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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칠요의 정령을 음신지력으로 각성시키라고?
‘음… 지금까지 해본 적은 없는 일이지만.’
요도 무라마사에게 음신지력을 불어넣어서 요도의 정령을 각성시킨 적이 있었다. 전욱의 힘인 음신지력은 강력한 보물에 영향을 미쳐서 정령의 힘을 각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음신지력의 응용법은 칠요에도 시도해볼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해보지 않았다.
그건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칠요에 강대한 대성급 음신지력을 불어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으음… 그건 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소. 그러나, 자폭에 가까운 결과가 될 거라고 예상할 수는 있소. 수요(水曜)의 경우는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칠요의 정령이 각성할 경우 대참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소. 칠요의 정령이라면 격이 다를 것이오. 그 자체로 신령일 것이며, 세계를 부술만한 힘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되오.]
[안 하는 게 좋아.]
[전욱의 경우는 신이라서 자신이 칠요의 힘을 제어할 수 있었지만 넌 그게 아니잖나.]
괜히 칠요의 정령을 각성시켰다가 폭주만 시키고 내가 자멸해버릴 위험성!
목숨이 쉽사리 날아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강력한 보물수준에도 상당한 음신지력을 소모해야 정령을 각성시킬 수 있는 걸 생각하면, 칠요정령의 각성에 필요한 음신지력은 굉장히 요구량이 높을 것 같았기에 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그건 예전부터 위험해서 안 된다고 결론이 났던 걸 텐데.”
“당신의 24번째 삶에서 오갔던 이야기였지요. 실제로 그 시점에선 옳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른 상황이지요.”
위잉!!
“당신과 저. 둘이서 같이 하는 겁니다.”
사공린이 갑자기 자신의 손 위에 황금빛의 구체를 떠올렸다. 나는 그 구체를 보자마자 강렬한 태양빛을 근처에서 쬔 듯한 느낌이 들어서 흠칫했다. 그리고 구체에 스며들어 있는 힘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
“……!!”
“당신이 혼자서 음신지력을 쓴다면 소모가 심하고 정령을 통제할 힘이 부족하겠지만, 제가 당신을 돕는다면 충분합니다.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그 힘은 대체 뭐지?”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황금빛의 구체에서 느껴지는 신력이 말 그대로 막대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팔부신중의 본체, 아니 그 이상의 존재를 눈앞에 두었을 때나 이런 느낌을 받고는 했다.
‘어떻게 이 정도 힘을?!’
사공린이 황금빛의 구체를 소멸시키며 말했다.
“말했듯 선조회귀입니다. 제갈유룡은 이 힘을 가리켜 천마지력(天魔之力)이라 했지요.”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침착하게 말했다.
“천마의 힘… 그는 사공린, 너를 50년 후에 나타날 십대고수 천마라고 단정 지었던 건가?”
“적어도 제갈유룡은 그랬습니다.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 힘을 각성한 건 아이테눔 문디에서였나?”
“그 전에도 이따금씩 힘을 끌어 쓸 수는 있었습니다. 완전히 신의 힘을 제 것으로 만든 계기가 아이테눔 문디였죠.”
“…신의 힘이라. 내 음신지력의 근원은 삼황오제 전욱이야. 그렇다면 사공린, 너의 천마지력의 근원이 되는 존재는 뭐지?”
“…….”
내 질문에 사공린이 침묵하자 옆에 있던 천우진이 대신 대답했다.
“황제 공손헌원으로 추측하고 있다.”
“…황제!!”
“태양(太陽)의 권능을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으며 사공린에게는 모든 속성의 공격이 반감되거나 소멸된다. 게다가 그녀는 공손세가의 혈족이란 게 이미 증명되었지. 그녀의 천마지력이 황제 공손헌원에게서 비롯된 선조회귀일 가능성은 매우 높아.”
“부작용은 없는 거야?”
내가 혹시나 해서 물어보자 천우진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녀의 특수능력이 그녀의 정신에 종종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솔직히 조금 위험해.”
“뭐? 특수능력이 뭔데?”
이어진 천우진의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마(魔)를 먹어치울 수록 강해진다. 그리고 그 마(魔)가 지니고 있던 능력은 고스란히 사공린의 능력이 되지.”
