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001화 (998/1,615)

1001====================

사신지혼(四神之魂)

저게... 말로만 듣던 해저의 도시.

' 비등의 환영으로 늘 지나쳐가던 그 광경...'

두근.

순간 나는 수백 수천 번이고 사용했던 비등, 그 비등에서 스쳐지나갔던 환영을 빨리 넘겨버리는 기능을 눈치 채서 거의 보지 않게 되었지만, 사실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저 도시의 내부풍경을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도저히 인간의 문명과는 연이 없는 것 같은 이질적인 마(魔) 그 자체. 시원(始原)의 공포를 머금고 있는 태초의 악의가 촉수와 함께 꿈틀대는 그 풍경을 생각하니 두근거렸다. 다만 이건 공포보다는 좀 다른 감정인 것 같았다. 마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진기한 것을 마주 대했을 때의 그 기분이었다.

다만 좀 의아한 게 있었다.

' 뭐가 저렇게 커?'

흉신이 다스리는 해저의 도시라지만 그 크기는 중원의 일개도시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성층권에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라면 이미 작은 대륙급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저렇게 큰 도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가 당황하자 전욱이 말했다.

[ 서왕모. 늦었군.]

쉬익!

전욱의 말이 끝나는 순간 허공에 서왕모의 신형이 나타났다. 그녀는 전욱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 전욱. 이게 다 무슨 일인가?]

[ 보면 모르겠나? 이계의 왕이 나타나서 쌍성의 재앙을 소환했소. 그리고 흉신이 자신의 권역을 대양(大洋) 위에 부상시켰지 않은가.]

전욱과 서왕모는 이미 서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비밀스럽게 서왕모의 정체를 감췄다 해도 전욱 또한 삼황오제이기에 모를 수는 없다. 서왕모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 그 백웅이라는 인간. 너무나 수상하다.]

[ 그래서?]

[ 그대가 사도로 쓸 만한 영체는 여가 천계에서 골라서 따로 주마. 그 인간은 내게 내놓아라.]

전욱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농담은 그만하시오. 크크크... 저 쌍성이나 처리하시지.]

[ 전욱이여. 그대 또한 그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여의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

[ 후. 천상의 여와가 본왕을 웃기려고 작정했군.]

전욱은 손쉽게 서왕모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서왕모는 한동안 냉막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말했다.

[ 그럼 소호와 제곡을 불러라.]

[ 아까부터 내게 왜 자꾸 명령을 내리려는 것이오? 명목상 귀한 신분을 대접해드리고 있으나, 본왕은 귀하의 밑이 아니오.]

[ 자존심을 세우자는 게 아니다. 저 흉신이 자신의 권역을 부상시켰다는 건 진심으로 이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려 하는 것이다. 우리 둘이서만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 ......]

[ 힘을 합치면 피해도 적어진다. 현명하게 대처하라.]

[ 좋소. 그건 맞는 말이군.]

전욱은 서왕모의 말을 긍정했다. 그 또한 왕이었기에 사리판단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욱이 아직도 천공에 떠서 공전하고 있는 흑백(黑白)의 쌍성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 저 2개의 별을 빨리 부숴야 하는 이유는 알고 있으리라 믿소.]

[ 알고 있다. 저 창세주문은 칠요(七曜)의 행성(行星)의 궤도를 끌어당기는 역할이 아닌가?]

[ 옳게 보았소.]

이어진 서왕모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 저걸 가만히 놔두면 칠요가 일렬로 배치되어서 흉신의 마력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겠지. 그것만은 피해야 할 것이다.]

뭐?!

' 칠요가 일렬로 배치된다고?'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칠요의 행성은 태양에 가까운 순서대로 수성, 금성, 지구, 달, 화성, 목성.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성 바깥에 천왕성과 해왕성이 있다고 들었고 그 바깥으로 가면 수많은 소행성군의 띠가 있다고 제갈사에게 배운 바가 있다.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이 칠요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두 개의 별은 태양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이계에서 유입된 별이기 때문이었다.

그 칠요는 평소에는 광대한 우주의 궤도를 돌면서 전혀 겹칠 일이 없었다. 겹칠 확률은 너무나 극미해서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만일 그 칠요가 일직선상에 놓이는 일이 생긴다면, 그 주술적(呪術的) 힘의 발현은 가히 우주적인 수준이 되리라!

전욱이 말했다.

[ 그래서 아까부터 쌍성을 부수라고 했잖소. 흉신 놈은 지금 부담을 감수하고 인과를 거꾸로 끼워 맞추려 하고 있소, 본디 별의 운행에 맞춰 수저의 도시가 부상하게끔 주술이 짜여 있지만 반대로 행하는 중이니, 지금 쌍성을 떨어뜨려야 놈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소.]

[ ......]

서왕모가 전욱에게 말했다.

[ 굳이 여가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 그럼 본왕이 하란 말이오? 그대가 현재 이 행성의 대지모신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달(月)에 대한 영향력도 강력하잖소.]

