이용해서 폭왕을 물리친다 해도 또 다른 [옛 지배자]가 소환되겠지.]
" 과한 생각이다. [옛 지배자]는 그리 쉽게 소환할 수 있는 게..."
[ 과한 생각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우린 절대로 백웅이 귀환할 때까지 버틸 수가 없다."
백련교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눈에서 안광이 일어났다.
[ 더 이상 이런 식으론 안 된다. 우리에겐 절대적인 힘이 필요하다. 설령 [옛 지배자]라 해도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 그걸 누가 몰라? 하지만 수단과 방법이 바뀌었지. 아이테눔 문디를 뚫으려면 그 힘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거냐고."
[ 단 하나 방법이 있다.]
휙하고 백련교주가 서문혜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받은 서문혜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지었고, 백련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 서문혜여. 인간을 버려라. 그대가 인간을 버린다면 아이테눔 문디를 뚫고 법문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 ......!!"
[ 그대가 선조회귀로 진정한 거신의 힘을 각성하면 [옛 지배자]에 못지 않으리라.]
천우진의 표정이 크게 날카로워졌다. 그는 보기 드물게 기함을 내질렀다.
" 교주, 결국 이런 식으로 마도(魔道)를 걷겠다는 건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을 텐데!!"
[ 천우진. 이게 바로 현실이다. 나는 이미 제갈부, 제갈유룡과 함께 의견조율을 마쳤다. 그리고 이 방법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인간의 미래를 위해 서문혜가 희생해야 한다.]
막상 대상이 된 서문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소 체념하는 표정으로 보아 교주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 했다.
" 웃기지 마라. 남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건 내가 허용할 수 없다."
천우진이 분노로 몸을 떨자 백련교주가 힐끔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태을신군. 천귀마살. 천우진을 죽여라.]
파앗!!
명령이 떨어진 순간 정파의 무림지존인 태을신군, 그리고 사파의 무림지존인 천귀마살이 동시에 천우진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 황궁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천하의 진정한 주인이 백련교주라는 걸 학습했기에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또한 생전 처음 보는 천우진이라는 술법사가 어떤 힘을 갖고있는지 모르기에 경시하는 마음또한 있었다. 저 평범해 보이는 청년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몰라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 미안하군, 청년! 죽어줘야겠소."
태을신군의 의념이 퍼져나갔다.
절대지경
광명대운룡(光明大雲龍)
그를 정파지존으로 만들어준 절세의 무공! 곤륜파에 존재하는 무공들을 결합하여 운룡검기(雲龍劍技)로 벼려내어 막강한 일점의 공격력을 지니는 절대지경이었다. 하나의 공격을 막아내더라도 마치 구름처럼 재생되어 쉴새없이 적을 몰아치는 검격에 버텨낸 상대는 거의 존재치 않았다.
푸콱
광명대운룡의 일 초가 천우진의 목을 꿰뚫었다. 천우진이 입에서 울컥하고 선혈을 토해내자 태을신군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으음, 미안하구려..."
무공도 모르는 술법사를 지근거리에서 절대지경 고수가 습격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태을신군은 천하의 지존인 백련교주의 명에 거역할 수 없었다.
" 미안하긴 뭘. 네놈 실력으로 미안할 일이 있겠느냐."
그러나 다음 순간 퉁명스러운 천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태을신군은 자신이 곤륜파에 되돌아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방금 전까지 남극의 비경에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 걸까?
" ......?! 이, 이건 환상..."
천우진의 냉혹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려퍼졌다.
" 애송이. 넌 죽이지는 않겠지만 50년쯤 고생해 봐라."
끼기기긱
태을신군은 잠시 후 자신이 싸우던 중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환상의 수레바퀴에 맞물려돌아갔다. 모든 기억을 봉쇄당하고 환상에 잡아먹힌 태을신군은 그 순간부터 체감시간 50여년 동안 곤륜파에서의 삶을 재생(再生)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을신군은 가공의 현실에서 알 수 없는 중압감을 느끼며 마음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실에서 태을신군이 공격하려다가 난데없이 넋이 나가버리자 함께 공격하던 천귀마살은 이를 악물었다.
' 역시 환신 천우진! 인류 최강의 술법사구나.'
태을신군과 달리 천귀마살은 알건 다 아는 자였다. 대웅제국 간부들이 얼마나 괴물같은 존재들인지 익히 알고 있었으며 특히 환신 천우진은 백련교주조차도 얕볼 수 없는 자였다. 아무리 자신이 절대지경이라지만 자칫했다가는 환상에 잡아먹혀 소멸될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태을신군과 달리 자만하지 않았다.
절대지경
천귀무옥살(千鬼武沃殺)!
푸콰콱
천귀마살의 도(刀)가 순식간에 수십 개의 도섬을 뿜어내며 천우진을 갈랐다. 그러나 자신이 벤 것이 환영이란 걸 알고 있는 천귀마살은 의념을 집중하며 환술에 미리 방어를 했다. 절대지경의 의념으로 정신방어에 집중하면 아무리 환신이라 해도 쉽게 환영을 보여줄 수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귀마살이 외쳤다.
