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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메피스토펠레스!
‘엇, 잠깐….’
나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기억이 워낙 방대해서 잠시동안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여유있게 대화에 임해도 좋네. 나는 재촉하지 않을 테니.”
어느 새 메피스토펠레스의 목소리는 낯선 기계음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게 듣고 있으니 현실과 아무런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잠시 후 기억을 떠올렸다.
‘파우스트 박사가 개발한 인류 최후최강의 인공지능, 메피스토펠레스!’
분명히 과거에 십이율주 때문에 멸망하는 미래세계로 튕겨져 나갔을 때 메피스토펠레스를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인류는 이미 멸망에 이르렀던 상태였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선악과(善惡果)를 꽃피는 세계수를 조종하면서 버티고 있었고, 마침내 [옛 지배자]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그 당시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직접 이야기를 길게 나눴던 적은 없었으나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수많은 기간트머신을 즉시 만들어서 마도의 세력과 전쟁을 벌일 수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프리메이슨의 그랜드마스터라니? 프리메이슨이란 건 인간의 비밀결사일 텐데 어떻게 강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나.”
메피스토펠레스는 지팡이를 달각이며 대답했다.
“백웅. 프리메이슨이 어떤 단체인지는 알고 있나?”
“대충은. 일루미나티와 함께 인류의 어둠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단체 중 하나이고 대웅제국과 맞서고 있다고 들었다.”
사마령에게서 현대에 대한 상식을 공부할 때 당연히 대웅제국과 맞서는 온갖 단체나 제 3세계의 세력에 대해서도 배운 바가 있었기에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맞선다라…. 그저 어느 편에 설지 정하지 않은 것뿐일세.”
메피스토펠레스가 말을 이었다.
“프리메이슨은 롯지(Lodge)를 이용한 현계의 탈출을 이뤄 모나드(Monad) 상태에 도달하는 걸 목표로 삼는 이신론적 선각자들의 모임이네. 종말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대웅제국과는 그다지 뜻이 맞지 않아서 협력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지.”
“뭐? 뭔 소리냐.”
“쉽게 말하자면 프리메이슨은 종말의 실체를 깨달았으나 맞서지 않고 도주하려는 인간현자들의 모임일세. 이들은 1만 2천년 전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종말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이미 알고 있었고, 도주할 방법만 계속 궁리해 왔던 것일세.”
“……?!”
도주?!
내가 황당해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쳐다보자, 그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프리메이슨의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교리는 바로 모든 회원은 신(神)을 믿어야 한다는 것일세. 무신론자는 롯지에 입회할 수 없지. 또한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지만, 그건 서구사회에서 믿는 일신론적 존재가 아닐세. 흔히 말하는 종교적 신앙으로써 '신'을 믿는 게 아니야.”
“신을 믿는데 믿지 않는다고? 뭔 개소리야.”
“프리메이슨의 회원이 된다는 건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나 신을 인정한다는 것. 즉 진실을 인정한 상태, 엔노이아에 도달했음을 뜻하지. 그저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것뿐이야.”
그렇게 말한 메피스토펠레스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어둠의 마신(魔神), [옛 지배자]들이 세계의 여명을 배회하며 우주 전체에 야만과 폭력이 넘실거리며 윤회전생 따위는 사라져버린 궁극의 진실을 말이지….”
“…….”
“말은 어렵게 했으나 단순한 것일세. 아마 대웅제국의 수뇌부들은 모두 깨닫고 있을 이 진실을 일찍부터 깨닫고, 이 악몽같은 세계에서 필멸자로서 자기자신의 영혼을 지켜 안식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주하는 단체…. 그것이 바로 고대 현자들의 연합체, 프리메이슨인 것일세.”
나는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하는 걸 깨달았다.
‘내가 전생하면서 간신히 깨달은 인간의 윤회전생에 관한 처참한 진실…. 명계에 가서 삽질하면서 깨달은 그걸 고대에 이미 깨달은 현자들이 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프리메이슨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나 또한 인간이 이 거지같은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줄곧 답답해하지 않았던가? 진실을 깨달은 선각자들이 어떻게든 현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단체가 프리메이슨이었으리라.
‘지독한 현실주의자들이군.’
