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50화 (1,047/1,615)

1050====================

진공가향(眞空家鄕)

요괴의 대란.

제일 먼저 이 이변이 발생한 장소는 다름아닌 해남(海南) 일대였다. 현재는 대웅제국의 일부로 편입된 다두왕국 일대는 물론이고 근처의 성(城)이 모두 요괴출몰지대가 되어버렸다.

뀨르르륵

요괴들이 부서진 성문 안쪽에서 울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대웅제국의 사여철 장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현재 요괴대란이 일어난 해남성에 요괴토벌을 하기 위해 2만여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와 있었다.

‘울음소리만으로도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는 게 느껴지는군. 요즘 세상에 요괴라니….’

하지만 사여철 장군은 이내 고개를 젓더니 손짓하며 말했다.

“열진포(熱振砲) 발사하라.”

쿠콰콰쾅!!

다음 순간, 백여 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열진포는 과거 대웅제국이 천하를 제패할 때 주력무기였던 만광포가 개조와 개량을 거듭한 결과 나타난 최신예 대포였다. 후장식 야포의 형태에서 한꺼풀 벗어서 연사속도를 극도로 높인 개량! 거기에다가 위력과 안정성 또한 두 배 이상이 되었으므로 실로 강력한 병기였다.

끼에에엑!!

열진포가 포격을 거듭하자 성을 습격한 요괴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수백 마리씩 쓸려나갔다. 그러나 중하급요괴들은 죽어나감에도 몇몇 요괴들은 멀쩡히 열진포를 견디거나 피하면서 점차 군대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를 지닌 벌처럼 생긴 요괴가 날아들더니 병사들을 습격해 왔다.

“발사!!”

타타탕! 타탕!

그러자 벌요괴는 소총탄에 맞아서 몸부림을 치다가 이윽고 몸뚱이가 걸레처럼 변해서 그 자리에 나동그라졌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보던 사여철 장군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저렇게 쉽게 죽다니 전탄이 다 먹혀서 그런 건가? 상급요괴긴 하지만 물리면역이나 영체화를 못 쓰는 놈이었나 보군. 기껏 주술탄을 장비시킨 소총대를 배치해뒀는데 주술탄이 아깝구나.”

사여철 장군은 요괴가 비과학적인 존재라서 싫어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대웅제국의 장군으로써 요괴의 속성이나 대처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세계를 누비며 마도사와 마물과 싸웠던 경험이 쌓인데다가 요괴 또한 많이 상대해본 게 대웅제국군이었고, 그 경험과 대처법이 몇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져오고 있었다. 사여철은 혹시나 총이나 대포가 안 통하는 영체화 마물이나 요괴가 있을까봐 일부러 대웅제국 주술사들이 가공한 주술탄을 장비시켰던 것이다. 주술탄은 설령 총이 안 통하는 마물이라 해도 타격을 줄 수 있었으며, 대포 또한 가공시킨 포탄을 쓰면 상급요괴를 타격할 수 있었다.

사여철의 2만여 군단은 아주 손쉽게 해남성을 탈환하며 오십여 리를 전진했다. 하지만 요괴들을 일망타진하려던 사여철의 계획은 해안가에 도착하자 좌절하게 되었다.

크우우우 -

해안에 진을 치고 있던 하급요괴 떼는 다 죽였으나, 이윽고 해안에 나타난 것은 몸 크기가 무려 이백여 장에 이르는 고래처럼 생긴 요괴였다. 말이 이백 장이지 마치 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촤아아

한 번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해안가에 일 장에 이르는 파도가 몰아칠 정도였다.

“저, 저건 대체 뭐냐.”

산전수전 다 겪은 사여철조차도 믿기지 않아서 입을 쩍 벌렸다. 저 정도 크기의 요괴나 마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장군. 어찌하시겠습니까. 공격할까요?”

부관이 질문했으나 사여철은 떫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퇴한다. 병사들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

아직 저 요괴가 이쪽에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도주해야 했다. 2만 대군이 요괴 하나에 겁먹어서 도망치는 건 부끄러운 일 같았으나 사여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저런 괴물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싸우게 되면 요괴를 토벌하긴커녕 전멸당하고 말리라.

‘저게 말로만 듣던 [변이종], 최상급 요괴인가…!!’

