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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죽음의 정령은 원래 정해진 주술의 춤을 추어야 나오게끔 되어 있었기에 나는 당황했다. 어쨌거나 정령이며 신적인 존재였기에 섣불리 싸우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이라 불리는 존재는 대개 중립적이며 강력했기 때문이다.
‘일단 얘기부터 해 보자.’
나는 죽음의 정령에게 말했다.
“나는 백웅이라 합니다. 여기에 온 이유는 전 세계의 화산이 폭발하려 해서 보패로 용맥을 잠재워 그 재앙을 막으려 왔습니다.”
죽음의 정령의 잿빛 입가가 씰룩였다.
[…그런 건 모르겠다.]
“네?”
[기껏 지표가 잠시 혼란되는 일에 불과한 것…. 대지의 본질에는 큰 영향이 없는 사소한 일. 내가 묻는 것은 누가 시간을 멈췄냐는 것이다.]
생각보다 죽음의 정령은 렙틸리언이 일으킨 재앙에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보다는 사공린이 지구의 시공간을 멈춘 일이 더 신경쓰이는 듯 했다.
‘음….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령의 반응이 호의적일지 아닐지를 떠나서 정향의 인과율이 과연 눈앞의 정령에게 적용되느냐의 문제 때문이었다. 만일 적용이 된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감에 맡기면 되지만, 만일 적용이 안 된다면 큰 액운이 닥칠수도 있다.
‘그래! 그렇다면 일단 어떤 성향인지 알아보자.’
나는 화요를 각성시켰을 때의 일을 생각하며 죽음의 정령에게 말했다.
“죽음의 정령이여! 물어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 갑자기….]
“당신이 보기에 제가 못 생겼습니까?”
[…….]
“…….”
죽음의 정령은 잿빛 얼굴에 영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내 말에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인간의 미적 감각은 모르겠군…. 하지만 영 나쁜 느낌은 아닌 듯 한데… 잘 모르겠구나…. 인간은 거기서 거기라.]
“그렇군요.”
칠요의 정령과는 다르다. 왜인지 모르지만 저쪽에선 내 외모에 별 관심이 없고 구분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죽음의 정령은 칠요의 정령보다 훨씬 인격화(人格化)에서 거리가 멀며 개념적인 정령체에 가까운 존재이리라. 나는 죽음의 정령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질서]에 속합니까 [혼돈]에 속합니까?”
[아까부터 질문은 내가 먼저 했는데….]
“이것만 대답해주시면 궁금한 것을 바로 말씀드리지요.”
[네가 말하는 구분이 우주의 거대한 균형에 접하는 두 개의 관점이라면…. 나는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아니하리라.]
“속하지 않는다고요?”
[나의 본체는 오래된 고신(古神). 오래된 존재인지라 질서든 혼돈이든 그 몸에 품을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어느 쪽이든 될 수 있다. 그 어떤 다툼에도 휘말리길 원하지 않아 은거하고 있다.]
“그럼 [옛 지배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너희가 뭉뚱그려 만들어낸 구분은 우주의 위대한 존재들을 정의하기엔 너무 얄팍하니.]
아무래도 [무지개뱀]이란 존재는 내 생각보다 특수한 존재같았다.
‘음…. [옛 지배자]급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극악(極惡)에는 물들지 않고 그냥 조용히 사는 존재에 가깝겠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죽음의 정령에게 말했다.
“사실은 제 동료인 사공린이 한 일입니다.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상대가 중도적 성향을 지닌 온건한 [옛 지배자]라고 친다면, 어설프게 거짓말을 하는 건 도리어 화가 될 듯 했다. 정향의 인과율이 좋은 영향을 줄 수는 없지만 딱히 나쁜 영향도 없는 존재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상황을 설명하자 죽음의 정령이 말했다.
[대지의 흐름을 잡는 건 뭐라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 능력은 빨리 거두는 게 좋을 것이다.]
“신에게 뭔가 피해라도 준 겁니까?”
[…오만한 존재의 힘이다. 내 본체는 그 존재를 아주 싫어한다. 온갖 흉계를 써서 다른 지배자들의 위에 서려는 그 존재.]
마치 분노하듯 중얼거리던 죽음의 정령이 잿빛 눈을 번득였다.
[경고하지…. 이 힘을 치우지 않으면 너희 인간 모두에게 죽음의 저주를 내릴 것이다.]
