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19화 (1,016/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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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칼비오그의 기세는 확연히 꺾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정중한 척 하면서 이쪽의 결정을 제한하는 태도였지만 지금은 좌불안석한 채 이쪽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동시에 지금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흠…. 일단 협상인 거니까. 조건에 맞게 이쪽에 유리한 상황을 끌어내야 해.’

어느 정도 압박해야 할까? 나는 이윽고 여기서 필요이상으로 꾹꾹 누를 필요는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자리에 선지자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압박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압박하면 아예 칼비오그가 교섭 자체를 포기하고 도망쳐버릴 우려가 있었다.

그렇다면 해야할 말은 정해져 있다. 나는 칼비오그에게 말했다.

“어이. 내 말 잘 들어.”

[무엇을?]

“칠요는 이번 교섭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우린 지금 칠요를 갖고있지도 않고 너희한테 넘겨줘야 할 의무도 없어. 그럼 더 이상 칠요를 얘기할 필요도 없지. 어때?”

칼비오그의 눈알이 데굴거렸다.

[…무리한 소리를…. 그것 외에 그대들 인류가 우리 은하부족연맹에게 줄 만한 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단정을 짓는 거야? 과학기술력이야 너희가 앞설지 모르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종말에 대비해서 준비한 건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나는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그건 내 제안에 동의하면 말해줄 수 있지. 우선 대화의 전제조건을 바꾸고 싶군. 서로 시간낭비하면서 심력소모하는 건 줄여야하지 않겠냐? 피차 바쁜 몸일 텐데.”

[…….]

“우리가 너희한테 코꿰여서 휘둘릴 정도의 입장은 아니란 걸 알아둬.”

칼비오그가 한참동안 침묵했다. 그의 눈이 슬며시 한 번씩 옆에 앉아있던 선지자를 향하는 걸 봐서는 크게 신경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한참동안 선지자의 눈치를 보던 칼비오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대들 측에서 제공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들어보겠다. 그럼 일곱 개의 보물을 단념할 수 있을지도.]

“흐음. 알았어. 잠깐….”

그 때였다. 한 장대한 체구의 금발 장년인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저 자는 누구지? 기껏 청년으로 보이는데 난데없이 외계어를 구사하며 자기 마음대로 은하부족연맹과의 협상을 진행하다니!]

나는 그 자를 물끄러미 보며 대꾸했다.

[넌 누군데?]

[나는 미합중국 46대 대통령 제럴드 H. 해리슨이다. 네 정체를 밝혀라.]

저 자가 미국의 대통령인가?

‘상당히 눈빛에 의지가 넘치는군. 하긴 뭐 저 정도 위치에 있는 인간이라면….’

나는 미국이 대웅제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영토가 큰 나라이며 남부와 북부의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물론이고 아프리카 일부도 지배하는 대제국이란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제럴드는 대장군 출신의 대통령이기에 전쟁경험도 있는 자였다. 무시할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는 과거 대웅제국의 황제였던 백웅이다. 이 자리에 참석할 자격은 충분하다. 그리고 칠요의 교섭조건을 물렸으니까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황제였다고? 그런 얘기는 들은 바 없다.]

[사공린이 내 신원을 보증한다. 그럼 다시 묻겠는데, 제럴드 너는 지금 나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회담을 끌고 갈 수 있나? 그렇다면 네게 협상의 주도권을 넘기겠다.]

[…….]

미국대통령 제럴드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멋대로 이야기를 결정하는 걸 자제해라. 우리 모두가 인류의 대표자로서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지.]

니 말대로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일단 듣는 척은 해 주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칼비오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비오그. 너희는 [종말]과 [계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그걸 왜 물어보는 거지?]

[우리 측에서 내세울 건 바로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한 정보다. 그 정보를 주는 대신 우리 인류가 발전하기에 충분한 과학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칼비오그가 얕보듯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얘기를 태연히 하는군. 너희의 이야기를 믿을 이유가 없다.]

[왜? 인류가 그걸 알 수는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너희 인류는 마도문명(魔道文明), 주술문명(呪術文明) 혹은 고도의 과학기술을 지닌 문명도 아니며 [옛 지배자]의 사도종족도 아니다. 은하계의 기준으로 크게 도태되어 있는 약소종족이 그런 정보를 알 수는 없다.]