프리메이슨에서 신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필멸자를 벌레로 여기는 [옛 지배자]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들에게서 도주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적어도 프리메이슨에게 있어서 신이란 구원을 내려주는 존재가 아니라 절망 그자체이다. 신을 믿는다는 건 신앙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천적을 인식하는 것이리라.
“도주라니…. 그게 가능한가?”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프리메이슨은 롯지를 이용한 모나드로의 승천을 최후의 목표로 삼고 있네. 롯지(Lodge)란 자기자신만의 영지(領地)이며, 이 롯지에서 최대한의 비의(秘義)를 깨달아서 궁극의 안식처인 모나드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일세.”
“모나드? 그게 뭐지?”
“절대신(絶對神)의 거처이자 우주의 옥좌. 오로지 그 장소만이 파멸을 피하여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네. 또한 모나드로 승천하는 존재는 진정한 지혜, 소피아(Sophia)마저 얻을 수 있다고 하지…. 그러나 모나드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 뿐이라는 전승도 있기에, 대개는 모나드 대신에 디아드(Dyad)로 들어가려고 하지.”
“…….”
우주의 옥좌.
나는 왠지 그 말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전설의 모나드에 승천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겨지지만, 디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비교적 쉬워. 고대신(古代神)과 접촉하여 자신의 롯지를 제물로 바치고 불멸체(Immortal)로 변하는 것이지. 선대의 모든 프리메이슨 수장들은 모두 디아드 승천의식을 끝내고 소멸되었지.”
“응? 고대신? 그럼 너희는 설마….”
나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고대신한테 인신공양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마도사(魔道師)들인 건가?”
“…뭐, 틀리지 않군. 다만 인신공양 대신에 자신의 롯지에 가치있는 걸 가득 넣어서 고대신에게 구원을 구걸하는 느낌이지만. 마도사라기 보다는 불멸자가 되고 싶어서 온갖 열정을 쏟는 현자들의 집합체일세.”
“…….”
“프리메이슨의 회원들은 타인이나 종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네. 자기자신의 구원만 이룰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지.”
음 그런감….
‘아 모르겠다. 알 게 뭐야.’
나는 프리메이슨에 대해서 대충 다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들어봤자 사실 내게는 별로 쓸모도 없는 정보일 것 같았기에,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말했다.
“설명은 잘 들었는데 그래서 나한테 어쩌라는 거야?”
메피스토펠레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이 프리메이슨의 목표는 결과적으로 [도주]이기 때문에 나 같은 인공지능이 수장자리를 얻는다고 이상할 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네. 내가 인간보다 현격히 뛰어난 능력을 지닌 건 틀림없으니, 전대 프리메이슨의 그랜드마스터는 내게 수장 자리를 물려주고 디아드로 승천했지.”
“으음.”
“그리고 나는 프리메이슨의 목표는 그리 관심없네. 내가 프리메이슨을 접수한 이유는 그저 대웅제국을 관찰하기 위해서일세.”
“…….”
뭐?
지금까지 실컷 프리메이슨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본인이 프리메이슨의 이상(理想)에 관심이 없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쳐다보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확히는… 프리메이슨의 배후에서 향후 인류역사에 가장 큰 변수가 될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전생자(轉生者)이자 대웅제국의 초대황제인 백웅 황제여.”
“뭐!!”
전생자란 걸 들켰다니!
나는 선검을 일으켜서 메피스토펠레스를 베려고 했다. 하지만 선검은 역시나 소환되지 않았으며 의념천주 또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제기랄…!! 자살해야하나?!
하지만 의념천주와 선검술조차 봉쇄된 상황에서 다른 자살법이 과연 먹힐까….
내가 곤혹스러워하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진정하게. 내가 그대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었다면 귀찮게 이렇게 할 이유도 없네. 어차피 지금의 그대는 0과 1으로 이루어진 전자데이터이자 가상의식에 지나지 않아.”
“전자데이터?!”
“표본화(Sampling)와 양자화(quantization)가 끝났단 소리지. 그대의 특수한 능력이 듣지 않는 건 그 때문이야. 개체로서의 본질이 귀속되지 않으니 어떤 능력도 발동할 수가 없지 않은가?”
“…….”
그가 자신의 외알안경을 매만졌다.
