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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천인은 오행활강시들과 초상기인들이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이루며 덮쳐오는 걸 상대하고 있다가 외부의 상황을 알아채고는 움찔하고 놀랐다.
‘가루라가 소멸했다…. 그리고 야차도 움직이지 않아. 건달파도.’
그렇다면 이 전장에서 멀쩡한 건 천인, 그 혼자 뿐이다.
‘모두 당했군.’
천인은 그렇다 해서 자신이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암울한 심정이 되었다. 인간을 초월한 마왕들이 넷이나 한 자리에 모였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본디 팔부신중 하나만 있어도 웬만한 왕국을 멸망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고작 인간제국 하나를 상대로 전멸위기에 몰렸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크으… 제기랄….]
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팔부신중, 그들은 긴나라 파와 야차 파로 파벌이 갈려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다가 긴나라가 소멸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힘을 모았다. 그러나 이미 힘이 꽤 소진된 상황이라서 한번에 대웅제국을 쓸어버리려다가 실패해버린 것이다. 이대로 도주해봤자 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리고 오행활강시를 통제하며 냉정하게 전황을 살피던 제갈유룡이 잠시 손짓하여 공격을 멈추고는 천인에게 말을 걸었다.
“천인이여. 이쯤에서 휴전(休戰)하지 않겠나?”
[…….]
“이미 눈치챘겠지만 오늘의 전투는 우리의 승리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당신을 잡기엔 전력도 준비도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우리는 당신을 기어이 잡느라고 힘을 소모하고 싶지 않고, 당신 또한 이 자리에서 죽고싶진 않을 것이다.”
[교활한 놈.]
천인의 눈에서 안광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후. 눈치챘으면 뭐하는가? 어떤 선택이든 결과는 정해져있으니 마음대로 하라.”
[…….]
천인은 제갈유룡을 비롯한 제갈가의 전력이 자신의 상대로 나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행활강시와 시해지술 등을 이용한 전략은 물론 무서웠지만 천인을 상대로 결정타를 먹일만한 공격적인 조합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천인을 상대로 버티기만 할 뿐 이기기는 갈수록 힘들어졌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버티기만 할 생각이었으리라.
가장 빼어난 술법실력을 지니고 있는 최강의 팔부신중인 천인을 상대로는 그 어떤 조합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한다. 설령 백련교주가 전력으로 싸운다 하더라도 천인 정도 되는 팔부신중을 상대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백련교주를 비교적 약한 팔부신중과 싸우게 해서 확실히 1승을 챙기고, 나머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버티는 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천인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전략이었다. 설령 알았다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리라. 약해빠진 인간의 술법사들이 잔뜩 모여봤자 마왕인 천인을 상대로 버티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한계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지연작전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제갈세가와 그들이 만들어낸 초상기인과 금술의 조합은 굉장한 방어력과 유지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천인은 분함을 느꼈지만 결국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좋다. 휴전하겠다.]
제갈유룡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대꾸했다.
“입발린 교언은 믿을 수 없다. 그대는 언령으로 서약하라.”
[…건방진!! 그것까지 논할 상황은 아닐 텐데!]
“말해두지만 우리도 양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대들과 결판을 내고 싶었다면 이 조합으로 찾아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는 걸 알아둬라.”
[뭐라고?]
“예를 들면… 축융이라던가.”
[으윽.]
뜻밖의 존재가 언급되자 천인이 흠칫하고 떨었다. 뜬금없이 팔부신중의 천적에 가까운 신격이 언급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인이 당황하자 제갈유룡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와서 축융을 통제할 방법이 전무해서 생각지도 않았던 전략이지만 위협용은 되는군. 역시 전생자의 지식이란 쓸만해.’
축융의 존재는 현재 행방불명이었다. 주군인 삼황오제 전욱이 소멸되면서 그의 만귀전 또한 붕괴되었고, 만귀전 소속이던 축융은 자연스럽게 차원 밖으로 튕겨나간 것이다. 물론 축융만한 존재가 그것만으로 소멸되진 않겠지만 굳이 인간계에 머무를 이유도 없기에 귀환하지 않는다는 게 정답이리라.