사여철의 대군에는 무림문파에서 지원한 무림고수들도 더러 있었으나 사여철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격차가 다르다면 기(氣)를 단련한 고수들도 무의미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대웅제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각 성을 습격한 요괴떼들을 손쉽게 대웅제국군이 물리쳤으나, 변이종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한 요괴들이 난데없이 출현하면 대응할 수가 없었다. 보통 요괴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특히 크기가 큰 변이종들은 그나마 호전성이 덜했지만, 크기가 인간형인데 말도 안되는 힘과 속력을 지닌 소형 최상급 요괴들이 호전적인 경우가 많아서 피해가 막심했다. 곳곳에서 장군들이 최상급 요괴의 손에 전사(戰死)하거나 학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중원 각지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종합하던 제갈유룡이 최고회의에서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변이종]은 아무래도 팔부신중이 자신들의 힘을 불어넣어서 만든 것 같다. 팔부신중 본체의 힘을 일부 넘겨받았기 때문에 자연발생하는 요괴들과는 격이 다른 것 같군.”

[그런가….]

보고를 듣고 있던 백련교주가 팔짱을 꼈다.

[변이종을 잡아야겠군. 놈들의 힘이 깃들어 있다면, 그건 화신을 만든 거나 마찬가지. 변이종을 잡아죽인다면 팔부신중의 힘이 크게 감소할 것이다.]

“그 말이 맞다. 현 시점에선 당연한 대책이지. 다만….”

[다만?]

제갈유룡은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책사의 감이다. 이건 팔부신중이 의도한 해답이라는 느낌이 든다.”

[함정이란 건가…. 변이종 요괴를 잡으면 우리가 함정에 걸릴거란 말이냐?]

“그래. 팔부신중도 멍청이가 아니니 신도 아니면서 화신체를 만들면 그 부담이 막대하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은둔하면서 본체를 회복할 시간을 차분하게 버티는 게 낫겠지. 그런데도 그 부담을 감수하며 일부러 우리를 건드려서 시비를 걸어오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아무래도 긴나라의 계책일 듯 하군. 이런 함정을 파는 건 긴나라가 즐기는 편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말이지? 이대로 변이종이 날뛰게 놔둘 수도 없다.]

교주의 말에 회의에 참석해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사형의 전언이다.”

모두의 이목이 천우진에게로 쏠렸다. 천우진은 과거 봉신방을 써서 팔부신중 본체소환을 막아낸 대가로 요양중인 망량을 간호하는 중이었다. 실질적으로 망량의 대변인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변이종을 쓰러뜨리는 일에 집착하지 말고 칠요와 절대지경 고수를 절대 내보내지 말라고 한다. 그게 놈들의 노림수일 것이다.”

[그럼 좌시하자는 말인가?]

“아니. 사형이 내게 부탁한 일이니 내가 처리하지. 성진과 아베노 세이메이의 도움을 받겠다.”

[호오…. 그럼 믿고 있겠다.]

곧 천우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빌어먹을… 이럴수가…. 내가 빡세게 일을 하다니…. 제기랄…. 내가 대체 왜 이렇게 일해야 하는 거지? 농사나 짓고 싶은데.”

그러자 참석해 있던 사공린이 천우진에게 말했다.

“투덜대셔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마무리 짓는 게 훌륭하신 것 같습니다.”

“…….”

“잘 부탁드려요.”

천우진은 그 순간 사공린의 눈빛을 보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앞으로 더 일을 하게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사공린이 그에게 계속 일을 시키는 미래가 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것일까?

‘아냐. 설마 그럴 리가…. 일하기 싫어!! 이번 일이랑 치우 봉인만 잘 해내면 나는 농사지으면서 쉬고 말 테다. 사형도 그 때쯤 회복될 테니까….’

파아앗!

며칠 후, 천우진과 성진, 아베노 세이메이가 한 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들은 모두 대라신선급 술법사였으며 술법에 관해서는 천하제일을 다투는 존재들이었다. 한참동안 변이종을 상대할 방법을 논하던 그들은 마침내 결론에 도달했다.

성진이 말했다.

“천우진 그대가 주축이 되어서 현실과 환상을 뒤섞게. 내가 술력을 보조하고 세이메이가 식신(式神)을 써서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게 낫겠군.”

“괜찮은 방법이군. 그런데 정말 그 정도의 술력을 내게 줄 수 있는 건가?”

천우진은 성진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론상 성진이 말한 방법이 제일 나았으며 그 방법을 쓰면 변이종이든 뭐든 인계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방법인 만큼 엄청난 술력과 법력이 필요했다. 그 필요량을 머릿속에서 계산한 천우진이 부언했다.