[즉 이야기의 신뢰성이 필요하단 얘기군.]

[그렇다.]

나는 그와 동시에 휙하고 옆에 앉아있던 선지자를 쳐다보았고, 칼비오그가 움찔했다. 나는 선지자를 지그시 쳐다보았고 이윽고 말했다.

[이 녀석은 뭐든 알고 있지. 내가 말하는 종말의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공증(公證)해줄만한 인물이 아닐까?]

[……!!]

칼비오그가 흠칫했다. 그러더니 당황한 듯 말했다.

[그… 그 분은 끌어들이지 마라. 굳이 이 협상에 그 분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겠나.]

[왜? 난 이래봬도 이 놈의 단골고객이거든. 내 부탁이면 이 정도는 들어주지 않겠냐. 안 그래?]

나는 실실 웃으면서 선지자와 좀 더 가까이 앉았다.

그러자 선지자는 매우 불편하다는 듯 바로 옆으로 떨어지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공증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공증료를 내라.]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너랑 거래한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이 정도를 예측 못했겠냐!

‘사소한 걸로도 다 뜯어먹는 개놈시끼!’

저 놈한테 몇 번이나 정보료를 후려쳐졌던가…. 나는 내심 선지자를 때리고 싶단 생각도 들었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될 일도 안 된다. 나는 표정을 웃는 표정으로 유지하면서 선지자에게 말했다.

[공증료는 내가 꼭 내란 법은 없잖아? 알고싶은 놈이 내야하는 거겠지?]

[…….]

선지자는 마치 양심없는 놈을 쳐다보는 눈빛으로 날 보다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낼 의사가 있다면야….]

칼비오그는 눈치가 빠른지 즉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를 알아챈 듯 했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보다 더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인류측은 아무것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말인가, 백웅이여! 이 쪽이 순순히 모든 대가를 내놓을 정도로 만만해 보이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손해를 안 본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너희 입장에서는 만일에 종말에 대한 정보가 진실이면 칠요보다 더 큰 이득일지도 모르잖아. 그걸 선지자가 공증까지 해준다는데 당연히 공증료는 너네가 내라.]

[…….]

[어쩔래? 말해두지만 내가 알고 있는 종말의 정보는 ‘진짜’다. 이건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어.]

[잠시…. 생각을 정할 시간을 다오.]

[안 돼.]

[뭐라고?]

나는 이런 협상을 할 때 상대한테 생각할 시간을 넉넉하게 주면 안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변심을 하거나 다른 변수가 끼어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다짜고짜 억지로라도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는 몸을 앞으로 스윽 내밀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이건 너희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공증따위 할 필요도 없이 나는 사실 선지자랑만 거래해도 돼. 하지만 너희가 우리 측에 선의(善意)로 접근했으니 이쪽에서도 그만한 아량을 베푸는 것뿐이라고.]

그냥 그럴듯하게 지껄인 것뿐이다. 선지자랑 이런 식으로 거래하면 배 이상 뜯어먹힐테니 내가 한 말은 허세에 불과하다. 이미 선지자한테 많이 뜯어먹혔으니 놈과 거래하는 건 꺼려지는 일이었지만 칼비오그가 그런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겉으로는 영락없이 선지자와 사이좋은 단골으로만 보일 것이리라.

[으음….]

[자, 빨리 대답해라. 어쩔 테냐.]

[좋다…. 그 제안에 응하겠다.]

해냈다!

나는 칼비오그의 대답을 받아내자 절반쯤은 성공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칼비오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너희가 우리에게 지원해 줄 과학기술과 지원을 명확히 한 다음에 종말의 정보를 공증해서 넘겨주지.]

[말해두지만…. 아까 말했듯 너희 인류 모두를 태양계 밖으로 대피시킬 기술은 없….]

나는 바로 칼비오그의 말을 끊었다.

[누가 도망친대? 17년이 긴 사건은 아니자만 그렇게 짧은 시간도 아니니까 할만큼 해 보고 나중에 탈출은 우리가 알아서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필요한 핵심기술을 최대한 내놓으라고.]

[…크으, 이 하위종족들 따위가….]

쿠웅!