“……!!”
“하지만 먹어치운 마의 수준이 높을 경우 그녀는 잠시 동안 그 마가 지니고 있던 성향에 잠식되어버리고 만다. [옛 지배자]나 다름없는 극악한 성향조차도 그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걸 가리켜서 폭주(暴走)라고 불렀지.”
“폭주라고….”
“그 때문에 예전부터 사공린은 전투에 나서는 횟수를 최대한 줄이고 있는 중이다. 자칫했다가는 그녀 자신이 대웅제국을 멸망시킬 천마(天魔)로 각성할 수도 있으니까.”
“흠.”
정말 믿겨지지 않는 일이다.
‘요약하자면 사공린은 황제 공손헌원의 선조회귀를 손에 넣었지만 그 대가로 폭주의 위험성을 늘 안고 있다는 말이군….’
아마 일루미나티와 싸워도 지지 않을 테지만 사공린이 섣불리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 듯 했다.
나는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곤 말했다.
“알아들었어. 그 천마지력이란 걸로 내 음신지력과 힘을 합쳐서 칠요의 정령을 각성시킨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전투가 아니라 힘을 소환하는 건 제게 부담이 가지 않으니까요.”
“근데 칠요정령을 각성 시키는 이유는 뭔데? 그걸 아직 설명 안 해 줬잖아.”
“기본적으로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천천히 세 개의 손가락을 접기 시작했다.
“하나. 칠요의 정령을 해방시킬 경우 칠요의 전력(戰力)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리라 봅니다. 일반무기라 해도 정령해방이 이뤄질 경우 급이 다른 무기로 진화하게 되어있으니, 칠요는 그 향상 폭이 더욱 클 것입니다.”
“흠.”
“두 번째. 칠요의 정령을 소환시켜서 늘 대면할 수 있다면 소유주에 대한 정령의 호감도가 크게 늘어납니다.”
“…….”
“세 번째. 늘어난 호감도를 이용하면 칠요가 다 모였을 때 시련의 난이도가 대폭 하향됩니다. 이 사실은 백웅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사공린이 모든 손가락을 접자 나는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러니까 칠요의 시련을 염두에 두고 정령의 호감도를 올리기 위한 거란 말인가?”
“그렇지요. 일단 칠요의 시련에 세상을 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제길.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나는 과거에 칠요의 시련을 통과한다고 정말 개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별의별 짓을 다 하면서 결국 꼼수에 꼼수를 남발하면서 일요의 시련까지 다 뚫었는데, 결국은 황제 공손헌원이 난데없이 태양을 폭주시키면서 내가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시련을 깬다고 해서 세상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황제 공손헌원의 변덕 때문에 내가 죽었던 걸 알고 있잖아. 그건 답이 아닐 거야.”
“그렇지요. 그래서 칠요의 시련에만 모든 걸 걸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칠요의 시련을 계속 염두에 뒀던 이유는, 당신이 귀환하지 못할 가능성을 늘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사공린이 힐끔 내 손에 들려있는 수요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우리 인간은 알지 못하는 신의 비밀을 칠요의 정령이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입니다. 망량이 마지막으로 유지를 남기고 간 실질적인 이유는 이거죠.”
“신의 비밀?”
“네. 칠요의 정령은 기본적으로 억년을 살아온 신령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신들과 가장 가까이 존재해 왔죠. 만일 그들과 친해져서 그들에게서 비밀을 엿들을 수 있다면, 당신의 전생여정이 크게 축약되리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다.”
“으음!”
“어쩌면 삼황오제의 약점 같은 걸 알아낼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칠요의 정령과 친해져서 정보를 얻어낸다면, 어쩌면 거기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비밀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나는 망량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문득 걸리는 게 있어서 말했다.
“근데 미해방 상태에서 정령을 각성시켜도 되는 거야? 정령각성이 곧 칠요해방을 의미할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면….”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상관없다고?”
“기존에 칠요해방이 껄끄러웠던 이유는 천계의 간섭이나 삼황오제의 오지랖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천계는 이제 머나먼 이계가 되었으며 삼황오제는 거의 모두가 소멸하고 말았죠.”
