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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060화 (1,057/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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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팔부신중 토벌 후 대웅제국에서 가장 집중한 것은 다름아닌 백련교주의 회복이었다. 제갈부는 이미 현자의 돌을 모두 소모한 상태였으나 천하오대의원들의 힘을 빌려 모든 영약을 사용해 가사상태에 빠진 백련교주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백련교주에게는 그 어떤 의술도 듣지 않았으며, 그의 육체는 혼돈에 물들어 물리법칙조차 통하지 않는 듯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중 백여 일이 지나자 그제서야 백련교주가 의식을 차렸다.

[걱정하게 했군.]

“교주. 괜찮은가?”

[…….]

백련교주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었던 일의 전모를 이야기했다. 원영신과 그 계약의 헛점을 노려서 [옛 지배자] 비류가 자신을 지배했던 경위였다. 그리고 백련교주가 말했다.

[비류는 이번에 입은 인과율의 손해가 막심해서 더 이상 나를 매개체로 강신할 수는 없다.]

“천령단의 소유자들을 통해서는?”

[그건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원영신과는 다른 구조이니…. 천령단은 원영신보다 훨씬 잠재력이 낮은 대신에 [옛 지배자]의 간섭에서도 비교적 안전한 편.]

“그렇군. 원영신은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트여있는 대신에 중개인에게서 간섭받을 확률이 높았던 거군.”

[내게도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달라.]

“알았다.”

그들은 정보공유를 끝내고 나서 심사숙고하는 시간을 가졌다. 교주가 말했다.

[제갈유룡과 망량이 힘을 잃거나 유폐되었으니 사실상 제갈세가는 제갈부, 너 혼자 남았군. 그리고 대웅제국의 절대고수가 거의 다 죽었으니 명룡자와 신승만이 쓸만한 전력인가…. 아베노 세이메이는 어떻게 되었나?]

“야차에게 치명상을 입어서 일시적으로 죽었지만 그는 본디 신의 반쪽을 몸에 품었던 자인지라 지금 본거지에서 부활을 위해 회복중이다. 특수한 존재니까.”

[…만신창이가 되었군. 후우.]

백련교주가 보기 드물게 한숨을 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초 세계를 정복하고도 남을 정도였던 대웅제국의 힘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강대한 마왕들을 떼로 상대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지만, 사정이 안 좋아졌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교주. 한탄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천축대륙을 다시 쳐야 한다.”

[전에 말했던 그 일인가? 크리슈나의 부활거점이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십중팔구는.”

[할 수밖에 없겠군. 그럼 출진하자.]

그리고 대웅제국은 다시 군세를 일으켜서 천축대륙을 공격했다. 예전의 정벌과 다른 점은 남만열국을 상대로는 조공을 받고 있었으므로 굳이 그들과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천축대륙도 과거 대웅제국을 상대로 싸우다가 주전력이 모두 타도당했기에 변변한 저항을 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천축대륙을 다시 손에 넣은 대웅제국은 크리슈나를 찾아서 헤매었다. 고대 힌두종파는 물론이고 온갖 종교단체들의 수장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하면서 크리슈나의 종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크리슈나는 단단히 몸을 숨긴 모양인지 전혀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초조해하고 있을 때 문득 제갈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랜만이군.”

[제갈사. 초상기인에 빙의했는가?]

초상기인에 빙의한 채 백련교주 앞에 나타난 제갈사가 히죽하고 웃었다.

“크리슈나를 찾고 있겠지. 내가 찾아내었으니 날 따라와라.”

[찾았다고? 어떻게?]

“내 영지(sapientia)의 수준이 상승해서 복음(Evangelium)의 단계가 되었기에 신의 흔적도 쫓을 수 있게 된 거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지.”

아마도 제갈사는 마왕 시몬마구스와의 길고 긴 사투를 하는 동안에 더욱 강해진 모양이었다. 백련교주는 그러려니 하고 납득하고는 말했다.

[좋다. 예전처럼 투신 아르쥬나를 상대할 준비를 해야하나?]