“중원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하려면 최소한 900년치를 넘어서는 술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성진 당신이 천여 년동안 술법을 쌓아왔다 해도 그 시간 내내 술법 기초수련에만 정진하진 못했을 것이다. 당신의 목숨을 걸어도 그 정도의 술력은 지원할 수 없잖은가.”

술법사의 술력은 단순히 수양한 기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술력이란 내공처럼 쌓이면 쌓일수록 정직하게 늘어나는 개념이 아니라 삼황오제 복희가 내려준 권능이었기에 일정수준 이상부터는 극히 성취가 더뎌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 때문에 술법사들은 자신만의 술법계통을 특화시키거나 고유술법을 개발해서 강해지는 편이었고 순수한 술법의 잠재력 자체를 키우기는 매우 힘들었다.

성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혼자서라면 절대 부족하겠지. 그러니 내 아내들과 힘을 합치겠다.”

천우진의 표정이 요상하게 변했다.

“아내들?”

스아앗

잠시 후 성진의 뒤편에 공간이동으로 그의 아내 아홉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성진은 그녀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내 아내들은 모두 술법을 깊이 익혀서 불로장수를 얻은 데다 수백 년간 술수를 익혀서 나와 영통(靈通)이 긴밀하게 이뤄져 있네. 우리가 힘을 모아서 원진을 만들어낸다면 일천 년에 필적하는 술력을 만들어낼 수 있네.”

“…….”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맨 앞에 서 있던 새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비단옷의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성진의 아내 중 하나인 백능파였다.

“제 여의주를 쓴다면 충분할 것이옵니다.”

당연히 동정호 용왕의 딸이 수백 년간 연마해 온 여의주의 힘이라면 충분히 힘을 보충해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천우진은 그 말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생각했다.

‘…성진 아저씨. 아내가 왜 그렇게 많소…? 그리고 어떻게 용을 꼬신 거지….’

심지어 그의 아내들은 그 누구도 성진에게 불만이 없어보였기에 황당할 정도였다. 과연 성진은 어떻게 그녀들과 천여 년 가까이 원만한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어떤 점에서는 백웅의 전생비밀만큼 수수께끼인 일이었다. 하지만 천우진은 이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었기에 관심을 끊었다.

아베노 세이메이가 말했다.

“성진. 하는 김에 그 술력을 내게도 좀 빌려줬으면 좋겠군.”

“왜지?”

“미호를 기신으로 각성시킬 필요가 있다.”

“전에 말했던 그 일이군. 알았네.”

잠시 후, 세 명의 대라신선급 술법사들이 힘을 합쳐서 제단을 쌓고 의식을 치뤘다. 그리고 그들이 의식을 치르던 그 날 - 중원대륙 전토에는 심상치 않은 오색 안개구름이 가득 깔렸다.

대환술법진(大幻術法陣)

만리무중(萬理舞中)

스스스스 -

오색 안개구름이 깔리자 천하 각지에서 날뛰던 요괴들이 난데없이 모두 사라졌다. 요괴들에게 죽거나 다치던 민간인들은 안개 덕분에 요괴들이 사라지자 기뻐했지만, 이윽고 그게 사라진 게 아니라 반투명하게 변한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게 뭐여?”

요괴들을 피해서 도망다니던 평범한 촌부 하나가 눈앞에 반투명하게 걷고 있는 요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요괴의 몸을 그냥 투과해 버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요괴들 쪽은 아예 인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멍하니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 시각 천우진은 제단 위에서 정신을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대환술법진 만리무중의 효과는 바로 현실에 있는 요괴를 환상 속으로 격리시키는 것…. 현실과 환상을 뒤섞었으니 아무리 변이종이라 하더라도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으리라.”

“얼마나 이 술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술력이 뒷받침되는 한!”

“그럼 3년은 가겠군.”

옆에서 술식을 보조하던 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현실과 환상을 뒤섞은 경계를 돌파할 정도의 [힘]이 없다면 결코 만리무중을 깨고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건 마왕급의 존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천우진 일행의 대처는 최선 그 자체였다.

그리고 술법사들이 피해를 막고 시간을 버는 사이에 대웅제국은 요괴들로 인한 피해를 정비하고 강력한 요괴들과 맞서싸울 준비를 했다. 술법사들을 대거 양성하며 무림인들을 모아서 수준을 끌어올리며 주술탄을 잔뜩 준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조용한 2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때쯤 황도 낙양에서 요양하고 있던 망량에게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그간 잘 지냈는가?”

