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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왜 반백반흑으로 변한 거지?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즉시 여동빈을 불렀다.
“오시오! 여동빈!”
여동빈은 바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나는 여동빈에게 바로 질문했다.
“수련하다보니 내 선검이 반백반흑으로 변했소. 왜 이런 것이오?”
[…….]
여동빈은 물끄러미 내 선검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니요?”
[전에도 말했듯 그건 본디 구천현녀의 술법을 내 방식으로 재창조한 것. 세상에서 그 수련법을 익히고 시행한건 오로지 나 혼자였다. 그 외의 존재가 익힌 건 연자가 처음이니 어떤 부작용이나 변화가 생겨도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아…. 그럼 지난번에 내 선검이 완전히 까맸을 때도 별 말 안 했던 이유는.”
[처음 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걸 섣불리 논할 수는 없다.]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여동빈이 내 선검이 시꺼먼 걸 보고도 별 말 안하길래 원래 수련과정에 있는 건가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여동빈은 남에게 선검술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고 자기자신만을 위해 만든 수련법이었기에 남이 익혔을 때 무슨 변화가 생기든 할 말이 없는 것 뿐이었다!
“윽, 하지만 그런 식이면 내가 익히다가 부작용때문에 죽으면 어떡하오.”
[죽으면 죽는 것이겠지. 무인(武人)이란 본디 수련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닌가. 또한 나는 그대에게 수련법을 전수해 준 기억도 없다.]
여동빈은 한없이 차가운 태도다. 나는 이대로면 아무런 조언도 못 받고 혼자서 헤매리라는 걸 수십수백 년의 수련경험에서 깨닫고 급히 외쳤다.
“젠장….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오? 따지고보면 어쨌든 나는 당신의 사승을 이은 존재요! 도움을 달란 말이오.”
여동빈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럼 무엇때문에 그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내게 말해 보라.]
“원이 둥글다는 걸 깨달았소.”
내 대답에 여동빈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원이 둥글다는 의미는?]
“시작도 끝도 없고, 시작한데서 끝나잖소.”
여동빈이 처음으로 눈에 이채를 띄었다.
[선검술의 첫 발을 내딛었군. 그것 말고는 더 깨달은 게 없는가?]
“어… 그러니까….”
나는 말을 더듬었다. 아까도 주현성을 불러서 내 깨달음을 말해줄려고 했는데, 막상 입밖으로 내고 보니까 그게 무슨 의미인지 확 와닿게 설명하기 힘들었다. 정작 나는 그게 뭔 뜻인지 알 것 같았지만 너무 직감적인 차원이라서 말로 풀 수가 없었다.
‘에이씨…. 살면서 공부도 엄청 한 거 같은데…. 머릿속에 있는 걸 뭐라 표현할 수가 없네. 답답해 죽겠네 제기랄!’
내가 어버버하고 있자 여동빈이 말했다.
[그대는 이미 깨달았으니 굳이 필설(筆說)으로 형용할 필요 없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란 것이다.]
“무슨 말이오?”
[선검으로 원을 그려보라.]
우웅
나는 여동빈이 시키는대로 선검으로 원을 그렸다. 허공에 선검의 잔흔(殘痕)이 남아 원의 형태를 고스란히 남겼고, 그 상태로 두세 개의 원을 겹치듯이 그렸다. 하루에 수만 번씩 몇 달이나 휘둘렀으니 원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그릴 자신이 있었다.
내가 그린 원을 보던 여동빈이 말했다.
[두뇌가 뛰어난 자는 그대가 말한 ‘원이 둥글다’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겠지. 그러나 지금의 그대처럼 의지를 담아서 원에 그려낼 순 없다. 아무리 뛰어난 식자라 해도 체화(體化)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얘기는 전에도 들은 것 같소.”
[지금 그대가 그린 원은 자신이 깨달은 만큼 정직하게 표현해 냈다. 이것이 바로 무(武)라고 할 수 있다.]
“무(武)….”
[무예란 입과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음…. 그렇소!”
[깨달음의 체화에 성공했다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깨달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해 베푸는 게 아니니까.]
나는 여동빈의 말에 약간 감명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서 여동빈의 말이 지극히 옳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무예란 아가리로 하는 게 아니다!
자기자신이 죽을 것 같아도 버텨내는 극한의 의지력과 근성, 그리고 몸 그자체가 정신에 말을 거는 그 순간을 쌓아 올리는 게 바로 무예! 그리고 말 없이 무예를 쌓아올리는 것이 무인이다. 비록 내가 재능은 없다지만 무예의 그 성질만큼은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곰곰히 곱씹다가 여동빈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정체된 느낌이오. 그 때 내게 선검의 날을 세우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상태로는 선검에 날이 세워지지 않소.”
[날을 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선검의 공격력을 올리기 위해서 아니오?”
[그럼 지금 한 번 날을 세워보라.]
