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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한백령은 회색빛 공간에서 나를 지긋이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군.”
“그건….”
스윽
한백령은 내 말을 제지하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한백령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한백령이 무슨 의미로 손을 뻗었는지 알아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흑요석을 달란 거군.’
우웅!
나는 지금까지의 기억을 담은 흑요석을 한백령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잠시 기억을 음미하듯 눈을 감고 있다가 신선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기분이었군. 기억을 얻는다는 건….”
놀라움은 별로 없는 듯 했다. 하긴 흑요석을 얻지 못했어도 지금껏 주변 동료들에게 나에 대해서 들을 건 다 들었을 테니 크게 놀라워하는 게 더 이상하리라.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싶다만.”
“본녀의 대답도 사실은 앞의 두 사람과 같다. 오백 년 동안 일어난 일은 지나치게 많아. 그래서 대부분의 사건은 전뇌자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그걸 열람할 수 있으면 귀찮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훨씬 효율적이지. 하지만 그게 되지 않으니 차근차근 말해 주마.”
한백령이 입을 열었다.
“팔부신중과의 전쟁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 그 당시에 우리 3인의 호법사자는 교주의 명에 따라 몰려다니며 팔부신중과 격하게 싸웠다. 팔부신중 하나하나는 우리 힘으로도 상대하기 힘들었지만 셋이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붙잡아두거나 부상을 입힐 수 있었지.”
“호오!”
요괴전쟁이 그런 식으로 전개됐던 거군!
“그리고 우리가 팔부신중을 붙잡으면 교주가 중상을 입히거나 마무리를 하는 식이었다. 또한 우리가 전면에서 팔부신중을 막는 동안에 후방에서 무인들이 성장할 시간을 벌 수 있었지. 그들은 나중에 참전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군. 좋은 전략이야.”
“하지만 그건 전쟁 초반에나 통했다. 긴나라라는 팔부신중은 두뇌가 뛰어난데다 통솔력이 있어서 점차 전략적으로 놈들의 힘을 쓰기 시작했지. 그리고 우리의 천령단도 한계가 명확히 보이게 되었다.”
“한계?”
한백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한의 내공인 천령단에는 우리도 모르는 약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의념기(意念技)의 강화에 한계가 명확히 존재한다는 거였다.”
“……?!”
“우리 호법사자들은 그 어떤 광세절학을 익힌다 하더라도 더 성장할 수 없었던 거다.”
뭐지?!
나는 처음 듣는 소리였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놀라서 몸을 약간 앞으로 숙였다.
“그 얘기를 자세히 해 줘.”
“너도 알다시피 고수들이 초상승의 절기를 시전 할 때는 내공과 의념을 함께 소모한다. 그리고 우리 호법사자들은 의념을 매우 적게 소모하면서 무한의 내공으로 나머지를 다 때울 수 있기에 강력하지. 호법사자의 천령단이 있다면 본디 초절정의 극의에 달한 자가 큰 소모를 감수하고 사용하는 필살절기의 위력을 무한정 난무(亂舞)할 수 있으니, 강호에서 싸울 때는 이게 무적인 줄로만 알았다.”
달각
한백령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팔부신중 본체의 기본적인 공격력과 방어력은 우리가 쓰는 필살절기가 통하지 않거나 종종 흘려보낼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의 기술을 더욱 강화하려 했지만, 일정수준 이상은 절대로 강화시킬 수가 없었다. 네 흑요석 동료들 중에서 절대지경에 이른 자의 가르침을 숱하게 받아보았지만 무리였다.”
“뭐…?!”
“일반무림인의 눈에는 압도적으로 보이는 절기라고 해도 초월자를 상대로 할 때는 한계가 존재했던 거지. 그 때까지는 인간만 상대했기에 도저히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으음…!!”
나는 한백령의 말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의념기는 이론상 의념과 의지력이 강할수록 강력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래서 강호의 고수들은 당연히 호법사자의 의념기는 무한한 위력을 갖고 있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나 또한 호법사자들 입장에서 그냥 강력한 기술을 난사하는 게 강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위력 자체에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절대지경인 내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의념천주가 있다면 그런 제약은 존재하지 않아!”
