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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크리슈나였다.
[질서]의 축에 서 있는 존재!
그와 동시에 옛 신(神)이며 황제 공손헌원과 계약한 자이기도 했다.
제갈유룡과 제갈사가 단숨에 크리슈나의 존재를 간파해낸 것은 크리슈나가 팔부신중 아수라의 친우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의 두뇌는 현 상황에서 끼어들만한 변수가 크리슈나일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으며, 제갈유룡은 팔부신중과의 대화 속에서 ‘의문의 존재’와 브라만교가 관련이 있다는 걸 유추해냈다. 그래서 단숨에 아그라까지 달려온 제갈유룡은 지체하지 않고 브라만교의 흑막일 크리슈나를 직접 파헤치기로 했던 것이다.
위선자라는 말을 들은 크리슈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역시 그렇군. 구심점이었던 백웅이 사라지니 그대들은 살육과 혼돈에 거침이 없어졌구나.”
[후…. 위선이 하늘을 뒤덮음보다 역겹지는 않으리라.]
“어째서 내가 위선자라는 건지 알 수 있겠나, 백련교주.”
백련교주의 눈에서 광망이 흘렀다.
[네놈이 스스로 질서의 수호자를 자청할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방관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독 우리의 앞길에만 나서서 선악을 논하며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가 그 부조화 속에서 위선과 위악을 분간치 못할 정도의 머저리로 보이는가?]
“…….”
[진심이 무엇인가? 결국 네놈도 [옛 지배자]이기에 종말에 이르러 거대한 초월의 권리를 손에 넣으려는 건가?]
백련교주의 말에 크리슈나가 대답했다.
“나는 유장한 우주를 관조하는 일좌. 생과 소멸은 우주의 운명이니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파멸을 가속시키는 너희의 행위를 좌시할 수는 없다.”
[가속시킨다고? 어떻게 가속시키는지 말해 보아라.]
“그대들의 목표인 세계정복…. 그 목표를 이루게 되면 결국 그대들의 문명과 문화가 이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며, 종말까지 남은 시기동안 모든 인간은 하나의 말과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백련교주.”
[…….]
백련교주가 크리슈나의 말뜻을 눈치채고 침묵하자, 옆에 있던 제갈사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한자(漢字)는 창힐이 만들어낸 것. 한자의 영향권에 있으며 팔괘의 힘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모두 창힐의 뜻에 지배당하여 꼭두각시가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잘 알고 있군. 설명해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랬다.
중원대륙은 물론이고 한자문명권에 속하는 모든 인간이라는 생명체에게서 의사체계와 신념체계를 장악한 것이 바로 사황 창힐! 사황 창힐이 문명을 다룰 수 있게 될 경우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는 과거 드러난 바가 있었다. 모든 인류가 창힐족으로 강제진화하게 되며 다른 형태의 파멸을 맞게 되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말했다.
“그대들은 창힐이 팔부신중을 부단히도 움직여서 노렸던 일을 제 손으로 해주는 셈이다. 그걸 알면서도 중화에 의한 세계정복을 시도하는가?”
“흐흐흐.”
제갈사가 어딘지 비웃는 듯한 음침한 광소를 흘렸고, 차분히 듣고 있던 제갈유룡이 대신 한걸음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크리슈나여. 십이율주와 손을 잡고 있는가?”
“그렇지 않네. 하지만 이후에 잡을 지도 모르지.”
크리슈나가 물끄러미 제갈유룡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 거짓말한 자의 영혼을 벌하는 선라(仙羅)의 술법을 거두게. 어차피 그 술법은 내게 통하지 않으니.”
파스스
어느 새 교언의 덫을 준비하고 있던 제갈유룡은 자신의 손에서 술법의 기운을 지우며 말했다.
“우리 대웅제국이 만일 무굴 제국에서 진격을 멈춘다면 팔부신중과의 회합을 멈출 생각인가?”
“그럴 생각은 없네. 나는 그대들을 끝까지 견제할 것이네.”
“아주 솔직하군. 우리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가?”