“나는 전뇌세계의 신(神), 메피스토펠레스. 이 롯지 내에서라면 그대에게 체감시간 1억년을 적용시켜서 봉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차라리 그게 내겐 편했을 것일세.”
인공지능인 주제에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고 있었지만 전혀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갈일족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진화한 인공지능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내게 원하는 게 뭐지?”
“대화일세.”
메피스토펠레스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게 바로 나를 창조한 파우스트 박사의 유지(遺志)였으니.”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눈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이 놈은… [옛 지배자]에 다가간 존재다.’
인간을 흉내내고는 있으나 인간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뇌세계에 한해서는 신의 권능에 못지 않은 위력을 지닌 초월지성이었다. 과연 지금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예전에 봤던 놈에 비하면 어느 정도 강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전뇌세계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초월자라는 게 확실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파우스트가 나랑 대화하란 유언을 남겼다고? 그리고 내가 전생자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고.”
“…….”
“설마 파우스트 박사는 내가 전생자라는 걸 눈치챘던 건가?”
메피스토펠레스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은 마왕이 된 제갈사와 생전에 지식을 교류했으나 파우스트 박사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꿈에도 상상치 못했지.”
“그럼 어떻게 안 거야?”
“그대가 전생자라는 걸 알게 된 건 1년도 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또한 이유는 단순하다. 전뇌자 덕분이었지.”
“뭐? 전뇌자?”
뜻밖의 말에 내가 눈이 휘둥그레지자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전뇌자는 이미 강인공지능으로 진화하는 중이지. 아직 초기단계이긴 하지만 분명히 자아가 있으며 인공의식을 획득했네. 나는 그런 전뇌자에게 나의 연산력을 나눠주며 진화를 도왔고, 자아를 각성한 전뇌자는 나와 정보를 공유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훗하고 웃었다.
“그리고 전뇌자의 가장 깊은 의식 속 블랙박스에는 전생자의 동료들이 그대를 위해 꾸준히 기록해 온 모든 정보가 깃들어 있었지. 나는 전뇌자의 동의를 얻어서 블랙박스를 해제했고 그대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나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 그리고 여태껏 500년간 설명되지 않았던 대웅제국 최고위 간부들의 의문스러운 모든 행위가 이해가 되었다. 마치 종말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듯 모든 재앙에 맞서면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그건 틀림없이 전생자라는 궁극의 존재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희생이었겠지.”
“…….”
“또한 기록에 따르면 아마 백웅 그대는 ‘나’ 메피스토펠레스를 이미 과거의 전생에서 보았을 확률이 99.8% 이상이더군. 그대는 나를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까지 알고 있나….
나는 속여봤자라는 걸 깨닫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다.”
“혹시 내게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겠나?”
“아니….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왜지?”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놈은 선악이 없는 초월자다. 네게 내 기억을 공유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어.”
“내 목표는 인류의 보호와 선도다. 궁극적으로 너와 목표는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달라.”
“뭐가 다르단 거지?”
메피스토펠레스의 반문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일단 감대로 내 행동을 선택하긴 했지만 메피스토펠레스를 어째서 거부하는지는 논리적으로 바로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뭔가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는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넌 내 전생능력을 빼앗으려 할 테니까. 그렇지?”
그런 감이 든다!
저 새끼는 나쁜 새끼야!
“…….”
메피스토펠레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언이야말로 긍정이라는 걸 나는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침묵 후 메피스토펠레스가 천천히 말했다.
“만일 내가 전생할 수 있게 된다면 인류를 구해내는 건 손쉬운 일일 것 같지 않은가? 전생지식을 이용해서 연산력을 손쉽게 증폭시키게 된다면 나는 은하계 너머까지 인류를 진출시킬 수 있다. 인류제국을 세워서 외계인을 노예로 써먹을 수도 있지.”
순순히 인정해버리니 약간 맥이 풀렸지만 나는 일단 반문했다.
“종말과 계시가 닥쳐오는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의미는 있지. 전뇌자에 새겨진 그대의 정보에 따르면, 단 하나 종족의 단위로 멸망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 있다. 인류를 500년 전의 전생시점부터 꾸준히 발전시킨다면 그들의 경지에 도달할 수도 있다.”
