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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내가 새끼줄을 무지개뱀에게 주자, 무지개뱀의 화신인 동녀는 그 새끼줄을 갑자기 양손에 끼웠다. 뭘 하려나 했는데 이윽고 양 손을 이용해서 모양을 만드는 게 보였다.
‘실뜨기?’
새끼줄이 본디 굵어서 실뜨기를 하기는 힘들었지만 저 새끼줄은 워낙에 얇고 허름한지라 가능해 보였다. 잠시동안 실뜨기를 하며 갖고 놀던 무지개뱀이 웃었다.
[재밌지 않느냐?]
“저는 실뜨기를 잘 몰라서….”
[이렇게 하면.]
무지개뱀이 좍 하고 자신의 양 손 사이를 넓게 벌렸다. 그러자 실 사이로 사각형이 생겨났다.
[소눈깔같지 않느냐.]
“…….”
어, 어쩌라고….
나는 내심 황당해했지만 이어진 일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스아아악!!
“……!!”
실뜨기의 빈 공간에서 기이한 빛이 일어나더니, 그 빛이 땅에 내려쬐자 마치 콩이 자라나듯 빠른 속도로 뭔가가 생장했다. 그리고 생장이 멈추지 않으며 계속 커지더니, 종래에는 인간의 크기가 되었다.
후두둑
완전히 인간의 형체를 갖춘 그것은 잠시 후 전신의 피부에서 흙덩어리가 껍질처럼 떨어지더니 인간이 된 것이다.
“이건 대체….”
[‘그건’ 아직 형태만 만들었다. 숨을 쉬지 않으리라.]
“숨을 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원하는 생명체가 되지.]
“…그 새끼줄은 인간을 창조하는 능력이 있는 겁니까!”
내가 놀라서 외치자 무지개뱀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왜 꼭 인간이어야 하지? 이건 모든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새끼줄이니까.]
모든 생명!
그게 의미하는 바는 굉장했다.
‘지금껏 많은 보패와 신물을 봐 왔지만…. 생명 그 자체를 만들어내는 건 없었어!’
수정석비와 현자의 돌을 사용하면 비슷한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최고수준의 술법사와 고도의 술식이 필요했다. 그나마도 실패확률이 있는데다가 인간형 이외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는데, 저 새끼줄은 간단하게 모든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니!
나는 무지개뱀에게 말했다.
“그 새끼줄은 본디 창세신 반고의 소유였던 겁니까? 그 새끼줄을 인간인 제가 써도 그렇게 생명을 창조할 수 있습니까?”
[너와 나의 거래는 이미 끝나지 않았더냐? 감히 그 질문을 청하는 게 불쾌하구나.]
“…….”
[하지만 내 화신이 너를 마음에 들어했으니 특별히 알려 주마. 그런 일은 거의 없는 일이니….]
무지개뱀의 화신은 새끼줄을 말아서 한 손에 쥐며 말을 이었다.
[이걸 만든 건 반고가 아니다. 여와(女媧)다.]
“…네?”
뜻밖에 여와가 튀어나오자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무지개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필멸자인 네가 이걸 써도 생명을 만들지는 못한다. 이걸로 설명이 되었느냐?]
“왜 만들지 못합니까?”
[너는 생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생명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아니오.”
[혼돈의 신들은 생명을 마치 장난감처럼 주무를 수 있으며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이걸 써서 얼마든지 새로운 종족을 창생하는 게 가능하지. 그러나 너희 필멸자들은 생명에 대해 형이하학의 겉면밖에 이해할 수 없으니, 이걸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지.]
그렇게 말한 무지개뱀이 말을 이었다.
[너는 거래를 잘 한 것이다. 돼지 목의 진주를 잘 써먹었구나.]
“…….”
나는 머리를 굴렸다. 뜻밖의 정보를 얻은 건 좋은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금 정보를 주는 한이 있어도 더 알아내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한번 더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저는 금오도의 [알]을 공양하고 그 대가로 정향의 인과율과 그 새끼줄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대가가 과하다는 이유로 새끼줄을 반고가 내어준 것 같은데…. 반고가 여와의 새끼줄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알이라고?]
“네. 금오도주가 몰래 갖고있던 알이었습니다만….”
무지개뱀이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어쩌면 이건 여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무슨 말씀입니까?”
[우주에서 단 하나, 여와 말고도 똑같은 걸 지닐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 존재가 지니고 있던 걸 반고가 맡아두고 있었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린 무지개뱀이 말했다.
[이만 나가보아라. 네놈은 너무 호기심이 많으니 귀찮구나.]
“잠깐….”
파앗!!
정신을 차리자,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급히 죽음의 정령을 근처에서 찾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젠장! 쫓겨난 건가! 그래도 다시 한 번….’
나는 기억을 되살려서 파만(言靈)을 외우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암 루추타 흘타… 라 문다 옷시라….”