“크크. 나오면 상대할 수는 있나? 불행 중 다행으로 놈은 그럴만한 인과율이 전혀 없어. 무주공산을 치는 거니 사실 너 혼자만 가도 된다.”

[가자.]

그렇게 대꾸한 백련교주는 당장 제갈부 등을 불러서 강력한 동료들을 위주로 소집했다. 그 모습을 본 제갈사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혼자 갈 생각은 없나보군?”

[방심은 하지 않는다.]

백련교주는 제갈사와 함께 아군 동료들을 불러모아서 가네샤의 어전(御殿)이라고 불리는 장소로 향했다. 이 장소는 평범한 힌두교 사원처럼 보였지만 사실 주문을 외워서 특수한 이계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구조였다.

쿠구구구…

어둠의 우주가 펼쳐져있는 기나긴 통로.

이 공간에는 신비로운 별빛이 가득했으며 사악한 기운보다는 우주적인 영성(靈性)이 느껴졌다. 이 통로를 살피던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아마테라스의 신체가 공명하는 게 느껴진다. 이 장소를 만든 것은 고대신(古代神)이다.”

[[옛 지배자]가 아닌 게 확실한가.]

“그렇다. 고대신끼리는 특유의 파장을 통해 교감하게 되어있으니.”

[…….]

백련교주가 침묵했다.

‘믿을 수 없다….’

크리슈나의 사악함과 위선은 [옛 지배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니, 고대신의 이름을 빌린 사악한 존재가 활동하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위대하고 정결한 고대신의 일좌였다니?

그 때였다.

위이이잉 -

통로의 끝에서 팔색(八色)의 빛으로 환하게 비치는 궁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궁전의 문 앞에 제관(帝冠)을 쓴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은 바로 다름아닌 크리슈나였으며, 예전과 달리 천축 신족(神族)의 정통예법을 갖춘 복장이었다.

크리슈나가 일행에게 말했다.

“필멸자들이여. 결국 내 근거지까지 찾아냈구나.”

제갈사는 크리슈나에게 웃으며 대꾸했다.

“크리슈나. 가지고 있는 보물이 있으면 내놔라. 그러면 한 번 봐 줄 수도 있지.”

“…….”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도리어 크리슈나에게 갈취협박을 하는 제갈사였다. 제갈사의 말에 크리슈나는 얼굴이 굳더니 말했다.

“너희는 아무것도 모른다. 너희가 무모하게 구원을 시도하는 게 도리어 우주의 질서와 균형을 해친다는 사실을….”

“알아서 뭣에 쓰지? 우주의 질서와 균형이 세워지면 우리의 운명이 뭔가 달라지는 게 있는 건가?”

“짧은 생을 사는 자들의 시선이 좁을 뿐이다. 순리대로 흘러가게끔 하면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크크큭… 웃기는군.”

비웃음을 지은 제갈사가 힐끔 백련교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 놈을 찢어죽여라. 저걸 찢어죽이면 영소(靈素)를 적지 않게 뿜어낼 거다. 네 몸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겠지.”

[알았다.]

후와악

푸콱

백련교주는 다음 순간 크리슈나에게 달려들어서 심장을 뜯어내어 버렸다. 크리슈나의 정령체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피분수를 뿜어내며 비틀거렸고, 이어서 백련교주는 무형장(無形掌)으로 크리슈나를 피떡으로 만들었다.

크리슈나가 처참하게 죽자 백련교주가 심장을 천천히 뜯어먹었다. 그리고는 무면탈을 꿈틀거렸다.

[이건… 본체가 아니군. 정령체인가.]

“뭐 그렇겠지. 이미 크리슈나를 구현화시킬 힘도 남지 않은 거다. 겉모습만 똑같게 만든 궁궐의 정령이겠지.”

[이제 이 궁궐을 때려부숴야겠군.]

쿠콰콰쾅

일행은 머지않아 크리슈나의 본거지를 때려부쉈다. 이로써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 간섭할 방법이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국 크리슈나는 뭐였던 것인가?]

백련교주의 물음에 제갈사가 대꾸했다.

“종말이 되면 알게 되겠지.”