칼비오그가 분을 참지 못한 듯 쾅 하고 탁자를 내리치는 게 보였다. 예상과 자꾸 틀어지니까 초조해지는 게 눈으로 보이고 있었다.

‘본심이 나오는가 본데.’

저 놈도 연맹의 맹주로서 상당한 너구리일텐데 이렇게까지 감정을 표출한다는 건, 평소에 인류를 어지간히도 약소종족으로 얕보았기 때문이리라. 하찮은 벌레나 다름없이 생각하던 자들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거나 테라포밍할 수 있는 기술. 그리고 [옛 지배자]의 사도나 화신에 맞설 수 있는 전투기술, 또한 은하세계에 대한 상세한 지식. 적어도 이 정도는 얻어야겠군.]

[과하다...!!]

나느 피식하고 칼비오그를 비꼬았다.

[과하다고? 고작 일만 명 살려주면서 칠요를 다 내놓으라고 한 네놈은 대체 뭔데. 저 선지자 놈도 그런 거래는 안 할텐데.]

[…….]

[착각하지 마라. 너희와 선지자네 종족의 친분도 내 손에 달려 있으니까 이 교석의 주도권은 결코 너희쪽으로 갈 수 없어.]

이게 이 교섭의 본질이다. 칼비오그는 단순히 종말의 정보 때문에 내게 목매다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선지자의 종족에게 밉보일까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칼비오그가 황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넌 인간이냐…? 너 같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할 수가… 마치…. [옛 지배자]를 대하는 것과 같구나.]

[대답부터 해. 우리 제안에 응할거냐?]

[…….]

칼비오그는 한참동안 고뇌했다. 그러더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너희 인류의 가능성을 높게 쳐줄 수밖에…. 너희가 우리 연맹의 일원이 되기에는 크게 수준이 낮으나…. 그대 백웅의 역량에 경의를 표한다.]

[거 참 장황하게도 말하는군. 그럼 교섭은 성립된 거지?]

[그렇다.]

나는 책상을 탕 하고 손바닥으로 한 번 두드렸다.

[좋아 얘기 끝! 그럼 공증료 얘기는 너랑 선지자 둘이서 해라. 다 되면 나한테 말해. 나는 잠깐 쉬고 올 테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서 홀로그램실 바깥으로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휴게실로 가서 커피라고 하는 새까만 음료를 마셨다.

‘어휴. 좀 긴장했나….’

방금 전까지 태연한 척 했지만 사실 좀 떨렸다. 자칫했다가는 대웅제국이 전 세계의 공적(公敵)이 되거나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칼비오그가 굴복해서 망정이지 수틀렸으면 언제든 회담이 끝장날 수 있었다. 그 긴장감을 마지막까지 버티기는 버거웠기에 쉰다고 핑계를 대고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옆에 류하가 다가왔다.

“초대황제님아.”

“응?”

“저기 이상한 사슴이 있슴다~.”

사슴?

나는 힐끔 통로의 맞은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곳에 은빛의 사슴이 이쪽을 보며 서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건 뭐야?’

궤도 엘리베이터는 성층권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우주궤도일텐데 은빛사슴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화안금정을 발동시켜서 은빛 사슴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눈이 따끔따끔해지는 걸 느꼈다.

“윽!”

뭐, 뭐야?

나는 이내 그것이 화안금정으로 감지한 사슴의 ‘힘’이 엄청난 수준이기 때문에 휘광 때문에 눈이 부셨다는 걸 알아챘다. 신력인지 뭔지 모를 힘이 마치 천령단이나 원영신을 연상케 하는 수준으로 내부에 뭉쳐있었다.

‘물(水)의 속성…!! 만만치 않아!’

그리고 나는 은빛 사슴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깨닫고 재빨리 검을 뽑았다. 승산이 확실하지 않다고 까지 여겨졌다. 한 순간 화안금정으로 스쳐지나간 은빛사슴의 이마에 태극(太極)이 새겨져있던 것 같았다.

…….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은빛 사슴의 신형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긴장한 상태로 아무것도 없는 복도를 쳐다보자, 어느 새인가 내 옆에 와 있던 초상기인 류오(劉烏)가 말했다.

“폐하. 놓쳐서 죄송합니다.”

“뭐? 넌 언제 왔냐?”