“…….”
“또한 백련교주도 기술의 위력에 딱히 제약은 없지 않았던가? 왜 천령단만 그런 건지 모르겠군.”
나는 강하게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의념천주가 있다면 내 역량에 한계가 있을 뿐 이론상 위력은 무한했다. 의념기 자체의 한계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무학의 이론이 모순되어 있기에 나는 어리둥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백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바로 천령단을 얻은 자에게 부여된 제약이었던 거다.”
“제약…?”
“교주는 나중에야 내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천령단은 무한의 기를 사용자에게 부여해 주지만, 그 무한한 기의 덩어리 속에서 의념의 본질인 태허(太虛)를 찾아내어 위력을 무한히 강화시킬 권리를 포기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
“교주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태허와 혼돈을 분리시켜서 감지하는 수련법을 먼저 완성시킨 후에 원영신을 느린 속도로 취득했던 거다. 말하자면 절대지경에 먼저 오른 다음에 원영신을 자기 자신에게 안착시켰던 것…. 우리와는 달랐다.”
나는 머릿속으로 한백령의 설명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랬던 건가…. 그럼 뇌신류 호법사자 이청운은….”
“그 또한 마찬가지. 절대지경인 뇌신지혼을 먼저 얻고 나서 천령단을 얻었으니.”
“…….”
나는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마, 만일에 내가 전생 초중기에 천령단을 얻어버렸다면….’
그랬다면 당시에는 강력한 천령단의 힘을 휘둘러서 전생여정을 훨씬 쉽고 빠르게 이끌어 나갔겠지만, 태허의 힘을 깨닫고 의념천주를 세우면서 절대지경에 오르지는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압도적인 기와 혼돈 속에서 의념천주를 깨닫는 건, 일반적인 무림인보다 한없이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답이 보이지 않는 선택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인가.
한백령이 약간 공허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진심으로 그 때 교주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멀리 와 있었지. 화신류 독립 같은 걸 생각할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이 세계의 종말이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재앙이라니.”
“…….”
“그건 요괴전쟁, 팔부신중과의 대전이 끝난 직후의 일이었지. 요괴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교주는 유일하게 남은 호법사자인 내게 진정한 [융합]의 수련법을 전수해 주었다. 교주는 그 시점에서 자기가 언제 강적과 싸워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융합?”
“너도 알고 있는 혼돈과 태허의 융합….”
“……!!”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한백령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그 수련법을 연마한 덕에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 연마하고 있는 중이지. 그걸 익히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크게 노쇠해 있었을 테지만, 전성기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백령이 통상적인 환골탈태로 얻는 한계수명을 극복한 것인가!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호법사자이며 환골탈태했다고 해도 요괴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면 그 시점에서 삼백 살은 너끈했으므로 노쇠를 걱정해야하겠지만, 한백령은 융합의 수련을 한 덕에 전성기의 힘을 유지하며 반영구적인 삶을 터득한 것이다.
“그리고 제 3제국과의 결전에서 교주는 치명상을 입었다. 동료들과 함께 [옛 지배자]의 사도와 싸워서 격퇴시키는 건 성공했지만, 직후에 나타난 아수라(阿修羅)의 광검(狂劍)에 당했지.”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수라…! 큭, 개자식…! 아수라는 쓰러뜨렸나?”
“어떻게든. 하지만 중상을 입혔을 뿐 놈은 도망쳤다.”
“으음.”
도망쳤다는 건가….
그럼 이 시대에 다시금 아수라와 마주칠 확률도 크다. 그 놈 또한 종말을 알고 있을 테니 모습을 드러내려 하리라.
“희생이 너무 컸다. 그 자리에서 거의 다 죽었으니.”
그렇게 말한 한백령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부터 줄곧 백련교의 교주로서 살아왔다. 사공린과 협력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과학세력에 맞서기 위해 백련교의 교세를 확장시켜 왔지. 또한 종말에 대비해서 일 년의 대부분을 폐관수련에 쏟아서 힘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이고.”
