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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무공을 잃어버려서 절대지경이 아니라고?!
나는 뜻밖의 말에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무공경지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
“의념(意念)을 쓸 수 없다는 말인가?”
사공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정확히는 의념은 쓸 수 있으나, 절대지경의 기예는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의념천주를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기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 건 있을 수 없어. 넌 실제로도 주현성이 인공보패로 폭주하려는걸 의념으로 막아줬잖아.”
“사실입니다. 의념을 전개하다가도 집중도가 높아지면 혼돈의 힘이 치솟아오르면서 끊겨버려요.”
우웅
사공린이 일순간 의념으로 만든 무형의 구체를 손 위에 올려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 구체를 움직이려 하자, 갑자기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는 대신 황금의 기운이 떠올라 있었다.
우우우…
사악해보이지는 않지만 보기만 해도 혼돈의 밀도가 그득해 보인다. 내가 황금의 기운을 쳐다보자 사공린은 손을 움켜쥐었고, 기운은 그대로 소멸되었다.
“주현성 때는 흐름을 살짝 잡아주는 정도라서 의념을 써도 괜찮았지만 집중시간이 길어질수록 혼돈의 힘이 강력해집니다. 제가 통제할 수가 없어요.”
“…….”
“이런 제약이 붙으면 무공을 써서 싸우는 건 힘들기에 차라리 쓰지 않을 뿐입니다.”
저 말은 진실인 듯 하다.
내가 놀라고 있자 사공린이 말했다.
“천마의 힘을 각성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덕분에 법문을 되찾았으니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천마의 힘…? 그게 뭔데.”
“백웅. 지금 저는 인간이 아니라 천마(天魔)입니다. 느껴지지 않습니까?”
스으으
사공린의 눈이 황금안(黃金眼)으로 변화했다. 나는 그 눈빛을 보자 흠칫해서 곧장 선검을 소환했는데, 그 순간 선검에서 진동이 울리면서 내 몸을 울렸다. 그리고 잠시동안이지만 내 화안금정에 사공린의 모습이 다르게 비쳤다.
금빛의 마수(魔獸).
그러나 그 형태가 마치 그림자처럼 불규칙적이라서 어떤 모습이라고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사악한 느낌은 아니었으나 정대(正大)한 기운 또한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또한 끓어오르는 듯한 위압감 때문에 저절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내가 의념천주를 세우지 않았다면 즉시 이 자리에서 압도당해서 주저앉았으리라.
‘큭….’
팔부신중의 본체를 보았을 때도 이 정도의 존재감은 절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다. 저 힘이 적대적으로 변하는 걸 생각만 해도 아찔해질 정도였다.
“……!!”
“제 본질을 잠시 일깨운 것만으로도 이렇게 됩니다.”
사공린은 황금안을 거두었고, 이윽고 위압감이 즉시 풀렸다.
“무림역사상 천마라는 칭호를 재미삼아 자신의 별호에 붙인 자는 많았으나, 그 본연의 뜻에 저보다 가까이 간 존재는 없었겠죠. 저는 말 그대로 천상의 마(天魔)로 회귀해 버린 상태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인간이 아니라는 거냐?”
“그래요. 확실히 아닙니다.”
“하지만 넌 괴물이 아냐. 지금 나랑 멀쩡히 이야기하고 있잖아. 그리고 내 동료고.”
“팔부신중도 인간으로 위장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죠. 초월자가 인간을 흉내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사공린의 말을 제지했다. 저 말은 마치 자신이 팔부신중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공린은 근처의 탁자에 놓여있던 딸기우유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어쩌면 저는 인간 [사공린]의 예전 기억과 인격대로 연기만 하고 있을 뿐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으로써 활동하는 동안 인간의 감정과 실감은 아주 희박하게 느껴지고, 예전부터 전생자 백웅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강하게 느껴지니까요.”
“…….”
“종말에 대해서도 별다른 감정은 없어요. 그저… 내가 해야할 일이니까 종말을 대비할 뿐.”
“사공린….”
사공린은 살포시 웃었다.
“하지만 웃기게도, 그런 부조화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고 인격의 균열은 느껴지지 않아요. 그건 [인간 사공린]이라는 전제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그래서 지금의 저는 인간도 괴물도 아닌 것 같네요. 두 가지 본질 모두를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
“그게 아니었다면 500여년을 결코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무시할 수가 없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말에 빨려들어간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사공린이 설마 자기도 모르게 매혹능력이라도 쓴 건가?’
정신차리자!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린 후 사공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과한 생각이야. 너는 절대로 인간이니까 다른 생각할 필요 없어. 넌 인간이야!”
내가 강조하자 사공린이 어리둥절한 듯 대꾸했다.
“그런가요.”
나는 팔짱을 꼈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이지 뭐. 인간 별 거 있냐?”