우웅!
나는 선검에 의념을 둘러서 검강(劍罡)을 만들어 내었다. 하지만 이내 예전에 여동빈이 했던 말로 미뤄 짐작해 볼 때, 이런 건 선검의 날을 세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츠츠츠
나는 검강을 없애면서 예전에 여동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의 선검은 아직 날이 서 있지 않다. 진정한 선검은 그 예기(銳氣)만으로 존재하지 않는 걸 벨 수 있다.]
[백웅이여. 선검의 날을 세운다는 건 심검(心劍)을 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심검(心劍)…!!
무예역사상 모든 무림인의 꿈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 경지이며, 사실상 그 경지를 달성한 것은 검선 여동빈 한 명 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날고긴다는 무림역사상의 그 어떤 절대지경 고수도 심검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동영 역사상 최강의 검호인 미야모토 무사시가 심검과 유사한 능력을 쓸 수 있는 듯 했으나 그의 심검은 어딘가 불완전했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심검이란 이기어검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어마어마한 경지다.
‘나도 심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만들었던 심인(心刃)을 생각해 냈다. 그가 쓰는 건 완전한 심검은 아니었으나 의지와 동시에 공격이 도착했으므로 대적하는 입장에서는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절대지경에 이른 검마 정도나 구분할까, 실질적인 심검급의 무예라 할 수 있긴 했다.
마음의 칼날이여.
솟아나라!
쩌엉!!
내가 의념천주를 써서 의념을 선검에 집중시키자, 마음의 칼날이 구현화되어 선검과 합일되는 게 느껴졌다. 내 의지가 강력한만큼 심인의 절삭력도 강해지므로 지금의 선검은 천하제일의 명검이 된 것이리라.
내가 그 상태로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자 여동빈이 말했다.
[그건 틀렸다. 심인(心刃)은 나쁘지 않은 발상이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스스스
나는 절대지경의 심인을 지우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심인도 칼날이고 심검도 칼날이오. 그런데 어째서 방향이 다른 것이오?”
[심인은 하나의 칼날이다. 칼날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자신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초식의 굴레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날을 세워 심검을 만든다는 것은 그 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
나는 알쏭달쏭해져서 여동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문득 미야모토 무사시와 검마의 일전이 생각났다.
‘…그래. 분명 검마가 비슷한 말을 했었어.’
심검이나 다름없는 무사시의 절대지경 절기, 부처베기를 상대로 검마는 심인을 일으키지 않고 일반초식으로 무탈하게 막아냈었다. 그리고 무사시의 부처베기가 심검인 척 하지만 초식의 굴레에 갇혀있다고 혹평했던 적 있었던 것이다.
…….
그럼 초식의 굴레는 뭐지…?
무초식(無招式)이라 한다면 강호에서는 통상적으로 모든 초식의 숙련도가 극한에 이르러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상황과 때에 맞는 대응이 나옴을 의미했다. 또한 자유자재로 초식을 섞거나 붕파(崩破) 후 초식의 재창조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강호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이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이런 무초식의 의미로 본다면…. 절대지경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무초식을 뛰어넘어도 한참 뛰어넘은 존재였다. 동영무술의 모든 오의를 보자마자 터득하고 스승없이 홀로 강해진 존재에게 무초식의 경지를 들이대봐야 우스운 일이 아닌가.
게다가 실전검술의 대종사이니 상황에 따라 제 맘대로 동작을 무한대로 바꾸기 일쑤였으니 무사시는 완전히 초식을 초월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도 무사시를 도저히 정공법으로는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천재라서 그때그때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마는 그런 무사시가 쓰는 마음의 칼날조차도 초식의 굴레에 갇혀있다고 평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초식의 굴레라는 건 강호에서 말하는 무초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라는 말인가?
내가 고민하고 있자 여동빈이 말했다.
[진정한 심검은 활인(活人)을 할 수 있다. 이게 지금의 그대에게 줄 수 있는 단서다.]
“활인?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오?”
[그렇다.]
“그, 그건 좀….”
나는 난색을 표했다.
검으로 사람을 살린다는 이념은 보통 정파에서 많이들 내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의협을 행하는 명분으로 내세운다는 것일 뿐, 결국 모든 검술은 상대를 물리치고 살육을 저지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못하는 검술은 약한 무예였으며 도태될 뿐이었다. 순수한 호신검술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동빈이 심검이 활인을 행한다고 말하니 낭패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뇌신류의 가르침에만 매여있는 걸지도 몰라. 좀 더 생각을 넓혀봐야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일반적인 강호의 수준을 뛰어넘어 절대지경에 이르렀으니 통념에만 얽매이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는가? 나는 여동빈이 말한 심검활인(心劍活人)의 경지를 말 그대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검으로 사람을 어떻게 살리지?
검으로 활력을 막 뿜어내면 되나?
‘끄응…. 너무 단순한데.’