“그래서 한백령 네가 원영신을 갖게 된 것인가….”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자, 한백령은 눈을 잠시 깜박이다가 말했다.
“무슨 소리지? 나는 원영신을 얻은 게 아니다.”
“…응? 융합의 수련법을 전수받았으면 그게 원영신 아니야?”
“아니다. 둘은 별개야. 나는 여전히 천령단을 갖고 있지만 융합의 수련법을 실천해 왔다고 해서 그게 원영신으로 진보하는 건 아니다.”
“뭐, 뭐라고?”
“원영신 자체는 교주 독고운천의 사망으로 대가 끊긴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영신의 전승 자체가 전생자인 네게 방해가 될 것이라 여겨 내게도 그 방법을 전수하지 않았다.”
이게 뭔 소리야?
나는 앞뒤 관계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알쏭달쏭했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한백령이 한숨을 쉬었다.
“…백웅, 나중에 전뇌자가 복구되길 기다려라. 지금 내가 다 설명해서 이해시켜 주기에는 조금 벅찬 것 같군.”
“벅차다고?”
한백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종종 헷갈리는 부분이 있으니까…. 자칫했다가는 오해를 심어줄 까봐 두렵다. 난 교주와 달리 마도(魔道)에는 그리 박식하지 못해서 들은 걸 모두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서 들어둔 설명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일단 전뇌자에 입력해 두었다. 그러니 그것만 있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았어. 어차피 17년 남았으니까 그 전엔 되겠지.”
“그래도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원영신은 천령단과 달리 [옥좌]에서 힘을 끌어오는 것만으로 끝이 아니다. 그건 백련교 종사로써 제의(祭儀)를 치르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기에 천령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흐음… 내 발목을 잡는다는 이유는 그 제의 때문인가?”
“그렇다 할 수 있지. 내 얘기는 이 정도다. 더 궁금한 게 있느냐?”
궁금한 거라.
나는 한백령의 말에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술무력요원인 무천룡 주현성이 전설의 마스터 클래스 어쩌고 하던데 이 시대에는 절대지경이 없다는 건가?”
“그거 말이군.”
한백령은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끼더니 말했다.
“역대 절대지경 고수들은 모두 망량과 제갈유룡의 계획대로 천계(天界)에 가 있지. 그래서 현 시대에 절대지경의 고수는 존재치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엥? 천계?”
“그래. 듣지 못했겠지만, 망량 제갈현의 계획이다.”
그런 계획이 있었다고?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얼마 전 천제단에서 대라신선이 된 망량을 봤는데 그는 나한테 그런 말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어.”
한백령이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더니 슬며시 곰방대를 꺼냈다.
그리고 예전처럼 곰방대를 천천히 피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천계 측에도 거의 알리지 않고 진행 중인 계획이니까…. 망량의 말대로 그 자리는 천계간부한테 다 들리는 자리인데 그가 멍청하게 비밀계획을 말해줄 리 있었겠느냐?”
“…….”
“쉽게 말하자면 현세에 절대지경 고수를 남겨둔다면 자칫하다가는 종말이 오기 전에 전력이 누수 될 위험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전력보존을 하려는 계획으로 인위적으로 절대지경 고수들을 천계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랬군….”
“후후…. 네가 없는 동안 다들 지모와 능력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었다.”
한백령은 낮게 웃더니 말했다.
“허나 본녀는 네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구나.”
“응?”
“무인이 회포를 푸는 방법은 그저 입만 터는 게 아니지 않느냐. 특히 네가 뇌신류라면 말이다.”
스윽
한백령이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다과실의 풍경이 사라지면서 주변이 연무장(練武場)으로 변화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한백령이 내게 쌍검 중 하나를 겨누며 말했다.
“네 기억에 따르면, 너는 몇 번이고 죽으면서 본녀에게 도전해 왔다. 그리고 계속 무공을 키운 결과 결국 초기시점의 본녀을 넘어설 수 있었지.”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 사실이 본녀의 호승심을 자극하는구나.”
이어진 한백령의 말에 나는 그만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너는 500여 년 동안 무공을 수련해 온 본녀를 상대로도 이길 자신이 있느냐? 앞으로 전생을 해서 본녀를 넘어설 수 있겠느냐?”