“그런 표현은 옳지 않네. 나 또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 뿐….”
크리슈나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제갈사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구만. 그럼 우린 백웅에게 당신이 진 ‘빚’을 좀 받고 싶은데.”
“백웅에게 알려주기로 했던 단서를 대신 들을 자격은 그대들에게 없지 않은가.”
“글쎄~ 그걸 판단하는 것도 제멋대로 아닌가? 우린 충분히 자격이 있어. 백웅의 의지를 공유하고 있고, 그가 귀환할 때까지 대웅제국을 지키는 것도 우리의 사명이지. 도리어 실종을 핑계 삼아서 빚을 유야무야시키려는 게 계약위반이 아닌가?”
“…….”
“신적인 존재의 약속은 스스로의 존재를 속박하는 최대의 제약이지. 넌 대가를 내놔야 해. 또한 백웅은 이미 아라사 제국을 구원하고 팔부신중을 몰아내 달라는 네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뒤통수를 친 건 네놈 쪽이지.”
크리슈나는 제갈사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좋아. 단서를 주지…. 종말의 때에 모든 가면은 벗겨지리라.”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모두가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저 단서 하나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예언인가?”
“그렇다. 이는 필멸자에게는 그리 의미가 없을 테지만, 내가 백웅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단서다. 본디 그에게 직접 전하려 했었다. 약간의 도움과 함께….”
“호오….”
“재밌는 일이군. 지금껏 줄곧 흉신(凶神)의 시선을 신경 썼건만, 백웅이란 자는 흉신 자체를 치워버릴 줄이야.”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제갈사는 잠시 뱀 같은 눈으로 크리슈나를 주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넌 창힐이 이미 소멸했다는 걸 알고 있지?”
“…….”
크리슈나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훗하고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만만치 않은 자들이로군. 다음에 보세.”
슈악!!
크리슈나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가 버렸다는 걸 알게 된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저 자의 존재감에 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인간처럼 생겼는데 저 자는 역시 신이었습니까?]
수신류 호법사자 독고준은 여태껏 남만과 천축을 정벌하면서 수많은 고수와 마물, 마법사 등과 싸워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천령단이 역시 최고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무패전적으로 인해 자신감도 생긴 상황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 크리슈나를 눈앞에 두자 공격의지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분명히 아무 힘도 없어보이지만, 덤비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독고준에게 있어서 이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렇다, 독고준. 이 자리에서 싸웠다면 저 화신을 쓰러뜨릴 순 있었겠지만 우리도 큰 피해를 입었겠지.]
교주의 말에 제갈유룡이 대꾸했다.
“큰 피해까진 아니었을 거다, 교주.”
[어째서지?]
“나 또한 어둠의 세계에서 비밀리에 모은 정보가 있지. 저 크리슈나라는 화신은 전투용 화신이 아니다. 저 존재도 전투력이 출중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투용 화신인 아르쥬나(अर्जुन)란 존재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아르쥬나는 이 천축대륙에서 투신(鬪神)으로 숭배받을 정도로 강력하다.”
[흐음. 처음 듣는 얘기군.]
“화신 크리슈나 정도면 우리끼리도 어떻게든 쓰러뜨릴 수 있다. 이 자리에서 화신 아르쥬나를 내보내지 않고 크리슈나로 우리를 마중했다는 건, 저 자도 우리와 오랜 싸움을 할 각오가 되었단 거겠지….”
[그렇다. 팔부신중을 조종해서 우리의 힘을 약화시킨 후에야 전투용 화신을 내보내서 진심으로 멸하려 할 테니.]
“…교주.”
제갈유룡이 힐끔 백련교주를 바라보자, 백련교주는 뭔가 눈치를 챘는지 호법사자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전투는 끝났다. 호법사자들은 아그라로 먼저 귀환하라.]
“존명.”
파앗
호법사자들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제갈유룡이 입을 열었다.
“새삼 백웅의 빈자리를 느끼게 되는군. 이렇게나 답답할 줄이야.”
[동감이다.]
