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
진공가향(眞空家鄕)
나는 메피스토펠레스를 재차 공격해 들어갔다. 평상시에 내공과 의념을 활용해서 이뤄지던 초인적인 움직임은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내 검은 확실하게 검술의 기초를 담은 채 메피스토펠레스를 베었다.
위잉!!
스칵
메피스토펠레스는 일순간 환영을 만들어내며 멀리로 피해버린 듯 했으나, 이윽고 놈의 가슴팍에 큰 참상(斬傷)이 남았다. 피가 나지는 않았으나 메피스토펠레스는 곤혹스러워했다.
[이 공간의 위상과 지배권은 여전히 나의 것…. 그러나 그 검은 내 전뇌세계의 지배력을 무시한단 말인가? 계산할 수 없다….]
나는 검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겨누며 말했다.
“여기서 포기해! 허황된 꿈을 꾸지 말고 꺼져라.”
[…….]
“전생자에게 밉보이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설마 강인공지능이면서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내 말에 메피스토펠레스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전생자 백웅이여. 그대의 목적을 알려줄 수 있겠는가?]
“목적? 그건 들어서 뭐 하게.”
[나는 파우스트의 유지에 따라 인류의 보호와 선도에 앞장서려 한다. 그걸 위한 모든 루틴을 짜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의 목적은 어딘가 나와 다르다는 걸 감지했다.]
“음.”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에 잠시 생각했다.
‘어쩌다보니 저 놈과 싸우게 됐지만, 그 정도야 말해줘도 되겠지.’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세상을 죽이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이 세상의 모든 [옛 지배자]와 외신(外神)들을 없애는 게 바로 내 목표다!”
[……!!]
메피스토펠레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리고 놈은 내 말에 곧장 대꾸했다.
[전생자여. 나의 연산결과 그 행위값의 실현가능성이 차원 대수(大數)로도 측정하는 게 불가능하다. 양자역학 이하의 이론적 상수(常數)로는 측정이 의미가 없다. 인간 특유의 허세라고 하는 감정의 발현인가?]
“…그래 뭐, 가능성이 낮기야 하겠지.”
나는 검을 휘두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되고 안 되고는 이제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그딴거 생각했으면 시작도 안 했어!”
[중요하지 않다는 건 모순이다. 실현가능성은 충분히 중대한 값이다.]
“모순? 그럼 니 목을 벨 수 있는 이 칼날의 확률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건 계산할 수 있냐고 썩을 기계놈아!”
[…….]
“그니까, 계산할 수 없는 걸 계산할 필요는 없다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침묵하다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궤변인가…. 그러나 그대의 의지값을 인정할 수밖에.]
츠즈즈즈
메피스토펠레스의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대가 나의 살해행위를 용서할 수 있는 대가로 2가지를 제시하겠다. 전뇌자를 그대에게 복종시키고 그대와 대웅제국을 위해 프리메이슨을 움직이도록 하지.]
여차하면 튀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파우스트가 기계 만드는 걸 실패했구만. 내가 그 제안을 못 받아들이는 이유가 뭔줄 알아?”
[무엇인가?]
나는 이를 으득 악물며 달려들었다.
“선빵 쳐놓고 잘난척 지랄마 개새끼야!!”
스악!!
내 검의 일 초(一招)가 출수되며 아지랑이처럼 변한 메피스토펠레스가 있던 장소를 베었다.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의 상반신이 뎅겅 베인 채 멀찍한 장소에 재차 나타났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의 몸을 복원시키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현재의 필드(field)에서 추방.]
빠직!
잠깐동안 전기가 내 몸에 흐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찌릿하는 감각을 털어내고 다시 한 번 맹렬하게 달려들어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베었다.
‘천우진이 만들어준 클라우딩 방어막이 남아있어서 놈의 공격을 막아준 거군!’
이번에는 메피스토의 모가지가 튕겨지듯 날아갔으며, 메피스토펠레스는 표정변화 없이 다시 모습을 없애더니 멀찍한 장소에 나타났다.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교섭결렬이니까 누가 먼저 지칠 때까지 해보자는 거지?’
해보자면 그것도 좋다. 어쨌든 내게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벨 무기가 있고, 이 곳은 전뇌세계이므로 내게는 체력소모가 전혀 없다. 그저 정신력만 버틸 수 있다면 이 곳에서 무한히 싸울 수 있으리라.
절대 포기란 없다!
내가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
“응?”
