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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여동빈의 말에 좌중이 한번 침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초무린이 말했다.
[여동빈. 아까 그 말은 천계를 등지겠다는 말인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초무린이 고소를 머금었다.
[내게 짐을 떠넘기는군. 내가 매사 그리 의욕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내 뜻은 변하지 않소.]
초무린은 잠시동안 여동빈을 응시하더니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웅. 난 임무를 포기하겠다. 그럼 이만.]
우웅…
초무린의 신형이 은은한 빛에 휘감겨 사라지기 시작하자 나는 기겁했다. 그래서 급히 의념을 전개해서 그의 신형을 옭아매었고, 초무린이 멈칫하자 그에게 외쳤다.
“잠깐, 무슨 말이오! 뜬금없이 왜 임무를 포기하시오.”
초무린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 실력으로 여동빈을 잡아서 연행할 자신이 없다. 그리고 너와 합공하면 연행할 수 있다손 쳐도 소멸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도 여동빈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임무를 포기하는 것인데, 3가지나 이유가 있군.]
“…….”
[당장 이 의념천주의 견제를 풀지 않으면 또 싸우자는 걸로 간주하겠다.]
나는 초무린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아까 나한테 졌잖소. 어디서 허세를….”
[나는 경고했다.]
초무린의 눈에 처음으로 진심어린 살기가 맴도는 게 느껴졌다.
[내가 널 죽이려고 싸운다면 넌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다.]
“음.”
나는 초무린의 냉막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주춤했다.
‘허세가 아냐….’
저 말은, 아까 나와의 전투가 나름대로 최선은 다한 거였지만 생사결으로 임한 게 아니었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무엇인지 절대지경 팔황천마에서 약간 짐작가는 바가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에잇 젠장…. 여동빈이 어찌됐든 초무린을 지상에 잡아둬서 투선급 고수를 부려먹으면 굉장히 편해지는데…. 게다가 그에게서 사대무류 초대종사인 호월의 이야기도 들어야 해! 이대로 포기 못해.’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작작 하시오! 당신은 종말을 막을 수 없다 생각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으려고 전력을 다하는 게 보이지 않소? 당신은 무림지존도 누려보고 인간세상의 흥망성쇠를 다 누려봤으니 삶에 미련이 없다 그 말이오? 당신처럼 이기적인 자가 어딨단 말이오.”
초무린이 깜짝 놀랐다.
[무엇이? 네가 정녕….]
“내 말이 틀렸소? 당신은 무신도 못 만났잖소. 그따위 성격이니까 못 만나지!”
[…….]
그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줄곧 무심으로 일관해 오던 여동빈조차 안색이 변했고,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던 초무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어라?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는 걸 감지했다. 평소처럼 상대의 약한 점을 건드려서 진심이 튀어나오게 하려는 화술을 구사한 건데, 어쩐지 그 반응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번에 뭔가 화술 전략을 잘못 택한 기분이 든다.
잠시 후 초무린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의 기세가 마치 귀면(鬼面)을 연상케 했으며 그의 전신에서 뇌무(雷霧)가 올올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애송이. 그럼 네놈은 무신을 만났느냐?]
저 말투는 마지막으로 한 번은 더 참아본다는 말투가 분명했다.
‘으으윽….’
이유를 모르겠다. 상대는 보패도 없고 나는 칠요가 2개나 있으며 아까 대결했을 때는 내가 이겼다. 그런데도 지금 초무린의 말에 잘못 대답하면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질 거라는 예감이 든다. 정말 환장하게도 이런 예감이 들 때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방금 전에 역린(逆鱗)을 잘못 건드린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못 만났소! 내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종종 만났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못 만난 것이오.”
초무린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 주제에 어째서 남에게 무신을 논하는가? 변변찮은 건 네놈도 마찬가지거늘.]
“미안하오. 하지만 지금 당신이 뇌신류의 종사답지 않아서, 후대의 종사로서 답답한 마음에 정언을 내질러봤을 뿐이오!”
[이상한 소리군. 나는 투선 초무린이다.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된 내가 뇌신류 종사의 격을 갖출 필요가 있단 말인가?]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왠지 이걸 잘 공략하면 초무린의 심중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이질감의 이유를 찰나간에 생각하다가 팍 하고 감을 잡고는 교묘하게 찔러보았다.
“그런것 치고는 아까 뇌신류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도 있더군. 지금의 당신 모습은 마치 억지로 자신의 패기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오. 몸에 안맞는 옷을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요.”
