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57화 (1,054/1,615)

1057====================

진공가향(眞空家鄕)

망량은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격전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슈슈슈슈

빛의 난무!

무음(無音)의 소용돌이처럼 무수한 빛이 반경 십여 장의 공간에 집중되어서 얽히고 섥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선의 궤적이 용권풍을 그리면서 때때로 하늘의 별빛 사이로 튕겨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빛의 난무 속에서 언뜻 인간의 신형이 스쳐보였는데, 그 얼굴은 당연히 망량이 익히 알고 있는 자들이었다.

망량이 외쳤다.

“서문혜… 사공린…!! 뭐하는 거요!!”

그랬다.

미간에 검이 꽂혀서 제압당해 있는 야차의 본체 근처에서 빛의 난무와 함께 서문혜와 사공린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전투와 달리 거창한 소리나 폭음은 울리지 않았으나, 그건 도리어 전투의 흉험함이 극에 달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망량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력(神力)의 전개…. 법칙왜곡! 이미 신성(神聖)끼리의 전투나 다름없다.’

신의 힘을 사용하게 되면 사용자는 이 세계의 형이하학적 법칙, 즉 물리법칙에 속하는 시공간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는 특성을 가진다. 신력의 수준에 따라 지배력은 차이가 났으나 때로는 인과왜곡조차 할 수 있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신력을 전개해서 싸우는 이상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모든 요소를 초월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만일 저 공간에 뛰어든다면 절대지경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스

그 때 망량의 옆에서 성진이 암울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진은 나타나자마자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서문혜가 [부름]에 잠식당했다.”

“……!!”

“시해지술로 그녀를 회복시킬 수 있겠나? 나나 세이메이의 술법으론 무리다.”

망량은 그 말에 빠르게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서문혜는 야차를 쓰러뜨리는데는 성공했으나 거신족의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선조의 [부름]때문에 미쳐버린 것이리라. 아무리 선조회귀의 혈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피가 섞여있는 이상 거신족의 강대한 힘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킨 후 말했다.

“내버려 두겠소.”

“뭐라고?”

“대신 나는 야차를 먼저 봉인할테니 저 두 사람이 결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지키시오.”

“정말로 그게 최선인가? 저들을 말리지 않으면 둘 중 하나가….”

성진의 의혹어린 말에 망량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이 단시간에 결판을 낼 수 있었을 거라면 내가 찾아오기도 전에 대결은 끝나있었을 것이오. 현재 서문혜와 사공린의 역량은 백중세. 그렇다면 제압당한 야차부터 먼저 해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오.”

“말도 안 돼! 망량, 너무 위험한 선택이야! 어떻게 백중세란 걸 알 수 있지? 내버려뒀다가 저 둘이 공멸(公滅)하면 우리는 끝장일세.”

“틀림없소.”

“저 빛의 난무는 신력의 궤도일세. 인간의 힘이나 술법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알아볼 수 없기에 우리는 지켜보기만….”

그 순간, 의혹을 제기하던 성진은 망량과 눈을 마주치고는 흠칫했다.

망량의 눈에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

성진은 망량이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망량은 틀림없이 저 둘의 사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단시간에 결단력있게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게 분명했다.

‘두렵구나…. 시해지술의 성취가 얼마나 높아진 것인가.’

문득 성진은 서문혜나 사공린보다 망량이 더 놀랍고 두려운 존재라 생각했다. 서문혜나 사공린은 따지고보면 혈족의 힘을 이어받은 것뿐이지만, 망량은 그런 혈통적인 수혜를 전혀 받지 않은 순수한 인간이다. 그런데도 시해지술을 연마한지 몇 십 년 만에 무시무시한 성장을 보여준 것 같았다. 단순한 전투력을 넘어선 총체적인 역량의 성장에 있어서는 어쩌면 망량이 최고일지도 몰랐다.

옆에 와 있던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좋아. 공간을 분할할 테니 망량 네가 야차를 봉인해라. 둘의 싸움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우리가 도와주겠다.”

“어서… 시간이 없소!”

“그럼.”

파앗!!

이윽고 망량은 야차 본체와 단 둘이 남겨진 새하얀 무(無)의 공간으로 이동했다. 결계작성자인 성진과 아베노 세이메이가 그렇게 되게끔 결계의 시공간을 조종한 것이다. 망량은 손을 들어서 주문을 외우며 시해지술을 시전했다.

