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59화 (1,056/1,615)

1059====================

진공가향(眞空家鄕)

타신편이 발동하는 순간, 망량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타신편과 자신의 눈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망량은 백련교주의 몸을 차지한 [옛 지배자] 비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아….’

그는 순간적으로 공포 때문에 넋이 나가는 것 같았다.

‘저것’은 무엇인가?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본질을 마주친 순간 망량은 정신이 붕괴할 뻔 했다. 이 세상의 불길함과 흉흉함으로는 차마 설명할 수 없었다. 저것은 본디 필멸자가 마주쳐서는 안될 악몽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는 오랜 기간 시해지술을 익히면서 수양을 높였기 때문에 간신히 공포와 정신붕괴를 떨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비류의 본질 내부에서 빛을 내고 있는 별무리와 같은 성구(星球)를 찾아내었다.

망량은 이를 악물고 타신편을 떨쳐내며 휘둘렀다.

콰과곽!!

수백 장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으나 그 순간 비류의 신성이 즉시 파괴되었다. 왜냐하면 타신편은 일반적인 공격과 달리 휘두른다는 행위만 있으면 과정을 무시하고 무조건 맞출 수 있는 보패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능력은 다른 보패에도 종종 있었으나, 타신편이 특별한 것은 상대의 방어조차도 모두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비류는 그 공격에 잠시 비틀거렸다.

예상 밖의 뼈아픈 공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달려든 아수라의 적멸무극이 정면으로 백련교주의 육체를 강타했다.

콰과광!!

본디 아무리 백련교주라 해도 호신강기 없이 적멸무극을 정통으로 맞을 경우 전신이 박살나야 정상이었다. 심지어 호신강기를 펼쳤다 해도 중상을 입을 것이리라. 그러나 아수라는 적멸무극을 무방비 상태로 맞았는데도 백련교주의 몸에 한 줌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마력이!!]

딱히 특별한 방어수법도 아니었다. 비류는 그저 혼돈의 옥좌에서 끌어온 마력을 몸에 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마력의 잠재력만으로도 아수라의 적멸무극을 훨씬 뛰어넘었기에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혼돈의 신인 비류가 옥좌에서 끌어올 수 있는 마력의 양은 백련교주의 수백 배나 되었다. 그 이상이라면 아무리 비류라 해도 소멸을 각오해야 했지만, 어차피 필멸자 따위를 상대할 때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벌레놈이….]

비류가 눈에서 은광을 뿜어내며 아수라에게 손을 뻗었다. 아수라는 그 손짓에 흠칫 놀라서 뒤로 크게 물러났는데, 다행히 비류는 지금 신능을 봉인된 상태라서 아수라를 즉시 없앨 수 없었다. 대신에 손에서 혼돈의 구체가 떠오르더니 천천히 커졌다.

구우웅

저게 어떤 수법인지 모르는 대웅제국측의 고수들은 경계상태를 취했다. 그러자 뒤에서 지휘를 하던 제갈부가 모두에게 동시에 천리전성의 전음을 보냈다.

[지원군이 온다…. 그때까지 공격해!]

지원군.

그 말에 아수라를 포함한 모든 고수들이 일제히 비류에게 달려들었다. 비류는 귀찮다는 듯 어둠의 장막을 펼쳐내어서 그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아수라는 그 정도는 감당할 역량이 있었으므로 앞장서서 장막을 의념절기로 뚫었다. 그리고 아수라를 선두로 다른 절대지경 고수들이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하자 비류는 기술을 함부로 시전하지 못했다.

망량은 그제서야 제갈부의 책략을 읽어내고는 말했다.

“정말 그녀를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가능성은 낮다. 아버님이 모든 힘을 쓰고 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제갈부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도착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콰과광

쿠콰콰쾅

유아독존(唯我獨尊)

사공린은 일행의 선봉에 서서 비류가 떨쳐내는 혼돈의 마력을 흘려내는 수비수의 역할을 했다. 유아독존은 인과를 왜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므로 아무리 막강한 마력이라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공린이 광범위 마력공격을 흘려내는 사이에 다른 고수들이 비류를 공격하는 구도였다.