정말로 언제 온 거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류오가 이 근처에 없었는데 어느샌가 나타나 있었다. 류오가 부복하며 말했다.

“제 고유능력으로 저 사슴을 속박해 보려 했지만 저항력이 있군요…. 기이한 존재입니다. 생명체는 제 고유능력에 저항할 수 있을 리 없는데.”

얘는 뭔 소리한다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어쨌든 은빛 사슴을 놓친 건 사실이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른 전술요원 다 불러서 경계시켜라. 또 나타나면 바로 홀로그램실로 와서 날 불러. 난 얘기를 빨리 마무리 짓고 나오지.”

“존명.”

나는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칼비오그가 내게 말했다.

[우리 은하부족연맹은 마도왕께 [종말의 정보]에 대한 공증료를 지불했다. 이제 말하면 된다.]

[알았다. 그럼 말해주지.]

나는 ‘종말’에 어떤 일이 닥쳐오게 되는지 차분하게 말했다. 우선 지구가 난데없이 소멸하는 것은 물론이고 [옥좌]로 향하는 거대한 문으로 빨려들어가게 되며, 그 문에서 지구가 토해지면서 인류 100억명이 몰살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파멸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며 그 여파를 측정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말해 주었다.

물론 우주가 멸망한다는 얘기, 그리고 옥좌 내부의 길을 통과할 때 보았던 광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직접 내가 확인한 것도 아니었고, 그걸 굳이 말해서 좋을 건 없었기에.

[……!!]

칼비오그도 아예 몰랐던 사실인지 충격받은 표정이었고, 사공린을 제외한 모든 인류대표자들이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미국대통령인 제럴드는 자신의 굵은 담배를 씹어물고 있다가 퇫하고 뱉으며 말했다.

[소설을 쓰는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야.]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제럴드뿐인 듯 했고, 대부분은 내 말을 사실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칼비오그가 말했다.

[위대한 마도왕께서 그대 이야기의 진실성을 공증하셨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어떤 존재이기에 기껏 인간따위가 위대한 회귀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인가?]

[알고 싶냐?]

[그렇다.]

나는 씩 웃었다.

[알고 싶으면 너네 종족의 보물을 다 털어서 내놓고 영원히 내 부하가 되어라~~. 그럼 가르쳐 줄게.]

[…….]

[…임마. 농담이야. 뭘 진지하게 고민해.]

나는 포기하라는 뜻으로 일부러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거지만, 뜻밖에도 칼비오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도리어 내가 당황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침묵이 이어지다가 칼비오그가 말했다.

[그대들 인류와의 계약은 성실히 이행하겠다. 핵심 과학기술을 이전해줄 자들이 곧 모선(母船)을 타고 그대들의 행성으로 1년 내에 찾아갈 것이니, 기다리고 있도록 하라.]

[알았어. 더 용건은 없냐?]

[파멸이 은하계 전체로 확대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우리 은하부족연맹도 거기에 대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귀하의 정보에 감사한다, 백웅.]

[흠. 없단 말이군.]

[그럼 이만….]

파앗

칼비오그의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인류대표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옆에 있던 사공린이 내게 말했다.

“백웅. 이만 나가셔도 좋습니다. 나머지 잡일은 제가 처리하지요.”

이제 남은 건 인류대표자끼리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었는데 굉장히 까다롭고 성가신 정치적 회의였다. 사공린은 내게 그 부담까지 지워주는 게 맞지 않다 생각해서 나를 내보내 주는 듯 했다.

“그래도 돼?”

“다 해놓으셨으니 나머지 일은 제가 해야겠지요. 정말로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아, 맞다! 방금 전에 웬 은빛 사슴같은 게 나타났는데….”

나는 사공린에게 방금 전 보았던 은빛 사슴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자 사공린의 안색이 크게 달라지더니 말했다.

“역시 그 사슴이 나타났군요. 강력한 힘이 출현했길래 무엇인지 신경쓰고 있었습니다만….”

“굉장히 강한 존재였어. 뭐였을까?”

“…약간 짐작가는 게 있습니다. 지금 말할 건 아니니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알았어.”