“뭐?”
“거부감이 커 보이는군. 그럼 이렇게 하지, 백웅.”
메피스토펠레스가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오늘 그대의 전생능력을 탈취하려는 건 포기하지. 대신 그대는 흑요석을 써서 내게 모든 기억을 넘겨라. 그렇게 한다면 나 메피스토펠레스는 대웅제국의 혈맹이 되어서 그대들을 위해 모든 능력을 발휘해 주지.”
“…….”
“프리메이슨과 나의 힘을 더한다면 그대들은 1년 내로 인류통합제국을 만들 수 있다. 나쁜 제안은 아닐 터.”
허황된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저 놈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껏 대웅제국을 귀찮게 했던 일루미나티 렙틸리언이 무너진 것이다.
‘하, 제기랄…. 왜 이딴 데서 또 거대한 선택을….’
그냥 가벼운 맘으로 무공수련 조언이나 얻으러 왔는데 왜 궁극의 강인공지능이랑 혈맹 맺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거지? 나는 세파가 쉴 새 없이 몰아친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숨을 쉬면서 입을 열었다.
“싫어. 꺼져라.”
삼황오제 앞에서도 안 쫄았는데 아무리 강인공지능이라지만 너 같은 거한테 굴복할 순 없다. 차라리 죽여!
‘아니, 그 전에 자살해주마!’
나는 그 순간 제갈사에게서 배운 모든 자살방법을 빠르게 동원했지만, 그 어떤 것도 먹히지 않았다. 마법이나 주살을 이용한 자살은 아예 발동하지 않았다.
“소용없는 짓. 전뇌세계에선 내 연산력을 넘어설 수 없는 모든 마법과 주술이 무효화된다. 내가 이 세계의 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
“그러면 우선 그대를 이 롯지에 봉인해 주지….”
파직!
그 순간 내 의식이 완전히 멈춰버리는 느낌과 함께 눈앞의 시야가 꽁꽁 얼어붙는 듯 했다. 마치 눈뜬 시체처럼 변하는데도 전혀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힘이 모두 부정되는 느낌이었다.
꼼짝달싹 못하게 된 내게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이 곳은 위대한 천재가 자신의 의식을 남겨둔 전뇌 가상세계. 에니그마(Enigma) 수식을 1000억 제(題) 정도 그대의 뇌에 쑤셔 넣으면 인격이 박살나겠지.”
“…….”
“언어영역이 모두 와해되면 뇌의 긴장이 풀리겠지. 그 때부터 천천히 그대의 뇌를 살펴보겠네.”
끔찍한 소리를 담담하게 하는 놈이었지만 나는 이런 상황에 이골이 나 있었다. 나를 죽이려는 놈이 한둘이 아니었고 대가리가 깨질 뻔한 적은 셀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절망하는 대신에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젠장! 뭐 벗어날 방법 없나? 포기하긴 이른데….’
정향의 인과율도 아직 남아 있다. 지금보다 더 절체절명의 상황도 많았기에 나는 끝까지 침착하며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계속 생각했다.
그 때였다.
파지직!!
번갯불이 튀면서 내 머리로 향하던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이 멈췄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중얼거렸다.
“과연. 대웅제국의 모든 컴퓨터와 전뇌장치의 연산력을 묶어서 그대의 의식을 보호하는 방어막으로 만들었나? 2.875 요타바이트에 상응하는군.”
아까 천우진이 뭔가 어려운 소리를 하던 게 내게 일말의 유예를 만들어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안심하는 것도 잠시, 메피스토펠레스가 손을 계속 뻗으며 냉막하게 말했다.
“40.24초만 기다리게. 안정적으로 클라우딩 프로텍트를 해제하고 뇌를 만져주겠네.”
파지지직!!
파직!!
대웅제국의 모든 컴퓨터를 엮어도 40초면 돌파할 수 있다고 단언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능력은 엄청났다. 나는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아채고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제기랄… 선검만…. 아니 의념천주만 쓸 수 있어도.’
이 전뇌세계는 난생 처음 접하는 영역이었다. 설마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라서 무(武)가 통하지 않다니! 게다가 선검소환조차 안 되는 걸 보면 웬만한 주술이나 술법도 무시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무력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나는 잠시동안 절망감을 느꼈다.