동시에 사공린은 자신의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방금 전 서문혜와 싸울 때 엄청난 힘을 소모한데다가 아수라에게 쓰러지면서 상당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갈비뼈 사이를 꿰뚫은 검상(劍傷)이 욱씬거리는 걸 느끼자 이를 악물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도와주십시오….’

그녀는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버텼다. 어쩌면 이게 자신의 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투신 아르쥬나와 싸울 때 위지혼이 그녀를 지켜줬던 것처럼 그녀 또한 동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휘청

그러나 그녀의 의지력과는 관계없이 한쪽 무릎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연이은 전투에 이어 모든 육체의 기능이 마비되고 있었다. 비류의 마력이 너무 막강해서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인과를 왜곡시키는 절대지경이라도 순수한 혼돈의 마력에 오랫동안 노출될 경우 결코 멀쩡할 수가 없었다.

‘아, 안 돼.’

앞으로 기껏해야 일 격을 막아내면 그녀는 더 이상 싸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공린이 저 막강한 마력을 상대로 수비수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아군 고수들은 1초만에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야 했지만 이미 상황은 의지로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절망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의지력으로도 일어설 수 없다.

설마 여기서 모든 게 끝장이란 말인가?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단 말인가.’

사공린은 어두컴컴한 절망의 맛이 자신의 정신에 침범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평생동안 거의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고, 그와 동시에 사공린은 찰나지간에 [또 다른 목소리]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을 느꼈다.

[인간인 척 하는 건 그만둬라.]

무슨 소리지?

사공린은 그 목소리가 마치 달래듯이 그녀의 심연에서 말을 걸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공린이 의지를 다해서 심연을 향해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인간이다. 결코 인간을 버리지 않는다.

사공린의 대답에 그 심연의 목소리가 마치 비웃듯 대꾸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어리석군…. 허나 한 번 정도는 힘을 빌려주지.]

파앗

그 순간 사공린의 눈이 완전한 황금안(黃金眼)으로 변했다.

그리고 사공린은 한 손을 휘둘러서 비류를 공격했다.

콰직!!

처음으로 비류의 목이 옆으로 돌아갔다. 비류가 뻗어낸 어둠의 장막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사공린의 황금빛 권압(拳壓)이 비류의 마력결계를 관통한 것이었다. 뜻밖의 공격에 비류는 분노하기 보다는 생경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까지 인과율을 읽었나? 이런 곳에서 나를 방해하려고 말을 배치할 줄이야….]

그 목소리에 분노는 한 줌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밌군.]

입가의 피를 닦는 비류의 목소리에는 흥미가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이 힘’의 주인이 자신이 진지하게 상대할 존재라는 걸 인지하기 때문에 나온 반응이었다.

후와아악

파캉!!

사공린의 힘이 강해지자 비류가 계속해서 어둠을 뿜어내는데도 불구하고 전방에서 사공린이 그저 양 손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긴 것처럼 막아내었다. 그 덕에 스치기만 해도 즉사하던 비류의 혼돈을 피해내던 대웅제국 고수들은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

아수라는 힐끔 사공린을 보며 생각했다.

‘갑자기 저 정도의 신력을 쓴단 말인가? 아까는 그저 겉에 두르기만 하던데 마치 자기 몸처럼 신의 권능을 쓰는구나. 하지만 왠지 서툴러.’

그는 사공린의 권능 전개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치명타를 먹이기 위해서 비류에게 계속 덤벼들었다. 아수라가 지속적으로 칼질을 하자 비류는 성가셔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수라를 일격에 죽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류는 그런 아수라가 못내 아니꼬운지 이윽고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

[벌레놈! 네놈만은 없애버리겠다.]

쿠구구구!!

아수라는 그 순간 비류의 혼돈이 엄청난 기세로 퍼져나오더니 순식간에 자기만을 포위해 오는 걸 알아차렸다. 사공린에게 몇 대를 맞더라도 아수라부터 처리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아수라는 예상 밖의 습격에 의념절기로 대처하려 했으나, 아수라의 절기는 혼돈에 그대로 먹혀서 소멸되고 말았다.

[아, 아니!]

너무나 농밀한 마력이다. [옥좌]에서 직접 뽑아낸 마력을 더더욱 농축시킨 힘이었기에 아수라의 절기조차 통하지 않을 지경이 된 것이다. 아수라는 눈을 부릅떴으나 이윽고 그의 오른쪽 팔 3개가 동시에 날아가 버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쿠콰쾅

[크악…!!]