죽음의 정령을 부르는 의식과 춤!
이걸 써서 다시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봐야지!
그러나 내가 제례의식을 치러도 죽음의 정령은 나오지 않았다. 계속 파만과 춤을 반복하고 있자, 별안간 죽음의 정령이 내 앞에 훅 하고 모습을 드러내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적당히 해라…. 넌 안 만나줄 것이다.]
쉬익
그 말이 끝나자마자 죽음의 정령이 사라졌다.
“…….”
나는 더 이상 해도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생각했다.
‘흐음. 여와의 것이지만 아닐 수도 있다라…. 그렇다면 다음 생부터도 새끼줄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한 거군.’
어쨌거나 천암비서도 되찾았고 나름대로 소득을 얻었다.
“돌아갈까.”
나는 기분좋게 비등을 써서 궤도 엘리베이터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되돌아와서 지휘실에서 약 다섯 시간 정도 대기하고 있자, 모든 곳에 파견되었던 무력전술요원들이 술법부대와 함께 되돌아왔다. 사마령이 지휘실에서 전자장비를 조종하면서 무언가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다가 외쳤다.
“폐하! 지각변동 제어율이 97.9퍼센트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화산활동 염려는 없나요?”
“세부적 여파는 있겠지만 큰 자연재해는 완전히 막았습니다. 더 이상 보패를 소모하는 건 낭비일 듯합니다.”
보고를 듣던 사공린이 서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좋아요. 작전 종료입니다.”
우웅!
사공린이 눈을 뜨자마자 지구 전체에 펼쳐져 있던 황금색 막이 씻은 듯 사라졌고, 시공간의 정지가 사라진 것 같았다. 사공린은 자리에서 일어선 후 내게 말했다.
“백웅, 고마워요. 당신 덕에 이 세상에서 렙틸리언을 몰아내고 평화를 지킬 수 있었어요.”
“힘을 많이 쓴 것 같은데 넌 괜찮나?”
“당분간은 쉬어야 할 것 같군요.”
이어진 사공린의 말에 나는 약간 당황했다.
“이렇게 된 김에 저 대신에 다시 대웅제국의 황제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응…?!”
뜻밖의 말에 나는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렇게 귀찮은 걸 또 하고 싶진 않군.”
정말 귀찮다. 황제가 되어서 좋았던 건 맛있는 걸 맘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뿐이었던 것 같다. 요즘 시대라고 딱히 다르진 않으리라.
사공린은 살포시 웃었다.
“후후후…. 당신은 500년 전 그대로같군요.”
“너도 귀찮아서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잖아.”
“들켰군요.”
기분이 좋은 듯 웃던 사공린이 말했다.
“그럼 이제 내려가죠. 낙양으로….”
우리는 다같이 낙양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작전이 잘 먹혀들었는지, 세계 각지에서 화산이 분화했다는 뉴스는 떴지만 큰 피해는 없다는 걸로 이야기를 맺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공린에게 천암비서를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했고, 사공린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다가 말했다.
“진소청이 천암비서를 가져갔었고 그런 2가지의 단서를 남겼다면…. 그가 또 하나의 단서를 남긴 거나 마찬가지군요.”
“또 하나의 단서? 그게 뭐지?”
사공린은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그녀가 절세미녀라는 게 실감이 났지만, 그래도 미호를 볼 때처럼 두근거리진 않았다.
“황제를 죽일 수 있는 건 치우 뿐이라고 했죠.”
“그랬지.”
“그럼 그 전제는 황제를 죽인다는 것. 황제를 왜 죽여야 하는 걸까요?”
“음….”
그것까진 생각해보지 못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사공린이 침착하게 말했다.
“살아있으니까 죽여야 되는 거겠죠.”
“뭐?!”
“흉신의 마지막 저주로 삼황오제가 모두 멸했다고 추측되지만 황제는 살아있다. 그런 전제가 아니라면 진소청이 굳이 그 단서를 보내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죽은 자를 또 죽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 그렇게 되나?”
“그럴 거예요. 또한 그건…. 황제를 죽여야만 당신의 전생여정이 축약될 거라는 뜻이기도 할거예요.”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다. 사공린에게 상담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백웅. 몇 달만 기다려 줘요. 곧 은하부족연맹에게서 신기술이 오게 되면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요.”
“알았어. 그 때까지 선검술 수련을 하고 있지.”
“아, 그 전에 사마령에게 가 주세요.”
나는 수련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마령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사마령은 이사장실 뒤편의 비밀공간을 열더니 내게 웬 귀걸이가 들어있는 백금상자를 내밀었다.
“폐하를 위해 대웅제국에서 특별제작한 인공보패입니다.”
“호오.”
지난번에 지나가듯 말했는데 어느 새 만들어두었던 모양이다. 내가 귀걸이를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자 그녀가 말했다.