[…….]
“대답하시오. 당신을 그렇게 허무로 빠뜨리는 게 무엇이오? 설마 방금 내가 말했던 것처럼 무신을 만나지 못했던 문제요?”
[대답하기 싫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앗, 잠깐….”
아차, 방향은 잡았는데 제대로 찌르지를 못한 건가? 초무린은 갑자기 자신의 마음을 닫아걸고 이야기를 피하려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초무린이 고스란히 돌아가 버릴 위기라서 내가 내심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초무린. 당신이 무신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당신이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오.]
갑자기 여동빈이 입을 연 것이다.
그 말에 초무린은 여동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입가를 씰룩였다.
[뭐라고…?]
[당신이 만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 했소.]
[나는 천계무련에서 삼일지투(三日之鬪) 끝에 팔황천마(八荒天魔)의 전개가 월공투계(越空透界)의 수읽기에 못 미쳐서 너에게 패배했었지. 그 때 나는 네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제발 무신에게 도달할 단서를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비참케 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이냐…. 여동빈!]
은은한 분노가 감도는 초무린의 말에 여동빈은 무감정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요. 당신의 내심은 무신을 그리 만나고 싶어하지 않소. 스스로가 그 자와 만날 길을 걸어 잠그고 있으면 내가 길을 알려준다 한들 다를 게 없지 않소? 도리어 갈증과 고통만 더욱 깊어질 뿐.]
[후후, 그 때와 똑같군…. 모든 걸 아는 것 마냥 지껄이는구나. 하하하하하하…!!]
[…….]
[네가 뭘 아느냐? 기껏 창힐의 졸개 하나 쓰러뜨린 걸로 세계의 이면을 다 알고 있다 자신하느냐!! 하하하….]
초무린은 광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눈에서 줄기줄기 광망을 흘리며 말했다.
[좋다. 어차피 종말은 멀지 않았으니….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 이 자리에서 너를 무신의 곁으로 돌려보내주마!]
파칭!!
초무린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그의 손에 갑자기 황금빛으로 물든 환영의 채찍이 소환되었다. 그 채찍은 나와 싸울 때 소환된 것과 같은 것인지라 나는 깜짝 놀랐다.
‘뭐?! 황금빛이 보패 뇌성편에서 뿜어져나오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초무린과 싸웠을 때 느꼈던 이질감은 바로 이것이었나? 설마 보패는 그냥 쥐고 휘두르는 것에 불과하고 황금빛 강기와 채찍 모두가 의념천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투선 초무린에게 있어서 보패가 있고없고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내가 아연해하고 있을 때 초무린이 절기를 시전했다.
팔황천마(八荒天魔)
극성(極成)
마하대겁륜(摩訶大劫輪)!
피비비비빙
마하대겁륜이 전개되는 순간 팔황천마의 범위 내에 무형의 소용돌이가 일그러지며 몰아쳤다. 무형의 소용돌이 내부에는 뇌광(雷光)이 무수히 떠다녔는데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바로 초무린의 최종절기가 분명하다!
‘이런, 무차별공격인가!’
나는 나 또한 마하대겁륜의 범위에 있다는 걸 알아채고 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는데, 무형의 사륜(絲輪)이 내 호신강기를 건드리는 순간이었다.
푸콰콱!!
“헉!”
나는 내 내공을 전력으로 집중해서 만든 호신강기가 일격에 터져나가며 동시에 내 살갗이 한움큼 파이는 걸 느끼고는 기겁했다. 설마 이 정도로 의념절기의 위력이 급증하다니?! 아까의 팔황천마도 위협적이긴 했지만 이 정도가 아니었기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 설마 회전의 위력이 더해져서….’
마하대겁륜은 장내에 펼쳐진 무수한 실의 의념천주를 모아서 자신을 축으로 하여 회전시키는 절기인 듯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내 주변에 마하대겁륜의 사륜이 날아드는 걸 감지하고는 수요를 휘둘러서 맞섰는데, 엄청난 반탄력 때문에 수요와 함께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까강!
“……!!”
잠재력이 막강하다! 만일 내 손에 들려있는 게 수요가 아니라 일반철검이었다면 이번 공격에 팔이 함께 잘려나갔으리라.
마치 교주의 심천무량 한복판에 뛰어들었을 때 같은 위기감에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일반적인 태세로는 이대로 수많은 실덩어리에 찢겨죽을 것이라 알아채고는 그대로 무량단을 전력으로 끌어내어서 정면을 크게 베었다.
