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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용중일이 배신했다고?!
“…그랬군.”
나는 살짝 놀랐지만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없는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다가, 오래된 일이라면 동료들이 그만한 대비를 했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한백령이 잠시 관찰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놈이 왜 배신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놈은 자신의 세력과 칠대절학을 가지고 단의 일족으로 귀순했지. 당연히 단의 일족 또한 칠대절학을 쓰게 될 테니 파해식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알겠다. 혹시 용중일 때문에 우리 측이 피해를 입었나?”
“칠대절학의 유출 자체가 피해라면 피해겠지. 용중일이 우리와 직접 부딪힌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럼 됐어. 그런 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지금 단의 일족이란 놈들은 뭘 하고 있지? 그리고 십이율주는?”
내 질문에 한백령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네가 실종된 후 놈들은 고려의 지배권 탈환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시에만 틀어박혀 방어에만 집중했다. 한두 번 정도 아군 전력을 끌고가서 도발한 적도 있었지만 겁쟁이라고 보일 정도로 밖에 나오지 않았다. 요괴대전 때도, 제 3제국과의 전쟁 때도 두문불출하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지금도 술법결계로 감시를 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나오는 기척은 없다. 놈들은 오백 년 동안 거기에서 은둔하고 있다.”
“율주도?”
“아마… 놈 또한 활동을 정지했고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대꾸한 한백령은 다소 곤란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순진하게 정말로 단의 일족이 활동을 멈췄다 생각한 녀석은 아무도 없었지. 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지금까지의 흐름에 개입했을 거다. 다만 네가 없었기에 특별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놈들을 잡아 족치지 못했을 뿐.”
“…으음.”
“좀 이상하긴 하다. 요괴전쟁의 막바지나 제 3 제국의 소멸당시, 우리 또한 큰 피해를 입어서 힘이 크게 약화된 적이 있었지만 그 때도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정말이냐?”
“그래. 철저히 은둔하기만 할 뿐 우리에게 공격을 해 오지도 않았다.”
“…….”
골치 아프다.
대웅제국의 최고위 간부라 할 수 있는 한백령조차 놈들의 대외활동이 전혀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 정도라면 조직이 가사상태에 빠져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가사상태라 하기에는 십이율주쯤 되는 자가 그럴 리가 없었기에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 것인지 모를 뿐이리라. 놈들의 실체를 알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섣불리 음모론만 펼쳐도 무의미한 일이긴 하다.
‘젠장. 귀찮은 일이 늘어났군….’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가 한백령에게 말했다.
“놈들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보지. 그나저나 혼돈과 태허의 융합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나?”
“알려달라고?”
“그래. 그 수련법을 내가 알고 있으면 한결 일이 더 쉬워질 거 아냐.”
나도 혼돈과 태허의 힘을 융합시켜서 강대한 힘을 손에 넣고 싶다! 뿐만 아니라 망량선사의 말에 따르면 수천 수만년간 수행하면 삼황오제에 버금가는 위력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하니 좋은 게 아닌가!
그러자 한백령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왜?”
“이 수련법의 전제조건은 절대적인 혼돈의 보유량이다. 너는 음신지력의 대성과 신력강화로 이 조건을 충족시키려 했던 모양이지만, 교주는 수련법을 연구하던 중 자신의 수련법이 네게 독(毒)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 동료가 된 후에도 네게는 따로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뭐? 독이 된다고? 왜?”
“…교주는 균형, 즉 태극이무극(太極而無極)의 원리를 계속 강조했다. 즉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본디 이 수련법은 독이 아니다. 도리어 혼돈의 신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수련법이라 할 수 있고, 그걸 위해 선행조건으로 천령단 혹은 원영신을 갖추는 셈.”
한백령은 탁자에 팔을 올리며 손깍지를 끼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교주는 혼돈에서 출발하여 태허에 도달한다. 혼돈의 극대화 속에서 태허의 추출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혼원태극(混元太極)의 신성을 얻어내는 셈. 사실상 인간이 신이 되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일 수도 있지. 그러나 넌 출발조건이 다르다. 아니, 도리어 반대가 될 수도 있어.”