" 아무리 내게 환술을 보여주려 해도 내 의념으로 막는 한 안될 것이다! 절대지경을 얕보지 마라!"
" 그렇구나...!! 확실히 절대지경이 방어에 집중하면 그렇겠군."
천우진이 탄성을 지르며 천귀마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하고 눌렀다.
" 그런데 네가 막기 전에 이미 걸어두었으니 상관없다."
털썩
천귀마살 또한 천우진을 공격하기는 커녕 멍하니 굳어있다가 이마를 누르자마자 뒤로 넘어가서 쓰러졌다. 그 또한 이미 환술에 걸려서 생사여탈권을 천우진에게 뺏겨있었던 것이다. 환신 천우진에게 있어서 언제 환술을 거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었기에 천귀마살처럼 대응해봤자 상대하는게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백련교주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 아무리 무림인이 술법사의 환술에 약하다고 하지만 절대지경 두 명을 어린애처럼 갖고노는군. 설마 경지가 더 오른 것인가?]
" 난 천재니까. 교주 너도 이미 환술에 걸려있다고는 생각 안했나?"
[ 뭣이.]
흠칫하고 백련교주가 놀라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사지가 분해되어서 땅에 쓰러져있다는 걸 깨달았다.
환신(幻神)
천마앙복(天魔仰伏)
[ ......!!]
이건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게 바로 환신이 부리는 환술의 무서운 점이었다. 천우진이 냉막한 눈으로 교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 원영신의 저항력을 믿고 방심했군. 이런 날도 있을 줄 알고 네 저항력을 뚫을 기술 정도는 만들어 두었다."
[ 흐음.]
슈와악!!
그러나 교주가 잠시 정신을 집중하자 그는 바로 환술에서 풀려났다. 도리어 천우진이 놀라서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교주가 나직이 말했다.
[ 지금의 너와 생사를 결하려 하면 내가 진심을 다해도 예측할 수가 없구나. 환신 천우진이여, 꼭 이렇게까지 막아야 할 일인가?]
천우진은 교주의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비록 천우진의 환술경지가 더욱 높아져서 교주를 상대로도 환술을 자유자재로 걸 수 있지만, 교주가 혼돈화를 하여 진심으로 싸운다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목숨걸고 싸우게 되면 교주나 천우진이나 서로를 한 방에 끝장낼 수 있었다.
그들 둘이야말로 현 시점에서 인류최강자를 놓고 경쟁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천우진이 백련교주를 노려보았다.
" 서문혜라는 '인간'을 죽이고 대의를 위한 희생을 강요하겠다는 게 아니냐? 그런 선택으로는 절대 세계를 구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해봤자 네가 백웅을 만나기 전의 비인외도로 되돌아갈 뿐이다."
[ 정말로 단 하나의 희생도 없이 세계를 구할 수는 없다...]
"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전생자 백웅이 계속 전생을 하고 있지. 내 말이 틀렸는가?"
[ 모든 죄는 내가 안고 가겠다. 어차피 절망뿐인 세계에서 내가 좀 더 죄업을 짊어지고 세계를 더 좋게 만든다는 게 정녕 하지 못할 일인가?]
" 이미 네 말에 모순이 있다. 네가 애초에 백웅의 동료가 된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 ......]
" 그 죄를 안고가는 건 네가 아니다. 백웅이 모든 업(業)을 짊어지기에 우리는 죄를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지."
[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이 수많은 왜곡과 괴로움이 천지에 가득차 있는 현실을.]
" 좋다. 그러면 본인의 뜻으로 결정하도록 하지."
그렇게 대꾸한 천우진이 서문혜를 돌아보았다.
" 서문혜! 정말로 그대의 의지로 자살하겠소? 아이테눔 문디를 뚫기 위하여 인간을 버리고 신이 되겠소?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당신은 두 번 다시 백웅을 볼 수 없을 것이오."
" ......"
서문혜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죽겠어요. 그게 백웅 님을 위한 길이라면."
" ......"
" 이게 저의 선택이에요."
천우진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결국 이런 식으로 흐르게 될 줄이야! 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 병신같은 놈들아! 목숨을 던져버리면 우리야 편하겠지만 백웅 놈이 동료를 죽게 했다는 자책감은 몇 배나 된다는 걸 정말 모르느냐?! 외도(外道)의 선택에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아!"
" 제 마음은 결정되었습니다."
" 이...!! 맘대로 해! 난 가겠다!"
천우진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려 할 때였다.
" 큭큭. 정말 볼만하군..."
" 제갈사!!"
장내에 느닷없이 제갈사가 나타난 것이다. 제갈사는 장내의 혼돈을 보더니 진정으로 즐거운지 킬킬거리며 말했다.