두 사람의 대화에 제갈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뻔히 저 놈이 개소리하는 게 보이는데도 백웅 놈처럼 막 내지르거나 앞뒤 안 가리고 휘저을 수 없잖나?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정말이지 전생자란 건 대단한 특권이야.”
[그대도 알아차렸군.]
“당연하지.”
와삭
제갈사는 천축대륙의 사과를 한 입 베어먹으며 말했다.
“팔부신중은 핑계에 불과하다. 놈은 이미 팔부신중이 신의 영육을 나눠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어. 사실상 팔부신중과 협력이라는 형태로 접근했지만 크리슈나야말로 새로운 놈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군.”
[…허나 우리는 놈의 위선을 알고 있어도 정면으로 그 위선을 통찰하거나 지적할 순 없었다.]
“그래 맞아. 우린 전생자가 아니니까. 수틀려서 저 놈이 당장 전투용 화신을 꺼내거나, 아니면 우리한테 지적당한 것 때문에 찔려서 패를 숨기기에 급급하거나…. 어느 쪽이건 기회가 한 번밖에 없는 우리 필멸자들에겐 좋지 않은 전개.”
제갈유룡이 말했다.
“사(邪). 이제 크리슈나와 겨루는 건 기정사실이다. 저 정도의 신적 존재에게 대처할 방법이 얼마나 생각나느냐?”
“흠 글쎄. 백웅이 있을 때라면 한 20개 정도? 하지만 결국 크리슈나 뒤편에 있을 흑막의 움직임까지 고려해야겠지.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흉신(凶神)을 대체할만한 존재를 찾아야 해.”
“어려운 문제군.”
“동감이야.”
셋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의 속내는 뻔히 읽히지만, 그럼에도 격의 차이 때문에 쉽사리 상대할 수 없는 상황!
고대신의 권속이었던 베헤모스조차도 상위로 모시는 질서의 신성이라면 삼황오제급일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상대가 진심이 되면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백웅이 있었다면….’
백웅의 머리가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백웅은 전생자라는 장점을 이용해서 수많은 신격들을 판에 끌어들이거나 기책(奇策)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행동이 어눌하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백웅은 초월자들을 상대하는데 뛰어난 강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웅이 사라진 지금, 유능한 호걸들만 남아서 운신은 자유로워졌을지 몰라도 압도적인 적수와의 능력차이를 극복하기는 도리어 힘들어진 셈이었다.
교주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크리슈나가 말했던 한자의 영향력이 신경 쓰이는군. 너희들은 거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가?]
“한자를 이용해서 인간을 조종하거나 임의진화시킬 수 있는 건 계약당사자인 창힐뿐이다. 창힐이 천암비서로 소멸한 이상 얘기할 거라도 못 되는 헛소리지. 그걸 굳이 다시 물어보는 건가?”
제갈사가 방금 전 크리슈나의 말을 비웃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마도에 통달한 그로써는 창힐이 백웅의 전생과 동시에 소멸해버린 이상 더 이상 한자의 영향력 따위는 신경쓸 것도 되지 못함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도 안다. 다만, 그 계약의 당사자가 사라졌다 하더라도 한자란 글자 자체가 강력한 마도의식의 잔유물(殘遺物). 그 언령의 힘을 우리가 쓸 수 있을지를 알고 싶다.]
“호오….”
제갈사는 뜻밖이라는 듯 교주를 쳐다보았다. 제갈사도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제갈유룡이 입을 열었다.
“쓸 수 없다. 결과물일 뿐이야. 애시당초 그런 게 가능했다면 중원대륙의 역사는 마도에 잠식되는 걸 피하지 못했다. 지금의 한자는 그저 상형문자일 뿐이다.”
[역시 그런가.]
“한자 그 자체보다는 [최초의 문자]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최초의 문자…. 백웅이 무수히 단서를 모았으나 결국 그게 무엇인지 본질적으로는 파악하지 못했지. 창힐과 팔부신중 놈들의 약점이며 목줄과 같은 것….]