[ 제곡의 만신전이 달에 있으니 그 놈이 해도 된다.]

[ 정말 이렇게 나올 셈이오? 그대가 하는 게 가장 인과율의 반작용이 적다고 굳이 본왕의 입으로 말해야 하겠소? 우리 오제(五帝)가 저걸 건드리긴 힘드오.]

서왕모는 전욱의 말에 태연히 대꾸했다.

[ 여의 힘이 약해질 때 너희가 피 냄새를 맡은 승냥이처럼 내 세력을 칠까 두렵구나.]

[ ...원하는 게 있다면 먼저 말을 하시오.]

[ 쇠약을 틈타 여의 기휘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언약하라.]

[ 좋소. 정말 쪼잔하구려.]

전욱이 동의하자 서왕모는 근처의 허공을 둘러보며 말했다.

[ 너희 또한 언약하라.]

쉬익!

쉬익!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근처에서 기이한 칠색(七色)을 빛내는 새와 사도 사비시신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 둘은 각각 삼황오제인 소호금천과 제곡의 사도였다. 사도의 몸을 빌려 나타난 두 명의 삼황오제가 서왕모의 말에 대꾸했다.

[ 나 소호 금천, 언약하오.]

[ 나 제곡, 언약하오.]

저들이 군말 없이 동의한 걸 보면 그만큼 쌍성이 이 세계에 거대한 재앙인 것으로 보였다. 서왕모는 그들의 언약을 받고나자 그제야 서서히 몸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쩌엉!!

서왕모가 서쪽으로 세 번 포효하자 흉수(凶獸)의 모습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흉수는 나타나자마자 천공에 떠 있는 흑백의 쌍성을 향해 달려들었고, 이윽고 수백 배나 거대화하더니 단숨에 별을 집어삼켜버렸다.

쿠와앗

서왕모가 두 개의 별을 삼켜서 뱃속에 집어넣은 순간이었다. 흉수의 뱃속에서 두 개의 별이 회전하며 불꽃을 만들어내자 뱃가죽이 새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빛났다. 서왕모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다가 비명을 지르듯 언령을 내질렀다.

[ 나는 태초의 질서, 반고의 이름으로 흉성(凶星)을 파쇄하노라!]

쿠구구구...

서왕모의 뱃속은 잠시 후 완전히 잠잠하게 가라앉았다. 서왕모가 자신의 권능을 발휘해서 흉신후예의 왕, [별을 뒤트는 자]가 창세주문으로 소환한 대재앙을 제압한 것이다. 서왕모가 비틀거리자 전욱이 말했다.

[ 수고했소. 이제 저 밑의 흉신을 해결해야겠군.]

[ 잠시... 뭔가 이상하다.]

[ 무엇이 말이오?]

[ 뭔가 불길하다... 설마 흉신이 처음부터 의도했단 말인가?]

서왕모는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삼제(三帝)에게 말했다.

[ 저 도시를 공격하는 건 기다려라. 흉신의 계책일 듯하다.]

[ 당신의 말이라면 질서의 근원에 닿는 예지이니 무시할 순 없겠군. 좀 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소?]

[ 인과율을 써서 태초의 빛에 접속하겠다.]

위잉

서왕모가 흉수의 모습을 한 채 정신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우주에서 의지를 내려 받듯 전에 없이 경건한 기세를 뿜어내던 서왕모가 잠시 후 말했다.

[ ...석판...]

[ 석판?]

[ 지금 흉신은 석판을 서둘러 옮기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이지?]

[ 무슨 석판을 말하는 것이오?]

[ 여로써도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물건이다. 그리고 현재 흉신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보이는군.]

[ 흠...]

전욱은 고민하다가 말했다.

[ 그럼 도시를 멀리에서 부수는 것보다는 직접 쳐들어가서 그 석판을 빼앗는 게 좋겠군. 가자.]

부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욱은 칠색조와 사비시신과 함께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이내 이 장소가 수면위로 부상한 전설의 해저도시라는 걸 알아차렸고, 아직 바닷물이 다 안 빠졌는지 여기저기에서 바닷물 웅덩이가 보였다.

저벅

마치 신전(神殿)과 같은 이 도시를 성큼성큼 걸어가던 전욱이 옆에 있던 사비시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 제곡. 달을 옆으로 좀 옮겨라. 아직도 쌍성의 마력(魔力)이 칠성칠요(七星七曜)를 일렬로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구나.]

[ 그쯤이야.]

사비시신이 알 수 없는 신언을 외웠다. 그리고 옆에 서있던 칠색조에 강림한 소호금천이 전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저건 흉신의 졸개들인가?]

쿠우우우...

흉신의 후예들은 물론이고 곳곳에서 거대한 해신족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는 거대한 도시를 삽시간에 까맣게 채울 정도였으니 그 숫자가 족히 십만은 될 듯 했다.

[ 도와줄까?]

[ 농담하느냐? 전욱.]

신의 사도 칠색조의 눈이 한 순간에 빛났다.

[ 나 소호금천이 명한다. 모두 사라져라!]