“검마 어르신. 웬 일이십니까.”

망량을 찾아온 것은 검마 서문대룡이었다. 세월이 꽤 지났지만 그는 절대지경에 오른데다가 내공 또한 극치에 이르렀고, 환골탈태 또한 얻었기에 백웅 실종당시와 거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다.

삿갓을 벗어서 놓은 서문대룡은 탁자 앞에 앉아있는 망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침상에서 움직이지 못 한다 들었거늘 이제 꽤 거동이 괜찮아졌나보군.”

“꾸준히 시해지술을 수련했으니까요. 게다가 현자의 돌이 망가진 영체를 많이 보조해준 덕에 요즘은 하루에 백 보 정도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다행이군.”

“잡담을 하러 오신 건 아닌 듯싶군요. 무슨 일이십니까?”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망량의 말에 검마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나는 대웅제국을 떠나겠네.”

“…진심이시군요.”

망량은 검마의 진심을 읽어내곤 말했다.

“서문혜도 데리고 떠나시려 합니까?”

“그러고 싶군.”

“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되었습니까?”

망량의 반문에 검마는 차분히 대답했다.

“나 또한 백웅에게 흑요석을 받았네. 전생자 백웅의 기억 모두를 알고 있으며, 그 덕에 절대지경에 오를 때 훨씬 빠르고 쉽게 올랐지. 하지만 그 이후로 점차 수련을 하면 할수록 절망의 기운이 내 심령(心靈)을 휩싸는 게 느껴진다네….”

그 말에 망량은 흠칫했다.

“설마 흑요석의 암기(暗氣)가.”

“아마도 그렇겠지. 질척한 어둠의 기운이 퍼져나오는 게 느껴지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별 말이 없습니다. 저 또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검마는 맑은 눈으로 망량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보지. 현재 대웅제국은 선(善)인가 악(惡)인가?”

“…….”

“어느 쪽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선이라 말할 순 없겠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침공을 진행하는 시점에서 상당한 살육이 일어났네. 필요에 따른 것이라고는 해도 그 명분이 결과까지 정당화할 순 없어. 우리 또한 패도(覇道)의 논리에 잠식되었기에, 그 암기(暗氣)에 위화감을 느끼기 힘든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일세.”

망량은 그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며 자기자신을 되짚어보았다. 그리고는 문득 그의 말이 옳다는 걸 깨달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패도와 마도는 종이 한장 차이…. 어느 새 익숙해져버린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 딸이 종종 초월적 존재와의 싸움에서 부상입는 걸 보면서 회의감을 많이 느꼈네. 그리고 대웅제국과는 좀 떨어진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지. 그리고 그 결과, 흑요석의 암기가 점차 우리의 성향을 바꾸고 있다는 걸 깨달았네.”

“으음. 백웅의 정신에서 절망이 희석되면서 절반 이하로 줄어든 암기인지라 큰 걱정이 없다 생각했습니다만….”

망량은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검마의 말이 맞다.’

아직까지 의식적으로 악행을 배제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과연 대웅제국이 소멸의 위기에 처한다면 악행에 손대지 않을 것인가? 초기의 망량이라면 차라리 대웅제국이 멸하는 한이 있어도 그러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을 테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노력하며 쌓아올린 대웅제국은 현재 망량의 모든 것이었기에 그 공든탑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흑요석의 암기가 묘하게 그의 정신과 성향을 뒤바꾼 탓이었다.

망량이 침묵하자 검마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암기는 달인의 정신력으로 충분히 누르고도 남을 정도로 약해. 그러나 전생자 백웅이 내면에 품고 있던 절망과 광기는 사실 그 이상으로 끈질기단 말이겠지. 이걸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인간의 길’을 찾아내야 하네.”

“인간의 길이란 게 무슨 뜻입니까?”

“…자기만의 방식이 다 있겠지. 허나 내가 생각한 방법은 바로 신역(神域)에 도전하는 것일세.”

“……!!”

“망량, 부탁일세. 나를 대웅제국에서 놓아주게.”

검마가 굳이 망량에게 부탁하러 온 이유는 현 대웅제국의 실세가 망량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망량보다 능력이 좋은 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판을 읽고 모두를 인도하는 능력은 망량이 제일 탁월했기에 모두가 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망량의 말이라면 황제 백련교주가 거의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다.