[제갈사. 싸움은 언제 끝나는가? 피해가 크니 네가 빨리 공백을 메워줘야 한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백련교주가 뒤를 돌아보자, 어느 새 제갈사는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대답할 시간도 없다는 듯 했다.

[…….]

제갈사는 과연 어떤 전투를 치르고 있단 말인가?

다만 그 이후로도 제갈사는 종종 초상기인에 빙의해서 궁궐에 출몰했고, 그 때마다 서방의 파우스트와 교류하며 과학기술을 얻어오는 듯 했다. 그리고 제갈사가 교류로 얻은 과학기술은 모두 제갈부에게 집약되었고 제갈부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다.

그러던 중 약 40여 년이 지났고, 서방에 파견되어 있던 첩자들이 대웅제국에 충격적인 소식을 보내 왔다.

[신대륙에 새로운 국가가 생겨났다고?]

“그렇사옵니다, 폐하.”

대웅제국 황궁어전에서 등곽이 다소 늙은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본디 힘이 넘치는 장년인의 모습이었으나 어느 새 꽤 늙어 있었다. 등곽의 말이 이어졌다.

“대영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붕괴 후 서방의 균형이 재편되었고, 재편된 국가 중 가장 강대한 국력을 지닌 게 바로 프랑스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국가였사옵니다. 헌데 프랑스 공화국과 구 대영제국의 후신인 브리튼(britain) 왕국이 연합탐사단을 과거에 보낸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 탐사단이 신대륙에 별개의 나라를 건국했다고 하옵니다.”

[별개의 나라라는 건 프랑스와 브리튼에서 독립된 국가를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흥미롭군. 그 나라의 이름은 무엇인가.]

“미 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고 하옵니다.”

[미합중국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알아보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 날의 회의가 끝난 후 백웅의 동료들이 모이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 합중국의 정보가 공유된 후, 불쑥 제갈부가 말을 꺼냈다.

“백련교주.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오늘 등곽의 모습을 보았겠지. 그는 신승에 버금가는 탁월한 내공의 소유자이지만 이제 더 이상 내공으로 노화를 막지 못하고 크게 늙은 모습이 되었다. 등곽의 나이도 이백을 넘겨가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

“등곽은 절대 오백 년을 살 수 없다. 길어봤자 삼백 년이다. 그게 무림인 수명의 한계지.”

백련교주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부의 말이 이어졌다.

“교주 당신이나 우리 술법사는 큰 문제가 없다. 허나 신승과 명룡자는 이미 고령. 등곽보다 적어도 오십 세는 많은 자들이다. 절대지경의 힘과 정순한 내공으로 등곽보다 노화는 적지만… 그래봤자 오백 년은 무리다.”

[절대지경의 전력을 보존하고 싶다는 말인가.]

“그래. 알고 있겠지만 절대지경은 이제 키워내고 싶다 하여 맘대로 키워낼 수 있는 재목이 아니다. 중원 전체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재능의 소유자가 수십 년간 고련한 끝에 도달할까말까한 경지…. 꾸준히 무림을 지원하며 키워내려 하지만 지난 40년간 새로운 절대지경에 도달한 자는 고작해야 2명에 불과했다. 제국 수준의 지원이 들어가도 그게 한계인 것이다.”

[예전부터 논했던 얘기였지…. 그 때 망량이 대안을 갖고 있다고 했었는데, 설마 제갈부 너는 망량의 대안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망량이 착안한 계획이지.”

제갈부가 말했다.

“절대지경들을 인위적으로 천계에 보낼 때가 된 거다. 마치 무신의 좌처럼….”

[호오.]

“제일 먼저 ‘위쪽’에 가 있는 것은 바로 검마 서문대룡이다. 나머지도 망량이 적절한 처치를 해 뒀지.”

이윽고 제갈부가 계획을 설명했다. 백련교주는 그 계획을 차분하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계획을 실행하라.]