“봉인.”

우우우우…

망량의 시해지술이 전개되면서 야차의 전신에 쇠사슬이 칭칭 감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수(魔獸)의 형태를 하고 있는 야차는 움찔하면서 저항하려고 했으나, 쇠사슬이 철그렁거릴 뿐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야차가 그르렁거리며 눈앞에 있는 망량에게 말했다.

[시해지술이라고 했지…. 아까 너희들의 대화를 멀리서 다 들었다.]

망량은 야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무시했다. 시간이 화급한데 적과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망량이 자신을 무시하는데도 야차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네가 외우는 모든 시해지술의 주문은 그저 요식행위에 불과하구나. 그게 술법이긴 한 것이냐?]

“…….”

망량은 움찔하고 반응했다.

[나는 은상(殷商)의 신화시대에 이미 대주술사였으며 이후로 창힐님의 도움을 받아 대부분의 주술을 연마했다. 그런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말이 많군.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지?”

[지금의 넌 술법사가 아니다. 주술사나 마법사 또한 아니다. 지금 네가 전개하는 것 또한 봉인술이라기엔 다른 차원의 무언가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너는 무엇이냐?]

야차의 질문에 망량은 잠시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꾸했다.

“너를 봉인할 자다. 그거면 충분하다.”

[크크크… 네놈이 망량선사의 제자라고 들었다. 망량선사가 너를 제자로 들인 이유는 어쩌면….]

꾸욱!

망량이 주먹을 한 번 말아 쥐자 쇠사슬이 철컥거리면서 야차의 몸을 크게 옥죄었다.

[카아아악!!]

야차는 그 고통 때문에 마수의 비명을 내질렀으나, 망량은 봐주지 않고 더욱 강하게 뼈와 살을 분리시키려 했다. 이윽고 야차의 전신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자 망량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너 따위가 감히 스승님을 논하지 마라.”

망량이 기운을 잃은 야차의 전방으로 손을 뻗으며 말을 이었다.

“우주의 기억 속에 잊혀진… 영원한 차원의 틈새로 가거라.”

우우웅!!

[우오오오오….]

야차의 거대한 신형이 쩍 갈라진 어두운 차원의 틈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야차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으나 도저히 망량의 봉인술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이마에 박힌 사공린의 검에 신력이 깃들어 있어서 야차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소멸시키는데다가 망량의 봉인술 자체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야차가 힘을 잃고 한 순간에 빨려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크윽…!!”

망량은 짧은 비명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거대한 반발력과 함께 봉인술을 더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봉인술의 제어력이 풀리자 야차를 흡인하던 차원의 틈 또한 소멸되었고, 야차는 멀쩡한 상태로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야차가 광소를 흘렸다.

[하하하하!! 자기가 펼친 술법을 감당하지 못해서 실패했단 말인가? 아둔한 놈!]

“…….”

아니, 그게 아니다.

망량은 자신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난 건지를 냉정하게 분석해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에게 닥쳐온 숙명(宿命)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천계가 멀어지면서 차원의 경계가 늘어났다. 그래서 천계와 이어져있던 맥이 끊어졌다…. 구천현녀의 힘을 빌려오는 시해지술은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

천계는 지속적으로 인과율의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현실과 멀어지는 중이었고, 시해지술의 근원인 구천현녀는 천계에 있었으므로 천계가 멀어질수록 시해지술 또한 약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다만 망량의 시해지술 숙련도는 이상할 정도로 높았기에 현실에서 여전히 활약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지금 시점에서 천계가 현실에서 완전히 동떨어지며 차원의 벽이 늘어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시해지술을 못 쓰는 현재의 망량은 거의 무능력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술법을 쓸 수는 있었으나 시해지술의 체계에 익숙해진 현재 일반술법을 사용해봤자 예전보다 약할 게 뻔했다.

구구구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야차는 방금 전 시해지술이 풀리면서 약간 체력을 회복한 듯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봉인술이 해제된 만큼 술법사에게 반작용이 되돌아와야 하는데 그게 봉인대상에게 이득을 주는 방식으로 구현화된 것이다.

야차가 자신의 손톱에 힘을 주면서 씨익 웃었다.