“반대라고…?”
“넌 네 생각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전생자(轉生者)가 갖춘 토양은 인간이 결코 일생에 이룰 수 없는 기반을 갖추고 있으니, 그 어떤 천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생(一生)에는 너같은 조건을 갖출 수 없다. 그런 네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수련하게 되면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는 말이다. 교주는 줄곧 그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계? 무슨 한계 말이냐?”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신(神)이 된다면 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한계가 생기겠지. 그건 네 최후의 소원과 배치되는 일. 그렇지 않나?”
“……?”
“네 전생 초기였다면 이 수련법이 득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책사들과 교주 독고운천이 십수 년간 토론한 결과 그건 답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지금 너는 이 수련법을 시행해서는 안 돼.”
“왜?”
뭔 소리여?
내가 한백령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그녀가 훗하고 웃었다.
“달라진 건 없다. 너는 외법(外法)에 한눈을 팔 필요가 없으니, 지금껏 하던대로 하면 된다는 얘기다. 일단은 무공만 익혀서 네 절대지경의 경지를 투선(鬪仙) 수준으로 다듬는 게 먼저다.”
“…알았어.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알아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말했다.
“슬슬 가봐야겠어. 묻고싶은 것도 많지만 지금은 이 시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게 많은 것 같거든.”
“그래라. 칠대절학의 파해식도 당장 급한 건 아니니 나중에 배우러 와도 좋다.”
“그래서 마지막 질문인데….”
“뭐냐?”
“방금 전의 의념천주를 보면 한백령 너도 절대지경에 오른 것 같은데 그 절대지경의 이름은 뭐지?”
틀림없다. 방금 전 칠대절학의 파해식을 상대하며 대련했을 때 한백령에게는 의념천주가 올곧게 뻗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파해식을 상대했다지만 내가 더 심하게 밀렸던 것이다. 사실 오백 년 동안 절대지경에 이르지 못한 게 더 이상하겠지만, 정말 이상한 건 한백령의 절대지경이 어떤 힘을 내포하고 있는지 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한백령이 미소를 지었다.
“나의 절대지경은 화신지혼(火神之魂). 당연하지 않느냐?”
“뭣!”
나는 놀랐다. 왜 놀랐냐면 화신지혼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에 숨겨진 뜻 때문이었다.
“설마 미완성이던 화신지혼을 완성단계로 끌어올렸단 건가!”
화신지혼!
그것은 한백령이 단기간에 엄청난 힘을 끌어올릴 수 있는 특수한 기술이었으며 뇌신지혼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기술이었다. 예전에 몇 번 본 적 있었던 화신지혼을 절대지경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게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오백 년은 긴 시간이었지. 화신지혼은 이제 나의 것이다.”
“…화신지혼의 효과는 뭐지? 뇌신지혼은 번개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었는데 화신지혼은 불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예전처럼 몸이 화염으로 휩싸이는….”
“후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다니, 아직 멀었구나.”
스으
“전생하면서 네가 봤던 모든 화신지혼은 모두 미완성. 진정한 화신지혼이란… 그저 불의 원소를 다루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한백령이 새하얀 손가락을 허공에 내밀었다.
그리고는 마치 허공을 수면(水面)처럼 두들겼는데, 비어있는 공기가 한 방울의 물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파장을 느끼자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스아앗
“……!!”
단숨에 나는 생사의 위협을 느끼고 의념천주가 극한의 집중상태에 이른 것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파장 자체에 내 본능을 위협할 정도의 ‘힘’이 담겨있는 것이다. 한백령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물아(物我)를 뛰어넘은 인식(認識)의 세계에 도달한 화염인 거지. 신의 힘을 담는 그릇이 되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
“이것이 내가 내놓은 절대지경의 답이다. 신(神)을 상대로 싸우려고 만든 힘.”