살벌한 협박이었지만 나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화산폭발을 못 막으면 인간이 다 죽는 건 똑같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윤회전생도 없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고통이 한 번 끝나는 것 뿐인데.”
[…….]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오래 안 걸릴겁니다.”
그러자 죽음의 정령이 잿빛 눈을 희번득거리며 이채를 띄었다.
[자세히 보니 넌 신기한 놈이구나. 죽음의 본질을 이해한 그 눈빛…. 하지만 환생자(還生者)의 냄새는 나지 않아.]
“…….”
[그 눈이 마음에 드는군.]
“그리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나의 신을 만나보겠느냐? 너라면 특별히 환생할 권한을 줄 것이다.]
응?
뜻밖의 제안이었다.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무지개뱀을 만나게 될 경우 생기는 일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그래! 무지개뱀을 만나면 2가지 중 하나를 택할 수 있었어. 하나는 표식을 지워 환생할 수 있는 권한이고, 다른 하나는 내 [업적]을 바쳐서 원하는 소원을 빌 수 있는 것!’
예전에도 한 번 외우주에서 무지개뱀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환생을 포기하고 신투지존의 행방을 알아내려한 적이 있었다. 그 소원은 정확히 적중했기에 무지개뱀 덕분에 수백 년씩 신투지존을 찾아다닐 수고를 덜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보게 해 주십시오.”
파앗!
나는 천지사방에 산천초목이 가득한 생명력 넘치는 거대한 숲으로 소환되었다. 그리고 소환되자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질서의 인과율을 가진 자로구나. 그대는 어찌 창조신과 인과를 맺게 되었는가?]
그래! 바로 그 때도 정향의 인과율을 가지고 외우주로 갔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그 때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리라. 나는 예상했던 일이기에 무지개뱀에게 말했다.
“저는 제물을 바쳐서 정향의 인과율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지개뱀이시여.”
여기까지는 예전과 비슷한 대답.
그러나 이어진 대답은 외우주 때와는 달랐다.
[맹약의 증거가 그대의 품에 보이는구나.]
스스스
다음 순간, 내 양옆에는 수요와 화요가 인간의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 용린갑옷을 입은 쌍둥이 남매처럼 생긴 그들 둘은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고, 잠시 후 비단구렁이가 스르륵 기어나오더니 순백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한 동녀가 되었다.
화신을 내보낸 무지개뱀이 왜인지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 오랜만이구나. 너희는 나를 기억하느냐?]
무지개뱀의 말에 수요와 화요는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수요의 정령이 말했다.
[위대한 분이시여. 귀하께서도 칠요가 제작되며 지배자끼리의 부전협정이 맺어질 때 공증인으로 참여하신 분임을 기억하고 있나이다. 이 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 중 하나시여.]
두 명은 완전히 예를 갖추고 있었다. 상대를 절대적 존재로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너희가 삼황오제의 손에 벼려져 신기(神器)로 태어날 때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너희가 두 번 다시 정령으로 되돌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거늘, 신력(神力)에 의해 각성하게 될 줄이야.]
어쩐지 무지개뱀과 칠요의 정령들은 아는 사이인 듯 했다. 내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 무지개뱀이 내게 말했다.
[본디 이들을 각성시킬 수 있는 신력의 소유자라면 고명한 지배자의 화신이나 사도가 분명할 터. 그러나 그대는 필멸자구나.]
“…어쩌다보니 신의 힘을 축적할 수 있게 되었는지라.”
순백의 머리카락을 한 어린 소녀, 무지개뱀이 웃는 듯 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대가 창조신과 인과를 맺은 것 또한 흥미가 생기는군. 그대가 갖고 있는 창조신의 유물을 내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창조신의 유물?
나는 그게 뭔가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아마…. 이거겠지.’
달칵
나는 목갑을 열어서 낡은 새끼줄을 꺼냈다. 분명히 반고에게 공양의식을 치를 때 정향의 인과율과 함께 받은 건 이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건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틈 날 때마다 화안금정이나 전국옥새의 전시안을 써서 수십 번이나 들여다 보았음에도 여기서 특별한 능력은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낡은 새끼줄을 꺼내자 무지개뱀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더니 어린 소녀의 만면에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걸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주… 훌륭하구나. 매우 길(吉)한 일이다.]
응?
나는 어리둥절해서 무지개뱀에게 말했다.