물론 축융을 어떻게든 소환하려 했다면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욱조차 없는 지금, 억지로 필멸자들이 축융을 소환해 봤자 이 세상과 함께 자멸하는 길밖에 되지 않는다.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말은 제갈유룡의 허세였으나 천인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느껴졌다.
천인이 침묵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이번 전쟁으로 우리는 ‘힘’을 증명했다. 당신이 정말로 종말에 뭔가를 하고 싶다면 우리 대웅제국을 쓰러뜨려서 섣불리 인신공양을 하려들기 보다는, 우리 힘을 빌려서 주군인 창힐을 찾아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기어오르지 마라. 휴전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어디서 감히 인간따위가….]
천인은 이를 갈며 뭐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뭔가를 발견했는지 놀라워했다.
[너, 너는 왜 이제서야….]
휘익!!
장내의 시선이 한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 사내는 여덟 자루의 검을 찬 채 꼿꼿이 서 있었으며 한 줌의 투기조차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의문의 사내는 허공에 떠 있던 천인을 느긋하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병신. 잘난 체하더니 결국 다 말아먹었군.”
[……!!]
그 한 마디에 천인은 굉장히 분한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외쳤다.
[닥쳐라, 아수라!! 네놈이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우리를 도왔다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
나타난 존재는 바로 파순이자 팔부신중 아수라!
요괴대전 동안 단 한 번도 참전하지 않았던 인물이 난데없이 모든 결판이 난 듯한 전장에 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느닷없는 아수라의 등장에 제갈유룡은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천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본체 아수라의 전투력은 천인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었으며 특히나 아수라는 대인전(對人戰)에도 굉장히 뛰어났다. 인간을 술법으로 학살하는데만 익숙해져 있고 절대지경을 상대로는 꽤 서투른 경우가 많은 다른 팔부신중과는 명백히 다른 존재였다. 도리어 아수라는 같은 절대지경을 상대로 압도적 우위를 지니고 있는 유일한 팔부신중이다.
만일에 전쟁 초기부터 아수라가 참전해서 아군 진영을 휘저었다면 대웅제국은 결코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수라의 불참은 대웅제국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호재였다.
그러자 아수라가 흥, 하고 비웃음을 지었다.
“처음엔 물론 그럴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서방 대영제국에서 봉신방의 삼백오십육 신선들과 피터지게 싸우고 나니까 문득 너희랑 협력하는 게 바보짓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뭐…? 무슨 개소리냐.]
아수라는 팔짱을 꼈다.
“애시당초 대웅제국이랑 왜 싸우는 거냐? 난 인신공양이 그렇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력(魔力)이 부족하면 이면차원에서 좀 강해보이는 고대이족이나 사냥해서 잡아먹으면 돼. 인간들이랑 싸운다고 이렇게까지 열올리는 게 너무 이상했거든.”
[이 놈…!! 전에도 몇 번이나 설명했잖나! 대웅제국 놈들은 창힐 님의 실종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고, 대웅제국을 먹으면 우리는 마왕을 넘어서 [지배자]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난 아냐. 그 때 정신이 번쩍 들더군.”
아수라의 눈이 심유하게 빛났다.
“이 놈들은 크리슈나의 아바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투신 아르쥬나까지 자기들 힘으로 물리쳤고 봉신방까지 소환할 수 있었다. 이런 놈들하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핏대 올리는 건 제정신이 아냐. 마왕이 된 존재가 아무리 오만하다지만 좀 이상하잖아. 결국 우리들 모두 누군가의 의도대로 휘둘렸던 거 아니냐?”
[뭐… 라고….]
“이제 와서 이런 말 해 봤자지만. 나는 너희랑 어울리기 싫어서 떠난 거였다.”
[큭… 제 멋대로 지껄이고 있느냐….]