[벌레는 벌레답게 죽어라.]

후와아아악….

아수라는 자신의 눈 앞에 파도처럼 밀려드는 어둠의 기운을 보자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은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여기까지인가.

그러나 바로 그 때, 한 줄기의 빛처럼 독고성이 아수라의 앞을 가로막았다.

절대지경(絶對之境)

검뢰(劍雷)

독고성은 자신이 검뢰를 써봤자 저 압도적인 마력의 파도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독고성은 인생 최후의 깨달음을 담아서 마지막 일참(一斬)을 날렸다.

뇌신검무(雷神劍舞)

폭포베기(瀑布斬)

과거 백웅이 십천군의 절기를 베기 위해 사용했던 무공.

독고성은 딱히 백웅의 기억을 본 게 아니었으나, 무인의 직감으로 저 혼돈의 파도에 이 무공이야말로 가장 알맞은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직감에 모든 것을 걸고 폭포베기를 시전했다.

정기신(精氣神)이 합일된 궁극의 일참!

‘자살행위….’

그걸 뒤에서 보던 아수라는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자신은 저것보다 더 뛰어난 무공절기를 수십 개 이상 알고 있는데, 그 어떤 것도 저 혼돈의 파도에는 먹히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보다 수준이 뒤떨어지는 독고성의 무공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절망하던 아수라는 이윽고 기적을 보게 되었다.

츄와아악 - !!

쩍 하는 소리와 함께 혼돈의 파도가 독고성의 일검에 갈라졌다.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아수라는 독고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럴수가. 어떻게….]

아수라는 살아나고도 믿기지 않아서 굳어 있었는데, 이윽고 독고성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독고성은 일검으로 혼돈의 파도를 베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혼돈의 여파를 감당하기에 보통 인간의 육체는 너무나 연약했다. 호신강기 덕에 몸의 형태를 남기기는 했으나, 그의 전신혈맥과 피부가 시꺼멓게 혼돈에 그을려 있었다.

쿨룩

독고성은 입에서 흑혈을 토해냈다. 몸 내부가 혼돈에 진탕되어서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상처였다.

[…….]

“아수라여. 이것이 뇌신류 검술의 자존심이다.”

[어째서… 날 구했는가?]

아수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자 독고성이 희미하게 웃는 듯 했다.

“나도 모르겠다. 양아치같은 놈….”

정말로 독고성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아까 전까지 아수라의 오만함에 분노해서 죽어라고 칼을 맞대고 싸웠는데 어째서 목숨을 걸고 아수라를 구해준 것일까? 독고성 본인의 검으로 찢어죽여도 모자랄 놈이었는데도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도 참 멍청한 놈이군.’

하지만 독고성은 순간 아수라가 그리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외곬수이고 제멋대로이고 오만하지만 순수한 면이 있다.

어쩌면 그런 감정이 덤이 되어서, 신을 상대로 맞서보겠다는 독고성 본인의 호승심이 작용한건지도 몰랐다.

[…….]

독고성은 끝까지 꼿꼿이 검을 든 채 노호성을 내질렀다.

“그대, 무(武)의 길을 관철하라!!”

그리고 독고성은 죽었다.

최후의 뇌신류 검성의 죽음이었다.

아수라는 목숨이 끊어지자 허공에서 떨어지려는 독고성의 몸을 받아들고는 한동안 말없이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

왜일까.

아수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검을 꺾고 싶다는 기분을 느꼈다.

그 감정은 부끄러움이었다.

스스스스

격전이 거듭된지 약 반 식경이 흘렀을 때.

암운으로 물든 하늘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황금빛과 은빛이 나선처럼 춤추며 하나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 존재는 아홉 개의 황금빛 꼬리를 나풀거렸다.

치리링

그 존재를 향해서 좌중의 시선이 모였다.

“아버님이 성공하셨다!!”

황금빛 존재의 현신장면을 멀리에서 쳐다보던 제갈부가 환희의 외침을 내질렀다. 그가 말했던 ‘지원군’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었다.

[죽어라!]

