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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격렬한 은빛이 마치 화살처럼 혈마적련성의 소환위치로 뛰어들었고, 그걸 제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은빛이 적색의 구체 안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 적색의 빛이 더욱 높은 천공(天空)으로 튕겨나가더니 이윽고 하늘의 새빨간 점처럼 변했다.
슈우우우…
은빛의 존재는 멀쩡히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입에서 흘렸다.
[마력왜곡포자 전량 방출 완료. 서몬 트리거(summon trigger) 제거.]
끼깅…
은빛 존재는 다름아닌 사슴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은빛 사슴이 장내에 나타나자 모든 이들이 멈칫하며 그 사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사슴을 보는 순간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강하다!!
가공할 위압감이 본능적으로 강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어떤 종류의 힘을 사역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절대적 강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기세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의문의 길항 상태가 이어지는 동안에 하늘에서 가루라가 비명을 질렀다.
[크하아아아악!! 아악!! 으아아아아-!!]
그는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다. 명룡자에게 베인 목의 혈선이 계속해서 그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방금 전 혈마적련성의 소환이 막히면서 그 반작용이 가루라의 혈맥을 두드리고 있었다.
금술(禁術)의 실패는 술법사에게 그대로 되돌아오는 법!
마왕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살아오며 수많은 전투를 겪은 마왕 가루라였으나, 언제나 남을 타도하는 쪽에 서 있었으며 패배를 겪은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고통 그 자체에 생경해진 그로서는 정신력 또한 빠르게 소모되는 중이었다.
쿠르륵! 쿠륵!
[그오오오오오….]
가루라의 눈알이 크게 팽창되더니 이윽고 부리같은 입에서 시뻘건 적황색(赤黃色)의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그 덩어리는 빛을 내뿜으며 허공에서 맴돌았는데, 그 정체를 정확히 아는 자는 장내에 없었다.
후웅! 후웅!
나선형의 힘이 맥동하며 적황색의 덩어리가 점차 커진다.
그러나 사슴조차도 가루라에게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인간측은 더더욱 몸을 사렸다. 가루라의 마지막 발악이라는 건 모두들 짐작하고 있으나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날 거라는 예측을 하기 때문이었다.
전장에 때 아닌 침묵이 감돌고 있던 그 때였다.
츠즈즈…
멀리 떨어져 있던 천인과 제갈세가의 전장에서 한 명의 오행활강시가 갑자기 몸을 꿈틀거리더니 온몸이 시꺼멓게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의 형태가 빠르게 뒤바뀌더니 제갈세가 인물들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크크. 내가 늦지는 않았나 보군.”
그 존재의 모습을 확인한 제갈유룡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갈사!”
그랬다.
나타난 것은 수십년 전 대영제국과의 결전에서 난데없이 자취를 감춘 제갈사! 그것도 예전에 비해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멀쩡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제갈사는 흉소를 흘렸다.
“형님, 피터지게 시몬 마구스랑 싸우는 중에도 이렇게 구원해주러 나타난 아우님께 감사를 표하라구.”
“그 얘기는 들었다. 승기를 잡았느냐?”
“승기? 크크크… 그렇게 만만한 새끼가 아니야.”
쓴웃음을 지은 제갈사가 말했다.
“아무튼 시간이 없군. [작은 굴레]를 미리 읽어본 결과로 곧 저기서 혈마적련성이 다시 소환될 거다. 내가 막아주지.”
“한 번 소환실패한 술법을 다시 소환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마왕 가루라라도 그런….”
“형님, 날 믿어봐. 인페로스 문디(inferos mundi)에서 눈으로 직접 보고 온 미래니까.”
“…….”
제갈유룡은 인페로스 문디라는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그는 마도의 지식 또한 갖고 있었기에 그 장소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가루라가 스스로를 폭주시키면서 완전소환을 감행할 거다. 그걸 아무도 막지 않으면 여기 있는 놈들은 사공린과 서문혜 빼곤 다 죽게 되더군.”
그 말에 제갈유룡은 물끄러미 제갈사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시몬마구스와 싸우다가 ‘그 차원’까지 가 버리다니…. 이미 인간을 포기했군….”
“크크! 예견된 일 아니었던가?”
그렇게 대꾸한 제갈사가 고개를 휙 돌렸다.
“내 본체도 아마 적련성의 여파에 불타겠지. 아직도 천일지투 중인데 큰 손해구만.”