천인은 아수라의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으나 문득 머릿속 한켠에서는 그의 말을 인정하는 자기자신을 알아차렸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다.
언제부터 자신들은 대웅제국을 맹목적으로 적대하게 된 것일까?
본디 대명제국과 마찬가지로 그저 중화대륙의 역사에 스쳐지나가는 인간의 황조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언젠가부터 그들은 대웅제국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물론 합당한 이유는 존재했으나 그나마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필연적인 이유는 절대로 아니었다.
천인이 혼란에 빠지자 제갈유룡이 아수라를 주시하며 말했다.
“아수라. 아무래도 당신은 다른 팔부신중을 도우려 이 자리에 온 건 아닌 것 같군. 왜 온 것인가?”
“별 거 아니다. 나는 나대로 하고싶은 게 있기 때문이지.”
스릉….
아수라는 천천히 자신의 팔검(八劍) 중에 한 자루의 검을 뽑아서 전방으로 겨누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백련교주를 불러와라. 놈과 일 대 일로 결투하고 싶다.”
결투신청이었다. 제갈유룡의 표정이 납빛으로 굳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그 동안 요괴전쟁을 주의깊게 지켜봤는데 너희 대웅제국에서 최강자는 바로 백련교주더군. 그에 버금가는 건 아마 서문혜라는 녀석일 텐데 놈은 무예의 소양이 별로라서 싸우고싶은 상대가 아냐. 백련교주쯤은 되어야 싸울 맛이 되겠지.”
“…….”
“다른 절대지경 놈들은 됐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를 즐겁게 해줄만한 역량을 가진 놈은 없더군. 잠재력이 다들 고만고만해서.”
제멋대로 내뱉는 아수라의 말에 사방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대화를 듣고 있던 제갈부가 황당해하며 끼어들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이냐? 백련교주는 현재 우리 대웅제국의 황제다. 우리가 그 제안을 들어줄 이유는 없을 텐데!”
저 결투제안에 응하는 게 미친 짓이다. 백련교주가 아수라에게 진다는 건 아니었지만 아수라만큼 강력한 존재와 싸우다가 죽거나 부상을 입으면 어마어마한 손해였기 때문이었다. 기껏 팔부신중도 다 물리친 마당에 아수라의 억지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이유가 없다고?”
아수라가 씨익 웃었다.
“싸울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 주지!”
푸콱!!
다음 순간, 아수라가 쇄도하면서 오행활강시 중 하나의 목을 그대로 날려버렸다. 엄청난 속도였기에 오행활강시조차도 아수라의 일검을 피하거나 막아내지 못했다. 오행활강시는 마물(魔物)이라 할 수 있었으므로 목이 잘려나가도 즉시 오행(五行)으로 변화해서 순간회복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찰나지간에 아수라가 절기를 시전했다.
비천원기영옥(飛天元氣靈玉)
와룡규광(臥龍叫光)
피잉-
마치 실이 떨리는 듯한 짧은 소리와 함께 오행활강시의 몸에 수천 개나 되는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보랏빛의 옥(玉)이 오행활강시의 내면에서 확산되더니 커다란 빛의 구슬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쿠콰콰쾅
후두둑…
“……!!”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천인의 온갖 강대한 술법에도 버텨내던 오행활강시가 아수라의 연속절기에 몸뚱이를 거의 남기지 못하고 넝마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처럼 괴물같은 초회복력이 봉쇄되어서인지 살점이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다.
[어, 어떻게 한 거냐.]
지켜보던 천인이 이해가 안 되어서 어리둥절해했지만 아수라가 자신의 검을 비스듬히 내리며 대꾸했다.
“술법저항력에 특화된 놈들을 술법으로 때리니까 안 죽지. 의념으로 오행생화(五行生化)의 흐름을 찾아내어서 흐름 자체를 의념천주로 끊어버리면 쉽다.”
[…….]
“뭐, 너는 알아도 못 하겠지만.”
[건방진 놈….]
그리고 눈앞에서 오행활강시의 소멸을 지켜 본 망량 제갈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위험해.”