“…….”
“그리고 인간이 아니게 된 것만으로 절대지경을 잃게 된다는 건 이상해. 그렇게 치면 팔부신중 아수라는 뭐야? 그 놈도 혼돈의 존재이지만 절대지경에 올라있고 그것도 적멸무극으로 한 번에 6개나 되는 절기를 쓸 수 있다고.”
“그건 왜인지 모르겠더군요. 본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수라는 실종되었습니다.”
“음.”
그랬다고 들었다. 제 3제국과의 전쟁에서 아수라가 난입해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어쨌든 동귀어진에 가깝게 놈을 격퇴했다고 들은 것이다. 이후 아수라는 세상에 모습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에 죽었거나 은거하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공린이 말했다.
“차라리 절대지경의 고수라면 한백령을 찾아가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폐관수련 중이라서 건드리기가 좀 그런데…. 일단 찾아가볼까.”
“네. 그리고 가시기 전에 천우진에게 들러 주십시오.”
“천우진?”
“전뇌자 때문에.”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우진에게로 갔다.
‘그러고보니 천우진이 수련이 끝나는대로 제도로 오라고 했었지.’
난 아직 수련이 끝났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끄고 있었는데 그 때부터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낙양에 온 김에 천우진에게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천우진이 있는 연구소로 가자 천우진은 서문혜가 갇혀있는 얼음을 유심히 관찰하며 기계화면에 뭔가를 필기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공식같은 걸 쓰고 있던 천우진이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왔나.”
“서문혜는 깨어날 가망이 있어?”
“…약간.”
달칵
천우진이 펜 뚜껑을 닫아서 가운 윗주머니에 쑤셔넣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들어 간헐적으로 명동(鳴動)이 일어나고 있다. 그녀 스스로가 봉인에서 깨어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종말이 다가오는 걸 느낀 건가?”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신력이 이 세상을 뒤덮은 것 때문에 거신의 피가 반응한 거겠지….”
천우진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아무튼 잘 왔다. 전뇌자를 보러 가자.”
저벅 저벅
나는 천우진과 함께 복도를 걷던 중 말했다.
“정말 전뇌자가 고장난 게 나랑 뭔 상관이냐? 난 컴퓨터나 인공지능같은 건 하나도 몰라.”
“상관이야 있지. 마지막에 쓴 게 너잖아.”
“아니, 그러니까 나한테 물어내라고 하지 말라고. 내 탓 아니야.”
“…네놈은 정말 한결같군. 그게 때로는 징그럽다…. 하아.”
천우진은 한숨을 쉬다가 말했다.
“잔말말고 전뇌자를 다시 착용해. 지금 떠오르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나는 천우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엥?! 또 하라고?”
“그래.”
“전자파 때문에 내가 죽거나 병신이 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내 환술로 없던 일로 해 주지. 그러니까 빨리 해, 병신아.”
휘익
퍽!
“억.”
천우진이 내 등짝을 때리려는 걸 멸혼보로 피하려 했지만 뭔가 술법을 썼는지 그대로 맞아버리고 말았다! 등짝이 화끈해서 천우진을 노려보자 놈이 태연하게 말했다.
“전뇌자를 가동시키지 못한 기간동안 발생한 대웅제국의 금전적 손해는 미화(美貨)로 5827억 7283만 달러. 그 돈 정말로 갚아주게? 사공린 대신 황제도 안 한다고 했다며?”
“…….”
“전뇌자는 종말 전에 다시 만들거나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죽어서 먹튀하지 말고 손해는 좀 메워줘라. 전생자가 아무리 갑이라지만.”
“젠장. 알았다고.”
나는 투덜거렸지만 일단 천우진이 내 목숨을 보증해줬기에 모험에 나서기로 했다. 말하는 걸 들어보면 다른 모든 방법을 써도 전뇌자를 복구시킬 수 없었기에 결국 내게 맡기려 한 모양이었다.
나는 전뇌자의 본체에 앉은 후 전뇌기(電雷機)를 썼다. 그리고 둥근 모자같은 전뇌기를 머리에 쓰자 천우진이 옆에 서 있다가 말했다.
“원래는 음성인식으로 전뇌자의 옥을 발동시키게 되어있는데 지금은 시스템이 다 죽어버려서 안 돼.”
“그럼 어떻게 접속하는데?”
천우진이 품 속에서 웬 손가락만한 메모리장치를 꺼냈다.
“그러니 직접연결로 간접적 양자컴퓨팅을 통해 전뇌자의 중심서버에 접속한다. 그 동안에 네 뇌(腦)를 이 QSD(Quantum state drive)와 동기화시켜서 대웅제국의 보안 클라우딩과 연결…. 유사시를 대비해서 프로텍트를 걸어놓을 생각이다.”