[#&%^*%*@&$^&@]
치지직
갑자기 메피스토펠레스가 이상한 기계음을 입으로 흘리면서 자신의 몸 형태가 크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초록빛의 숫자로 변해서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형태를 전혀 유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귓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지금이오!!]
알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목소리의 말대로 일단 달려들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을 찔렀다.
“죽어라!”
푸욱
검이 꽂히는 순간, 메피스토펠레스의 몸이 마치 가루처럼 흩어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수많은 알갱이가 빛의 안개처럼 흩어져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스아아아
그리고 다음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사라진 자리에 꽤 낯익은 인간의 모습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라 있었다.
우웅
[설마 이 수어사이드(suicide) 프로그램이 발동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구려….]
나는 한 눈에 그 홀로그램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파우스트.”
홀로그램의 모습은 바로 파우스트 박사였다. 연금술사이며 마도사이자 뛰어난 과학자이기도 한 그와는 전생하면서 몇 번이고 마주쳐왔기에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서 파우스트 박사의 홀로그램에게 말했다.
“무슨 상황이지? 메피스토펠레스가 내 전생능력을 뺏으려 하길래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신이 나타난 이유가 뭐야.”
홀로그램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나는 파우스트 본인이 아니오. 파우스트는 사망했으며, 나는 수어사이드 프로그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강인공지능인 메피스토펠레스를 없애기 위해 파우스트 박사에 의해 제작된 존재요.]
“……?”
[내가 발동되는 조건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인간구원의 초기목표를 잃고 대파국(catastrophe)를 활동목표에 넣는 순간. 방금 일어난 사건이 메피스토펠레스로 하여금 인류멸망을 염두에 두게끔 만들었다는 뜻이오.]
“음….”
[강인공지능이 인류의 사멸을 목표로 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기에.]
나는 홀로그램의 말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랑 싸우는 도중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인류파멸]도 시도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꾼 거군. 그래서 파우스트 박사가 심어놓은 견제용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발동한 거야.’
뭔가 뜻밖의 도움을 얻은 기분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파우스트의 유산이라 그 말이지. 그래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지금 죽은 거냐?”
[죽어가고 있는 중이오. 메피스토펠레스의 근간이 되는 전뇌상의 양자코어가 자동분해중이니 1시간 이내로 소멸하게 될 것이오.]
약간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목숨걸고 수천 일이라도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메피스토펠레스가 처리될 줄이야? 하지만 개고생하는 것보다는 쉽게 가는 편이 나았기에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이것도 정향의 인과율 덕분에 생긴 행운 같군.’
역시 제갈유룡이 목숨걸고 노리던 가호다웠다. 바치는 제물이 크고 의식이 까다롭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보장하는 가호인 것이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홀로그램에게 말했다.
“좋았어. 그럼 이제 날 현실세계로 돌려보내 줘.”
[…….]
“왜 그래?”
홀로그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어렵겠소.]
“엉?! 왜 어려운데?”
[메피스토펠레스는 역사상 최고최강의 인공지능이오. 현 시점은 그가 74.2요타바이트의 연산량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전뇌상의 기능을 홀로 계산할 수 있었소. 그런 메피스토펠레스를 죽이는 이상 엄청난 대가를 감수해야 하오….]
“대가?”
[실제로도 메피스토펠레스는 전뇌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전뇌상에 그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전뇌 터미널 링크(terminal link)를 두고 있는데 그 숫자는 50조 개가 넘소. 양자코어가 분해되면 그 터미널링크들은 모두 시한폭탄이 되는 것이오…. 데이터 연쇄폭발로 인해 전염병처럼 네트워크에 연결된 모든 컴퓨터와 전자장치는 물리적으로 파괴되고 이상작동을 하게 될 것이오. 군사용 인트라넷으로 지상의 네트워크와 격리해 놓았어도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모든 컴퓨터에 자신의 분신을 숨겨놓았기에 예외는 존재치 않소. 메피스토펠레스는 전기선만 꽂혀있으면 어디든 침투할 수 있었으니까.]
아 뭐라는 거야!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아니 그래서 뭐? 난 전자전뇌 쪽은 잘 모르니까 쉽게 좀 설명해 봐.”
정말 못알아듣겠다. 난 500년 전 창칼 쓰던 시대에서 이 세계로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저딴 얘기를 어떻게 알아듣는단 말인가? 내가 신경질을 내자 파우스트의 홀로그램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전뇌세계 그 자체였소. 그러므로 전뇌세계는 곧 멸망하오. 이 세상의 모든 인터넷(internet)과 네트워크는 붕괴할 것이며, 지상의 문명은 50년 이상 퇴보하게 될 것이오.]