“…….”
“그래도 뭐, 그 놈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초상기인에 다시 빙의할 수 있을 거다.”
“그러기를 바라마. 외도(外道)는 선택하지 마라.”
“크크! 이제 와서?”
스스스
제갈사는 비웃음을 흘렸고, 말이 끝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갈유룡은 제갈사가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 오행활강시의 몸에 임의로 빙의(憑依)한 것이며, 그것은 외부차원에서 임의로 이혼대법을 써서 현실에 간섭했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사실은 제갈사가 이미 인간의 범주에서 한참 멀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갈사가 시몬마구스와의 대결에서 이기든 지든, 그는 원래의 제갈사가 아닐 것이리라. 마법을 다루는 존재로서 승격해 버렸기에.
‘…예측이 안 된다.’
제갈유룡은 긴장했다.
어쩌면 이번에 팔부신중의 대란을 잠재우더라도 그 이상의 마왕이 이 세상에 도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스앗!
가루라가 소환해 낸 적황빛의 구체 앞에 도달한 제갈사는 아군을 돌아보며 히죽하고 웃었다.
“오랜만이야! 무림인 나부랭이들아.”
“제갈사!!”
“크크크큭….”
광소(狂笑)를 터뜨린 제갈사는 자신이 빙의한 오행활강시의 속성을 내심 살펴보곤 생각했다.
‘이 속성은 목(木)인가? 소체는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인간에게 단약(丹藥)을 먹여서 가사상태로 만든 후 인위적으로 초상기인으로 만들어낸 건가….’
그 덕분에 통상적인 용인이나 마인의 10배나 되는 신체능력과 회복력, 오행장악력을 지니게 된 것이리라.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금술(禁術)이다.
또한 마도(魔道)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손을 뻗쳤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 이 술법으로 오행활강시가 된 존재는 두 번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웅제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자를 받았을 게 뻔했다. 그것은 제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으나 동시에 악(惡)에 한 발을 걸친 선택이기도 했다.
‘크흐흐…. 순조롭게 모두가 타락하고 있군.’
제갈사는 내심 현실에 자조했다.
역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망량조차도 패도에 물들어 금술에 손을 뻗게 되고, 모든 전생동료가 암울한 현실을 틀어막는데 급급해서 이상(理想)을 주장하기조차 버거워했다. 이제 마(魔)의 세계로 한 발짝만 옮기면 떨어져 내리는 건 시간문제다. 백웅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제갈사가 서서히 적황색 구체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만나자마자 이별이구만.”
때묻어서 새까매진 건 더 이상 흥미가 없다.
제갈사는 백웅이 돌아올 때 모조리 때가 타 있으면 그거야말로 재미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거침없이 고통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후와아악
이윽고 제갈사의 손에서 오행활강시의 강대한 마력이 치솟았고, 오행지심(五行之心)이 밑바닥에서부터 힘을 긁어내며 적황색의 구체를 붙잡았다.
화르르륵!
화르륵!!
적염(赤炎)이 서서히 제갈사의 몸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가루라는 반쯤 미친 상태로 계속해서 비명을 토해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비명이 거세지면서 불길이 마치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제갈사의 몸을 잠식했고, 제갈사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고통을 이성으로 차단하면서 빠르게 이혼대법을 이용해서 적염의 소환술식을 무효화시키기 시작했다.
파지직!
그의 마도실력이라면 소환을 무효화시킬 수 있겠지만 죽음 자체는 피할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가루라의 이 술법은 자기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머나먼 성좌(星座)에 존재하는 적색거성(赤色巨星)의 환염을 직접 소환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극히 일부만 소환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 이 술수가 펼쳐지는 순간 이 행성이 멸망해도 이상하진 않다. 그 반작용을 마력덩어리인 오행지심과 오행활강시의 능력으로 최대한 분산시키는 거지만, 목숨을 챙기는 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도 좋다.
전생자와 함께 하는 대가 치고는 싸니까!
“흐하하하하하하!!”
일소(一笑)와 더불어 일소(一掃).
후와아악…!!
그리고 잠깐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제갈사는 환염에 휩싸여 그대로 소멸하고 말았다. 머나먼 이차원에서 [작은 굴레]를 읽고 아군을 구원하기 위해 잠시동안 인형에 빙의해서 가루라의 자폭을 막아낸 것이다.
“음….”