파바바박
일순간 실덩어리가 찢겨나가고 마하대겁륜의 포위가 사라진 듯 했다. 하지만 내가 그 틈새로 뛰쳐나가서 마하대겁륜을 벗어나려 하자 수요의 정령이 경고했다.
[백웅! 별이 떨어진다!]
별?
나는 수요의 경고를 듣자마자 급히 육감을 돋우어서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그리고 의념으로 감춰진 무수한 사륜덩어리가 내 전신을 난도질하려 날아옴과 동시에 마하대겁륜 내부를 떠돌던 무수한 뇌광이 마치 별처럼 떨어져 내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서운 것은 뇌광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삼보절기를 써도 다 흘려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파바밧!!
‘젠장…. 뭐 이런 기술이.’
같은 절대지경이 아니면 아예 맞설 수가 없는 수준이다. 나는 멸혼보와 삼보절기를 섞으면서 뒤로 다시 물러섰고, 별 수 없이 다시 포위에 갇힌 형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허공에 초무린과 여동빈의 신형이 떠서 마주친 걸 볼 수 있었다.
첫 공격은 여동빈이었다. 여동빈은 자신의 왼손에 거머쥔 장검과 함께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루어서 초무린에게 쏘아졌다.
천둔검법(天遁劍法)!
빛덩어리같이 쏘아진 신검합일의 속도가 가공할만 했기에 초무린은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천둔검법에 꿰뚫리는 듯 했다. 그러나 터져나간 것은 초무린의 환영이었고, 초무린은 어느 새 자신을 지나쳐 간 여동빈의 신검합일에 똑같은 속도로 따라붙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초무린은 여동빈과 지근거리에서 그대로 마하대겁륜을 재차 전개했고, 여동빈의 신형이 갑자기 마하대겁륜의 실에 먹혀서 시꺼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일 초에 수백 개의 초식이 뒤섞이면서 아수라처럼 울부짖는 것 같았다.
쿠궁
어둠 속에서 빛줄기가 터져나오며 여동빈이 마하대겁륜을 잠시 탈출했지만 초무린이 이미 그에게 무환천랑백팔식을 연거푸 시전하며 전후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숨쉴 틈도 없는 공세였기에 여동빈은 운결(雲決)을 동원해서 뇌광을 구름덩어리로 밀어내었다.
천결(天決)
천둔검법의 천결이 펼쳐지자 뇌광이 여동빈의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스쳐지나갔고, 이윽고 여동빈이 몸을 회전시키며 우수(右手)로 장력을 뿜어내며 지결(地決)을 사용하자 모든 공세가 무마되었다.
팔황천마(八荒天魔)
천랑아(天朗牙)
그러나 이어지는 일첨(一尖)!
그 일격은 여동빈이 방어를 시전하고 생겨난 극순의 틈새를 아주 정확하게 찌르고 있었으며 팔황천마의 극의라고 할 만 했다.
푸콱
여동빈은 초무린의 천랑아 일격을 피하지 못하고 손바닥을 꿰뚫렸다. 정확히는 천랑아가 여동빈의 운결 방어를 뚫고 머리통을 터뜨리려고 했으나 찰나의 순간에 여동빈이 월공투계로 한 수 앞을 읽은 덕분에 손바닥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여동빈의 얼굴은 표정변화가 없었으며 초무린은 의념의 채찍을 거머쥔 채 말없이 밀고 있는 중이었다.
꾸드득…
여동빈의 손바닥은 갈수록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명백히 여동빈의 수세였기에 나는 예상과 다른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여동빈이 당연히 초무린을 이길 줄 알았는데….’
심지어 초무린은 아까 나한테도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격렬한 공세를 시전해서 천둔검법의 결계를 꿰뚫을 정도라니! 심지어 여동빈은 방금 천결과 지결까지 사용했는데도 팔황천마의 공세를 다 막지 못했다. 견제 위주라고 생각했던 절대지경인 팔황천마가 이 정도의 압도적인 공격력을 머금고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나는 예상과는 다른 상황에 어찌된 일인지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실력을 시험하려고 싸우는 것과 죽이려고 싸우는 것.
그건 절대지경끼리의 전투에서 엄청난 실력차이를 보인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아까의 초무린은 싸우기 싫은 걸 억지로 싸운다는 기색이 강했기에 그것 또한 역량차이를 보이는 요인이었다. 초무린의 진짜 실력은 투선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초무린이 말했다.