“……!!”
“방해할 자가 없는 지금 이 시점. 이 미래이기 때문에 시도해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망량 제갈현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그렇군.”
“저 혼자서 시도하면 신력이 줄어들어 제국을 유지하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지금껏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흠잡을 데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 방해할 놈이 하나도 없구만! 딱 좋아!’
그렇다면 남 눈치 보면서 칠요의 해방을 미룰 필요도 없다! 도리어 해방을 서둘러 해도 좋을 것이리라.
내가 신바람이 나 있자 사공린이 말했다.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지금 바로?”
“네. 일루미나티의 침공을 목전에 둔 지금, 미룰 필요가 없는 이야기니까요. 사실은 당신이 좀 더 전후사정을 알고 나서 도전하길 원했지만….”
“알았어.”
파앗
이윽고 나는 사공린, 천우진과 함께 천제단으로 이동했다. 수요를 제단 위에 올려두고는 천제단의 힘을 빌려 주변의 영력을 안정시킨 후, 거의 동시에 신력을 수요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큭…. 빨려 들어간다….’
나는 빠르게 음신지력이 소모되며 위압적으로 흘러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미 20년 치는 빨려 들어갔고 순식간에 그 배를 넘어선 것 같았다. 그렇게 반 식경이 지나자 내 소모도는 상당한 수준에 접어들어 있었다. 음신지력 소모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부…부족할지도…. 사공린은 천마지력 넣고 있는 거 맞아?’
쿠구구구!!
‘…맞군.’
내가 옆에 있던 사공린을 쳐다보자, 사공린 또한 금광(金光)을 내뿜으며 엄청난 신력을 퍼붓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나보다 더 막대한 양인지라 허술히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느꼈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젠장…. 사공린의 보조가 있어서 쉬울 줄 알았는데. 역시 예전에 하던 것처럼 해야 하나?’
나는 고민에 빠졌다. 예전에 십이율주와 싸울 때 강제로 수요의 정령을 각성시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내 음신지력과 전국옥새의 영력을 모조리 끌어내서 때려 박은 덕에 간신히 일깨웠었다. 그 때처럼 전국옥새의 영력까지 동원하면 더 이상 크게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쉽게 각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국옥새는 강력한 탐색기능도 있으며 이 상황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신급 보패다. 전국옥새의 영력을 다 소모해버렸다가 자칫 손해를 볼 수 있다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화르륵
쿠아아아아-!!
“……!!”
점차 감소하고 있던 음신지력이 난데없이 실이 풀리듯 엄청난 속도로 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정제되지 않은 음신지력의 기류가 난폭하게 뛰어다니더니 소모되었던 힘을 거의 다 원상 복구시켰다.
쿠아아아아!!
왜지?!
내가 난데없는 음신지력의 초회복에 곤혹스러워 할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님….]
흑웅?!
[전욱과 아마테라스의 힘…. 그리고 케찰코아틀의 힘…. 주인님의 생각보다 더 강합…. 신력은 내공과 다릅…. 지나친…. 압축….]
“흑웅!!”
[…….]
잠시 동안 흑웅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이내 사라졌다. 마치 간절하게 정보를 전하고 싶어 하는 듯 했지만 너무 먼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움찔하면서도 일단 회복된 음신지력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수요에 음신지력을 퍼부었다.
“아아아압!!”
파앗
그러자 그때까지 은은한 빛만 내고 있던 수요가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에 무수한 숫자의 균열이 새겨졌다. 그 균열은 파괴되려는 흔적이 아니라, 수요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눈을 뜨기 시작한다는 증명이었다.
‘됐다!’
기이이잉
수요가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폭발했다.
콰치칭!!!
수요의 칼날이 폭발하고 그 자리에 빛으로만 이루어진 청색 칼날이 생겨나 있었다. 또한 허공에서 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막대한 양의 물덩어리가 나타나더니, 이윽고 인간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나타난 것은 은청빛 용린(龍鱗) 갑옷을 입고 있는 젊은 무인(武人)이었다. 마치 전설의 영웅과 같은 뛰어난 위풍과 사내다운 기상을 품고 있었다.