“대체 무슨.”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장내의 인간들은 상황이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왜 제갈사가 난데없이 나타났는지 파악하고 있는 자조차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장 빠르게 움직인 것은 다름아닌 은빛의 사슴이었다.
슈우 -
콰광!!!
[크흑… 커커컥….]
가공할 속도와 힘으로 돌진한 은빛의 사슴은 은빛 뿔으로 가루라의 몸통을 관통해 버렸다. 가루라는 뿔에 관통당한 채 몸을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나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로 보였다. 그러나 가루라는 그 공격에 도리어 정신을 되찾은 듯 피를 토해내면서도 크게 날개를 홰치면서 뒤로 순간이동을 했다.
[이노옴…!!]
번쩍!
회광반조일까? 가루라는 연이은 술법의 실패와 명룡자의 습격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음에도 입에서 엄청난 위력을 지닌 신염(神炎)을 내뿜었다. 심지어 신염의 속도는 빛과 같았기에 도저히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신염은 [옛 지배자]의 본체조차도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압도적 공격력이 있었기에 은빛 사슴은 그대로 스러질 것 같았다.
[사용자 직접명령으로 환인(桓因) 모드 발동.]
그러나 은빛 사슴이 눈을 번쩍이더니 갑자기 육각형의 반투명한 결계가 사슴의 몸 주변에 소환되었다.
치지징!!
[퀀텀 오버필드(Quantum overfield).]
파앙!!
육각형의 결계는 가루라가 입에서 사출한 신염을 정면으로 막아내자 거미줄이 터져나가듯 박살났다. 그러나 정작 신염은 은빛 사슴의 몸을 조금도 상하게 하지 못했으며, 신염은 마치 물방울처럼 산산히 흩어지며 형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면 중화!
[아, 아니.]
가루라는 전력을 다한 공격이 막히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심 팔부신중 중에서도 공격력만으로는 아수라와도 자웅을 가릴 만큼 압도적이라 생각했는데 저 은빛 사슴이 설마 정면으로 공격을 중화시킬줄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은빛 사슴은 달려들어서 허약해져 있는 가루라의 몸을 다시 들이받았다.
푸콱!!
[크아아아악….]
가루라는 이번에는 순간이동으로 피하지 못했다. 아까와 달리 힘이 떨어진데다, 그를 꿰뚫고 있는 뿔에서 정체모를 힘이 새어나와서 그의 힘을 봉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버둥치던 가루라는 잠시 후 축 늘어지기 시작했고, 은빛 사슴은 그런 가루라의 몸을 몇 차례 바닥에 패대기쳤다.
콰앙 콰앙
이윽고 가루라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자, 은빛 사슴은 잠시 동안 백웅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
그리고는 말없이 어디론가 뛰어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정체모를 사슴을 제지할 수 있는 자는 장내에 아무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독고성이 명룡자를 부축하며 말했다.
“괜찮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나도 그렇네. 다만 지금 확실한 건….”
그는 어느새 그의 근처로 온 신승과 한백령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제 다른 전장을 도와주러 가야 한다는 걸세.”
[가, 가루라가….]
야차는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 가루라의 마력반응이 끊기면서 완전히 소멸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돼!!’
가루라는 팔부신중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투파였다. 아무리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해도 고작 인간들의 합공에 죽을 수 있다니? 그러나 대웅제국이 그들 생각보다 더 강력한 존재라는 걸 인지한 지금은 그마저도 오만함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후웅
평정심을 잃은 야차의 공격이 일순간 집중력을 잃고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야차와 막상막하로 싸우던 서문혜의 새하얀 눈동자가 빛나더니, 그 헛점을 파고들어 공격했다.
거신지력(巨神之力)
초중력(超重力)
쿠구구궁
[크으… 으아아아악!!]
단지 서문혜의 일 장(一掌)이 야차의 가슴팍을 후려갈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 장에 실려있는 신의 힘이 초중력으로 변화하면서 야차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었다. 우주적인 단위의 압도적인 질량이 야차의 본체를 찢어발기려 하자 야차는 신력으로 버텨내었으나 식은땀이 절로 나는 것을 느꼈다.
‘아차!’
지금의 일격은 치명적이었다. 서문혜와 팽팽하게 이어지던 대결의 끈이 끊어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야차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그 대결을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던 성진이 옆에 있던 사공린에게 외쳤다.
“지금이다!!”
파앗
절대지경
유아독존(唯我獨尊)!
