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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이랑진군의 말에 분위기가 스산하게 변했다. 그것은 제천대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노골적인 짜증을 토해냈기 때문이었다.
[ 그건 무슨 개소리야?]
[ 제천대성. 내가 거짓말하는 것으로 보이는가.]
[ 좋아... 서왕모의 명이라고 치자. 왜 무효화시키려는 건지 말해.]
[ 나는 그저 명을 받들 뿐. 일개 투선일 뿐인 내가 어찌 서왕모의 진의를 억측하여 네게 말해줄 수 있겠나.]
[ 하!]
제천대성은 코웃음을 치더니 이윽고 눈에서 혈광을 뿜어냈다.
[ 웃기지 말라 해! 내가 서왕모 졸개인줄 아냐? 당장 그 삼첨창 안 치우면 네녀석부터 없애버릴 줄 알아라.]
[ ......]
[ 꺼져!]
[ 그렇겐 못 한다.]
이랑진군의 단호한 대답에 제천대성이 한 손에 여의봉을 소환했다.
휘리릭
[ 그래... 해보자 이 말이지.]
[ 바라던 바.]
제천대성은 도리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 이런 미친... 천계무련(天界武練)에서 여러 번 무승부가 났다고 해서 네가 나랑 동급인 거 같냐? 내가 제대로 하면 넌 뒤져!]
[ 입만 살았군.]
쿠구구구
두 명의 투선(鬪仙)이 서로 살기를 일으키며 노려보자 허공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살기가 웬만한 절대지경의 고수를 훨씬 상회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그런 단위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차라리 이건 자연재해에 가까운 위압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대치를 보고 있던 팔선 남채화가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 큰일이군요. 저 두 분은 천계에서 최고를 다투는 투선... 어느 한 쪽도 몸성할 수 없을텐데.]
[ 말려야 하네.]
[ 제 술수로는 저 둘을 말릴 방법이 없습니다.]
[ 흐음...]
팔선들은 자칫했다가는 그들의 대결을 말리기는 커녕 불똥이 더 크게 튈까봐 나서지를 못했다. 말리는 건 둘째치고 잘못했다가는 자극받은 그들이 날뛰어서 이 일대가 박살이 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여동빈이 둘 사이로 걸어들어갔다.
우웅
마치 투명한 물방울이 불길 사이에 떨어지는 것 같았으나, 여동빈의 기세는 청정하게 파장을 타고서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두 명의 투선 사이에 섰다. 화룡신검을 쥔 여동빈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세로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어느 새 제천대성과 이랑진군은 살기를 꺼뜨리고 있었다.
뜻밖의 침묵!
' 대, 대단하다.'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침묵은 여동빈이 완벽하게 두 절대강자의 기세를 파악하고 그 빈틈으로 자신의 의념(意念)을 흘려넣어서 천주를 세워 파고들었기에 생긴 것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고 해도 흐름을 따라서 받아낸다면 없던 것처럼 흘려낼 수 있었고, 그것이 무예의 기초이자 모든 것인 화경(化經)이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과연 저게 가능한 경지인가? 무쌍패를 대성한 나조차도 지금의 여동빈처럼 자연스럽게 저 둘의 기세를 중화시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여동빈의 검기(劍技)는 확실히 인간의 경지를 초월해 있었다.
여동빈은 나직이 말했다.
[ 진정하시오.]
[ ......]
[ 이랑진군이여. 말씀은 그리 하셨으나 이 공양의식은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이뤄진 것이며 서왕모께 대라신선의 계약을 함부로 무효화시킬 권한은 없소. 그대정도 되는 존재가 이게 억지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터.]
여동빈의 차분하고 조리있는 말에 이랑진군이 서서히 삼첨창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는 대꾸했다.
[ 서왕모는 그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천계에서 추방하겠다고 말했다.]
[ ......!!]
[ 나로서는 그대들이 순순히 서왕모의 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대들처럼 뛰어난 대라신선들이 인간세상의 흉사에 휘말려 그 자리를 잃는 일은 없었으면 하기에 강경하게 나가는 것이다.]
그 말에 팔선은 물론이고 제천대성조차 놀랐다. 제천대성은 잠시 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 이 할망구가 보자보자 하니까 미쳤구만! 지가 옥황상제인줄 알아?!]
팔선들 또한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었다.