수요의 정령은 그 형태를 취한 채 우리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요의 정령의 모습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가.’
두 번인가 볼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십이율주에 맞서 싸워서 수요의 정령을 소환했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칠요의 시련에 도전할 때였다. 그러나 십이율주와 싸울 때는 내 눈이 멀어있는 상태라서 수요의 정령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칠요의 시련 때는 초상기인 진이 수요를 상대해서 이겼으므로 마주치지 못했었다.
직접 얼굴을 맞대서 형체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수요의 정령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나의 주인, 백웅이여! 기어코 나를 현세에 구현시켰구나. 설마 내가 인격을 지니고 세상에 나오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구나.]
“수요! 내 이름을 알고 있냐?”
[물론이다. 그대처럼 나를 오랫동안 사용한 자는 달리 없었다. 나는 그대가 유적에서 나를 얻은 후 줄곧 그대를 지켜보고 있었노라. 다른 모든 칠요가 그러하듯.]
“아….”
수요가 힘주어 말했다.
[그대의 행적을 굳이 내게 설명치 않아도 좋다. 나, 수요는 곁에서 모든 걸 보고 있었다.]
“그렇냐!”
나는 알 수 없는 감회에 젖었다.
마치 오래된 옛 친구를 만난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사공린이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수요의 정령이여, 당신은 지금 해방된 상태인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 아니하다. 해방이란 [최초의 문자]로 구속된 칠요의 본질을 풀어내는 것이며, 종말의 열쇠로 각성시키는 것. 그러므로 너희가 한 것은 그저 나를 각성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요 막야는 아직 미해방 상태이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지금 수요의 위력은 얼마나 강해졌습니까?”
[사용자의 역량에 비례하여 강해졌으리라. 무기의 영이 각성하여 얻는 힘의 법칙에서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와 동시에 사공린과 수요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윽…. 그냥 몇 배 강해졌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냐….
나는 그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며 수요에게 말했다.
“수요. 만일 이런 식으로 지상에 존재하는 육요(六曜)를 다 모으면서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영을 모두 각성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본인, 말할 수 없다. 허나 그리 되면 계약의 저편에 있는 존재들이 크게 거슬려할 것이다.]
“계약의 저편?”
[칠요가 만들어질 당시, 삼황오제와 한 쌍이 되어 계약한 [옛 지배자]들이다.]
“아!”
[그들은 지금도 삼황오제가 사라진 이 대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삼황오제의 부재를 틈타 칠요를 이용하려 한다. 그들의 사악한 의지와 시선이 지금 본인에게 여실히 느껴지는구나!]
“…….”
그러고 보니 그 놈들이 있었지.
칠요가 만들어질 때 동서양의 부전약정이 맺어졌고, 그 때 칠요를 축으로 삼황오제와 강력한 [옛 지배자]가 하나씩 대응하여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삼황오제의 소멸에만 신경을 썼는데 그들과 계약을 맺은 이계의 [옛 지배자]들 또한 지금은 큰 변수로 떠오른 것이리라.
[아무튼 백웅이여. 나를 각성시켜준 대가를 주겠다.]
“대가?”
수요는 팔짱을 끼며 쩌렁쩌렁 외쳤다.
[그렇다. 본디 신성(神聖)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나의 진정한 필살기, 천빙(天氷)을 쓸 수 있게 해주겠노라!]
천빙!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나는 걸 느꼈다.
‘분명히 그건… 수요의 고유기술!’
예전에 내 몸을 빌린 이계의 사악한 신격이 천빙을 시전하자 일격에 기백의 신선들이 얼어 죽고 말았었다. 그 엄청난 힘은 천계를 홀로 휘저을 정도였고, 결국 제압당하긴 했으나 나는 지금도 내 몸으로 시전 된 천빙의 괴력을 기억하고 있다.
“정말이냐?!”
[그렇다. 내가 인정한 주인이니 이제 그대는 천빙을 쓸 수 있다. 다만 몇 가지 설명을 해야 하는데….]
수요가 잠시 후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요는 굉장히 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웅…. 좀 더 이야기하고 싶으나… 형체를 드러내는 데 큰 힘을 써서 지쳤다. 잠시 자겠다.]