“실제로 그건 모든 문자의 정점에 있는 초위언어(超位言語). 황제가 창힐을 제어하려고 마련했다는 생각은 들지만 뭔가 다른 비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비밀이라면?]
“백웅이 선지자에게 받은 정보에 따르면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있음을 증명하는 글자]라고 황제가 직접 언급했다고 한다. 즉, 여기서 황제가 ‘우리’라고 칭한 게 어떤 범위인지가 중요해진다.”
[…….]
“어쩌면 언어계약의 주체는 하나가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큰 굴레]를 넘어서 힘을 얻은 창힐에게 삼황오제가 [최초의 문자]를 써서 견제하려 들지 않은 걸 보면 통하는 힘의 범위에도 한계가 있고.”
[내 생각에는 그 일에 크리슈나도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군. 방금 전 그를 추궁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얘기를 꺼냈다면 절대 필멸자가 취급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니 크리슈나가 우리를 더 심하게 경계했을 것이다. 무모한 행위다.”
그렇게 대꾸한 제갈유룡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팔부신중을 대적할지부터 생각해보지. 백련교주, 대웅제국의 세계정복을 멈출 것인가?”
제갈유룡의 질문에 백련교주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크리슈나는 우리가 진군을 멈추든말든 우리를 견제하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타국을 정복해서 힘을 키우는 행위를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 팔부신중에 대응할만한 전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제국의 영토만 늘려나가는 건 하책이라고 보인다.”
[뭔가 팔부신중을 견제하면서도 대웅제국의 힘을 키울 방법이 없겠는가?]
“…….”
제갈유룡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린 반드시 남은 칠요를 얻어야 한다. 교주 그대나 절대지경의 고수가 칠요를 든다면 충분히 팔부신중에게도 대항할 수 있다.”
[백웅이 실종되었으니…. 이제 얻을 수 있는 건 화요와 토요인가.]
“그렇다. 화요는 결계를 뚫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들여서 다음 개기일식에서 얻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토요는 측천무후와 잘 교섭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도 그것만으로 마왕급 무리를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뭔가 복안이 있는가?]
“당연히 이대로는 팔부신중에 대항할 수 없다. 과거 세계수 결전 때처럼 놈들이 우르르 뭉쳐서 오면 몰살당하겠지. 하지만….”
제갈유룡이 싸늘하게 웃었다.
“팔부신중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내가 그걸 찔러주지.”
그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원래 - 백웅이 없었다면 팔부신중을 견제하기 위해 쓰려 했던 분명한 계책이.
그들은 브라만교를 멸망시킨 후 대웅제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대웅제국은 천축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넓히면서 지배력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으며,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3년 후.
독고성과 무영검제, 검마 3인이 절대지경에 올랐다.
백웅이 있을 때와 비교하면 느린 듯 했으나 사실은 인위적으로 절대지경에 도달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재능이 출중한데다 대웅제국의 성장과 함께 수많은 전투를 치뤘기에 그 실전경험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다만 명룡자는 언제부터인가 대웅제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완전히 무당산에 틀어박혀서 폐관수련을 했으며 신승 또한 소림사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초기에는 백웅이 남긴 칠대절학이나 무공절학을 수련하면서 큰 진전을 얻은 듯 했으나, 도중에 뭔가를 깨달았는지 독자노선으로 폐관수련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또한 정천맹주였던 위지혼이 초절정의 극한에 도달했으며 동영의 양대검호 또한 그와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그들은 앞으로 용맹정진한다면 10년 내에 절대지경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제갈사가 황궁에서 망량과 마주앉은 채 낄낄거렸다.
“…하여, 우리는 전생자의 도움으로 절대지경을 양산할 수 있게 된 거로군! 크크크.”
“양산까진 아닙니다. 백웅이 실종된 지 약 9년…. 도리어 백웅의 도움이 그만큼 거대한데도 겨우 셋밖에 절대지경이 되지 못했으니까요.”