“이 새끼줄이 뭔지 아십니까? 전 사실 받고도 이게 뭔지 잘 몰라서 못 쓰고 있습니다만….”
[잘 모르면 내게 주지 않겠느냐? 내가 요긴하게 쓰겠다.]
“…아, 아뇨. 그냥 갖고 있으려 합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설마 상대가 대놓고 이걸 욕심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무지개뱀은 생각보다 더 격이 높은 존재같았는데 저런 신성이 고작해야 이런 낡은 새끼줄을 원할 줄이야? 욕심은 둘째치고 저 욕심 때문에 내가 화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그러자 무지개뱀이 말했다.
[너는 그게 어디의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느냐? 돼지 목에 진주는 필요없다.]
“못 써먹는다 하더라도 이건 제 소유물입니다. 함부로 남에게 넘길 순 없습니다.”
[어설프게 눈치가 좋아서야…. 내가 분노한다면 네가 이 자리에서 영겁토록 죽음을 반복할 수 있음을 모르는가? 신의 제안을 섣불리 거절하면 횡액을 당하는 법이다.]
헉!
무지개뱀의 은근한 협박에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상대가 [옛 지배자]급 존재이고 이 곳이 저 존재의 차원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흐음…. 그걸 내게 준다면 뭐든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그럼 천암비서의 행방을 알려주시고 그걸 제게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 주면 이 새끼줄을 드리겠습니다.”
[좋다. 찾아보지.]
무지개뱀이 눈을 감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와서 천암비서를 물리적으로 찾기는 불가능하고, 전국옥새로 찾아도 나오지 않지만…. [옛 지배자]의 힘이라면 어쩌면.’
어쩌다보니 천암비서와 떨어진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사실은 늘 몸에 지니고 있어야 했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기에 이런 제안이라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업적]을 바치고 부탁해볼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천암비서를 찾기만 하면 상관없다.
그러자 잠시 후 무지개뱀이 말했다.
[네 생각에 떠올랐던 천암비서라는 것…. 그건 우주의 근원부터 뒤져본 결과, 지금 진소청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다.]
그 말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진소청요? 그가 왜….”
진소청이 천암비서를 갖고 있다고?!
너무 뜻밖의 얘기라서 나는 잠시동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니 왜 진소청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행방!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무지개뱀이 말을 이었다.
[뭐하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그 존재가 갖고 있다.]
“정말입니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새끼줄을 부여잡았다.
“그, 그렇다면 진소청한테서 천암비서를 찾아서 저한테 지금 바로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이 새끼줄 당장 드리겠습니다.”
[좋다….]
무지개뱀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우주의 근원에서 온 자…. 무한한 순환의 뱀…. 내가 허공록에 걸고 명하노니, 천암비서는 진소청의 손에서 백웅의 손으로 되돌아가거라.]
파아아앗!!
밝은 빛이 일어나더니 천암비서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드디어!’
나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 오랜만에 보는 천암비서를 집어서 내 품 안에 넣으려 했다. 온갖 세상의 흉흉함을 다 뿜어내지만, 어쩌면 내 전생능력의 근원일지도 몰라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천암비서-그게 미래로 온 후 드디어 내 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천암비서를 집는 순간이었다.
파아아앗!!
갑자기 다시금 빛이 일어나더니 나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풍경이 마치 물감이 번져나가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일그러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왜곡된 세계를 통해서 무언가가 흘러오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손이었다. 인식도 할 수 없는 순간에 나타난 인간의 손이 갑자기 허공에 무어라고 글자를 썼다. 아주 짧은 시간, 나는 그 글자가 허공에 붉은 색으로 칠해지면서 새겨지는 걸 유심히 쳐다보았다.
천암비서는 스스로 우주의 인과율을 조종해서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다
치우(蚩尤)만이 황제를 죽일 수 있다
파스스스…
손은 한동안 글자를 쓰다가 그 2개의 문장을 완성하자마자 이윽고 가루가 되어서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리고 모든 것이 일그러진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내게 무지개뱀이 말을 걸어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망량선사의 술법이군. 환몽(幻夢)때문에 깜박 졸았다.]
“…….”
[방금 누가 이 공간에 침입했느냐?]
“아,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새끼줄을 드리죠.”
나는 급히 새끼줄을 무지개뱀에게 건네며 생각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치우…!!’
왠지 방금 전의 두 문장은 진소청이 내게 준 단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