“검마 어르신이 빠진다면 우린 팔부신중에게 몰살당할지도 모릅니다. 어르신의 역량은 이미 대웅제국에서 대체할 자가 거의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칠대절학과 뛰어난 가르침이 있더라도 절대지경에 이를 수 있는 자는 거의 존재치 않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중원 전역에서 무공천재를 선발하고 있으나 그들 중 누구도 절대지경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검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마음이 가는대로 살고싶네. 그리고 더 이상 혜아가 전생자의 운명에 휘둘리는 것도 보고싶지 않아.”

“…….”

“그 아이가 너무 상처받았네. 나는 아비로써 더 이상 소중한 딸에게 상처받는 삶을 강요하고싶지 않아!”

“어르신….”

“만일 나를 막는다면…. 백련교주고 뭐고 다 죽여버리겠네. 누구라도 내 앞을 가로막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진심이었다.

그리고 현재 진심이 된 검마가 한 소리는 절대 빈 말이 아니다. 검마는 절대지경에 오른 후에도 뼈를 깎는 수련을 반복했기에, 현 백련교주라도 검마를 상대라면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망량은 더 이상 검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할 수 없이 차선책을 입에서 꺼냈다.

“좋습니다. 대웅제국에서 놓아드리겠습니다. 다만 서문혜의 건에 대해서는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녀가 빠지면 무슨 수를 써도 팔부신중을 막을 수 없으니, 그녀 본인의 의지를 묻겠습니다.”

“알았네. 그 아이가 남고 싶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러나 가고 싶어한다면 막지 말게.”

검마는 서문혜를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만 강요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만 했다.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검마 어르신…. 어르신께서 마냥 은거하시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싶군요.”

“어떤 방법 말인가?”

“본디 대웅제국에서 절대지경 고수를 열 명 이상 키운 후에 이 계획을 말하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망량의 입이 열렸다.

“샛길을 만들어뒀으니, 그 샛길을 통해 천계(天界)로 가십시오. 천계라면 백웅이 귀환할 때까지 여유롭게 수련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셔서 할 일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었는데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처음 듣는데.”

“때가 되면 이 세상으로 귀환하는 계획이지요. 또한….”

망량은 누가 들을까 신경쓰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황(三皇) 복희(伏羲)를 찾는 계획이기도 합니다.”

며칠 후, 검마는 홀연히 대웅제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의 행방에 모두들 당황하고 놀랐으나, 이윽고 잠잠해졌다. 그것은 검마가 망량의 비밀지령을 받았다는 말 때문이었다. 물론 그 내막을 알고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 년 후, 서서히 만리무중이 풀렸다. 그리고 술법사들이 만들어 낸 삼 년의 유예가 끝나고 요괴전쟁이 진정으로 막을 열었다.

삼 년 동안 칼을 갈면서 준비해왔던 대웅제국의 최정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요괴무리들과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양상은 삼 년 전의 갑작스러운 기습과는 많이 달랐다.

쿠콰콰콰!!!

“크으윽…!!”

독고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변이종] 요괴 중에서 대장격이라 할 수 있는 혈영마(血影魔)의 손톱공격이 난무하자 그의 검뢰로도 당해내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핏빛 안개에 둘러싸인 듯한 인간형 요괴! 저 요괴가 수만 명의 인간을 학살하고 중원 서쪽을 초토화시킨 원흉이었다.

그러나 - 독고성은 그 순간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들어서 혈영마의 목을 베었다.

스칵!

혈영마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일격에 목이 떨어졌다. 독고성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거두면서 중얼거렸다.

“이걸로 변이종은 다 죽였구나.”

요괴전쟁이 시작된지 약 삼 년. 그 동안에 대웅제국은 만리무중으로 요괴들의 무리를 몰아놓고는 한 번에 결계를 쳐놓고 기습소탕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아직도 술법을 펼치고 있는 천우진, 성진, 아베노 세이메이의 지원 덕에 위기가 찾아와도 환술을 이용해서 피해를 줄이기도 했다. 그러자 사방에 들끓던 요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고 대웅제국은 강력한 [변이종]들도 성공적으로 잡아내었다.