“뭔 말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천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쉽게 말해서 네놈의 뇌가 터지지 않게 QSD가 대신 데미지를 받아줄 수 있게 해둔다는 말이다. 수백억 대의 컴퓨터 연산능력이 네 뇌를 지켜줄 거다. 안되면 내가 현실을 조작하겠지만 솔직히 능력을 쓰는게 위험이 커서.”
“그렇구만. 그 QSD라는 건 좋은 거냐?”
“이것보다 좋은 전뇌장치는 현재 이 세상에 없어. 그 전뇌자 빼곤.”
“알았다. 시작해.”
뭔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천우진이 뭔가 해 놨겠지!
죽으면 지금까지 한 게 아까울 뿐이지 지금 죽어도 큰 미련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의자 위에 누워있자 천우진이 옆에 있던 기계장치에 QSD란 걸 꽂고 뭔가 패널을 조작하다가 버튼을 꾹 눌렀다.
위잉-
그러자 지금까지 땅에 떨어진 채 가만히 있던 청색의 옥이 허공으로 떠올랐고, 잠시 후 제갈부의 환영이 떠오르며 말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지난번에 전뇌자를 발동했을 때의 모습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져서 옆에 있던 천우진에게 외쳤다.
“야, 이거 봐! 고쳐졌다고! 전뇌자 고친 거 아니냐?”
“…….”
“내가 앉으면 기계든 뭐든 고쳐진다고, 암.”
천우진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고 인상을 쓰며 전방의 기계화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급히 내게 말했다.
“그거 벗어! 이건 함정….”
파직
그 순간 전기가 튀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내 전신의 감각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까만 세계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뭐지!?
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급히 의념을 발휘하려 했지만 의념이 구현화되지 않았다. 대신에 칠흑의 세계에 내가 반투명하게 변해서 둥둥 떠다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건 뭐야.]
어? 목소리가 아니라 이상한 소리가….
소리가 아니라 내 의지가 다른 글자로 변환되어서 허공에 시각화되고 있었다. 속칭 ‘만화’라고 하는 책에서 나오는 ‘말풍선’처럼 보였다. 내 말 자체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데 말풍선의 글자로 떠오르는 것이다.
뜻밖의 상황에 내가 긴장하고 있을 때 눈 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튜링의 에니그마 공원(Turing's Enigma park)으로 아바타(Avatar)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뭐?
슈우우욱!!
갑자기 내 몸이 어디론가 빨려들어갔다. 내 몸 전체가 0과 1으로 변해서 거대한 흐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상황이었고, 나는 거대한 흡인력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끌려들어갔다.
후웅!
잠시 후 나는 웬 공원에 앉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공원의 긴 의자에서 내 옆에는 웬 노인이 앉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노인은 허름한 갈색 코트를 입은 청안(靑眼)의 늙은 백인이었다. 나이가 아주 많은지 머리가 하얗게 새어 있었으며,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내가 노인을 돌아보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당황할 필요 없네. 자네가 백웅이라는 자인가?”
저건 서역의 영어라는 말 같은데 신기하게도 통역없이도 바로 그 뜻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
[아니, 이런 제기랄. 이 개같은 말풍선.]
이런…. 말을 하니까 또 말풍선의 글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허공에 떠오른 말풍선을 보고 황당해하자 노인이 껄껄 웃었다.
“전뇌자는 장난끼 많은 아이라서 자네에게 장난을 친 모양이군…. 허허.”
[당신은 누구냐니까?]
“말하는 게 불편해 보이는군. 일단 만화캐릭터 전용 양자코드를 해제해 주지.”
따악
“아.”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나는 말이 정상적으로 나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일단 정신을 차리며 노인에게 말했다.
“다시 묻겠소. 당신 누구요. 날 어떻게 할 셈이오?”
“흠….”
“날 죽일 셈이오?”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질문하자, 노인은 땅에 짚은 지팡이를 흔들거리며 대꾸했다.
“그렇지 않네. 다만 내가 그 아이에게 부탁해서 자네를 에니그마 공원에 데려와 달라고 했지. 튜링의 흔적이 남은 이 전뇌공간에서 꽤 오랫동안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
나는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인에게 말했다.
“전뇌자가 고장난 건 당신 때문이군.”
“귀여운 꾀였다고 생각해 주게. 현실세계의 자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에는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았으니…. 자네에게 해를 끼치려고 여기에 부른 건 아닐세.”
일단 대화를 해 봐도 될 것 같다. 나는 침착함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누구이며 나를 왜 불렀는지 설명하시오.”
“좋아. 정식으로 소개하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외알안경을 만지작거렸다.
“내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현 프리메이슨(freemason)의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이며 최초의 강인공지능일세. 그리고 이 곳은 내가 롯지(Lodge)로 삼는 가상세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