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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여동빈을 찾으러 왔다고?
‘그러고보니 망량이 천제단에서 그런 얘기를 했었지…. 나한테도 부탁했었고.’
그 때는 시간나면 여동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넘겼는데, 그게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었다는 말인가? 나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초무린에게 반문했다.
“여동빈의 행적을 찾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구궁파천뢰에 인과율이 걸린 건 최근의 일이 아니라 꽤 예전의 일이 아니오? 앞뒤가 맞지 않잖소.”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명분에 불과하다. 현허궁주 망량은 언제든 나를 지상계에 내보낼 수 있게끔 준비해둔 것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내게 임무를 주기로 했던 것이지. 그리고 현 시점에서 내게 최우선인 임무는 실종된 여동빈을 찾는 것이고.”
“으음, 그렇군.”
내가 생각하던 것과 순서가 반대인 듯 했다. 일단 초무린을 현실에 소환할 수 있는 명분만 갖춰져 있으면 망량이 상황에 따라 초무린에게 명령을 내리는 식인 것이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실종된 여동빈의 행적이 중요한 것이오? 망량이 사실 내게도 그를 찾아내라고 강조한 적이 있소만.”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그러나 현허궁주는 여동빈을 찾아야 종말을 물리칠 단서가 생긴다고 여기고 있다.”
“……!!”
“그리고, 또 하나 현허궁주가 전해주라 한 것이 있다.”
스윽
초무린은 자신의 품속에서 웬 붉은 구슬을 하나 꺼내어서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이 구슬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보패군.”
“통천신화주(通天神火珠)다. 곤륜십이대선 운중자의 보패지.”
“……!!”
“좋을대로 쓰면 된다.”
십이대선의 보패! 게다가 나는 과거에 천계에 쳐들어갔을 때 이 통천신화주와 직접 대적한 적도 있었기에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는 거대한 구체 형태였는데 평상시에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그마한 듯 했다.
‘화룡진인의 화요천염에 뚫리긴 했지만 분명히 천계의 상위보패 중 하나다.’
나는 통천신화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걸 왜 내게….”
“그것뿐만이 아니다. 현허궁주는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천계의 보패를 천제단을 통해 지상에 하사할 것이라 했다. 역소환의식은 자신의 사제인 천우진이 감당할 것이라 하더군.”
“뭐, 뭐라고?”
“그리고 보패의 주인을 가능하면 빨리 찾아달라는 부탁 또한 했다.”
대체 망량은 무슨 생각이지?
‘그 말대로라면 통천신화주 뿐만 아니라 천계의 내로라하는 대선(大仙)들의 보패를 모조리 뺏어서 지상에 내려보낼 생각이라는 건데….’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망량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나는 멍하니 있었지만 초무린이 부숴진 자신의 채찍손잡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에게 채찍을 내밀었다.
스윽
“나는 지상에 오래 머물 듯 하다.”
“…그건 알겠는데, 채찍을 왜 내게 내미는 것이오?”
“네 능력이라면 보패를 고치는 방법도 알겠지. 내 전용보패인 뇌성편(雷星鞭)을 고쳐달라.”
“…….”
“보패가 없으면 내 임무수행에 지장이 생긴다.”
나는 초무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알아차렸다.
‘방금 전 내게 패배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심적 충격도 없어보인다….’
그의 얼굴에 떠도는 허무감은 사라질 기색이 없었다. 사실 후대의 뇌신류 종사이며 인간에게 싸워서 패한 게 꽤 충격적인 일일 만도 한데, 초무린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대에 수십 년이나 무림지존으로 군림했던 존재가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아까부터 그는 자기 할 일만 처리하고 싶어하는 기색이 매우 강해 보였다.
저건 일을 열심히 하려는 게 아니다.
모든 게 허무하기 때문에, 그저 물 흘러가는대로 대충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나는 초무린의 기운이 퇴락해 있자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했다.
“초무린, 뇌신류의 종사여! 어찌하여 그리 의욕이 없는 것이오? 무인의 기백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소.”
“네가 알 바 아니지 않은가? 오지랖이 심하군.”
“음, 그렇긴 하지만…. 당신은 팔황뇌신이란 이름으로 초대 뇌신류를 전설으로 이끌었던 존재.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구려.”
“남이 마음대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보다 불쾌한 일은 없지.”
짤막하게 대꾸한 초무린이 부서진 뇌성편을 거두어서 자신의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말했다.
“싫으면 말아라. 새파란 후배에게 구걸은 안 한다.”
“…….”
뭔가 초무린도 굉장히 제멋대로인 성격인 듯 했다. 그나마 허무주의에 가려져서 잘 티가 나지 않을 뿐 원래는 자존광대한 인물일 것이다.