쿠왓

그 존재는 나타나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비류에게 달려들어서 목덜미를 물었다. 비류는 그 물기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하고 마치 사공린에게 당할 때처럼 돌격에 날아가 버렸다.

쿠콰쾅

절벽이 부서지며 두 절대자가 연기구름을 내며 땅에 처박혔다. 목덜미를 물린 비류는 자신을 공격한 자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만들어진 신(機神) 따위가 감히 내게 덤비느냐?]

[…….]

[반쪽짜리가.]

비류가 여유로운 이유는 바로 토요 팔괘도의 신능봉인 시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해방 토요라고 해도 진짜 신을 상대로 권능을 오래 봉인할 수는 없었다.

‘제법 강한 존재긴 하지만 내가 진심을 보이면 금방 쓰러뜨릴 수 있다.’

뿌드득

비류의 목덜미를 물고 있는 것은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닌 황금의 여우였다. 지금도 단순히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비류의 마력을 완벽히 차단하는 신의 권능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서서히 여우의 이빨이 비류의 목덜미에 꽂히기 시작했으니 마력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증거였다.

[반쪽짜리라도 너같은 기생충 잡는 건 아무런 문제 없다!]

콰악!

마침내 여우가 목덜미에 송곳니를 끝까지 박아넣었고 백련교주의 몸뚱이에서 피분수가 터져나왔다. 비류의 마력이 뚫려버렸다는 뜻이었다. 예상 이상으로 강력한 황금여우의 신력에 비류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 이건 여와(女媧)의 힘. 그 잔재. 너는 대체 뭐냐?]

그저 단순한 신적 존재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 힘의 근원이 예상보다 격이 높았다. 서서히 신능봉인에서 풀려나는 비류로서도 여우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벅찼기에 당황한 것이다. 방어에 실패한 것이다.

‘이런…!! 아까 신성이 파괴당해서 반격을 할 수 없다.’

망량의 타신편에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반격을 가해서 여우에게 상당한 부상을 입히고 나서 일시적으로 피하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여우를 상대로도 충분한 승산을 장담할 수 있었는데, 아까부터 누적된 피해가 비류의 반격을 막고 있었다.

여우의 눈에 흉광이 감돌았다.

[나는 꼬리이자 여와의 자식. 그 분이 이 세상에 남긴 흔적이며 분신이다…!!]

여우가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는 그 말에 비류는 진심으로 여와를 이해할 수 없어서 경악했다.

[삼황씩이나 되는 존재가 뭐하러 그런 짓을.]

[알 거 없다, 죽어!!!]

우드득!

여우가 한 번 더 송곳니를 박아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크악.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허무하게….]

우득!!!

[…….]

비류는 여우에게 뜯어먹히면서 발버둥쳤지만 이내 반응이 사라졌다. 여우의 신력이 송곳니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저절로 비류를 백련교주의 몸에서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계속 저항하며 남아있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될 경우 비류의 본체 또한 큰 타격을 입으므로 더 이상 이 세계에 강림할 수가 없었다.

슈우욱…

잠시 후 여우의 몸이 수인(獸人)의 형태로 변했다. 그 모습은 황금빛의 머리칼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어느 새 비류를 물리친 현장으로 찾아온 제갈부가 그 수인에게 말을 걸었다.

“미호(美狐). 비류를 완전히 물리쳤나?”

그랬다.

이 자리에 나타난 건 다름아닌 미호!

요괴대전 내내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미호가 처음으로 나타난 셈이었다. 미호는 힐끔 제갈부를 쳐다보더니 마치 신과 같은 힘을 지닌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 놈은 더 이상 이 몸에 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이군….”

[하지만, 내가 한 일에 대해 대가를 줘야겠다.]

“…….”

미호의 말에 제갈부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현자의 돌이다. 가져가라.”

이번 전투에서 제갈부는 현자의 돌을 물쓰듯 썼다. 그리고 현자의 돌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 대웅제국의 10여년치 국력이 소모된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가벼운 대가가 아니었다.

[…내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미안해하는 미호에게 제갈부가 한숨을 쉬었다.