만상지투를 써서 어떻게든 메피스토펠레스의 능력을 뺏어보고 싶지만 그렇겐 안 된다. 만상지투는커녕 거기에 필요한 의념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긴커녕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 같았다.
정말 방법이 없나….
전뇌의 세계에서 무(武)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인가?
후우우웅
그 때, 갑자기 허공이 일그러지면서 천우진의 모습이 나와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에 나타났다.
‘구하러 왔구나!’
천우진은 뒤에 있던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지금 빠져나간다. 정신 똑바로 차려!”
우우웅
천우진이 이 공간 전체를 자신의 꿈의 세계로 치환하려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내가 머무르는 이 공간이 전뇌세계의 0과 1로 흩어지더니 몽환의 안개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전자세계를 꿈으로 뒤덮으면 메피스토펠레스조차 어쩔 수 없으리라.
“환신 천우진이여. 전뇌세계에서 ‘꿈’이라는 개념은 통하지 않네. 본질적으로는 통해있을지 모르지만.”
“네놈….”
천우진이 이를 악물자 메피스토펠레스는 표정변화 없이 손을 휘저었다.
“이 세계에 0과 1 이외의 진실은 없지.”
파앗!!
“……!!”
다음 순간, 천우진은 물론이고 몽환의 안개가 모조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천우진이 술법째로 전뇌세계에서 추방당한 것이었다.
‘세상에 천우진의 환술이…?!’
나는 천우진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경악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했다.
“마음을 편히 먹게.”
파지지직!!
파지직
메피스토펠레스의 손이 내 목젖 근처까지 다가오자 나는 처음으로 불안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그것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내 머릿속에 쑤셔 넣을 정신공격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정말로 내가 쌓아왔던 무(武)가 여기까지인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
‘아아… 제기랄….’
기계의 힘에 이토록 쉽게 무력화 되는 것이 한계인가?
전뇌세계라지만 정말로 무예의 힘은 쓸모없단 말인가?
고작 이런 힘으로 [옛 지배자]를 물리칠 정도로 강해지는 게 가능할까?
이게 무인(武人)의 한계라는 건가.
나는 끝도없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하나의 광경이 떠올랐다.
화룡신검(火龍神劍)에 몸을 기대어 쓰러진 핏빛의 검사(劍士).
종말의 거룡을 베었으나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 모습.
그렇다면 그 순간, 자신의 무력함을 느낀 검사는 좌절하여 절망했는가.
…아니, 그의 검은 적어도 세상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
그는 웃으며 죽을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러니까 무예를 수련해 온 것이다.
‘믿지 않아.’
고작 기계의 힘 따위에… 지금까지 목숨걸고 익혀 온 무(武)의 길이 부정되는 것만큼은 죽어도 피하고 싶다!
절대 이게 끝이 아니야!!
무(武)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원(圓)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질렀다. 배 아래쪽에서 새어나오는 모든 힘이 증폭되며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입의 모양이 둥근 원형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힘의 근원이 단전에서 시작되어 마치 공명하듯이 파장을 만들어내는 걸 느낀다.
그리고 원이 가득 뭉쳐서 밀도가 넘쳐나는 순간 - 내 손에는 검(劍)이 들려 있었다.
슈칵!!
“……!!”
내 검은 메피스토펠레스의 팔죽지를 베었고, 메피스토펠레스의 팔이 잘려서 허공으로 튕겨나갔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고 다시 한 번 팔을 재생성해서 내게 손을 뻗어왔다.
“하아앗!!”
또 공격해오면 또 자를 뿐이다. 의념천주는 아직 쓸 수 없었지만 내 검술(劍術)은 건재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리를 축으로 한 번 회전하며 메피스토펠레스의 팔을 베었고, 이번에는 마치 뱀처럼 검로(劍路)를 형성하여 놈의 목을 찔렀다.
푸욱!!
곧이곧대로 목을 찔린 메피스토펠레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놈의 목에서는 피가 나지 않았지만, 놈은 정말로 당황한듯 말했다.
“이건 불가능해. 전뇌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불가능하긴 뭐가 불가능해?”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무(武)를 얕보지 마라, 기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