그렇게 말한 한백령이 파장의 힘을 손으로 거두며 말했다.
“어차피 종말이 다가왔으니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이 위력을 보여줄 날이 올 것이다. 지금 보여주기에는 살상력이 너무 높아서 적당치 않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한백령의 화신지혼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일반적인 절대지경이 아니라 그녀는 교주 독고운천의 수련법을 오백 여년간 계속해서 수련해오며 융합의 힘으로 절대지경을 더 강화했으리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기대하지.”
나는 한백령에게서 물러나온 후 다시금 현 백련교 부교주인 독고숭과 마주쳤다. 독고숭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교주님을 잘 뵈셨습니까.”
“음.”
위잉
나는 독고숭과 함께 하늘을 나는 기계에 탔다. 그리고 함께 내려가면서 물었다.
“당신은 앞으로 종말이 닥쳐온다는데 두렵지 않은가?”
독고숭은 내 질문에 흠칫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허나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응이라….”
“폐하. 잠시 절 따라 오시겠습니까?”
위잉….
하늘을 나는 기계가 드넓은 백련교 건물에서 어떤 중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중층에 도착하자, 드넓은 강당에서 수백여 명의 수련생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걸 볼 수 있었다.
하앗!
합!!
강당에서 기합이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그들은 저마다 사대무류의 무공과 초식을 연마하는 중이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다들 새하얀 백련교의 수련복을 입고 있는데 모두들 어린아이라는 점이었다. 기계에 서서 내려다보던 독고숭이 말했다.
“저 200명은 전 대륙에서 모집한 12세 이하의 재능있는 수련생들입니다. 모두가 천재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어린아이들도 모두 종말의 때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뭐?”
“저희 백련교는 예전부터 종말의 때를 교리(敎理)에 담아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저 아이들 모두가 17년 후에 세상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백련교전에 담겨있으니까요.”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미친 건가? 왜 그걸 알려주는 건가?”
“하지만 알려주었다 하여 저 아이들 중 진심으로 17년 후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지요. 정신에 이상이 오거나 괴로워하는 아이도 없습니다.”
“…….”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더할 나위없이 평안하고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웅제국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으며 문명의 이기가 발전하여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대륙간 중력진공열차가 다니고 있지요. 그렇기에 저 아이들 모두가 백련교의 강한 무공과 입신양명을 노리고 입문했으며, 그들의 머릿속에 세상의 멸망같은 건 허황된 백련교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은 정말로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기에 폐하께서 종말 전에 귀환하셨겠지요.”
독고숭이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폐하. 종말과 계시가 닥쳐오면 모든 인류가 예외없이 미쳐 죽게 된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앙을 겪기에 이 시대의 인간들은 아무런 대비도 되어있지 않으며… 이전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서 억울한 느낌도 듭니다. 왜 우리가 그 절망을 직접 대면해야 하냐는 마음이 들지요…”
“으음.”
“저나 어른들은 살만큼 살았습니다. 그 또한 이 시대에 태어난 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저 어린아이들이 [옛 지배자]가 강림하는 아비규환을 겪어야 할 이유가 있을지요.”
나는 독고숭의 말에 크게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
나는 물끄러미 수련생들을 보았다. 눈에는 즐거움과 활력이 넘치고 있었으며 재기(才氣)도 발랄해 보였다. 의욕이 넘치는 저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건 당연했다. 저런 아이들이 [옛 지배자]와 그 수하들에게 능욕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하여 고깃덩어리가 되며, 영혼조차 영겁토록 고문당하는 건 사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독고숭이 말했다.
“그저 푸념이었습니다. 잊어주십시오, 폐하.”