‘음…. 최소한의 자존심은 있는 것 같은데 왠지 짓눌려있는 인간이군.’
나는 초무린에게 말했다.
“좋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여동빈의 탐색에 나 또한 협력해 주겠소. 보패를 고치는 일도 최대한 도와주겠소.”
“그런가?”
“다만 그 대신에 이 인간계에 머물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무공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어야 하오. 또한 구궁파천뢰에 대해서도.”
“물론이다. 처음부터 현허궁주가 그럴 의도로 날 보낸 것이니.”
초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초무린에게 말했다.
“음…. 그리고 사대무류의 초대종사였다는 호월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오. 사실 나는 성진이란 자에게 달마시절에 있었던 일을 들었으나, 막상 호월 본인이나 당신에게 있었던 일은 잘 알지 못하기에.”
“내 스승에 대해서 말인가.”
“그렇소. 아까부터 말은 안 했지만 마지막에 당신이 나와 위치를 바꿨던 그 초식…. 팔황경천신공이 아닌 것 같았소. 그건 호월의 무공이 아니오?”
“…….”
“용형기(龍形氣)가 당신의 몸을 감싸는 걸 봤소.”
초무린이 화요어검을 피하고자 나와 위치를 바꾸었던 그 기묘한 무공초식은 틀림없이 초무린의 무공은 아니었다. 그건 절세고수의 감으로 틀림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자 초무린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우선 내 일부터 도와라. 그러면 하는 걸 봐서 알려주겠다.”
“…….”
와… 이 인간…. 대단하군.
“왜 그런 눈으로 보나?”
“아니, 왜 그리 당당한가 싶어서…. 당신은 지금 임무를 하러 온 거고 조력하고 말고는 내 마음인데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것이오?”
초무린은 마치 죽은생선같은 눈빛으로 대꾸했다.
“싫으면 말아라. 나는 이 임무를 안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대신 현허궁주가 다른 놈을 내려보내겠지.”
“으음….”
“구천현녀한테 징계먹는 건 좀 귀찮겠지만…. 알 게 뭔가.”
여태껏 만났던 인간들 중에서 본 적이 없는 유형이다.
초무린은 허세를 부리거나 짜증내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만사가 귀찮아서 진심으로 일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허무 그 자체였다. 내가 초무린을 돌려보낸다면 잘 됐다 싶어서 당장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런 상대한테 화를 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에 나는 침음성을 흘리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함께 움직입시다.”
아무리 의욕이 없어도 투선은 투선이다. 초무린의 힘은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일단 그를 데리고 다니기로 했다.
나는 옆에서 관전하고 있던 이설표에게 말했다.
“잠시 여기저기 다녀올 것이오. 내가 다녀올 동안 주현성에게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시오.”
“알겠소! 부디 종사의 앞길에 영광이 있기를….”
그리고 옆에 있던 주현성에게 말했다.
“주현성. 지금 사공린을 만날 수 있겠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실 테지만 지금 바로 연락드린다면….”
“아니. 그러면 천우진한테 가야겠군.”
파앗
나는 천우진에게 가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천우진은 초무린을 몇 번 훑어보다가 말했다.
“보패수리를 인간계에서 하는 건 본래 불가능했지만, 인공보패를 제작하면서 기술력이 쌓였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하군.”
“뇌성편을 고칠 수 있겠나?”
“나한테 주면 초상연구부에 맡겨서 수리하게 시키지. 그리고 여동빈을 찾는다고?”
“그래. 망량은 그 일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
천우진은 크게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빨라. 이렇게 빨리 천계근접계획을 실행하는데도 사형은 자신이 없는 거군.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응?”
천우진이 입을 열었다.
“사형이 통천신화주를 내려보낸 이유를 말해주마. 전국옥새를 쓰면 영력이 크게 소모될 텐데, 전국옥새는 쓸데가 많으니까 대신해서 통천신화주의 영력을 쓰라는 이야기다. 일종의 보조배터리 용도지.”
“그래도 되는 건가?”
“딱히 상관없어. 통천신화주가 100개 있어봐야 종말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지만, 전국옥새로 여동빈을 찾으면 그럴 가능성이 늘어나니까. 다만 보패에서 영력을 뽑아서 대신 갖다쓰는 건 꽤 힘든 작업일테니 내가 대신 영력을 뽑아서 주마.”
그렇게 말한 천우진은 통천신화주에 손을 뻗은 후 오랫동안 주문을 외워서 새하얀 힘의 덩어리를 뽑아내었다.
우우웅
천우진은 그 힘의 덩어리를 손바닥 위에 띄우고 있다가 조그마한 옥패에 쑤셔넣었고, 그 옥패를 내게 건넨 천우진이 말했다.