[각오하거라. 팔다리를 하나하나 잘라서 네 입에 처넣어 주마…. 그리고 으깬 고기로 만들어서 네 동료들에게 던져주겠다.]

야차의 위협은 잠시 후 현실이 될 것이다.

망량은 뜻밖의 위기에 곤란함을 느꼈다.

‘할 수밖에 없겠군….’

남은 목숨의 9할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한다.

화르륵!

망량은 양손을 펼쳤고 이윽고 십지(十指)에 동시다발적으로 불꽃이 솟아올랐다. 야차는 언뜻 저게 화염술법인가 싶었으나, 잠시 후 망량이 펼친 술법의 정체를 깨달았다.

[강신술(降神術)인가.]

망량의 눈이 빛났다.

천신경(千神鏡)의 술(術)

금술(禁術)

사계육기(四季六氣)의 장(章)

십왕소혼(十王召魂)!

우우우우!!

열 개의 손가락에서 불길이 모조리 사라지면서 망량의 전신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피부색깔은 물론이고 눈동자 색깔까지도 완전한 혈령(血靈)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망량이 완전히 힘을 끌어오기 전에 야차가 기습적으로 달려들어서 손톱을 휘둘렀다. 설령 신선이라 해도 일격에 찢어발기는 야차의 손톱이었다.

꽈앙!!

그러나 망량은 그 손톱의 공격을 피하면서 뒤로 돌아가 있었다. 도저히 술법사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어느 새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봉혼도(封魂刀)를 꺼내서 야차의 뒷목을 베었다. 야차는 투선을 뛰어넘는 신체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 반격은 간단히 피해내었으나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슈칵

[아… 아니?!]

분명히 피했는데 베였다! 야차는 뜬금없는 피해에 당황했다. 그리고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걸 느꼈고 한 순간에 회복된 체력이 사라져버렸다. 야차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안력을 집중해서 마치 피빛 괴물처럼 변한 망량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깜짝 놀랐다.

거대한 영(靈)이 저 좁아터진 육체에 마치 우겨넣듯 들어가 있다!

무려 열 개나 되는 거령(巨靈)이!

저 압도적인 영력때문에 망량의 몸이 터질듯한 혈령으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저건 소환술의 금기나 다름없었기에 야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 번에 다수의 영을 빙의시키는 건 빙의술사 최대의 금기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빙의술사라고 해도 한 번에 하나의 영이 원칙이었다. 더욱이 초월자도 아닌 인간술자인 경우 그 법칙을 깼을 때 생존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무려 열 개나 되는 영을 한 번에 불러오다니?

게다가 망량의 몸에 임해있는 저 10마리의 거령들은 일반적인 영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보였다.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저 영체 하나하나의 격이 절대 야차로서도 얕볼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어느 새 망량의 눈은 시꺼멓게 죽어서 피빛에서 시꺼멓게 되돌아와 있었다. 어마어마한 정신적 피로때문에 반쯤 죽어가는 망량이었으나 그가 희미하게 말했다.

“원래 봉혼도는 벤 상대를 봉인하는 능력이 있지만… 영혼을 흡수해서 깎아낼 수도 있지. 넌 이제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이 놈….]

“나도 이 술법의 정체는 정확히 모른다. 삼황내문을 마지막 장까지 다 익히면 등장하는 숨겨진 장, 사계육기에 봉인되어 있던 금술(禁術)…. 십령이 동시에 임하는 이상, 나는 술법사로써 대라멸진에 못지않은 힘을 얻을 수 있다.”

망량이 친절하게 대답해 준 것은 야차에게 예우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십령의 압박 때문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같이 죽겠다는 거냐? 그 열 마리의 영이 무엇인지 넌 짐작하고 있을 터…. 모르는 척 하지 마라. 그 놈들은 널 잡아먹으리라. 그리고 넌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내가 이 자리에서 찢어죽여 주는 게 자비로울 정도로!]

야차가 발악하듯 외치자 망량은 쿨룩하고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어차피 결과는 같다…. 모든 건 백웅을… 위해….”

광신이나 다름없는 자기최면을 거는 망량이었다.

“같이 죽자!”

[미친 놈…!!]

그리고 잠시 후 망량은 다시금 야차에게 달려들었고, 잠시 동안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피빛으로 물든 망량의 신형은 이윽고 야차의 입천장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왔고, 이어서 야차의 심장에 봉혼도를 깊게 박았다.