" 아주 볼만해. 백웅이 없으면 이토록 개판이라니, 나중에 놈이 돌아와서 이 기억을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할 지경이군..."
[ 제갈사. 아이테눔 문디의 공략에 참여하러 왔나?]
" 아니. 공략을 알려주려고 왔지. 방금 전까지 이면세계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거든."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아이테눔 문디에 들어가면 육계(六界)의 문이 열린다. 그리고 육계의 문을 수호하는 자들에게 각기 도전해서 하나씩 인장(印章)을 얻어낸 후 중앙에 6개의 인장을 꽂으면 법문을 획득할 수 있지."
제갈사의 말에 백련교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 그건 마치 칠요(七曜)의 최종시련같군.]
" 맞아. 굉장히 비슷하지.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칠요의 최종시련에서는 '왕'이 인연(因然)을 이용해서 자신의 부하를 소환할 수 있는 반면에 아이테눔 문디에는 그런 게 없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육계의 수호자가 강해진다는 게 골치아픈 점이지."
[ ... 강해진다고? 무슨...]
" 일종의 시간제한이야. 지연전의 특징을 이용해서 편법으로 법문을 얻어내려 할수도 있으니까. 애시당초 칠요의 시련과 달리 이건 시련이 아니라 정말로 세계에서 격리시키려 만든 봉인이니까 이 정도의 제한은 당연하다."
[ 말도 안 된다. 시간제한이 있으면 절대로 법문을 얻을 수 없어.]
" 크크크. 그 말대로야. 설령 1계의 수호자를 쓰러뜨릴 힘이 있더라도 이런 체계로는 공략이 불가능하지. 그래서 말인데..."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 순서가 잘못된 것 같아. 우선 오늘은 여기서 퇴각하자고."
[ ......?]
" 지금과 다른 순서를 밟으면 어쩌면 공략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백련교주는 물론이고 장내에 있던 대부분의 인간들이 어리둥절해했다. 지금 제갈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순서라는 말에 숨겨진 말뜻을 제일 먼저 알아챈 것은 바로 사공린이었다.
" 제갈사. 아이테눔 문디를 뚫기 위해 서방에 소환된 [옛 지배자], 폭왕 카르파도크에게 협력을 요청하자는 거군요."
" ......!!"
제갈부가 깜짝 놀라서 사공린을 돌아보았다. 천재인 그조차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던 기괴한 발상! 아마 사공린이 제갈부보다 먼저 그 결론에 도달한 것은 사공린에게 고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사공린의 말에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 맞아. [옛 지배자]를 소환했다는 게 꼭 우리한테 최악의 상황만은 아니란 말이지."
" 그, 그게 가능하겠나? [옛 지배자]는 극악과 오만의 극치. 교섭할 수 있는 상대가 절대로 아니다. 특히 폭왕 카르파도크는 전욱과도 대등한 힘을 지닌 지배자. 그냥 우리를 다 불로 태워죽일 것이다."
제갈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제갈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 그 말이 맞아. 백웅이라면 할 수 있겠지만 우린 백웅이 아니지.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저 벌레처럼 무시당하거나 괴롭힘당할 뿐 대등한 경지에서 교섭하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딱 하나 방법이 있긴 하거든."
" ......?"
이어진 제갈사의 제안에 좌중은 침묵했다.
그리고 제갈부가 경악했다.
" 미, 미친... 그냥 미친 소리야!!"
그러나 제갈사의 말을 들은 백련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은 여기서 퇴각한다. 그리고 제갈사의 책략을 진행하자.]
" 교주! 미친 개소리일 뿐이다! 퇴각은 하더라도 저딴 책략만큼은..."
[ 이미 마음을 굳혔노라.]
제갈부는 아연해져서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절망의 한탄이 새어나왔다.
" 다들 미쳤어..."
그리고 일주일 후.
서방 폭왕 카르파도크의 본거지에 백련교주와 제갈사, 사공린이 함께 찾아갔다.
[옛 지배자]가 머무를 수 있도록 이계화(異界化)된 산맥의 중심부.
끝없이 타오르는 옥염 속에서 폭왕 카르파도크가 거대한 흑룡(黑龍)의 모습으로 현현해 있었다.
폭왕 카르파도크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 마도사들을 다 때려죽이고 여기까지 왔구나. 건방진 놈들아... 어떻게 죽고 싶으냐?]
그들은 고작 셋이서 수백 명의 마도사와 대마도사들을 학살하고 본거지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마도사들은 마법만 빼면 일반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옛 지배자]라는 존재는 너무 큰 압박이었기에 섣불리 시도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윽고 제갈사가 씩하고 웃으며 말했다.
" 위대한 존재시여. 청이 있사옵니다."
[ 청이라고?]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폭왕 카르파도크가 눈을 크게 떴다.
" 저희 백련교에서 보유하고 있는 무생노모의 법문 한 조각을 바치겠사옵니다. 그 대신에 아이테눔 문디를 공략하여 그 곳의 법문을 얻는 일에 나서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