살아오면서 검으로 사람 쳐죽이는 일밖에 하지 않았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생각에 잠기자 여동빈이 말했다.
[심검과 심인의 차이…. 잘 생각해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선검의 날을 세우는 단서가 되리라.]
“알았소.”
[그리고 원 그리기는 하루도 빼먹지 말라.]
파앗
여동빈은 그 말을 끝내고 사라졌다.
‘좋아, 수련하자.’
나는 좋은 가르침을 들은 것 같았기에 일단 그 자리에 앉아서 여동빈이 한 말을 스스로 생각하며 명상해 보았다. 그러기를 약 여섯 시진 - 나는 계속 명상을 하다가 결국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검으로 어떻게 사람을 살리지?
심검이 애초에 무엇인가?
나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주현성과 이설표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상담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나는 그들에게 여동빈과 했던 대화를 말해주고 지금 내가 선검술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두 알려주었다. 주현성과 이설표는 그 자리에 정좌하고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너희는 심검활인(心劍活人)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냐.”
“허허… 굉장히…. 아니…. 이 이설표의 생전에 들어본 그 어떤 무예이론보다 수준이 높은 이야기라 생각하오…. 과연 절대지경에 이른 존재들….”
이설표가 침음성을 흘리다가 말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뇌신류에서도 가끔 무예로 사람을 살린다고 주장할 때는 있었소…. 허나 그 대부분은 악당을 무자비하게 때려 죽여서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것이므로…. 그건 사회적 의미일 뿐 무예 자체가 무언가를 죽인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소.”
“뭐, 그렇겠지.”
나는 이설표의 관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뇌신류였으며 약육강식의 무림에 몸담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갖고있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초대 뇌신류 종사인 초무린이 천 명의 마두 모가지를 베고다닌 것도 그 사상이 현실에 드러난 것 뿐이었다.
주현성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폐하. 저희는 절대지경의 무론을 논하기엔 너무 수준이 낮사옵니다. 심검활인을 가지고 식자(識者)들이 사전적 지식을 논하는 것도 무의미하고요.”
“그건 그렇지.”
“차라리 시간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절대지경의 고수에게 토론을 청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초무린을 부르란 말인가?”
“혹은 사공린 폐하와 말씀을 나눠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
엥?
나는 뜬금없이 나온 주현성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사공린은 갑자기 왜?”
나는 천계에 있을 장삼봉 진인이라도 어떻게 불러올 방법이 없을지 생각하는 중이었기에 주현성의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주현성이 말했다.
“사공린 폐하께서도 절대지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아!”
“황제가 되신 후에는 무림에서 활동하시지 않으나 그 전까지는 무림을 주름잡는 절대고수 중 한 분이셨다 합니다.”
“왜 과거형이야?”
“수백 년 전의 일이라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거라…. 저 같은 현대인은 중세시대의 일을 잘 모릅니다.”
주현성이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희 요원들 앞에서도 무공을 선보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무공시연 자체를 아예 하지 않으시니. 평상시는 물론이고 중대한 작전을 펼칠 때도 무공을 쓴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흠.”
“음…. 그렇다 해도 그 분이 절대지경에 올라있는 건 틀림없을 듯합니다.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렇겠군.
나는 사공린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냥 천마의 힘만 각성한 줄 알았는데, 사실 사공린은 원래부터 정파삼대기인 태산노옹이자 황궁의 흑막이었던 제갈유룡이 눈독들일 정도로 엄청난 무재(武才)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내가 사라진 후에도 무공수련을 했을 테니 어찌 보면 절대지경에 도달한 게 당연했으리라.
‘근데 그런 것치고는 주현성 말대로 의념절기나 무공을 아예 안 쓰길래 간과했는데…. 왜지?’
천마의 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무공을 안 쓴 건가?
“알았어. 갔다오지.”
뭔가 숨겨져 있는 느낌에 나는 곧장 사공린에게로 향했다.
파앗!
나는 사공린을 만나자마자 내가 처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황제의 옷이 아니라 비교적 편한 활동복을 입고 있던 사공린은 곰곰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주현성이 제게 가 보라고 했단 말인가요?”
“그래. 절대지경과 의논해보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초무린 님과는….”
“어차피 뇌신류라서 심검활인 이야기를 해도 반응이 뻔하지 않을까 했지.”
게다가 여동빈의 무형검로에 당해서 천계무련에서 굴욕을 겪었으니 이 이야기를 하면 결코 반응이 좋지 않으리라. 괜히 초무린이 깽판치는 걸 막는 것도 귀찮았기에, 그와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이 없는 심산유곡에서 하게 되리라.
그러자 사공린이 말했다.
“백웅.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뭘? 절대지경이었다는 걸?”
“아니요.”
사공린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진 사공린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는 천마(天魔)로 각성하면서 무공을 잃어버렸습니다. 지금의 저는 절대지경이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