독고숭이 되려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종말이 오기 전에 자살하거나 할 순 없어. 어설프게 하면 계속 전생하는 횟수만 늘어질 뿐… 난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번 생에는 다행히 전욱이 삿갓무사를 처리해준 덕에 안정적이지만 삿갓무사는 아마 다음 생에도 출현할 것이다. 그 때 놈을 처리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며, 그렇기에 나는 이번 생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텨야 한다. 그리고 미래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얻어야만 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을 고통에서 구해주려고 고의적으로 자살해서 눈 앞의 정보를 다 놓칠 순 없다.
하지만, 독고숭 말대로 이 시대의 인간들이 17년 후에 지옥에 빠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인식했기에 마음이 무거워졌고,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빌어먹을…. 그렇다면 종말 그 자체를 막아보겠어.’
망량선사도 종말이 오는 걸 막을 수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막을지는 딱히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의를 다질 수밖에 없었다. [종말]이 닥쳐오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고통에 빠지는지를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선으로 끝내고 싶지 않아….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뜻밖의 작전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어? 그러고보니.’
지금 당장 해 볼만한 좋은 방법이 있잖아!
“독고숭. 나는 이만 가 보겠어.”
“살펴 가십시오.”
나는 백련교를 나왔고, 생각이 난 순간 바로 류하를 스마트폰으로 호출했다. 1번을 누르자 류하는 부르고나서 바로 소형 전이문을 써서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류하에게 말했다.
“류하. 궁금한 게 있는데 네 소형 전이문은 결계도 뚫을 수 있나?”
“넹? 됨다.”
“어느 정도 수준의 결계까지 뚫을 수 있지?”
“흐음~ 안 되는 데 빼곤 다 됨다. 앱으로 좌표분석만 하면 결계관통능력도 생김다.”
역시.
비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능이었다. 초상기인의 강력한 초상능력에다가 순간이동 특화이기에 비등같은 마도구를 현저히 앞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소형 전이문으로 갈 수 있는 장소는 네가 가본 장소만 가능한 거냐, 아니면 네 기억에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가능한거냐?”
내 질문에 류하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후자임다. 눈으로 본 데도 갈 수 있슴다. 근데 그건 왜…?”
“좋아. 이걸 받아!”
우웅
“우에에에에에엑”
나는 다짜고짜 류하에게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했다. 그러자 류하는 어지러워하는 기색이 강했고 심지어 토를 간신히 참는 듯 했다. 나는 류하에게 말했다.
“이제 내 기억을 받았으니까 내 기억에 있는 장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거겠지?”
“너무함다~~ 어지러워 죽겠슴다….”
“갈 수 있지?”
술취한듯 비틀거리던 류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류하에게 말했다.
“금오도, 갈 수 있겠냐?”
“오효효~~! 난데없이 특급임무를 주시는 잔인한 초대황제임까. 이거 완전 평안한 삶은 끝장이구만! 아마 가능할 거임다.”
류하가 이상한 소리를 하며 푸념했지만 나는 반색하며 명령했다.
“가능해?! 그럼 거기서 진소청이 알을 얻었던 장소로 가. 금광성모가 지키고 있던 곳으로.”
류하의 얼굴이 울상이 되면서 토끼모자의 귀가 쫑긋거렸다.
“전 모름다~~”
파앗!
“초상기인 류하가 명한다! 금오도로 향하는 전이문이여, 개방되어라!”
부웅!
다음 순간, 소형 전이문이 생겨났다.
정말로 현대 초상기인이 앱을 쓰면 금오도의 결계도 뚫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심 놀라면서도 그 소형 전이문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이 전이문 유지할 수 있지?”
류하가 자신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내게 들이대듯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시간이 숫자로 표시되며 줄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앱에는 유지시간 80초임다~”
“뭐? 유지시간?”
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뚫을 수는 있는데 완전히는 못 뚫어서 제한시간이 있음다~~”
“……!!”
그 순간 나는 재빨리 소형 전이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도착한 곳이 예전 금광성모가 지키던 고대 금오도주의 봉인지라는 걸 깨달았고, 류하가 내 기억대로 정확하게 보내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금오도주의 봉인까지는 못 뚫은 듯 바로 앞에 도착했지만 나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으아아아압!!”