정말로 아수라는 위험하다!
사실 오행활강시와 시해지술의 조합이라면 그 어떤 팔부신중을 상태로도 버티는 게 가능했다. 팔부신중의 주된 공격법은 어쨌든 강대한 마력으로 권능을 퍼붓거나 술법을 시전하는 거였는데, 그건 오행활강시의 방어력을 향상시켜서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근원기관인 오행지심에서 뿜어져나오는 술법방어력을 시해지술로 보충해준다면 아무리 팔부신중이라도 마력만으로는 오행활강시를 부술 수 없다.
그러나 아수라는 다르다. 저 자는 팔부신중 중에서도 유일하게 절대지경의 고수였으며 그것도 절대지경을 6개나 얻은 초고수였다. 그러므로 술법저항력에 특화된 오행활강시를 의념천주로 때려서 손쉽게 농락할 수 있는 것이다. 오행활강시는 오로지 권능에 대적하는 데 특화되어 있을 뿐 의념공격에는 대책이 세워진 설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행활강시는 아수라를 상대로는 그저 조금 단단한 인형에 불과했다.
상성관계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마왕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역량차이가 원점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냥하는 쪽에서 사냥당하는 쪽이 되고 만 것이다.
망량은 급히 제갈유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오행활강시를 폭주시킵시다.]
이 순간 망량의 머릿속에서 나온 최선의 계책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행활강시와 초상기인들과 함께 제갈세가 3인은 이 자리에서 몰살당하고 말리라. 폭주시킨 대가로 오행활강시를 영영 잃어버리겠지만 살아있기만 하면 또다시 만들 수 있다.
[…….]
그러나 제갈유룡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현아. 나는 부아와 함께 여기를 막겠다. 너는 급히 야차를 봉인하러 가라.]
[무슨 말입니까?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둘이서는 절대 아수라를 못 막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여기서는 이게 최선이다. 지금 네가 야차를 시해지술로 제때 봉인하지 못하면 야차가 도주해버릴 것이다. 그럼 전쟁은 또 다시 백 년이 길어진다.]
[하지만….]
제갈유룡이 문득 망량을 쳐다보며 육성으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철혈의 책사답지 않게 뜨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아들아. 한 번이라도 애비 말을 들어줄 수 있겠느냐.”
“…….”
망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말에서 거역할 수 없는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파앗!
그러더니 빠르게 축지법을 써서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천인이 허공에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좋다, 그다지 모양새가 좋지는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인간놈들을 몰살시키면 되겠군! 힘을 합치자, 아수라!]
슈욱
압도적인 우위를 느꼈기 때문일까? 천인은 별 경계 없이 바로 아수라의 곁으로 순간이동 했다. 천인이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아수라에게 말했다.
[네가 오행활강시를 처리해라. 내가 저 책사놈들을 하나하나 잡아죽이겠….]
그 때였다.
절대지경(絶對之境)
적멸무극(寂滅無極)
시공이 난자되는 듯한 찰나 속. 아수라의 몸이 본체로 되돌아가면서 그의 팔이 난무했고, 시공 속에서 무수한 검섬(劍殲)이 스쳐 지나간다. 빛이 계속해서 가속하는 동안에 아수라의 검은 의념천주의 힘을 받아 더욱 빠르고 강해졌고, 그 공격을 간파하는 건 같은 절대지경이 아닌 한 무리였다.
월아영상패룡파(月牙永狀覇龍波)
천수관음(千手觀音)
자영환수도(紫影幻秀刀)
비천원기영옥(飛天元氣靈玉)
폭광누멸검(爆光漏滅劍)
아수라파천(阿修羅破天)
푸콰콰콱!!
끔찍한 소리와 함께 천인의 양팔이 떨어져 나가고 이마 한가운데에 십자인(十字刃)이 박혔다. 그리고 몸통 한가운데에 마치 바둑판같은 참격의 흔적이 남았고 뎅겅하는 소리와 함께 천인의 본체에서 머리통이 깔끔하게 분리되었다.