지금까지도 보낼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후진들의 양성 때문이었다. 다른 절대지경 고수가 앞에서 끌어줄 때 초절정고수가 절대지경에 오르기 훨씬 쉽다는 게 이미 경험으로 입증되었기에, 새로운 절대지경을 키울 때까지는 신승이나 명룡자 등을 천계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승과 명룡자가 대웅제국의 전폭적 지원을 등에 업고 대륙 전역에서 모집한 무림인들을 열심히 가르쳤으나 40년 동안 수십 만 명 중에서 고작 2명밖에 절대지경에 이르지 못했다. 그에 반해 신승과 명룡자의 수명은 점차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제갈부는 마침내 위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이대로 그들이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면 큰 손해였다.

그리고 계획의 실행에 대한 합의가 끝나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그는 요괴대전 중에 참전할 수가 없었는데 그 동안에 치우의 봉인이 급격히 강해져서 봉인에 전력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봉인을 안정화시키고 한숨을 돌린 참이었다.

“미합중국이란 놈들 수상하군.”

천우진에게로 장내의 시선이 몰리자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백웅놈의 기억에 따르면 그 장소는 야생의 [옛 지배자]들이 백주대낮에 돌아다니는 마경(魔境)이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인간이 국가를 세운단 말인가?”

[그렇다.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

그 순간 백련교주가 천우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은 천우진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제기랄! 괜히 말을 꺼내서….’

저 시선은 틀림없이 천우진에게 조사를 시키려는 것이다!

없는 일을 만들어 버리다니!

천우진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급히 말했다.

“…나는 요즘 술법수련에 바쁘다. 말하는 걸 깜박했군!”

[누가 뭐랬나?]

“아니 뭐 그렇다고.”

천우진이 사태를 수습했다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백련교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천우진 너밖에 조사할 사람이 없군.]

“아, 아니… 아니 왜! 성진한테 시켜라!”

[성진은 대주술을 펼쳐서 망량을 회복시키는 중이라고 저번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술법수련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지. 게다가 아베노 세이메이는 부활 후 아직도 잃어버린 힘을 양생하는 중이라 미지의 대륙을 조사시킬 수 없다. 제갈유룡도 아베노 세이메이와 마찬가지. 술법을 다 잃어버려서 다시 수련중이니. 대라신선급 술법사 중에서 조사를 시킬만한 기량이 있는 건 천우진 너 뿐이다.]

“제갈부도 이제 그 정도 능력은 있어! 예전에 그 경지에 도달했었다고!”

[그가 가짜의체를 내세워 대웅제국의 모든 행정업무와 과학기술 발전을 도맡아 하고 있다. 사실상 대웅제국을 운영하고 있는 승상이나 다름없으니 탐사임무를 맡길 순 없다.]

“…….”

천우진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닫고는 좌절했다. 천우진이 힘없이 탁자에 머리를 박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걱정 말라. 서문혜와 사공린이 너와 함께 탐사를 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 [옛 지배자]를 맞닥뜨리더라도 충분히 도주할 수 있겠지.]

“싫어…. 일하기 싫다고….”

그 때 회의에 참석해 있던 사공린이 말했다.

“천우진, 함께 열심히 일해 봐요.”

“아니 일하기 싫다고오…. 내가 왜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거냐!!”

천우진이 발작하듯 몸을 뒤틀었다. 아직도 그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극렬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사공린이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평생 하는 것도 아니고, 백웅이 돌아올 때까지만 열심히 해 봅시다.”

“…….”

천우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망이란 걸 느꼈다.

‘백웅이 언제 오는데…?’

아무런 악의없는 말이었으나 그게 현실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말고는 일할 사람이 없다는 현실을!

그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그래 제기랄…. 백웅이 올 때까지만 해 보자! 오긴 오겠지!’

어쩌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된 천우진이었다.

머지않아 천우진, 서문혜, 사공린으로 이루어진 세 명의 탐사단이 극비리에 신대륙으로 향했다. 신대륙에 세워진 새로운 국가, 미합중국을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전이문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신대륙의 해안가에 도착한 그들은 인간의 기척을 찾아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신대륙의 수도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다. 삿갓을 쓰고 있던 천우진이 슥하고 삿갓의 챙을 올려서 전방에 있는 도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기가 바로 뉴욕(New York)이라고 부르는 곳인가?”