독고성이 죽인 게 마지막 변이종 요괴이자 악명높았던 혈영마. 독고성은 이제야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으나, 그 순간 웬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칠요를 갖고 나올 줄 알았는데 끝끝내 갖고나오지 않는구나. 설마 칠요도 없이 우리가 소환한 요괴군단을 격퇴하다니…. 인간들이 이 정도로 힘을 키울 수 있다니.”

독고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보고는 눈에 불을 뿜었다.

“팔부신중 야차!!”

야차는 크게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설마 인간제국 따위가 칠요도 없이 자기 부하들을 물리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는 우리가 직접 너희를 상대해 주마.”

파앗

야차가 갑자기 낫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독고성은 의념천주로 검뢰를 뿜어내어서 야차의 공격에 대항했으나, 그 혼자서는 야차의 힘에 당해내기 힘들었기에 연신 밀리고 있었다. 야차는 사신의 낫을 휘두르며 독고성을 비웃었다.

“네 동료들이 없을 때를 노렸으니 살아날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너희 절대지경을 하나하나 낚아죽이겠다!”

까앙!!

팔부신중 야차의 강한 내려찍기를 막아낸 독고성이 씨익 웃었다.

“이럴수가…. 생각이 완전히 같군. 우리도 너희를 낚을 생각이었다.”

파바밧

그 순간 사방에서 천우진, 아베노 세이메이, 성진이 모습을 드러내서 결계를 쳤고 전투형 초상기인이 열 명이나 튀어나와서 야차를 포위했으며 백련교주가 하늘에서 심천무량의 만다라를 소환해서 공격했다.

“……?!”

콰과과광

[두고보자!!]

난데없이 합공을 받은 야차는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갑자기 본체로 변신하더니 도주해 버렸다. 그러나 야차가 본체라고는 해도 합공을 맞았기에 상당한 부상을 입은 듯 청혈을 땅에 흩뿌린 듯 했다. 도주한 야차를 먼발치에서 쳐다보던 백련교주가 말했다.

[제갈유룡. 정말 아직도 팔부신중의 이간책이 통하고 있는 거였군.]

그를 따라온 제갈유룡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놈들은 서로간의 유대가 돈독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야차 파벌과 긴나라 파벌이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놈들은 지금 현재 서로를 믿지 못해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힘을 합치지 않지…. 이번 일도 긴나라 쪽은 알았지만 야차는 몰랐기 때문에 야차가 귀환한 후 또 자기들끼리 말싸움을 할 것이다.”

제갈유룡은 몇십년 전부터 팔부신중에게 간첩인 척 협조하면서 이중간첩으로써 그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그 덕에 확실히 팔부신중은 반쪽으로 갈라져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호오….]

“하지만 이번 전쟁은 길어질 것이다. 놈들도 부상을 입은 게 완전히 낫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못 먹는 감 찔러보기만 반복할 것이다.”

[귀찮군. 치고 빠지기만 한다는 건가….]

“우리는 지속적으로 놈들을 약화시켜야 한다. 관건은 이번처럼 팔부신중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 번에 올가미에 빠뜨려 죽이는 것이다.”

[부상을 입었는데도 놈들이 끈질기게 우리에게 덤비는 이유가 뭐지?]

제갈유룡은 훗하고 웃었다.

“현이의 봉신방에서 소환된 삼백육십오선에 입은 피해가 놈들 예상보다 컸기 때문이겠지. 그 부상이 온전히 다 회복되기를 기다린다면 이미 [종말]과 [계시]가 다가올 테니, 그 전에 우리와 결판을 내고싶은 것이다.”

[그렇겠군. 놈들이 체력을 다 회복해봐야 [종말]에 [옛 지배자]들이 산더미처럼 출현한다면 무의미할테니.]

백련교주가 팔짱을 꼈다.

[해볼 수밖에…. 몇십년이 걸리더라도 다 죽여버리고 말겠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뭐지?]

제갈유룡은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아수라…. 그 놈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여태껏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으나, 만일 그 놈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내 계책따위는 먹히지 않을 것이다.”

[흥. 그래봤자 모두가 다 같이 공격한다면 죽을 것이다. 창힐이 소멸되어 부활의 권능도 없는 상태에서 그 놈 혼자 뭘 하겠는가.]

백련교주가 아수라를 비웃었으나 제갈유룡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책사로써의 직감은 아수라를 가장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어째서지….’

단순히 그의 이간책 바깥에 있는 존재라서가 아니다.

뭔가 아수라가 원하는 게 책사로써는 읽어낼 수 없는 차원에 있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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