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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천우진의 말에 나는 놀랐다.
“부화시키자고?”
천우진이 전자담배를 탁자에 톡톡 두들기며 대꾸했다.
“알이니까 당연히 부화하겠지. 혼돈의 속성인 게 틀림없어 보이니 네 음신지력에 반응할 거고. 틀린 말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그건 그런데 위험하지 않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예전에 알을 얻었을 때 그 방법을 안 쓴 이유는 알을 부화시켰을 때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서였잖아.”
그렇다. 천우진이 지금 한 말은 다른 책사들이 생각 못한 게 아니다. 당연히 알을 얻는 순간부터 그걸 부화시키자는 계책도 내었지만, 알이 너무나 정체불명이었기에 그 후환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하필 예전에 알을 얻은 시점이 너무 중대한 시점이었기에 그 시기에 내가 알 때문에 돌연사하게 되면 심하게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래세계 500년 후에 오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고 지금 죽으면 엄청난 손해다. 과연 그 위험부담을 무릅쓰고서라도 알을 부화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천우진이 말했다.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네가 얻은 그 알이 내포하고 있는 가치를 볼 때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해야할 일이야. 게다가 이미 지금 시점에 인간진영이 종말을 극복할 가망은 없다고 봐도 좋으니, 죽어도 네놈을 원망할 일은 없다.”
“……!!”
“따지고보면 그렇게까지 사릴 일도 아닌 것 같다만. 어차피 네놈은 전생자인데 한번쯤 죽으면 뭐 어때.”
나는 담배연기 사이에서 권태로운 표정을 짓는 천우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고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너, 변했군.”
“어떤 점이?”
“조금…. 염세적으로 변한 것 같다.”
순간적으로 제갈사와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들었다. 다만 제갈사 정도는 아니고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큭.”
쓴웃음을 머금은 천우진이 전자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허공을 쳐다보았다.
“난 원래 그랬다. 다만 수백 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다 보니 이젠 젊은 놈들처럼 진력을 다해서 까다롭게 생각하기 싫어졌지. 나도 이 시대의 기준으로는 살아있는 중세시대의 유물이다. 500살이 그리 흔한 건 아니잖나.”
“…….”
“다만 인간진영에 승산이 없다는 건 사실이야. 이쪽 책사들 계산대로라면 네가 해신전에서 승리해서 귀환한 후 인간종족을 통합한 후 수백 년 동안 힘을 키웠어야 했다. 그런데 네가 실종되고 온갖 잡놈들과 전쟁을 치른 시점에서 글러먹었던 거지.”
“삼황오제가 사라진만큼의 이득이 있지 않았던가?”
“글쎄…. 군주인 네놈이 사라진 만큼의 손해를 충당할 정도였는지는 의문이군. 내 생각엔 손해도 이득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공린이야 사려가 깊으니 네놈이 기 안죽게 둥기둥기 해주려고 말을 그렇게 했다만 사실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지.”
달각
천우진은 전자담배를 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여하튼 네놈은 뭐든 해 봐라. 모험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계획대로 종말을 맞이해봤자 결과는 뻔하니까. 사형과 책사들이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놨다만 솔직히 종말에 닥쳐올 신적 존재들을 이겨내기엔 턱도 없어.”
“으음…!!”
“그 모험의 일환으로 알을 부화시키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본다.”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 역할인지도 모르겠군….’
현 시대에서 순수한 내 무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의외로 높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 지혜로 헤쳐나갈 만큼 내 머리가 좋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전생자로서 지니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서 의외성을 확장시켜나가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일 것이다. 천우진은 그 점을 내게 강조하는 듯 했다.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잠깐 기다려.”
“왜?”
“공간을 만들어주마.”
우우우우
“환무진(幻霧陣) 소환.”
천우진이 눈을 감고 기이한 주문을 외우자, 사방의 풍경이 마치 천계의 영산처럼 변화했다. 주변의 현대적인 풍경은 온데간데 없었고 어느 새 풀과 꽃이 가득한 초록빛 평원에 서 있었다. 나는 이게 환술이면서 동시에 실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내심 감탄했다.
‘절반의 역량밖에 찾지 못했는데 이 정도인가?’