“앞으로 계속 절대지경 고수가 생겨날 거 아니냐? 양산 맞지 뭘. 특히 사공린이랑 당산은 진작에 절대지경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전생자의 도움은 그만큼 압도적인 기연이죠. 백웅은 수십 번이나 무림 절세고수들의 무학을 배우고 기억하여 전달한 거니까요. 게다가 그걸 간접적으로 전수받는 자들은 무림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들.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대꾸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절대지경 고수가 많아진다 하더라도 팔부신중 본체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딱 까고 말하자면 무인만으로는 마왕급을 상대 못 해. 순수하게 정면으로 겨뤄주면 몰라도 혼돈의 권능을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지. 절대지경이 몇 명이든 간에 권능에 휘말리면 동귀어진 외에는 노릴만한 전략이 없다구. 오늘 네가 나를 부른 건 그 대책을 논하기 위해서 맞지?”
“그렇습니다.”
망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문제는 무인들이 맨몸이라는 겁니다. 무림 수준의 싸움에서는 호신강기와 뛰어난 회피신법만으로 충분히 해결되지만 강대한 혼돈에 맞서기엔 벌거벗은 거나 마찬가지. 그래서 장비(裝備)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결국 도구를 써서 강해지는 존재니까요.”
제갈사가 솔깃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방어력(防御力)의 측면이겠군. 팔부신중 상대로 쓸만한 방어구는 지상에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금강석으로 갑옷을 만들어도 무의미하지. 너는 뭘 생각하는 거지?”
“예상하셨겠지만 보패입니다.”
“보패가 천상의 신선이나 다루는 극한의 보물인건 알고 하는 말이지? 전생자인 백웅 놈이 동네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우리까지 보패를 그런 취급 할 순 없잖냐.”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보패는 신선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존재만 다룰 수 있는 것…. 하지만 인간 또한 보패를 만들 수 있습니다.”
슥 하고 망량이 품에서 백우선과 함께 웬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기이한 광석을 꺼내서 탁자에 올렸다. 그걸 본 제갈사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말했다.
“확실히 우리 제갈가의 선조 제갈무후가 백우선을 인공보패로 제작한 사례가 있긴 하지. 근데 그 광석은 뭐냐?”
“오채감람석(五彩輡壈石)이라 합니다. 천계의 가장 깊은 계곡에서만 나는 특수한 돌이지요. 또한 이건 천계에서 보패를 만들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이기도 합니다.”
“호오…. 구천현녀에게 시해지술을 배운다 싶더니 결국 그녀를 꼬시는 데 성공했구나. 천계에서 오채감람석을 지원받아서 인공보패를 만들겠다 이 말이지?”
“…….”
망량은 쓴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네. 제갈무후처럼 대라신선의 경지에 오른 자가 각고의 노력 끝에 하나의 인공보패를 만드는 식으론 안 됩니다. 천계가 인간계와 완전히 멀어져서 분리되기 전에 최대한 보패의 원료를 받아내어서 이쪽 세계에서 전면생산을 할 수 있게끔 해야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인공보패는 대부분 갑주(甲胄)의 형태가 되겠군.”
“팔부신중을 상대로 완전히 버텨낼 순 없겠지만 적어도 맨몸으로 괴물한테 달려드는 형태만은 피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절대지경 고수라면 의념천주를 이용해서 인공보패의 방어력이 만들어준 여유를 잘 활용할 수 있을 테고.”
“뭐, 상황은 이해했어. 그래서 오늘 나를 여기 부른 이유는 뭐지? 업적 자랑이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제갈사의 질문에 망량은 손깍지를 끼며 대답했다.
“…머지않아 시몬 마구스를 꺾으실 생각일 텐데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호오.”
“저는 곧 시해지술의 연마와 천제단을 다시 쌓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아무것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크크… 크크큭….”
제갈사는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역시 망량은 백웅과는 달리 자신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어느 정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읽어낼 수 있는 건 오로지 제갈가의 인간뿐이었다.
“글쎄, 뭐, 미리 읽어서 제안해 준 건 고맙군. 굳이 말하자면 말이야…. 진(秦)을 만들 생각이다. 그게 필요하거든.”