“…….”
칼날의 빛이 마치 서릿발같이 느껴진다. 그건 한백령의 무공이 나를 위협하고도 남을 수준이라는 걸 의미했다.
“네가 전생자라면 날 넘어서야 할 것이다. 지금의 본녀도 이길 수 없다면, 사공린을 상대로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검법의 기수식을 잡았다. 나는 뇌신류 만승검법의 기수식을 잡았고, 상대인 한백령은 화신류의 용왕검법의 기수식으로 서로 삼 장의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나는 대치한 순간 한백령의 몸에 장중하게 흐르는 기도를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의념천주.
강고한 의념의 기둥이 천지인의 기둥을 이루는 게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내부에서 웅혼한 칠흑의 내공이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게 느껴졌다.
“그럼 일백 초만 겨루어 보자꾸나.”
화신류(火神流)
진야천랑검(眞夜天狼劍)
오의(奧義)
월영천강(月影天降)
그녀의 일검이 거대한 의념을 담고 마치 새벽을 가르는 늑대처럼 내 전방으로 쇄도해 왔다. 나는 저게 화신류의 절세검공 중 하나인 진야천랑검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그대로 굴공검을 써서 흘려보내려 했다.
후우웅
월영(月影)과 같은 검강이 굴공검의 궤도에 휘말려서 양옆으로 파산(波散)하려는 순간이었다. 찰나의 지경에 한백령이 좌수검(左手劍)을 빠르게 내려치더니 그대로 돌진해 왔다.
뭐지?!
생각지도 못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한백령의 속도는 굉장히 빨랐기에 내가 대응책을 내기도 전에 이미 지근거리까지 다가와서 두 개의 검이 종횡무진 난무하고 있었다.
비오의(秘奧義)
굴공검 되치기!
까강!
“……!!”
나는 검력(劍力)이 갑자기 뭉개지면서 내 몸이 크게 뒤로 날아가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검기(劍技)가 완벽히 파해 당한데다가 의념천주끼리 격돌했기에 일어난 충격이었다. 나는 허공을 날다가 재빨리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했는데, 아직도 월영천강이 내게로 날아오는 게 눈에 보였다.
카앙!
나는 재빨리 월영천강을 무마시키며 뒤로 두 걸음을 더 물러났다.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한백령에게 말했다.
“설마 방금 그건… 굴공검을….”
“그래. 파해(破解)했다. 이걸 보여주려고 너와 대련하려는 것이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네가 반드시 익혀야 할 테니까.”
“뭣…!”
내가 깜짝 놀랐지만 한백령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설마 무당파 종사 장삼봉의 무공이 수백 년 동안 불패(不敗)의 아성을 유지할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하물며 네 기억을 받은 불세출의 천재들이 천계의 도움을 받아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켰거늘.”
냉철하게 말하던 한백령의 검이 한 번 부웅 하고 허공을 갈랐다. 그녀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와라. 칠대절학(七大絶學)은 이미 우리들의 손에 무너졌다는 걸 보여주마.”
“좋지!”
파앗
나는 한백령의 말에 호승심을 느끼며 덤벼들었다.
‘칠대절학의 파해식? 보고 싶군!’
그렇다면 이 자리는 다른 무공보다는 칠대절학만 쓰면서 싸워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한백령과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었다는 걸 느끼고는 제일 먼저 칠대절학의 천축검(天縮劍)을 사용했다.
위잉-
한백령의 몸을 빨아들이는 인력(引力)이 발생하며 공격범위를 차츰 넓혀나갔다. 천축검의 인력은 매우 상대하기 귀찮은 것으로, 절세고수라 하더라도 인력에 잘못 말려들면 자신의 공격이 모조리 빗나가거나 치명적인 빈틈을 노출할 수 있었다. 그러자 한백령이 휙 하고 자신의 쌍검을 조반인왕(條盤仁王)의 자세로 전환하더니 의념을 담아서 검을 두어 번 허공에 그었다.