이 공간은 천우진의 의지로 지배되므로 이 안에서 천우진은 신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술법지식으로 미뤄볼 때 이 정도 결계를 작성하려면 최소한 금오도 십천군급의 술사여야 했다. 천우진 또한 오백 년 동안 강해진 듯 했다. 천우진은 환술공간을 만들어낸 후 말했다.
“설령 폭발해도 한 번 정도는 내 힘으로 현실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 거다.”
“여긴 네 의지로 지배하는 환술공간 아닌가? 왜 한 번이라고 단정짓냐.”
“그 알에 감춰진 잠재력이 측정불가능하니까…. 내 힘을 현격히 뛰어넘는 혼돈의 권능은 꿈으로 무마할 수 없다.”
“…시작할게.”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알에 손을 갖다대었다.
‘그래 뭐. 죽으면 죽는 거지….’
이것저것 다 따지면서 기다리다 보면 예측하지 못한 일이 터져서 하지 못하는 일이 일상이다. 이론적으로는 지금 시도하는 게 무모한 모험밖에 되지 않지만 왠지 지금 하는 게 낫다는 직감 또한 들었다. 나는 마음을 크게 가라앉히고는 신중하게 음신지력을 끌어내어서 알에 쏟아부었다.
쿠오오오…
음신지력은 마치 비어있는 물병에 물을 붓듯이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나는 장심이 알에 딱 달라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종래에는 팔의 혈관이 끌어당겨지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크으으윽….”
뭐, 뭐가 이렇게 많이 먹어?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숨 열 번 쉴 사이에 벌써 30년치 음신지력이 흘러들어갔으며 흡수량은 가면 갈수록 많아지고 있었다. 팔이 터질 것 같았고 장심을 떼려고 해도 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체력마저 달리는 기분이 들어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헉, 헉, 허억….”
이런 말도 안 되는….
얼마 전 수요를 각성시키려고 음신지력을 불어넣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하다! 순식간에 50년치가 빠져나간 걸 느끼자 나는 급격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반 식경도 지나지 않아서 내가 가진 음신지력이 고갈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쿠오오오!
쿠오오!!
알은 더욱 거세게 내 음신지력을 먹어치웠다. 나는 말할 힘도 없어져서 알에 달라붙듯 몸을 싣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새 흡수된 음신지력은 100여년에 이르렀고, 순식간에 임계치를 돌파해서 내 밑바닥을 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쿠구구구…!!
그 순간, 수요를 각성시켰을 때 느꼈던 그 가공할 초회복력이 느껴졌다.
‘왔다!’
실이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음신지력이 다시 정점까지 들어차는 게 느껴졌다. 나는 체력이 다 회복된 느낌이 들어서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다시 표정이 암울하게 굳어졌다.
쿠구구구!!
“으… 으아악.”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음신지력이 다 회복되었는데도 흡수력이 증폭되어서 순식간에 절반까지 다 빨아먹혔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의 흡수력은 난생 처음이었기에 나는 급히 장심을 알에서 떼려고 했지만 단단히 달라붙어서 빠지지 않았다. 나는 위기감을 느끼고는 팔에 힘을 주었지만 팔에 감각이 없었다.
쿠오오오 - !!
‘으아악. 또 전부 고갈되었….’
알이 또 다시 내 음신지력을 다 빨아먹었고, 다시 한 번 초회복력으로 음신지력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방금 전보다 더더욱 빠른 속도로 알이 음신지력을 먹기 시작했고 나는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안돼애애애….”
쿠궁…
갑자기 알이 음신지력의 흡수를 멈추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에서 손을 뗄 수 있었고, 뒤로 풀썩 주저앉았다.
“…….”
쩌적
알은 갑자기 뭔가 깨지는 소리를 내더니 겉의 껍질이 파삭 하고 부숴지기 시작했다. 알의 껍질은 저절로 깨지기 시작했는데 균열이 확대되어서 완전히 다 무너지자, 그 안에서 새빨간 알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내었다.
후두둑….
적란(赤卵)이다!
“…뭐냐고…!!”