투두두둑
일격에 치명상을 입은 천인의 본체가 뒤로 쫙 밀려나가더니 잠시 후 기우뚱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아무리 천인이라 해도 적멸무극을 무방비 상태에서 정통으로 맞으면 결코 무사할 수가 없었다.
털썩
“…….”
난데없이 일어난 상황변화에 제갈유룡과 제갈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제갈세가의 두뇌로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새 본체로 변해서 여섯 개의 팔에 각각 검을 들고 있던 팔부신중 아수라는 냉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나간 놈. 나는 너랑 손잡을 생각 없다. 그런데도 내 옆에 무방비로 서다니, 뒈지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그 모습을 본 순간 제갈유룡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 앞의 존재는 이미 마왕인 것을 떠나서 천하의 광인(狂人).
무한한 싸움과 투쟁에 미쳐버린 존재다.
저런 존재를 상대로 책략 따위는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천인과 손잡으면 손쉽게 이길 수 있는데도 천인을 아작내버린 이유 - 그것은 지금의 인간진영을 상대로는 혼자서도 유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리라.
제갈부는 아수라가 뿜어내는 맹렬한 투기에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아버님….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 그렇겠구나.”
두 명의 제갈가 책사는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이 하나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쓰면 망량은 도리어 거치적거리기 때문에 내보낸 것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해 봐야지. 제갈사가 그렇게까지 이번 전쟁의 승패에 집착했다면, 지금이 바로 이번 전쟁 최대의 분수령이다.”
“…갑니다.”
스윽 하고 제갈부가 제갈유룡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주문을 외웠다.
불사초래(不死招來)의 술법
생명력 공유
스스스스
술법을 시전하자 제갈부와 제갈유룡의 이마 위에 흰색 원이 떠올랐다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또한 제갈유룡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맹렬히 용솟음쳤고, 제갈유룡은 그 힘과 함께 자신의 육체에 어마어마한 부하가 걸리는 걸 깨달았다. 그 격통을 이겨내면서 제갈유룡은 품 속에 있던 침을 꺼내서 천천히 정해진 부위를 찔렀다.
퓨븃
천천히 문(門)이 열린다. 제갈유룡은 일련의 과정을 행하는 동안에 아수라가 기습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자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이지 백웅의 기억대로군. 강자와 싸울 수 있다면 실전성을 내버려두고 강해지도록 내버려둔다는 건가….’
그러나 그런 만큼 아수라는 더할 나위없이 강대한 존재다.
이윽고 제갈유룡은 힘이 완벽하게 끌어올려지자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았다.
“정확히 한 식경이다.”
스릉
제갈유룡의 내공은 이미 신승의 수준을 훨씬 초월해 있었으며 호법사자가 단기간에 끌어올릴 수 있는 수위를 현격히 초월해 있었다. 제갈유룡은 눈에서 백색의 안광을 뿜어내며 계속해서 힘을 가다듬었다.
아수라는 여전히 재밌다는 듯 껄껄 웃었다.
[크큭… 좋구나.]
대라멸진(大羅滅盡)이 육문(六門)까지 차올랐다.
‘조금만 실수해도... 의체(擬體)로 옮길 순간따윈 없다.’
대라멸진은 제갈유룡의 술법조차 통하지 않는 절명의 위험성이 존재했다. 제갈유룡은 한 식경이 끝나는 순간 의체조차 쓰지 못하고 절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이를 악물었다.
“…간다.”
그는 지난 세월동안 책략만 세우며 놀았던 게 아니었다.
한 때 포기했었던 자기자신의 가능성을 갈고닦으며 무(武)와 술(術)을 함께 고도로 연마해왔던 것이다. 그것은 전생자 백웅이 제시한 승리의 가능성이 그에게 희망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해 왔던 결과, 새로운 가능성이 세상에 출현했다.
절대지경(絶對之境)
천랑북두(天狼北斗)
다음 순간, 제갈유룡의 일 검이 아수라의 어깨를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