[끄윽….]

슈아아악!!

완전히 힘이 떨어진 야차는 차원의 틈으로 빨려들어서 봉인되었다. 일련의 과정을 이악물고 해치운 망량은 잠시 후 금술을 해제했고 그의 전신에 소환되었던 십령 또한 서서히 물러났다.

털썩

망량은 이로써 자신이 구천현녀의 수제자로써 얻었던 장수(長壽)의 수명 중에서 9할 이상이 소진되었으며 남은 수명이 10년 남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본디 그는 구천현녀의 가호를 받아서 1000년 이상 살 수 있었는데 지금 한 번의 금술으로 900년 이상의 수명을 소모해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잠시 후 그의 몸 주변을 둘러싼 열 명의 영체들이 차례로 망량의 이마에 손가락을 뻗었다.

지익

혈선(血線)이 망량의 이마에 새겨졌다. 그 선이 하나씩 새겨져서 총 열 개가 새겨지자 열 명의 영체는 차례로 떠났다.

이 현상은 삼황내문에 설명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금술이기 때문에 딱히 아무도 펼친 적이 없었고 부작용 또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망량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먹이]의 [표식].

야차의 말대로, 결코 곱게 죽을 수는 없으리라….

“어쩔 수 없지.”

망량이 씁쓸하게 자신의 상황을 곱씹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있던 격리공간의 결계가 무참하게 깨졌다.

콰칭!!

그리고 전면에 드러난 것은 바닥에 널부러진 서문혜와 사공린의 모습이었다. 둘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으며, 그들을 쓰러뜨린 것은 다름아닌 팔부신중 아수라였다. 아수라의 모습을 본 망량은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

[흐음. 둘이 같이 덤볐다면 빡세게 싸울 수 있어서 재밌었을 텐데 한 놈이 폭주하는 중이라서 영 재미가 없었군.]

아수라는 경상을 입은 듯 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싸울 여력은 넉넉해 보였다.

‘아수라…. 전투에 난입한 건가!’

망량은 상황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아마 서문혜와 사공린이 싸우던 전장에 난입했는데, 정작 서문혜는 적아를 불문하고 폭주해서 공격하던 중이라서 아수라를 합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수라는 그 틈을 타서 일단 사공린부터 때려눕힌 후 폭주하는 서문혜를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팔부신중 아수라가 힐끔 망량을 보더니 말했다.

[이봐 너. 망량이라고 했던가? 백련교주를 불러와라.]

“…목적은 백련교주와 싸우는 것이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아수라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백련교주가 내 흥을 맞춰주지 못하면 남은 놈들도 다 죽여버릴 생각이지만.]

“…….”

망량은 이번 요괴대전이 이미 반쯤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팔부신중과의 전쟁은 대웅제국의 승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팔부신중을 다 쓰러뜨렸으나 마지막 강적인 아수라 때문에 이 자리에서 대웅제국의 전력이 몰살당할 수도 있다.

‘하필이면 지금… 제길….’

망량은 운이 없다는 걸 피부로 느꼈다. 방금 전 하필 그때 천계와의 연결이 멀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야차를 좀 더 빨리 제압하고 십령상태를 유지했다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한 망량으로서는 눈앞의 아수라에게 더 이상 쓸 수 있는 계책이 없었다.

그 때였다.

“이노옴!! 건방지게 굴지 마라!!”

독고성의 거대한 노호성과 함께 언덕 위에 네 명의 절세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성, 한백령, 신승, 명룡자!

팔부신중 가루라와의 정면대결에서 승리해서 살아남은 그들이 큰 부상 없이 아수라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독고성이 검에 검뢰를 머금으면서 아수라를 향해 겨누었다.

“백련교주를 끌어내려면 나부터 꺾어야 할 것이다!”

[호오, 독고성이군. 네놈도 꽤 하는 놈이니 재밌겠어.]

저벅

아수라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지만 이윽고 네 명을 차례로 훑어보더니 실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다들 지치고 약해졌군. 만전이었으면 재밌었을 텐데 말이지.]

“재미? 재미라고?”

기가 막힌 독고성이 외쳤다.