나는 모습을 드러낸 새빨간 알을 보자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알이 깨지면 내용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알 안에 알이 또 있다고?! 사람 놀리는 건가?! 내가 황당해서 어이없게 쳐다보고 있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아무래도 또 해야할 듯 싶군. 2차해방을 해야하겠다.”
“뭐라고?!”
“내 예측으로는 방금 전보다 더 강하게 음신지력을 먹어치울 것 같군. 백웅, 얼마나 음신지력을 소모했지?”
나는 천우진의 말에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대꾸했다.
“제기랄! 한 번에 400… 아니 5백년치는 빨아먹혔어!! 근데도 알이 다 안깨지다니 대체 이게 말이 되는거냐고!!”
5백년치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 신력을 단순 연차로 세기가 힘들어서 그냥 느낌상으로 재고 있지만, 기이한 초회복력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에 음신지력이 고갈됨과 동시에 사망해버렸으리라. 기가 막히는 상황에 내가 망연자실해 있자 천우진이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신(神)만이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특수한 알인 것 같군. 네 음신지력으로도 고작 1단계를 해금할 정도라면 실질적인 필요신력은 [옛 지배자]의 권능 수준이다. 애시당초 인간은 커녕 상위 외계종족조차 봉인을 해제하는데 종족의 명운을 걸어야 할 정도군.”
“마… 말도 안 돼. 이런 게 존재할 수 있는 거냐? 전설의 칠요나 보패도 이 정도로 음신지력을 넣어주면 각성할텐데….”
“단순하게 생각해. 넌 지금 칠요각성보다 더 많은 음신지력을 소모했지. 족히 배는 되는 음신지력을.”
“그런데?”
천우진은 전자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 알에서 깨어나는 게 칠요의 격을 몇 배나 초월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겠나? 잘은 모르겠지만 삼황오제조차 이 알을 최종단계까지 해방시키려 하면 상당한 힘을 소모해야 할 거 같다.”
“…….”
“예상 이상의 거물이군. 명명하자면 우주(宇宙)급 보물이야. 필멸자는 그 존재를 아는 것 자체가 재앙이며 [옛 지배자] 수준에서나 취급할 수 있는 절대적 존재. 그러니까 선지자가 탐을 내겠지만.”
“대체 이 알은 뭐지….”
칠요를 넘어설 수 있는 건 사대신기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게 또 있었다니. 내가 경외어린 눈으로 알을 쳐다보자 천우진이 말했다.
“…백웅.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만.”
“뭐냐? 이 알에 더 음신지력을 불어넣는 건 거절하겠어. 암만 그래도 지금은 좀….”
나는 학을 떼며 말했다.
‘의문의 초회복력이 또 발동할지 미지수야….’
방금은 운이 좋았다. 만에 하나 그 초회복력이 또 발동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속이 텅텅 빈 채 말라죽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내가 간이 배밖에 나왔어도 빨간색 알에 음신지력을 또 불어넣는 모험을 할 순 없다.
천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에서 네가 아무리 힘을 다 소모해도 이 알을 해방시키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1단계 해방이 되었다면 이 알의 가치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지 않나?”
“가치?”
“그래. 이 알은 처음보다 훨씬 가치가 높아졌단 거다. 왜냐하면 네가 미리 힘을 소모해서 1단계 해방을 시킨 상황이니까 이 알을 최종해방시키고 싶은 자는 그만큼의 힘 소모를 줄일 수 있단 뜻이 아니겠나.”
“그건 그렇지.”
“이걸 그대로 반고에게 공양해 보자. 목갑에 반고의 상은 갖고 있지?”
“어…, 갖고 있지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반고에게 공양하자고?”
“그래. 반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그 축복…. 정향(正向)의 인과율. 그게 있다면 큰 대국의 축을 인간에게로 실어오는 게 가능하다. 그 효과는 너도 지난번에 체감해본 적 있잖나.”
“…그래! 그 수가 있었군.”
“천제단과 술법의 준비는 내가 하겠다. 구천현녀에게 연결하는 것도 사형이 작업을 다 해놔서 손쉬운 일. 지금 바로 시행하자.”
파앗!