사공린은 성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결계의 문을 열고 뛰어들어가서 야차를 습격했다. 빈틈투성이던 야차는 급히 사공린의 습격에 방어하려고 주술방어막을 펼쳤지만, 사공린은 이 한 순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방어막은 금세 유아독존의 일검에 깨지고 말았다.
인과역전(因果逆傳)
푸욱
그리고 마치 크리슈나에게 일격을 먹이던 것처럼 사공린의 일 검이 야차의 미간에 길게 틀어박혔다. 야차는 현실을 믿을 수 없는지 몸을 비틀거렸지만, 이윽고 사공린의 검에 깃들어 있던 신력이 빠르게 스며들어서 야차의 몸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크아… 아아아악!!]
쿠궁
마침내 야차는 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제압당한 야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공린은 서문혜에게 말했다.
“됐어요, 서문혜. 이제 신의 권능을 잠시 풀어요. 이제 망량을 불러와서 야차를 봉인할 테니….”
계속해서 서문혜가 거신의 힘을 쓰면 그녀의 몸에 큰 부담이 갔다. 목표인 야차가 쓰러졌으니 그녀의 전투태세를 푸는 게 나았다. 하지만 서문혜는 들리지 않는지 투명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서문혜가 손을 들어서 사공린을 습격했다!
콰광
“크흑…!!”
사공린은 난데없는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 자리에 쓰러졌다. 워낙 순간적인 기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공린이 땅에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꿈틀거리고 있자 서문혜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부르고… 부르고 있어. 나의 근원이… 거신(巨神)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
“나는… 누구지…?”
그 모습을 본 사공린은 순식간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서문혜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
강대한 근원의 힘을 일깨운 대가로, 머나먼 상위차원 존재들의 [부름]에 매몰된 것이다.
콰앙
팔부신중 건달파는 피투성이가 되어서 이름없는 야산에 처박혀 버렸다. 수천 번이나 쏟아진 백련교주의 권력(拳力)에 마침내 더 이상 방어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더 이상 술법을 시전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건달파는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승패는 이미 났다. 다른 지원이 없는 이상 건달파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다.
[건달파. 한때 친구였던 정으로 고통없이 죽여주마.]
쿠르르르…
[…….]
혼돈화한 백련교주의 한쪽 팔에 맺힌 거대한 혼돈의 힘을 본 건달파는 침묵했다. 그러더니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교주여… 하나 물어볼 게 있네.]
[무엇인가.]
[우린 실종된 창힐 님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지…. 혹시, 너희들은 그 행방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그 질문에 백련교주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창힐은 소멸되었다.]
그가 보기드물게 솔직히 대답해 준 이유는 그만큼 건달파와의 우정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백련교주가 책만 읽어서 무공이 약했던 시절에 건달파가 개방 걸선으로써 백련교의 정치다툼에 참여해서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래서 너희는 끝까지 창힐 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와 맞선 거였어.]
[나도 궁금한 게 있다. 너희는 무슨 의리로 끝까지 창힐을 따르는가? 창힐이 사실 너희에게 신(神)의 영육을 나눠줬을 뿐이고 그저 약탈적 계약관계라는 걸 알고 있긴 하는가?]
[…….]
교주의 말에 건달파가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묘하군…. 나도 감으로만 느끼고 있던 걸…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가.]
[창힐이 너희를 배신했음을 짐작하고 있었군.]
[적어도 난 그랬지…. 창힐 님이 수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달파가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그래도 그 분께서는 인간을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파멸의 세상 속에서 구원자의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 거라는 믿음…. 천마(天魔)가 되어 인류를 영도하시리라 생각했다.]
[…….]
[거짓된 믿음이라도 좋다…. 그걸 믿는 동안에는 행복하지 않은가. 나는 그 믿음을 위해 모든 악(惡)을 짊어지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스윽
백련교주가 건달파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가 냉막하게 말했다.
[잘 가거라, 친구여.]
[후후….]
건달파는 쓴웃음을 지었다.
[백련교주여. 그대의 눈에서 나 자신을 보았다네….]
후와아악!!
이윽고 건달파의 전신이 백련교주의 흑염과 같은 혼돈에 통째로 소멸당하고 말았다. 그 혼돈의 잔재가 마치 안개처럼 퍼져나가자, 안개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백련교주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그렇겠지.]
그와 건달파는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또한 언젠가 건달파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