“알고 있다. 넌 이미 기신(機神)이 되었으며 달기의 힘마저 6할 이상 흡수하여 인과율의 영역까지 힘을 키워버렸다. 신의 반열에 이른 존재는 강한 힘을 지닌 대가로 인과율 없이는 이 세상에 관여할 수 없으니, 네 의지와 관계없이 대가를 받아야만 힘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나를 소환한 제갈유룡은 죽지는 않았지만 모든 힘을 잃었다. 정말 나를 원망하지 않느냐?]

미호의 질문에 제갈부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신을 소환한 거니까.”

그랬다.

제갈유룡과 제갈부가 찰나지간에 떠올린 책략은 바로 [지원군]으로써 기신 미호를 소환하는 것!

백웅 실종 직후 미호는 아베노 세이메이와 계획을 세워서 힘을 키우기로 했었다. 그것은 바로 기신으로써 진화한 후 그 힘을 바탕으로 금오도로 가서 달기의 힘을 빼앗는 것이었다. 화요의 힘과 대웅제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미호는 비교적 쉽게 기신이 되면서 자신의 인격을 전승하는데 성공했고, 머지않아 금오도로 가서 달기의 봉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달기가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달기의 힘을 흡수했던 것이다.

문제는 미호가 강해지면서 그녀가 인과율에 구애될 정도의 신격으로 올라섰다는 점이었다. 본디 단순히 마왕 달기의 힘을 얻는 것만으로 이렇게 될 수는 없었지만, 미호와 달기의 근원이 같다는 점 때문에 생긴 상승효과였다. 달기의 힘을 5할쯤 얻은 시점에서 미호는 여와의 영향을 받아서 신(神)으로서의 절대성을 각성했고, 인과율을 벗어나 버렸다.

기신 미호는 이 우주에서 삼황 여와의 신좌(神座)를 일부 이어받은 존재로써 인식되어 버렸다. 그것은 달기가 여와의 음신(陰身) 그 자체이기 때문에 생긴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필멸자를 벗어나 인과율에 올라선 존재는 그 힘이 어떻든간에 대가가 있어야 현실에 관여할 수 있다. 이 법칙을 어길 경우 역풍 때문에 모든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미호는 아군임에도 불구하고 요괴대전의 전장에 섣불리 참여할 수가 없었다.

미호 본인은 대가없이 도와주고 싶어도 그녀의 힘이 마왕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으며 삼황의 신성조차 이어받았으므로 필연적으로 크나큰 대가를 필요로 했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우주의 법칙이었다. 그랬기에 대웅제국 측에서는 팔부신중을 감당할 수 있는만큼 감당하고 미래에 일어날 종말의 전장에 미호를 소환하기로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 제갈유룡과 제갈사는 의체를 통해 부활하고 재차 전투에 참여하려 할 때 심상치 않은 [옛 지배자]가 전장에 나타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수라를 ‘따위’라고 취급할 수 있을 정도의 신급 존재의 출현! 이대로는 무슨 수를 써도 감당이 되지 않았으므로 할 수 없이 종말에나 쓰려고 했던 최강의 패인 미호의 소환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제갈부만이 전장으로 나와서 지원군인 미호의 소환이 가능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둔 것이었다.

그 대가는 상당히 컸다. 소환술을 시전한 제갈유룡은 수명은 물론이고 모든 술력과 내공을 탕진했다. 제갈유룡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왔으니 힘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그걸로도 대가가 모자라서 제갈부 또한 현자의 돌을 미호에게 바쳐야 했다.

‘하지만. [옛 지배자]를 퇴치한 대가라면 싼 것이군….’

미호는 씁쓸한 눈으로 그런 제갈부를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전생자 없이 인간들끼리 버티는 건 지나치게 험난한 길. 오늘 저 놈보다 더 강대한 존재가 앞을 가로막으면 그 땐 미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겠지.”

[백웅이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허나 모두가 스러진다 하더라도 나는 종말의 때에 백웅을 위해 싸우리라.]

“…….”

[힘 내거라.]

파앗

미호가 사라졌다. 소환시간이 끝나서 다시 금오도로 송환된 것이었다.

그녀는 달기의 힘을 모두 흡수할 때까지 현실에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 시점, 망량은 거대한 번뇌에 휩싸여 있었다.

‘기신 미호를 소환하는 수가 있었다니. 그렇다면…. 내가 타신편을 쓴 것은 결국 낭비였다는 말인가?’