무량단!!
꽈광
콰과과광!!
‘빨리빨리!’
모든 의념을 실은 무량단으로 결계를 강하게 가격한 직후, 나는 주먹에 모든 음신지력을 담아서 몇십 번이나 봉인을 난타했다. 그러자 금오도주의 봉인은 한동안 버티다가 약 30초 후 박살이 났다. 나는 봉인이 부숴지자마자 바로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이놈!! 어딜 감히 침입하느냐!!]
등 뒤에서 십천군 금광성모의 비명소리같은 게 들려오며 수많은 금광(金光)이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그 금광을 삼보절기로 피하면서 어두운 유리벽의 공간 내부를 뛰어들어갔고, 이윽고 암흑의 공간 속에서 더듬거리며 알을 찾았다.
‘아 제길…. 기감에도 안 잡히는 거라서 직접 찾아야 하네…. 어딨냐 대체….’
더듬더듬
나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다가 간신히 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을 목갑에 집어넣은 후, 정신을 집중해서 금광성모가 추적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또한 소형 전이문의 위치를 기감으로 확인한 후 묵묵히 기다렸다.
위이이잉!!
이윽고 분노한 금광성모가 암흑의 공간에 나타나며 금광진(金光陣)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아공간 진법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는데, 금광성모가 한 줄기만 닿아도 목숨이 날아가는 금광을 수천 줄기나 내뿜으려는 직전에 눈을 부릅떴다.
파천일보(破天一步)!
파바밧
말 그대로 압도적인 신법으로 금광성모의 아공간을 그대로 무시하고 관통! 나는 멸혼보의 극성인 파천일보를 제대로 운용해서 금광성모를 스쳐지나서 소형 전이문 앞에 도착했고, 바로 전이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등 바로 뒤까지 금광이 자동추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낙법을 취할 겨를도 없었다.
쿠당탕
나는 바닥에 마구 뒹굴다가 경공으로 튕겨오르듯 일어서며 말했다.
“몇 초 남았었어?”
파앗!
그 말이 끝나는 즉시 소형 전이문이 소멸되었다.
류하가 아깝다는 듯 말했다.
“쳇…. 4초 남았었슴다~~”
“…좋아. 그럼 천우진한테 가자.”
나는 류하와 함께 천우진이 있을 장소로 향했다. 천우진은 연구소장으로서 자료를 모두 복구하는 중이었는데 근처의 막사에서 여러 가지 글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천우진 앞에 도착하자마자 금오도의 알을 꺼냈다.
쿠웅
천우진이 금오도의 알을 보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입을 껌벅거렸다.
“너… 이건….”
“천우진. 이게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구체적인 정체는 몰라도.”
“…….”
“이걸 써서 종말을 어떻게든 유예할 순 없을까?”
망량선사가 꿈에 나타나서 내게 했던 2가지 제안과는 다른 길을 만들어보고 싶다. 망량선사는 그 '손님'이란 작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압박을 받는 듯 했고,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가치의 공양물을 잘 써서 망량선사에게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망량선사가 제약이 줄어들면 종말에 대처하기도 쉬워질 테지….’
천우진은 머리가 좋아서인지 단숨에 내 의도를 간파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흠.”
녀석은 액상형 전자담배를 몇 모금 빨다가 말했다.
“아니. 무리다. 스승님은 결계와 합일해서 정상적인 공양의식은 전혀 통하지 않아. 이게 가치가 있다고 해서 대뜸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속물적인 분도 아니시고.”
“무리인가…?”
“하지만 이건 다른 방식으로 쓸 수도 있겠어. 네가 지금 해야 할 건 종말을 미루는 게 아니라, 그 전에 뭘 얻어내느냐니까.”
“무슨 소리지?”
푸우-
천우진이 잠시 전자담배의 여운을 남기다가 말을 이었다.
“백웅. 그거, 바치지 말고 네가 음신지력으로 부화시켜보는 게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