천축검(天縮劍) 파검식(破劍式)
인왕(仁王) 역천비룡(逆天飛龍)
슈아악
‘앗, 파고든다…?!’
나는 찰나지간에 인력의 공간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동강나면서 용형검기(龍形劍技)가 내 상단으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건 순수한 속도가 빠르다기보다는 내 천축검의 인력을 역이용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되려 나를 끌어당기면서 가속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는 상대의 공격을 더 빠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피잇!
나는 아슬아슬하게 삼보절기를 운용해서 인왕 역천비룡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완전히 허를 찔린 상황이었는데도 삼보절기의 특수한 성질 덕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는 피할 수가 없어서 뺨에 상처가 났다.
“허업.”
나는 헛숨을 삼키면서 칠대절학을 연거푸 쏟아내었다.
진무칠절경(眞武七絶經)
태극요지유검(太極曜志柳劍)
한 손으로는 진무칠절경의 방탄진기를 끌어내어 내 몸에 두름과 동시에 다른 한 손의 검으로는 태극요지유검의 검결을 시전 했다. 장삼봉의 절학을 대성한 후에는 대성한 절학을 따로 운용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공격하면 진무칠절경의 방탄진기가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주고 태극요지유검이 상대의 허를 찔러주므로 굉장히 뛰어난 모양새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그러자 한백령이 갑작스럽게 쌍검을 교차시켰다. 저런 건 쌍검술의 수비초식에서 나오는 자세였으므로 당연히 방어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한백령은 교차시킨 쌍검을 그대로 반탄력을 실으며 전방으로 튕겨냈다.
그럼 저건 반격기인가?
절기(絶技)
십자맹룡쌍아참(十字猛龍雙牙斬)!
쉬칵!
“……!!”
십자검기의 첫 일격이 요지유검의 공세에 맞닥뜨리자 나는 칼날이 적의 칼날에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십자검기에 담겨있는 강기의 의념이 일순간 내 의념을 급격히 뛰어넘은 것이다. 나는 요지유검의 변화를 이어나가기도 전에 강능단유(强能斷柔)에 당할지도 몰랐기에 공세를 물릴 수밖에 없었고, 십자검기는 맹진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진무칠절경의 반탄강기에 부딪혔다.
꽈앙!
“큭…!!”
나는 폭음과 함께 몸이 삼 장이나 밀려남을 느꼈다. 겨우 막아내긴 했지만 반탄강기가 십자검기에 완전히 찢겨나가 버렸고, 삼보절기로 겨우 무마한 것이다. 나를 단번에 몰아붙인 한백령이 나직이 말했다.
“너와 나, 순수한 내공이나 의념차이는 거의 없겠지. 하지만 파해식으로 대응한다면 이쪽은 오 할 이상의 유리함을 손에 넣게 되니, 동급에서는 이기기 힘들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한백령의 역량이 나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게 아니다. 내공이야 그녀 또한 오백 년간 수련해 왔으니 나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것이며, 모조리 정확한 반격을 당하는데다가 칠대절학의 성질을 역이용당하기 때문에 이기기가 힘들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하군. 이걸 동료들이 만들어냈다는 건가?”
“그래.”
“…하지만 좀 이해가 안 가는걸.”
나는 몸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왜 이런 파해식을 만든 거냐? 칠대절학은 내 전생시점에서는 이미 무당파에서 거의 실전되어버린 절학이었다. 내가 장삼봉을 천계에서 불러내어 축복을 받고 전승받아서 되살린 거지. 그럼 세상에서 나와 내 동료들 외에는 배울 사람이 없을 텐데 왜 굳이 파해식을 만든 거지?”
“…….”
한백령의 얼굴이 약간 어둡게 굳어졌다. 나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파해식이란 건 대적할 무공에만 특화된 무공이니 파해식이 강하다 해서 무공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닐 텐데. 우리끼리만 칠대절학을 쓴다면 의미가 없잖아.”
“그래…. 원래는 의미 없다. 하지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왜?”
이어진 한백령의 말에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환생자 용중일이 칠대절학을 배운 후 단의 일족에 그 절학을 넘기고 동료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