나는 천우진, 류하와 함께 숭산의 천제단으로 갔다. 나는 숭산의 천제단 또한 화산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마련되어있는 걸 확인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흠… 소림사라. 신승 명호대사는 죽었을 테고. 방주는 아직 운영하고 있냐?”
“물론. 명호대사는 좀 다른 얘기다만….”
짧게 대답한 천우진이 천제단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천제단을 연속해서 사용하면 천제단에 맺혀있는 신기(神氣)가 소모되어서 효율이 낮아진다. 한 번 천제단을 쓰면 다른 장소의 천제단에 가야 해.”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시대에는 그런 제약 없었잖아.”
내가 반문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천계가 우리 차원과 멀어진 여파로 생긴 제약이지. 천계가 가까울 때는 천제단을 반복해서 써도 상관없었지만 멀어졌기 때문에 신기의 충전이 느려. 마찬가지 원리로 현재 이 세계의 술법사(術法師)들은 전반적으로 주문의 충전이 느리다.”
“…으음. 골치아프군. 근데 술법은 복희에게서 비롯되는 거라서 천계와는 상관없는 게 아니었나?”
“술법 자체는 그렇지만 천계가 정순한 힘의 통로 역할도 하니까. 천계가 가까울수록 이 세계의 술법사에게 유리한 거지.”
“그렇군.”
“이제 다 왔다.”
“응? 저건 뭐지?”
나는 숭산 천제단의 앞에 웬 인간형 기계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외골격이 은빛 기계로 이루어있으며 앙상마른 몸에 소림사의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한 손에는 목탁을 들고있는 걸로 봐서 영락없는 스님의 차림이었다.
‘기계가 스님 모습을 하다니.’
내가 어리둥절해져서 저 스님기계를 쳐다보자 그 존재가 천우진에게 천천히 합장하며 몸을 숙였다.
[천우진 시주. 반갑소. 천제단을 이용하러 오셨소?]
“그렇소, 명호 대사.”
[기다리시오. 장치를 가동하겠소.]
……응?
내,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나는 스님기계가 움직이는 걸 보고 당황해서 천우진에게 말했다.
“야…. 명호 대사라고? 무슨 소리야. 저게 어떻게 명호 대사야.”
천우진이 귀찮은 듯 대꾸했다.
“진짜 신승 명호 대사는 요괴대전이 끝나고 회복기에 환골탈태의 한계로 수명이 다해 죽었다. 그러나 그가 남겼던 사리(舍利)가 있었는데, 이후 대웅제국에서 그 사리를 안드로이드에 융합시키자 명호 대사의 기억과 능력이 안드로이드에 이어졌어.”
“……!!”
“기계로 전생(轉生)했다고 할 수 있지. 사리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서 사후세계로 가는 걸 미뤄둔 덕이었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런…. 초상기인에 명호대사의 기억을 넣어서 되살릴 수도 있었잖아.”
“명호대사 본인이 초상기인을 거부했다. 마도의 힘이 묻어있는 초상기인으로 생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면서, 차라리 기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 대웅제국은 수십 년 후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
“그는 대웅제국이 최초로 만들어 낸 안드로이드이기도 하다.”
나는 할 말을 잃고 눈앞의 [신승 명호 대사]를 쳐다보았다.
덜컹
덜컹
기계장치를 모두 가동시킨 명호 대사는 내 시선을 느끼자 합장했다.
[백웅 시주. 간만에 뵙소.]
명호대사가 맞다. 나는 이혼대법을 습득한 자로써 영혼의 감각을 세밀하게 알 수 있었기에 바로 알 수 있었다. 기계의 몸에 기계음성이라 해도 저건 명호대사가 맞았다.
‘설마 기계몸에도 영혼이 이어질 줄은….’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천계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한백령 시주와 같은 이유…. 천계에 가면 정해진 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 이 세계에 남아서 소림사를 지키고 싶었소.]
“…….”
[그대는 결국 돌아왔구려…. 오랜 기다림이 헛되지 않음이오.]
명호대사가 나를 향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나는 멍하니 있다가 마주 합장했다.
“아미타불.”
영혼이란 대체 뭘까?