[천계무련 때도 이랬지. 내가 계속 몰아쳤지만 넌 쓰러지지 않고 계속 버티다가…. 어느 순간 월공투계로 수를 앞서나가서 역전. 이번에도 수가 늘어진다면 또다시 내 패배가 되겠지.]
[…….]
초무린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동빈. 사람 놀리는 게 재밌느냐? 네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닐 텐데. 네가 오백여 년 동안 신역절기(神域絶技)를 수행하여 차원이 다른 역량을 쌓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무신의 제약이니 뭐니 하면서 나를 상대로는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 따위는 신역절기를 상대할 자격이 안 된다 그 말이냐?]
[아까부터 전력을 다하고 있소. 당신은 강하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의 목소리가 점차 싸늘하고 음울해져갔다.
[신역절기를 꺼내라. 아니면 이대로 없애주마.]
[…….]
[좋다. 그럼 어디 죽어 봐라.]
푸콰콰콱!!
분노한 초무린의 채찍이 회전하더니 그대로 여동빈의 손바닥과 함께 팔을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흑색 돌개바람처럼 변한 사륜(絲輪)이 천지사방에서 뿜어져나오며 여동빈의 신형을 그대로 집어삼켜버리는 듯 했다.
“안 돼!!”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봐도 여동빈이 저 위기를 타개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초무린이 여동빈을 죽음을 몰아넣을 실력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방관한 내 실수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검선지경(劍仙之境)
사방이 고요해진 듯 했다. 그리고 흑색과 백색, 두 가지 색상만이 세상에 남은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여동빈의 검로(劍路)가 부드럽게 하나의 길이 되어 전방으로 뻗어나갔다. 그것은 육의(六意) 중 그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는 무색(無色)의 힘을 띄고 있었으며, 초식이되 초식이 아닌 것 같았다.
후와악
초무린의 마하대겁륜이 둔중하게 칠흑의 힘을 뿜어내면서 검로를 막아섰다. 겁륜의 중심에서 초무린의 신형이 회전하면서 더욱 더 속도를 높였고, 종래에는 사륜의 춤이 뇌무(雷舞)로 변화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오의의 변화를 보게 되자 저 마하대겁륜이 뇌신류의 절학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막강한 의념천주를 기반으로 하여 엄청난 회전수를 이용하여 뇌력(雷力)을 극대화시키는 절기! 극에 이르면 방어와 공격을 함께 할 수 있으며 마치 뇌신이 강림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생전의 초무린이 무림지존이 된 이유는 단순히 팔황천마 하나 때문이 아니라 마하대겁륜을 그 누구도 뚫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파지직! 파지직!
눈이 멀 정도로 어마어마한 뇌광이 충천했고, 그 뇌광 안에는 적을 파괴하는 압도적인 회전의 채찍이 맴돌고 있다. 백련교주 독고운천이 심천무량을 써서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파괴할 수 없을 것 같은 저 압도적인 절기를 상대로 검선지경의 검로는 그저 유유히 뻗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검로가 마하대겁륜의 경계에 도달하는 순간 - 허무의 공간 속에 마치 물 한 방울이 떨어진 듯한 파장이 울려퍼졌다.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여동빈의 모습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
무형검(無形劍)
내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걸까?
무형검로(無形劍路),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한다고 할 수 없는 그 애매한 직선(直線)이 그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인데 - 마하대겁륜의 무시무시한 뇌광과 암천(暗天)은 조금도 무형검로를 막아서지 못했다. 본디 힘 대 힘으로 부딪힌다면 거대한 폭렬음이라도 울려야 할 것인데 마치 모든 걸 무시하고 오연하게 전진밖에 하지 않는 듯 했다.
설마 저건, 차원이 다른…
파앗!!
잠시 후, 여동빈의 일검은 초무린의 목젖에 닿아있었다. 그리고 초무린의 의념천주로 만든 채찍은 갈가리 찢겨서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다가 이내 소멸되었다. 주륵 하고 초무린의 목에서 피 한 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여동빈의 한 마디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승부가 났소.]
[…….]
[투기를 거두시오.]
여동빈의 말에 초무린은 순순히 자신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그러더니 말했다.
[무한에 이르는 무형의 검로. 이걸로 신을 벨 셈인가.]