실상은 망량이 타신편을 쓴 덕분에 신성이 파괴된 비류가 미호를 상대로 반격조차 못하고 쉽게 토벌된 것이었다. 망량이 타신편을 쓰지 않았다면 비류를 상대로 미호도 큰 힘을 소모하여 퇴치가능성이 불분명했으리라.

그러나 망량은 이런 결과론 따위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천현녀의 예지.

현실을 앞세워 그 예지를 어긴 결과는 반드시 인과율에 따라 되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적의 때’를 무시했으니, 나중에 그 때가 찾아올 경우 반드시 큰 손해를 보리라. 그리고 그 손해를 과연 망량이 감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

“망량. 정신차려라. 큰일났다.”

“아베노 세이메이. 무슨 일이오?”

어느 새 망량 앞에 나타난 아베노 세이메이였다. 지금까지 술법으로 아군들이 무리없이 체공할 수 있게 지원하고 있던 아베노 세이메이가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옛 지배자]가 날뛰면서 그대가 야차를 봉인했던 공간이 뒤틀렸다….”

망량의 표정이 암울해졌다.

“크, 크윽. 설마….”

“지금은 성진이 잠시 막고 있다. 이리 와 봐라.”

파지직!!

검은 번개가 튀며 차원의 결계가 일그러져 있었다. 그 공간 앞에서 성진이 주문을 외우며 차원 밖으로 야차의 팔이 빠져나오는 걸 억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아까 망량이 술법으로 야차를 봉인했던 바로 그 이공간이었다. 멍하니 망량이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자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그대가 봉인했으니 그대가 완전히 매듭지을 수 있겠지. 그것이 봉인술의 원리니까.”

“…….”

“우리는 술자가 아니니 완전봉인을 할 수 없다.”

무리다.

망량은 아까 금술을 사용하면서 모든 체력과 술법을 다 써 버렸다. 심지어 십령(十靈)에 의해 정체불명의 [표식]이 새겨졌는데 십중팔구는 금술에 따라붙는 악몽같은 저주였다. 심지어 천계와 거리가 너무 멀어져서 시해지술은 더 이상 쓸 수 없다.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 봉인술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량은 드디어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놓아버리고는 말했다.

“알겠소. 내가 하겠소.”

쿠구구구…

망량은 이번에 엄청난 소모를 해 버렸기에, 힘을 다시 쌓아서 장수의 술법을 다시 터득하고 백웅이 돌아올 그날까지 오래 살아서 버티려 했다. 그러나 그럴 여력은 없는 듯 했다. 그는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남은 목숨을 태우면 되겠군.”

목숨을 술력(術力)으로 전환하는 마지막 수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걸 쓰면 망량은 당장 내일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수밖에 없나….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가사상태로 만들어주지.”

“성진.”

“자네가 이대로 죽게 놔둘 순 없지. 가사상태로 생명을 보존하고 다음 방법을 찾아보세. 내가 아내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대의 명줄을 붙여놓겠네.”

성진은 고대의 주문을 외워서 망량에게 시전했다. 그것이 어떤 주문인지 알아차린 망량은 이게 최선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그는 우는 소리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내 꾹 눌러참고는 차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봉인하겠소.”

시해지술은 없어도 이미 봉인술은 펼쳐져있으니 마무리만 하면 된다. 그건 망량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치지직…!!

이윽고 망량의 수인이 야차를 차원 바깥으로 완전히 날려버리려 했다. 그리고 그런 망량을 옆에서 아베노 세이메이가 보조하려고 옆에 섰을 때였다.

[크아아아!! 이대로 봉인될 수는 없다!!!]

야차는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갑자기 자신의 거대한 팔을 바깥으로 내뻗었다. 최후의 발악을 예상하지 못한 망량은 흠칫하고 굳어버렸고, 아베노 세이메이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사적으로 망량 앞을 가로막았다.

푸콱

아베노 세이메이의 상반신과 배가 한꺼번에 야차의 팔에 관통당했다. 마치 꼬챙이처럼 관통당한 아베노 세이메이는 피를 입가에서 흘리며 훗하고 웃었다.

“오늘은 마가 낀 날이군…. 결국 나도 죽는구나.”