“미친 새끼! 그만한 무예경지를 터득했는데도 대가리 속은 저잣거리의 양아치란 말이냐! 투견같은 새끼!”

[양아치면 어떻느냐? 어차피 내가 선(善)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무신(武神)이란 놈은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선을 행하려 미친듯 돌아다니다가 크리슈나란 친구놈 하나 생기긴 했군. 아무튼 나는 기약없는 기다림에 질려버렸으니 흥미라도 추구해야겠다.]

“…….”

도리어 당당해하는 아수라를 보자 독고성은 이를 악물었다.

“네놈 목을 베어버리겠다.”

[할 수 있으면….]

아수라는 팔짱을 끼며 네 명 앞으로 걸어나가서 고개를 까닥였다.

[다 같이 덤벼라. 100초 내에 박살내주마.]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쿠콰콰쾅

그들이 아수라와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쿠우우우우…!!

서쪽 하늘에서 암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강대한 마력을 느낀 아수라는 문득 암운을 쳐다보았고, 환희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하하하, 백련교주!! 드디어 왔구나!]

슈웅

그러더니 네 명과 싸우던 상태에서 즉시 벗어나서 암운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혼돈화한 백련교주를 향해 날아가 버렸다.

쩌엉!

후두둑….

“…괴물같은 놈.”

독고성은 기가 질린 듯 중얼거렸다. 고작 오십 초 내외의 짧은 전투였으나 아수라의 검격에 실린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가 쓰던 애검이 산산조각났기 때문이었다. 아수라가 필살절초를 쓴 것도 아니었는데 명백한 수준차이였다.

같은 절대지경이라고 비슷한 수준이 아니다.

아수라는 수천 년 동안 모든 기예를 극상의 수준으로 올려서 새로운 경지를 밟은 괴물이다.

‘100초 내에 우리를 몰살시킨다는 게 허풍이 아니었다.’

아수라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명룡자의 구요신검도 신승의 삼고삼법인도 독고성의 검뢰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손으로 다른 절대지경을 시전하면서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도리어 쓰러뜨리려면 순식간에 그들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자신들의 무예를 관찰하려고 조금 봐준 느낌마저 들었다.

도대체 아수라의 수준은 얼마나 높아진 것일까?

독고성은 고명한 천계의 투선 중에서도 제천대성이나 항우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아니면 아수라를 상대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과연 그만한 격에 현재의 백련교주가 미칠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절대지경(絶對之境)

적멸무극(寂滅無極)

아수라는 암운 한가운데에 있는 백련교주를 얕보지 않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서 공격했다. 선공을 성공시키면 무조건 유리해진다는 건 절대지경의 싸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의 절대치를 비교해볼 수 있으니 싸움꾼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하하하!! 백련교주… 넌 어떻게 대항할까…. 으음?’

그 순간, 아수라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찰나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쇄도해서 백련교주의 면전 삼 장 앞에 도달했을 때 말도 안 될 정도의 냉막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휩쓴 것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요괴대전 내내 관찰해 왔던 백련교주만의 패도적인 기운과는 명백히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그리고 백련교주의 눈에서 은광이 뿜어져 나오며 기이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것은 백련교주가 평소에 내던 음성과는 완전히 달랐다.

[벌레 따위가.]

지독한 권태와 광기, 악의(惡意)가 함축되어 있는 한 마디였다.

퍼벅!!

아수라의 몸이 마치 파리처럼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바닥에 얻어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아수라는 떨어져서 타격을 입자마자 바로 몸을 추슬렀으나 이윽고 한 번의 충격이 더 날아오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독고성은 그 광경을 보자 경이로움을 느끼고는 외쳤다.

“과… 과연 교주!! 엄청나다!”

저 막강한 아수라를 단 두 방으로 인사불성까지 몰아넣다니?

백련교주가 대웅제국 최강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의 상식을 초월하는 강함이었다. 독고성이 이번 전쟁은 압승이라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자 옆에 있던 신승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졌다.

“이, 이럴 수가.”

그러더니 나직이 말했다.

“큰일났구려….”

“뭐가 큰일났단 말이오? 하긴 뭐 팔부신중한테 대승을 거뒀으니 큰일이긴 하….”

“그런 상황이 아니오, 독고성.”

이윽고 신승은 암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서 부상자를 수습해서 도망쳐야 하오. 아니면 우린 다 죽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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