뉴욕은 낙양만큼 거대한 도시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번화하며 서양문명 특유의 무언가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그렇다더군요.”

“뭔가 좀 이상한데…. 저건 대체 뭐지?”

우우우웅

하늘에는 처음 보는 철덩어리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철덩어리 안에는 인간이 타고 조종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걸 본 사공린이 말했다.

“정보를 수집한 바로는 비행기라고 하더군요. 본국의 비공선에서 더욱 기술을 발전시켜서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게 말이 되나? 이런 척박한 신대륙 오지에 겨우 몇십년 전에 세워진 독립국가가, 대웅제국의 기술력을 뛰어넘는다고.”

“…….”

“이상해 이건.”

침묵하던 사공린은 천천히 대꾸했다.

“미합중국의 수장은 대통령이라 불린다던데 현재의 초대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라 하는 자더군요. 그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던데, 그 자를 만나볼까요.”

“…잠깐.”

문득 천우진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누군가가 우리가 서 있는 장소에 시공간 왜곡을 시도했다. 뭐지? 누가 우릴 공격하는 거냐.”

그렇게 외친 천우진이 손을 뻗으며 환술을 시전했다.

“급급여율령!”

천환(天幻)

환상역린(幻想逆鱗)

환신 천우진은 자신들을 결계에 가두려는 움직임을 역으로 반사한 것이었다. 이로써 속박을 피하고 도리어 상대를 자신의 환상 속으로 가두는 게 가능했다.

위이이잉!!

그 순간 그들은 정체불명의 네모난 공간으로 이동했다. 이 공간은 마치 기계적으로 짜여진 것처럼 정사각형의 판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온통 새하얬다. 그리고 기계음이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키기깅 키깅

백색의 공간 맞은편에서 갑자기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명의 인형(人形)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도마뱀처럼 생긴 두상이 중얼거렸다.

[설마 차원왜곡필드를 감지해서 반사할 줄이야…. 저게 술법이라는 체계인가?]

그들을 마주친 천우진이 노려보며 말했다.

“너흰 누구냐?”

[우리 쪽에서 초대를 하려 했건만 무례하게 느껴졌겠군. 미안하오.]

마치 도마뱀과 인간이 섞인 것처럼 생긴 존재가 한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대웅제국에서 오신 분들이여. 나는 일루미나티(Illuminati)의 수장이자 렙틸리언 로드(Reptilian Lord)요. 이 미합중국의 건국에 4할의 지분을 갖고 있소.]

“……?”

[그리고 이 분들은.]

천우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자 그 존재가 옆에 있던 두 명을 마저 소개했다.

[인간측 대표인 대통령 조지 워싱턴. 그리고 아즈텍 제국의 제사장인 [검은 태양] 님이시오.]

천우진은 물론이고 사공린과 서문혜도 그들 셋을 유심히 살폈다. 조지 워싱턴은 서양의 의복을 입고 있는 전형적인 중년 인간으로 보였으며, 옆에 서 있는 [검은 태양]이란 존재는 이국(異國)의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는 주술사처럼 보였다.

전혀 뜻밖의 존재들이 자신들을 가로막자 천우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대꾸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그대들이 마왕조차 물리친 강대한 대제국의 간부라는 걸 알고 있소. 나는 사실 머나먼 별에서 온 외계의 종족, 그대들과 섣불리 겨루기 보다는 현재의 안정을 유지하며 평화동맹을 맺고 싶소.]

“외계인이었군.”

천우진은 렙틸리언 로드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성계에서 찾아온 외계인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옛 지배자]도 난무하는 상황에서 기껏 외계인 정도에 놀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천우진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

“평화동맹은 내 소관이 아닐 뿐더러 너희랑 맺고싶은 생각도 없어. 괜히 설레발치지 마라.”

[너무 단정적이군.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몰라서 묻는 거냐?”

천우진은 아즈텍 제국의 제사장, [검은 태양]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저건 [옛 지배자]의 사도(師徒)잖나!! 이 마도 새끼들아!”