“…그렇군요. 그건 이미 제갈유룡과 협력하고 있겠군요.”
“그래. 필요한 게 있다면 진작 말했을 거다. 너는 네가 할 일을 해라.”
“알겠습니다.”
후웅
망량은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순식간에 축지법을 써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제갈사가 중얼거렸다.
“어느 새 현이의 술법도 시해지술 덕분에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군. 짧아보여도 어느 새 10년 가까이 흐른 건가….”
아직 팔부신중은 공격해오지 않는 상태였다. 아마도 크리슈나의 교묘한 수작에 의해 물밑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으리라. 언제 상대의 공격이 시작될지는 몰랐지만 그 전에 최대한 힘을 키워놓는 수밖에 없었다.
우드득!!
제갈사는 자신의 손이 갑자기 마수(魔獸)처럼 변형되었다는 걸 알아챘다. 무표정하게 괴물의 손을 바라보던 제갈사가 영지주의의 주문을 외웠고, 이윽고 손은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는 생각했다.
‘안 돼. 고작 상급 마법 하나에 반작용을 이렇게 받는다면, 아직은 무슨 수를 써도 시몬 마구스를 이길 수 없다.’
아유타야 왕국을 무너뜨릴 당시에 브라만교의 정예를 쓰러뜨릴 때 썼던 마법의 반작용이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마법은 술법과 달리 불안정하며 극단적으로 위험했기 때문에 아무리 최상급 마도사의 한 명인 제갈사라도 강대한 마법을 쓰면 반작용에 노출되는 것이다.
제갈사는 자신과 시몬마구스 사이의 격차를 잘 알고 있었다. 시몬마구스는 역사상 최초로 외신에게 공양을 성공하여 마왕의 경지를 손에 넣은 최강의 대마도사였고, 제갈사가 그에게 대적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 제갈사의 장기인 이혼대법조차도 사실은 시몬마구스가 원조였으며 도리어 더욱 강력했다. 그리고 시몬 마구스를 이겨낼 수 없다면 머지않아 그에게 영혼을 바치고 악마로 전생하게 될 것이리라. 그 시기가 멀지않은 지금, 제갈사는 약간 초조해져 있었다.
과연 외신 [산양]과 연결된 마왕급 존재를 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혼대법조차도 통하지 않는 원조를 상대로 한다면?
‘…웬만한 마도서를 익힌다 해도 힘의 격차는 좁힐 수 없겠지.’
이윽고 제갈사는 비직하고 웃음을 흘렸다.
“일단 죽는 수밖에 없겠군.”
그리고 5년 후 - 망량은 완전히 지상세계에서 은둔하듯 자취를 감추었다. 천계와 현실세계를 떼어내는 작업이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구천현녀를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망량이 천계에서 산 두어 개를 퍼 와서 보패의 재료가 잔뜩 쌓이게 되었다.
동시에 대웅제국의 2대 황제, 백련교주 독고운천은 명령을 내렸다.
[서방을 친다. 놈들을 쳐서 멸망시킬 것이다.]
“황제폐하 만만세!!”
쿠르르르…
전쟁의 암운이 드리웠다. 그리고 대웅제국은 전 영토에서 병사와 물자를 징발해서 전이문을 통해서 서방열국 중 최전방에 있는 나라, 카자흐 국(國)과의 접경에 배치했다. 카자흐를 위시하여 중원의 서방에는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이 존재했다. 그 나라들은 대웅제국의 움직임에 긴장하며 크게 주시했으나 이윽고 들려온 소식에 모두들 희망을 잃고 말았다.
[서방은 이제 우리 것이다.]
국경에 도열한 대웅제국군을 살피던 백련교주가 말 위에서 크게 손을 들며 외쳤다.
[200만 대군으로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리라!]
우오오오 -
200만 대군!