우웅

아베노 세이메이가 부적을 소환해서 야차의 팔뚝에 붙였다. 망량은 뒤에서 이를 악물고 목숨을 태워가며 봉인술을 시전했고, 두 사람의 술법사가 전력을 다하자 야차는 더 이상 이겨내지 못하고 차원 저편으로 날려갔다.

쉬이이익

[크아아아아….]

더 이상의 반전은 없다. 야차는 이제 우주가 끝날 때까지 영겁 속을 떠돌게 될 것이리라.

그리고 숨이 끊어져서 죽어있는 아베노 세이메이의 시체를 본 망량은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

그 감정은 바로 결의와 분노였다.

이 변화가 앞으로 어떻게 작용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망량이 마지막 힘을 다 소모하고 기절하자, 성진이 그를 들쳐업고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제갈부. 전쟁은 이걸로 끝난 거 같군.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뒤늦게 공간이동으로 제갈부가 나타났다. 그는 아베노 세이메이의 시체에 부적을 붙여서 가공처리를 한 후 냉담하게 중얼거렸다.

“지금부터가 책사의 일. 나는 대외적으로 아수라에게 죽은 걸로 하겠소. 그리고 지금부터는 대웅제국의 운영을 도맡아 할 생각이오. 백련교주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회복할 때까진….”

“팔부신중에게 당한 피해를 회복하는데 모든 힘을 다해야겠군.”

“…아니오. 인도까지 수복할 생각이오.”

“뭐?”

뜻밖의 말에 성진이 눈을 둥그렇게 뜨자 제갈부가 말했다.

“제갈사가 예전에 내게 말했소.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 추방되었으나 놈이 되돌아올 수 있는 근거가 천축에 있을 거라고. 그리고 팔부신중이 무력화된 지금, 크리슈나는 직접 나서려고 뭔가 수를 쓰고 있을 거요. 놈이 다음 수를 쓰기 전에 천축을 다시 쳐서 무너뜨리고 크리슈나를 완전히 몰아낼 것이오.”

“가능하겠는가? 예전에 전력이 완전할 때도 천축을 정벌하는 건 힘들었는데….”

“교주가 회복하면 가능한 일. 우선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봅시다.”

“부디 잘 되었으면 좋겠군….”

“…….”

제갈부는 암운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되돌아오는 걸 쳐다보며 말했다.

“잘 될 거요. 아수라가 말없이 가 버린 걸 보면.”

아수라의 성격상 남아서 아군에게 깽판을 치리라 생각했고, 제갈부는 그걸 마지막 관문으로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류가 소멸하자 아수라는 말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고, 그건 제갈부의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생기기라도 한 것일까?

크나큰 희생은 치렀으나 인간의 힘으로 마왕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

길고 길었던 요괴대전의 끝이었다.

“…….”

팔부신중, 아수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광야를 홀로 걷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허무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갖고 다니던 8자루의 검을 모조리 광야에 던져버린 맨몸이었다.

그는 문득 멈춰서서는 자기 앞을 가로막은 존재에게 말했다.

“크리슈나. 내게 할 말이 있나?”

어느 새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크리슈나의 영체였다. 크리슈나가 말했다.

[친구여. 어찌 전투를 포기하고 떠나는가.]

“…….”

[동료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되는….]

그 순간, 아수라는 분노해서 일갈했다.

“닥쳐!! 그건 대체 무슨 언령(言靈)이냐!”

움찔

“그건 연대감을 이용한 언령이지? 난 네 술법에 조종당하지 않아! 다른 놈들을 애초에 동료로 생각한 적 없기 때문이다!”

[아수라.]

크리슈나는 아수라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약간 놀란 듯 했다. 크리슈나가 침묵하자 아수라가 이를 악물었다.

“네가 우리를 이용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누구도 믿지 않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 지경까지 와서도 날 농락하려 드는 네놈은 대체 무엇이냐. 이토록 사악할 줄은.”

[…….]

“네가 나의 친구라 자청할 거라면 말해라. 넌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런 짓을 하는 거냐.”

그 질문에 크리슈나는 문득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조만간 알 수 있을 걸세….]

파앗

크리슈나의 영체가 사라졌다.

아수라는 무표정하게 그 공간을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아수라는 그 단어를 한없이 곱씹었다.

그는 광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염없이 걸어가는 그에게 이미 투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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