“이 옥패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전국옥새의 힘을 소모할 때 그보다 앞서서 통천신화주의 영력이 소모될거다. 전국옥새를 오래 쓸 수 있겠지.”
“호오.”
나는 감탄하고는 곧장 전국옥새를 꺼내서 검색했다.
“전국옥새여, 투선 여동빈을 찾아내어라!”
망량은 바로 내가 이걸 해주기를 바랬을 것이다!
우우웅….
전국옥새는 한참동안 검색을 하다가 말했다.
[여동빈의 검색결과는 1건입니다.]
나는 바로 찾아내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차원계로 간 게 아니라 어쨌든 이 주차원계에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찾았나? 어디에 있지?”
[위치는 여산(廬山)입니다.]
“…거긴 여동빈이 마지막으로 거룡을 벤 장소일텐데. 여산 어디에 있지?”
[산 정상에 있습니다.]
“좋아, 거기로 가자!”
파앗
나는 전국옥새의 좌표를 얻어서 비등을 써서 바로 여산으로 갔다. 그리고 여산의 정상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여동빈이 절벽 위에 서서 일출(日出)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후우우…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말없이 여동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을 걸었다.
“여동빈. 천계에서 빠져나와 여기에 있었소?”
여동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에 한동안 일출을 쳐다보며 그저 아침이 찾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기묘한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여동빈이 해가 지평선에서 모두 떠올랐을 때야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엔 왜 왔는가.]
나는 옆에 서 있던 초무린을 턱짓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용건은 초무린이 있소. 그는 현허궁주 망량의 명을 받아 탈주한 당신을 천계로 데려가기 위해 왔소.”
[…….]
“다만 궁금하군. 어째서 천계에서 나와서 여산에 와있는 것이오?”
[그대가 밟고있는 이 절벽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는 힐끔 발밑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전생하면서 알아낸 지식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바로 종말의 거룡이 그대로 석화(石化)되어 있는 절벽이지. 그 정도는 알고 있소.”
예전에 화룡신검을 찾으러 여동빈과 함께 다니던 전생에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여동빈이 고대에 쓰러뜨린 종말의 거룡의 본체가 진정으로 봉인된 장소인데, 그게 마지막에 깨어날까봐 화룡진인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여산에 꽂혔던 것이다.
여동빈의 말이 이어졌다.
[거룡의 본체는 지금도 이런 형태로나마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가. 그는 지금도 우리 발밑에 있다.]
“……?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살아있다니.”
[진실이다.]
“그럴 리가….”
전시안(全視眼)!
나는 반신반의하며 전국옥새의 전시안을 발동시켜서 발밑의 절벽을 쳐다보았다.
쿠르르르
그 순간, 나는 이 커다란 절벽의 깊숙한 내부에서부터 거대한 암흑의 용이 꿈틀거리는 걸 전시안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전시안은 모든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이기에 거짓은 있을 수가 없었다. 봉인으로 석화되어 있지만 분명히 이 내부에는 팔부신중의 하나이자 세계를 멸망시킬 뻔 했던 종말의 거룡이 있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거대한 암흑의 용 주변에는 웬 거대한 뱀이 유영하듯 함께 흐르고 있는 중이었다.
“……!!”
내가 이걸 지금까지 못 보고 지나쳤다고?!
‘팔부신중 용이 살아있었구나….’
하지만 전시안으로 봐야 보일 정도이니 현재의 봉인은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본질이 견고하게 석화되어 있는 건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죽지는 않았더라도 봉인되어 있으면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 절벽을 물리적으로 깬다고 해서 용이 죽지는 않을 것이고 이 장소에 영혼이 귀속되어 있으니 어떤 형태로든 봉인은 이어지리라.
나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여동빈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고대에 거룡을 베어죽이지 않았소?”
[그건 봉인의 외부로 유출된 절반의 혼백체가 죽은 것. 절반은 아직 살아 있다.]
“그렇다 해도 거룡의 봉인은 완벽해 보이오. 이걸 재봉인하러 굳이 나왔다면 삽질인 것 같소만.”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이 재앙 하나를 막는다 해서 세상의 운명이 달라질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여동빈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천계의 현허궁주는 교묘한 수단으로 무신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니, 더 이상 천계에 속할 생각이 없다. 너희는 이만 돌아가라.]
“…….”
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천계에 등선한 망량이 여동빈이 알고 있는 무신의 좌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려 했구나!’
하지만 그걸 알아차린 여동빈이 망량의 압박을 피해서 인간세상으로 도주한 모양이었다. 나는 여동빈에게 말했다.
“여동빈. 정말 묻고싶은 게 있소.”
[무엇인가?]
“…무신은, 종말에 인간을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내 질문에 여동빈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적어도 구원받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를 만날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