쿠구구구

그 말을 들은 아즈텍 제사장 [검은 태양]의 몸에서 서서히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겉으로나마 인간인 척 하던 걸 그만두고 진정한 몸뚱이로 화한다는 뜻이었다. [검은 태양]이 말했다.

[전쟁을 원하는가…?]

“별 그지같은 새끼가 다 까부는군. 넌 잘못 걸린 거다.”

천우진은 불쾌감에 치를 떨었다. [검은 태양]의 영혼에서 풍겨나오는 인육과 인신공양의 냄새가 끔찍할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소 수만, 아니 수십만을 넘어서는 가련한 영혼들의 비명소리가 천우진에게 들려왔다. 저 존재는 틀림없이 국가단위로 인신공양을 바친 괴물이었다.

저런 극악(極惡) 그 자체인 존재와 타협하는 것만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온 세 사람은 사실상 대웅제국의 최강전력이므로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천우진 뿐만 아니라 서문혜나 사공린도 그다지 전투를 피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었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말했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특히 당신은 그 잔인한 모습을 거두시오.”

슈욱

그러자 뜻밖에도 [검은 태양]이 마력의 분출을 멈추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마치 조지 워싱턴의 말에 찔끔한 듯한 모습이었고, 명백히 눈치를 보는 듯 중얼거렸다.

[일부러 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내 앞에선 하지 않기로 했었지.”

[미안하다, 인간의 대표여.]

어째서인 것일까? 조지 워싱턴의 말 한마디에 [검은 태양]은 [옛 지배자]의 사도인데도 쩔쩔 매는 듯 했다. 그 기이한 광경에 천우진은 황당해서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이윽고 조지 워싱턴이 말했다.

“우린 신흥국에 지나지 않소.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국정에 간섭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고, 그럴 여력도 되지 않지. 그래서 귀국와 미합중국 사이에 평화 동맹을 체결했으면 하는 것이오.”

“말했듯이 우린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확답도 줄 수 없소. 국정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오.”

“하지만 그대들은 초인. 충분히 대웅제국의 황제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겠지. 귀하들의 의견이 소중할 것이라 생각하오.”

“…….”

“우리의 말을 황제에게 전해 주시오. 무례를 범한 것을 사과하겠소.”

“그러지.”

천우진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저쪽이 그저 마도세력이라면 쓰러뜨려 없앨 뿐이겠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순수인간인 조지 워싱턴의 발언권이 매우 강했다. 사실상 저 3명 중에서 수장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 균형을 볼 때 미합중국은 마도세력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

천우진이 말했다.

“당신은 힘없는 인간일진대 어떻게 외계인과 사도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이오? 그게 우리의 판단에 중대한 역할을 할 거요.”

천우진의 질문에 조지 워싱턴이 대답했다.

“내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소. 이 신대륙에서 우리 미합중국의 인간은 결코 핍박받는 약자의 처지가 아니오. 도리어 이 땅에 만연하던 하급 [옛 지배자]들을 모두 몰아내고 대륙 중북부를 모두 인간의 영역으로 만들었지. 또한 지금은 남쪽 대륙에 있던 인신공양 풍습을 근절하도록 [검은 태양]과 협약을 맺은 상태요.”

“……!!”

“이 곳은 인간의 대륙이오. 그 사실을 알아 두시오.”

인간의 대륙.

‘전생자의 동료도 아닐진대 인간의 세력이 저 정도로 강할 수 있는 건가?’

저건 결코 연기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의 세력이 확실히 외계인이나 사도보다 강력한 게 눈에 보였다.

천우진은 무언가 그들에게 엄청난 비밀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걸 파헤치려면 목숨걸고 모험을 해야할 텐데, 천우진은 지금도 일하기 싫은 상황에서 그런 모험까지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킨 일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알겠소.”

천우진은 동료들을 데리고 대웅제국으로 귀환해서 황제인 백련교주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약 10여년간 잠정적인 교류가 흐른 후, 대웅제국과 미합중국은 상호불간섭 및 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다시 지났다.

“무생노모의 법문(法文)이 있는 곳을 알아냈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로 제갈사였다.

그는 히죽 웃으며 전생동료들에게 말했다.

“다 같이 세계의 악몽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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