콰과과광

그게 끝이었다. 은빛이 시야를 새하얗게 했고 천공에서 떨어진 은광(銀光)의 폭풍에 휘말린 흉신의 졸개들은 삽시간에 소멸되고 말았다. 저들 중에는 분명히 웬만한 신선이나 투선급 존재도 있었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수십만 대량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전욱의 내면에서 지켜보던 나는 아득함을 느꼈다.

' 제기랄... 전생하면서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삼황오제의 막강함이란 건.'

삼황오제 입장에서 나름대로 중대한 사태인지라 인과율을 끌어 쓰고 있긴 하지만 저건 본체가 아니라 사도에 강림한 것뿐이라서 낼 수 있는 힘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소호금천의 힘은 필멸자로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의 소호금천을 상대로 항우라 해도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도대체 저들과 체급을 같이 하며 대등하게 싸우려면 얼마나 수련하고 노력해야 하는 걸까?

확실한 건 작정한 삼황오제와 싸우기에는 아직 나와 내 동료들의 힘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암울함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 내게는 사대신기와 신역절기가 있어.'

아직 완벽히는 구사할 수 없지만, 제대로 사용법만 안다면 저 막강한 놈들을 상대로도 충분히 신살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방금 전 [별을 뒤트는 자]가 사대신기 바즈라에 소멸당한 걸 보자 그 생각은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

' 좋아. 어떻게든 이 위기만 버티자. 이번 생, 끝까지 가보는 거야.'

아까는 자포자기 하듯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어떻게든 흘러가고 있다. 나는 설령 고문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이번 생은 끝까지 가리라고 다짐했다.

[ 저 놈은 뭐지?]

[ 흠. 왠지 위험해 보이는군...]

특히 제곡은 큰 호기심을 보였다.

[ 재밌군. 필멸자가 우리를 경계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해신의 졸개가 쓸려나간 저편의 지평선에 한 점이 서 있었다. 그 점은 어느 새 축지법을 쓰듯 삼황오제 앞에 성큼 다가오더니 신형을 드러냈는데, 나는 전욱의 내면에서 놈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 아, 아니 저 새끼?!'

삿갓무사!

예전부터 내 전생에 출몰했던 그 새끼다!

뜻밖인 건 삼황오제는 놈을 벌레취급하지 못하고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스르릉

놈은 삼황오제, 그 중에서도 [나]를 보자마자 자신의 기다란 도(刀)를 가로로 치켜들었다. 마치 삿갓 너머로 나를 노려보는 듯 했고, 그러더니 다짜고짜 일섬을 그었다. 대화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푸콰콱!!

[ 호오...]

" ......!!"

전욱의 손, 정확히는 내 손이 쩍하고 잘려나갔고 팔이 세로로 잘려나가서 너덜너덜해졌다. 확실하게 일격을 먹은 것이다! 저건 전욱의 시공왜곡을 검섬(劒殲)으로 뚫었다는 소리였으므로 나는 내면에서 지켜보며 경악했다.

' 어, 어떻게 한 거야?!'

키이잉

다시 한 번 놈이 종(縱)으로 일섬을 휘두르는 듯 했다.

[ 본왕에게 똑같은 수를 쓰다니, 터무니없는 녀석이구나.]

투웅

이번에는 전욱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퍼버벅

그것이 삿갓무사의 최후였다. 전욱이 제대로 권능을 쓰자 인간의 육체로는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천참만륙 당한 것이다. 손가락 튕기기로 간단하게 삿갓무사를 살해한 전욱은 이윽고 자신의 정수리를 매만졌다.

[ 참 신기한 기술이군.]

주륵...

내 정수리에서 한 줄기의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전욱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정수리와 팔의 상처를 원상복구시켰지만 나는 내면에서 지켜보며 놀라움을 느꼈다. 전욱이 막았는데도 어쨌든 공격을 먹이긴 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 저건 대체 무슨 검술이었지?'

삿갓무사가 죽었으니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겠지만 정말 생전 처음 보는 검술이다. 아니, 검술이라기보다는 그냥 휘두르기 같았지만 그 일참은 절대지경인 나로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뭔가가 깃들어 있었다.

세계 그 자체를 베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저 놈이 내 추적자일 텐데, 벌써 그 힘이 삼황오제에게 닿을 정도가 되었단 말인가?

' 그, 그래.'

나는 급히 전욱에게 말했다.

[ 전욱이여! 저 삿갓무사의 영혼을 불러내서 묶어주십시오. 놈이 윤회전생 할 수 없게 해주십시오!]

[ 아는 사이냐?]

[ 그건 아닙니다만... 위험인물이니 명계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 일리 있는 이야기군. 그럼 어디.]

전욱이 동영무사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

잠시 후 그는 손을 거두며 말했다.

[ 어찌된 거지?]

파스스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삿갓무사의 처참한 고기파편은 가루가 되어서 흩날렸다.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이어진 전욱의 말에 갈수록 수수께끼가 깊어지는 걸 느꼈다.

[ 영혼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