여동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초무린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 이건 신역절기가 아니겠지. 그저 네 오백 년 수행으로 파생된 힘일 테니까. 흐흐….]
여동빈이 한숨을 쉬었다.
[종말이란 그 누구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혼돈이오. 희망 또한 마찬가지. 당신은 너무 일찍 포기했소.]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난 신같은 것과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게 무림 이외의 세상은 필요하지 않았다.]
[…….]
[너나 장삼봉이 이상한 것이다.]
넋두리하듯 중얼거린 초무린이 말했다.
[여동빈. 차라리 네 손으로 날 끝내다오. 이젠…. 수천 년 동안 나를 갉아먹는 체념과 좌절에서 벗어나서 편해지고 싶구나.]
스릉
하지만 여동빈은 초무린의 말을 듣지 않고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터져나간 자신의 팔을 영기(靈氣)로 곧장 재생시키며 절벽 앞으로 갔다. 천계와 멀리 떨어진 지상계에서 저 정도 영기수복능력을 갖고 있는 걸 보면 여동빈이 오백 년 동안 신선으로서의 격을 더욱 높인 모양이었다.
[싫소. 끝까지 발버둥치시오. 그게 승자로서 내가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이오.]
[…크크. 잔인한 놈….]
초무린은 고개를 홱하고 돌렸다. 그러더니 내게 말했다.
[임무를 포기하진 않겠다. 하지만 백웅 네놈은 저 여동빈을 상대로 천계로 송환시킬 자신이 있느냐?]
“음…. 그게….”
나는 초무린의 의욕이 되돌아온 건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물음에 답할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방금 전의 초무린이 보여준 무위는 굉장했는데 그런 초무린도 여동빈의 무형검로에 단숨에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초무린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나와 초무린이 전력을 다해서 지금의 여동빈에게 덤벼들어도 그를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동빈은 강하다.
내가 실종되었던 오백 년 동안 수련을 쌓아서 더 강해진 것이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잘 측정이 안 되는 걸 보면 최소한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차원이 높은 경지였다. 무형검로가 어떤 원리인지 도저히 파악이 되지 않았다.
‘쳇…. 이거 참… 어떡한다.’
물론 전생자로써 온갖 수단을 다 쓰면 지금의 여동빈이라도 어떻게든 때려눕힐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동빈을 윽박질러봐야 손해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초무린의 말을 듣자마자 이건 성공할 수 없는 임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별 수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여동빈에게 말했다.
“여동빈. 지금 인류측은 은하부족연맹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력을 발전시켜서 종말에 대비하려고 하는 중이오. 당신이 그 강력한 힘을 써서 남은 17년 동안 인류를 좀 도와주는 건 어떻겠소?”
[그건 나의 길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라. 나는 협력할 수 없다.]
“…그럼 당신의 길이란 건 뭐요?”
[나와 같은 백좌(百座)가 종말 직전에 힘을 합치게 되리라. 나는 거기에 한 손을 보탤 것이다. 이 길은 그대들이 문명의 단위로 세상을 구하려는 것과는 상관없는 길이다.]
“…….”
백좌.
그건 설마 무신이 말했던 백 명의….
여동빈이 말을 이었다.
[백웅이여. 그대는 오백 년 전 해신과 겨루다가 전욱의 강림을 겪은 후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천계와 인간계의 인과율이 끊어져 버리면서 나 또한 그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지. 그 동안 어디로 갔는가?]
“음… 그건….”
나는 사대신기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망량이 천계의 실권을 잡고있는 듯한 상황에서 사대신기 이야기를 한다 해서 큰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대신기 바유 덕에 시간을 초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여동빈이 말했다.
[그대 말대로라면 지금 물의 바루나 외에는 다른 신기를 사용불가능하다는 말인데, 종말을 막기에는 힘이 부족하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소. 모두가 사정이 있었던지라.”
[…그런가.]
잠시 침묵하던 여동빈이 말했다.
[좋다. 나와 다시 단말을 이어다오.]
“그 말은?”
[나는 수련을 해야해서 지금 당장은 그대를 도울 수 없으나, 그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하러 가리라. 종말을 이겨내려는 그대의 검이 되리라.]
“좋소!”
나는 흔쾌히 여동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그와 단말을 이었다. 그런데 단말을 이은 후 뒤를 힐끔 바라보자 초무린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이윽고 초무린이 공포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이제 와서 봉인된 인드라(因陀羅)가 풀려날 가능성이 있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