그것은 역사상 최대규모의 군세였으며, 종종 허풍이 섞였던 규모와 달리 200만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정확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 전투병의 규모가 컸으니 역대 중원이 동원했던 그 어떤 규모의 군단보다 더욱 거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전이문을 이용해서 정복지인 남만과 천축대륙 모든 곳의 경제적 안정을 쉽게 취할 수 있었으며 전투병도 쉽게 양성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만 대군만 하더라도 한 국가의 모든 명운을 걸고 출진하는 규모의 대군이었는데 최소한 그 20배의 규모로 병력이 움직이자 말 그대로 천지가 진동했다. 접경에 있던 카자흐 국에서는 일단 대항해 보려고 마음먹었으나, 전쟁이 시작된지 하루만에 카자흐의 최대규모 요새가 박살이 났다.
꽈과광!
쾅!!
더욱이 200만 대군에는 현 지구상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는 만광포와 귀뢰포가 대량으로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소총이 보편화 되어 있었으며 사거리 또한 길었다. 무기의 질로 보나 숫자로 보나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대웅제국이 개전(開戰)을 선언하고 노도처럼 서방으로 밀고 들어간지 고작해야 3개월 - 그 사이에 카자흐는 멸망했고 사파비 제국 또한 멸망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쉴새없이 영토를 정벌당했고 어느 새 수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결국 항복했으며, 오스만을 차지하는 순간 대웅제국은 드디어 서방의 열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쿠구구구…
[드디어…. 마도에 지배된 서방의 왕국들을 해방시킬 때가 왔구나.]
백련교주가 감회가 어린 듯 중얼거렸다. 그 때 급히 전령이 막사로 뛰어들어왔다.
“황제폐하, 큰일났사옵니다!”
[무슨 일이냐?]
“아라사 제국에서 40만 대군을 동원해 중원의 북방을 침범했다 하옵니다.”
[…….]
백련교주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찮은 인간놈들…. 서남제국을 토벌하러 모두 나와있으니 빈집을 털 수 있다 여기는 것인가? 그 일은 제갈유룡에게 맡기도록 하라.]
현지에 나와있던 책사들이 진언했다.
“북방과 대치하던 병력은 10만여 명에 불과하옵니다. 수도를 지키는 어림군 또한 그 수를 줄여서 5만에 불과하옵니다. 아라사 제국은 총병과 화포도 발달되어 있으니, 급히 회군하심이….”
[크크…. 낙양성주 제갈유룡에게 돌아가서 내 말을 전하라. 아라사의 황제와 그 일족을 모조리 멸하라고. 그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존명!”
[이 기회에 아라사도 멸망시켜야겠군.]
전령은 전이문 너머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백련교주가 말했던 대로, 제갈유룡은 제갈부와 함께 본토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해서 고작 10만 병력으로 거의 피해없이 40만 명의 아라사인을 씨몰살시켰다. 또한 제갈유룡이 직접 아라사의 섭정과 황제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저벅….
제갈유룡은 아라사의 황궁을 뚜벅뚜벅 걷다가 어떤 장소에 멈칫하고 섰다. 그리고 [도서관]의 입구를 찾자 중얼거렸다.
“도박을 해봐야겠군.”
그는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또한 아라사와의 전쟁이 이뤄지는 동안에 백련교주는 서방열국과의 첫 전쟁에 나섰다. 첫 대적상대는 바로 신성로마제국이라 불리는 서방 최대의 제국이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선봉으로 나온 존재들을 보자 백련교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것은… 무엇인가.]
손에 창과 검을 들고 있는 날개달린 인간들.
그 날개에서는 환한 빛이 흐르고 있었으며 성스러운 기운이 뿜어져나오는 듯 했다.
그런 날개달린 익인(翼人)이 무려 5만여 명이 넘었으며, 그건 명백히 인간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백련교주와 달리 제갈사는 그 익인을 보자마자 킬킬 웃었다.
“저건 카발라의 천사(天使)다. 놈들도 [이면]과 손을 잡았어.”
[천사?]
“그래. 드디어 이 세계의 역사가 인간의 선을 넘기 시작했군….”
제갈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사병과 대웅제국의 대군이 충돌했다.
역사상 첫 인외(人外)의 대전이 시작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