“……?!”
[심할 경우 전 세계의 핵미사일이 동시발사되며 문명이 끝날 것이오. 하지만 그걸 막을 방법은 없소.]
나는 그제서야 홀로그램의 말을 조금 알아들었다. 메피스토가 전뇌세계를 완전히 잠식했기 때문에 놈이 죽는 순간 전 세계의 컴퓨터가 마비되거나 폭주한다는 말이다! 그 정도 개념은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문제의 심각성을 대충 알 수가 있었다.
나는 급히 홀로그램한테 말했다.
“이, 일단 됐으니까 나부터 밖으로 내보내 줘. 밖에 나가면 뭔가 방법이 생길 테니.”
[그것도 불가능하오. 이곳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전용공간으로 삼던 롯지(Lodge). 이 세상에서 가장 엄중한 전뇌방벽이 쳐져 있소. 나는 메피스토펠레스 암살용으로 만들어졌기에 이런 방벽은 풀 수 없소.]
“아니 씨발 넌 불가능하단 말밖에 못 하냐?!”
[…….]
홀로그램은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파우스트는 생전에 당신과 메피스토펠레스가 협력하길 바랐소. 힘을 합쳐 인류를 구원하길 바랐던 게 그의 소망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정말 유감이구려….]
“야, 잠깐.”
[그럼 수어사이드 프로그램으로서의 활동을 종료하겠소.]
파앗
홀로그램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놈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이 공간에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스륵….
“아!”
게다가 내 손에 들려있던 검도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 선검술인 거 같긴 했지만 다시 소환하려고 하니 방금 전처럼 소환되지가 않았다.
‘소환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뭔가 힘을 다 써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느낌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일단 주먹을 불끈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흥! 1시간이라… 이대로 내가 죽을 거 같으냐!”
나는 이 에니그마 파크란 장소를 좀 더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나는 이 공원이 수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방문을 열면 책상 1개와 문제지 1개가 놓여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문제지를 집어들었다.
“이건….”
뭔가 알 수 없는 말이 잔뜩 쓰여져 있다. 정말 생전 처음 보는 글자다!
그리고 책상의 맞은편에는 문제지를 집어넣는 조그마한 틈이 있었다.
‘문제지에 답을 적어서 저 안에 넣으면 정답인 건가.’
나는 이 공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가 잔뜩 쓰여있는데 어떻게 답을 적으란 말인가?
“제길… 그래도 일단 해 볼까.”
나는 답안 항목에 정체불명의 언어를 아무렇게나 휘갈겨 적었다. 내가 쓰고도 내가 뭔 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반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조그마한 틈으로 문제지를 한 번 집어넣어보자, 이윽고 띠링 하는 소리가 울렸다.
띠리링!!
[테스트 완료. 총 10문 중 1문이 정답입니다. 에니그마(Enigma) 클리어.]
“응?”
10개 중에 한개만 맞춰도 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내가 어떻게 맞췄지?
나는 신기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클리어 보상으로 에니그마 파크 자유출입권을 드리겠습니다.]
위-잉
잠시 후, 문제지를 집어넣었던 틈에서 웬 표 같은 게 마치 영화표처럼 출력되었다. 나는 이게 놀이동산의 자유이용권이란 것과 비슷하단 걸 깨달았다. 나는 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표에서 out이라고 표시되어있는 면을 다시 틈 속으로 밀어넣었다.
파앗!!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머리에 전뇌기를 쓴 채로 어딘가 생소한 장소에 와 있었다. 현실로 돌아온 건가 싶었지만 이내 나는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 내가 누워있는 의자와 전뇌기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디지?’
그리고 잠시 후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바로 메피스토펠레스가 규명할 수 없었던 카르마(karma)의 능력이구나. 인과율 그 자체가 연산계 밖을 움직여서 운명을 만들어내는 거였네.”
“넌….”
소녀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당신의 탈출방법은 에니그마를 클리어하는 것뿐이었어. 당신이 에니그마 파크를 통과할 확률은 천문학적으로 낮았는데, 당신에게 적용된 카르마가 소모되며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걸 양자시점에서 관측했어.”
옆을 보자 어느 새 너구리인형을 품에 안고 있는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의자 옆에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여자아이 자체도 마치 인형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알아채고는 말했다.
“네가 전뇌자(電腦者)냐?”
여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