“그 인공보패의 이름은 황룡마신(黃龍魔神). 여태껏 제작해 왔던 그 어떤 인공보패보다도 강력합니다. 이름을 외치면 자동장착될테니 부디 요긴하게 써 주시길….”
“근데 절대지경 이상의 전투에서 이건 사실 신외지물이야. 서로 공격력이 막강해서 갑주가 큰 도움은 안될 것 같은데.”
“황룡마신의 능력은 방어력만 있지 않습니다. 여기 설명서도 있으니 나중에 같이 보시길.”
“알았어.”
파앗
나는 수련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여동빈이 말했던 대로 원을 그리면서 수양을 거듭했다.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선검술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여동빈처럼 선검술을 익혀서 더욱 나만의 힘을 키워야 해…. 그래야 신역에도 도달하고 신을 없앨 힘을 제대로 쓸 수 있어!’
부웅 부웅
매일같이 검을 휘두르며 원을 그렸다. 나는 원을 그리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둥글다는 특징이 왜 인과율과 관련이 있는 걸까?’
둥글다는 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여동빈은 남한테 함부로 의견을 구하지 않고 나 혼자서 수양할 것을 권했다. 똑똑한 자에게 물어보면 쉽게 의미를 알려주겠지만, 그런 피상적인 이해로는 결코 선검술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동빈의 말을 받아들여서 내 머리로 계속 생각해 보기로 했다.
‘둥근 건 둥근거지…. 음….’
근데 하면 할수록 어쩌라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내가 검으로 원을 그리면 대체 인과율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일까? 나는 가끔 원을 그리기를 멈추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쉽사리 깨달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인과율이 무엇인지 한 번 정의해 보기로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거…겠지? 이유가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 건데….’
뾰족한 생각이 안 나서 나는 멍하니 칼을 휘둘렀다.
횟수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어서 하루에 최소한 2만 번은 원을 그리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파지지직!!
나는 무아지경에서 수련하던 중 천랑뇌신결의 성취가 육 성에 이르러서 큼지막한 뇌광구(雷光球)가 내 몸속을 돌아다니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가 되자 뇌혼의 양이 상당히 늘어나서, 이제 구궁파천뢰의 사록까지는 어떻게든 안정적으로 펼쳐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취를 본 이설표가 감동한 듯 말했다.
“오오… 과연…. 엄청난 재능이오.”
“…이설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시오.”
“광구가 더 커지면 몸 안에서 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때부터는 어떻게 수련하는 거지?”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여 뭐라 말할 수는 없소만…. 광구를 더 만들어서 돌려야하지 않을까 싶소.”
“더 만들어?”
“전신에 흐름을 만들려면 그 수밖에는….”
굉장한 수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미 기존의 광구가 커진 상태에서 새로운 뇌정을 만들어서 키워나가려면 원래보다 몇 배나 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앞으로도 수련할 게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침음성을 흘렸다.
그리고 계속 시간이 흘러서 두 달이 더 흘렀다.
나는 하루에 수만 번씩 원만 하염없이 그리다가 문득 깨달을 수가 있었다.
‘어…. 그러고 보니까 원은 시작과 끝이…. 있나?’
스윽
나는 하나의 원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똑바로 원을 그리자 시작한 곳에서 출발하여 시작한 곳에서 끝난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
아하, 그렇구나!
‘원이 둥글면 시작도 끝도 없는 거야!!’
그렇다면 인과율에서 이야기하는 인(因)과 과(果)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된다는 말이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게 큰 깨달음을 준 것 같았기에 나는 일순간 환희에 넘쳐서 소리를 질렀다.
“원은…… 둥글다!!!!”
타다닷
내 사자후를 근처에서 듣고 달려온 주현성이 당황한 듯 말했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내 깨달음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주현성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원이 둥글다!! 둥글다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원은 둥글죠!”
“그, 그러니까 둥글어…. 음…. 원이 둥글다고!!”
어깨를 흔들리던 주현성이 크게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젠장, 이걸 뭐라 해야하지?! 뭔가 깨달은 거 같은데 표현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나는 급히 선검을 들어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자 봐라!! 원은 시작한데서 끝난다구!!”
“그… 그렇군요….”
“대단하지 않냐!”
“…….”
주현성의 넋나간 표정을 보자, 나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아차렸다.
‘내가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구나….’
이게 대체 뭐야.
무(武)의 길은 왜 이리도 멀단 말인가!
나는 황당함과 허탈함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젠장. 뭔가 깨달은 건 좋은데 이걸로 어떻게 선검에 날을 세우지?
이 깨달음으로 뭘 해야하지?
내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주현성이 내게 말을 걸었다.
“폐하. 선검의 색깔이 이상해진 것 같습니다.”
“응?”
나는 주현성의 말에 내 선검을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새까맸던 내 선검이 반백반흑(半白半黑)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