슈우욱
수요가 사라지자, 나는 제단 위의 수요를 움켜쥐었다. 나는 수요를 잡고도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한동안 쳐다보았다.
‘이제야 천빙을 쓸 수 있게 된 건가.’
수요를 해방시켜야만 쓸 수 있는 기술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천빙을 얻기 위해서는 수요의 정령을 각성시켜야 하니 상당한 대가를 소모한다고 할 수 있었다.
사공린이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래. 이제는 다른 칠요를 각성시키면 되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오늘은 너무 많은 일을 겪으셨군요…. 잠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정신력 또한 체력의 일부입니다.”
나는 사공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해신과 격돌했던 시점부터 체감시간으로 따지면 겨우 하루 이틀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것이다. 내공 덕분에 체력은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치더라도 정신적 피로감은 상당했다.
오늘 다른 칠요를 각성시키려 하면 못할 건 아니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만전의 상태가 아니라면 위험할 수도 있다. 나는 한숨 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내일부터 차분하게 준비합시다. 그리고 당신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씀드리지요.”
“알았어. 너도 쉬어.”
나는 낙양에 돌아가서 사공린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향했다. 황제만이 쓸 수 있다는 별궁에 들어와서 비단금침에 몸을 누이자, 새삼 미래로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가만히 누워있어도 천정에 반투명한 화면을 띄워서 뭔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기한 게 많군.’
한 달 내내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이지만, 지금은 좀 머리를 쉬어두고 싶다. 혼잡스러운 미래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분하게 하고 마음을 다잡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일어나라.]
…응?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는데, 침대 맞은편의 높은 선반에 앉아있는 그 존재를 보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고양이.
새까만 고양이!
그 흑묘(黑猫)는 꼬리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나는 믿겨지지 않아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나…?”
[그래. 여기는 꿈이다. 내가 너를 불렀다.]
“…….”
으으으으….
역시나….
나는 안 좋은 예감이 맞아떨어지자 머리를 감싸 쥐었고, 흑묘는 묘안(猫眼)을 빛내며 말했다.
[백웅. 너는 이 세계의 종말을 보고 싶은가, 아니면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은가?]
망량선사였다.
나는 이런 일도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마을에서 잠에 빠지는 게 아니라 황제의 궁에서 망량선사를 꿈으로 만나는 게 처음이었기에 이색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약간의 반가움과 껄끄러움을 담아서 말했다.
“간만에 만났는데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종말이든 결말이든 뭔 상관인데?”
어차피 둘 다 끝이라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내 반문에 망량선사가 대꾸했다.
[상관은 있다. 오늘 여기에는 너만 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
스스스
그 순간, 침대의 옆쪽에 놓여있던 기다란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어두운 형체인데다 빛이 어두침침해서 그 형상을 제대로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분명히 제관(帝冠)을 쓴 존재였다.
“……!!”
나는 순간적으로 의념을 끌어내서 의념천주를 발현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다. 마치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이 된 것 같았다.
‘아, 제길! 망량선사의 꿈속이면 절대지경도 힘을 못 쓰나…. 아니 애초에 꿈이니까 어쩔 수 없나!’
내가 머뭇거리면서 그 의문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저 녀석은 오늘 손님으로 왔을 뿐.]
“손님? 저게 누군데?”
[음험한 기회주의자.]
망량선사가 보기 드물게 약간의 적의를 담아서 말했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있던 의문의 존재가 웃는 듯 했다.
아주 소리 없이 조용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웃음만 흘릴 뿐 딱히 그 이상의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는 듯 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내 쪽을 주시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굉장히 껄끄러웠으나 왠지 그 모습은 여유에 가까워보였다. 그리고 지금껏 망량선사를 대하는 존재들과는 약간 태도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지? 이 위화감은….’
저 녀석은 뭔가 다른 존재인가?
뭔가… 뭔가 달라.
잠시 후 망량선사가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했다.
[백웅. 너는 이 세계의 종말을 보고 싶은가, 아니면 행복한 결말을 보고 싶은가?]
“…….”
나는 분위기를 빠르게 읽었고,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질문이 아니야.’
이것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