“류하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덜컹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슈아악-

갑자기 주변의 풍경이 회백색 풍경으로 뒤바뀌더니, 이윽고 요아찬란(妖娥燦爛)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이 광경을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선지자의 고향별의 모습이었다. 과거에 무창의 탑의 권리를 빌렸을 때 본 적이 있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슬며시 옆을 쳐다보자, 선지자가 서 있었다. 선지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전생자여…. 방금 전 그대는 이 우주의 운명에 거대한 파급(波及)을 일으켰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무래도 저 놈은 시공간을 조작해서 나를 이 장소에 초대한 듯 했다. 신적인 존재가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걸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니었다.

“뭐? 내가 파급을 일으켰다고?”

선지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대가 누설한 종말의 정보는…. 이 대우주 전체에서 선택받은 몇몇만이 인지하고 있던 것…. 심지어 [옛 지배자]들조차도 대부분이 그 정보를 알지 못하며…. 신좌(神座) 중에서도 극히 고귀한 존재들만이 알고 있었지…. 말 그대로…. 승천(昇天)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는 천기(天機).]

“음.”

[허나 전생자여, 그대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기껏 필멸자에 불과한 은하부족연맹주 칼비오그에게 천기를 누설했다…. 아무리 필멸자 중에 강대한 권세를 갖고 있어도 놈은…. 진정한 신들에 비하면 벌레에 불과한 놈….]

“…….”

[본디 내가 인과율의 고리에 끼어들어서라도 막았어야 할 일…. 하지만 질서의 근원에게 주청하여 이미 정향의 인과율을 얻어버렸구나. 그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우주의 대신격들이 이번 교섭에 전혀 끼어들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선지자가 왠지 폭소를 터뜨리는 듯 했다.

[후하하하…. 지금 격조높은 지배자들끼리 지지고볶고 난리가 난 걸…. 그대한테도 보여주고 싶군…. 후하하.]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그럴 리가…. 그대는 인간이 아니라 전생자…. 전생자의 삶에 그 누가 과오를 논할 수 있겠는가…. 신 조차 그대를 심판할 수 없거늘.]

선지자가 근처에 있던 옥좌로 다가가서 앉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를 심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그대 자신 뿐…. 우주적인 운명의 고리를 말 몇 마디로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구나…. 옆에서 보고 있자니 그저 무시무시할 따름.]

“젠장! 있어보이는 척은 그만해.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혼돈의 신들이 날 공격할거란 말이냐?”

내가 성질을 내자 선지자가 대꾸했다.

[아니…. 그렇진 않겠지…. 아직 혼돈의 신들이 그대에게 관여할만한 인과율은 없어…. 하필 정향의 인과율을 두르고 있으니 더더욱. 다만 그대가 나의 단골이기에 조언을 하려고 부른 것이다….]

“조언?”

[정향의 인과율은 이번처럼 쓰면 다른 혼돈의 신격들에게 미움받게 마련이다…. 소모도 심하지…. 차라리 질서성향의 존재들과 자주 접촉하는 게 효율이 좋을 것이다…. 그게 정석적인 사용법이겠지.]

“흐음.”

[이번 거래에 나를 데려온 값은 받지 않겠다. 그대 덕에 판이 재밌어지고 있으니 그걸로 퉁쳐주지…. 삼황오제가 사라진 후 다소 지루했었는데…. 흐흐. 이제부턴 재밌겠어…. 역시 전생자가 있어야 해….]

혼돈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왠지 즐거워하는 기색이다.

저런 걸 보면 저 놈도 역시 혼돈의 왕좌 중 한 명이었다.

“…….”

[앞으로 내게 어떤 거래를 하자고 찾아올지도 궁금해지는구나…. 또 보자.]

파앗!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원래대고 되돌아와 있었고 선지자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멀뚱하게 서 있다가 밖으로 걸어나갔다.

‘흥. 뭐 어쩌라는 거냐….’

나는 코를 후볐다. 죽으면 죽는 거고 저 놈은 여전히 재수없다. 그거면 끝이다.

약 한 시진 후, 사공린이 회의를 끝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사공린은 회의결과를 내게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사실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것들 같았지만 일단은 관심있게 다 들었다. 사공린은 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말했다.

“백웅. 아까 전 출현했다던 그 사슴은 과거에 본 적 있습니다. 그 사슴은 중요한 역사의 분기마다 출현했습니다.”

“뭐?”

그녀가 투명한 눈으로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단(檀)의 일족에서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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