나는 명호대사를 보자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혼대법을 이토록 오래 연마하고 있는데도 영혼이란 건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것이었다.
나는 이윽고 천제단에 반고의 상과 1단계 해방 적란을 함께 올려두었다. 그리고 천우진이 제단 앞에서 주문을 외우며 서서히 반고에게 공양을 바치는 의식을 시작했다.
우우우-
잠시 후 천제단 위에 구천현녀의 환영이 소환되었다. 구천현녀를 불러낸 천우진이 말했다.
“구천현녀여. 우리는 이 반고의 상과 적란을 반고에게 바치려 합니다. 이 세계에 정향의 인과율을 얻어 세계의 종말에 대비하고자 하니 도와 주십시오.”
[천우진이군요.]
“그대는 이미 사형에게서 수호자의 업을 각성했으니 저희가 하는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반고에게 공양하는 일도 그리 어렵진 않겠군요. 정향의 인과율에 필요한 제물을 살펴볼까요…. 단 1회로 끝날 거란 사실은 유념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망량이 이미 구천현녀에게 수호자의 업을 다 알려줘서 각성시키고 아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밑작업을 다 해둔 듯 했다. 그래서 천우진이 대뜸 반고에게 공양하는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우우우
[음…? 이 기운은… 어디선가….]
시해지술의 법문을 운용하던 구천현녀는 적란을 의혹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설마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진행하겠습니다….]
그 때였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굉음과 함께 하늘에서 암운이 맺히더니 거룡(巨龍)의 비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비늘의 색깔이 금빛인 걸 보자마자 나는 그게 어떤 존재인지 알아차렸다.
‘응룡!’
역시 응룡이 끼어들려는 것인가?
파지직 파직
파직….
하지만 비늘 끄트머리 정도만 소환된 상태에서 번갯불만 몇 번 파직거리다가 이내 암운이 걷히고 말았다. 허망하게 응룡의 소환이 중단되자 구천현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시 그 날 이후 만신전의 힘 또한 크게 약화되었군요….]
“응룡이 이 세계에 넘어오려다가 실패한 이유입니까?”
[그렇습니다. 흉신의 자멸과 함께 일어난 멸신의 저주…. 그건 만신전에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원래 응룡이 정향의 인과율 공양과정에 끼어들어 방해를 하기 마련이었지만 아무래도 흉신이 소멸되며 남긴 여파가 응룡에게도 타격을 준 듯 했다. 다행이긴 했지만 정말로 이 세계에 삼황오제의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끼어들었어도 응룡에겐 명분이 없으니 말빨로 물리칠 순 있었겠지만…. 씁쓸하군.’
우우우….
이윽고 구천현녀의 환영이 사라지더니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졌고, 그 근원의 소용돌이에 반고의 상과 적란이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질서의 영겁(永劫)이 비쳐보이는 정적의 세계 너머에서 예전처럼 [목소리]가 들려 왔다.
세계의 천장을 떠받치는 거인이 말했다.
[…과하다…. 남은 대가를 돌려주리라.]
쿠오오오오!!
잠시 후 공양의식이 끝났고, 초상적인 현상이 모두 사라지고 숭산의 천제단에 정적이 찾아왔다. 원래 정향의 인과율을 받으면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희망이 좀 생겼겠지…. 어.’
저것은?
나는 뜻밖에도 제단 위에 뭔가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제단에 다가가서 새롭게 나타난 걸 손에 집었는데, 그 모습을 확인하곤 말했다.
“밧줄? 아니…. 새끼줄인가.”
새끼줄이다.
짚을 꼬아서 만드는 전형적인 새끼줄 같았고 신기(神氣)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여러 번 손을 탄 듯 했으며 영력도 없었기에 영락없는 천민들의 실생활에 사용하는 새끼줄 그 자체였다.
“…….”
아니 창세신이 왜 이런 걸 주지…?
나는 반고가 이런 걸 왜 줬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단 천우진에게 보여주었다.
“나도 뭔지 모르겠군….”
“어떻게 하지?”
“일단 넣어둬라. 반고가 공양의 대가가 남아서 줬다면 평범한 건 아닐테지.”
나는 목갑에 새끼줄을 집어넣었다.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