[ 이건 월권이오.]
[ 아무리 천계의 큰어른이라지만 그럴 권한은 없소.]
[ 이치에 맞지 않게 대라신선을 겁박할 경우 천계의 옥에 가두도록 되어있건만, 서왕모가 그 법도를 초월한 존재란 말이오?]
스스스스
팔선들이 적의를 드러내자 이랑진군도 흠칫하며 밀리는 기색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삼첨창을 거두면서 말했다.
[ 내게 말해봤자 무의미하다. 설령 이 자리에서 나를 물린다 하더라도 서왕모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러 투선을 보낼 것이다.]
[ 그래서? 니 사정을 봐달라는 거냐?]
[ 그래주면 고맙겠군. 허나 그렇게 알량한 상황이 아니니...]
이랑진군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다. 이랑진군 또한 내심 서왕모의 명이 말도 안된다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기에 곤란한 듯 했다. 제천대성도 이랑진군의 태도를 눈치챘는지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말했다.
[ 좋아, 공양의식 무효화 해주지.]
[ 정말이냐?]
[ 그래. 까짓거 뭐 안될 거 있냐? 무효화했다고 가서 전해. 안 그래? 무효화만 하면 되잖아... 흐흐흐...]
제천대성의 음흉한 웃음을 보자 이랑진군은 뭔가를 알아챈 듯 했다.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 천방지축 놈... 서왕모한테 단단히 미움 사겠구나.]
[ 언제는 안 그랬냐?]
[ 그럼 가 보겠다.]
파앗!
이랑진군이 신견을 데리고 사라지자 제천대성이 물끄러미 나를 보더니 공양물들을 슥 하고 제단에서 밀어서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 공양의식은 없던 걸로 하자.]
" 제천대성! 이런 게 어딨습니까!"
제천대성이 서왕모의 압력에 굴복한 것인가?
내가 눈앞이 캄캄해져서 외치자 제천대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 지금부턴 안 받고 도와주지!]
" 네?"
슈우우욱...
잠시 후 제천대성의 몸이 영체에서 수육하여 실체를 가진 몸뚱이로 변했다. 그것은 공양의식을 위해 영체만 내보냈던 것과 달리 본체째로 현신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제천대성이 옆에 있던 팔선을 보면서 말했다.
" 어이! 내가 예전에 용왕한테 받았던 삼룡금갑(三龍金鉀)을 너네한테 줄 테니까 이번에 해신 토벌할 때 날 도와! 어때?"
[ ......]
" 화과산을 뒤져보면 나올 거야. 후불로 주지."
팔선들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눈치를 챘는지, 팔선 장과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 허허, 물론이지요 대성. 이건 공양의식도 아닌 대성의 부탁이니 우리가 안 들어드릴 수가 없겠구려.]
" 그렇지이~~?"
그리고 제천대성은 싱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 자원봉사라고 들어봤냐?"
" ......!!"
이럴 수가!
나는 제천대성이 어떻게 상황을 흘려넘겼는지 알아채자 기가막힌 기분이 들었다.
' 내가 바친 공양물을 포기하고 자기 보물을 희생해서 팔선을 끌어들였어!'
이렇게 하면 서왕모의 명도 어기지 않으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 셈이 된다. 왜냐하면 서왕모는 '해신을 토벌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서왕모 또한 제천대성과 팔선에게 징계를 내릴 명분이 없어지게 되리라.
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제천대성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대, 대성. 처음 본 제게 어떻게 이 정도로 호의적인..."
그렇다.
나는 전생하면서 여러번 제천대성을 보아왔고 인연을 맺었지만 제천대성은 이번에 처음 나를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수요를 미끼로 내걸어서 제천대성을 이용하려 한 셈이었으니 사실상 냉막한 거래관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제천대성이 이 정도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처음 보는 필멸자를 도와주려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제천대성이 여의봉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 두 가지 이유가 있지. 하나는 서왕모년이 하도 재수없어서 어떻게든 엿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버린 거고, 또 하나는..."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너희처럼 한낱 인간도 의(義)를 위해 움직인다면 이 몸이 엉덩이를 뒤로 뺄 수가 없잖냐! [옛 지배자]한테 도전하려는 배짱이 맘에 들었다."
" ......!!"
" 아, 그래도 수요는 나중에 나한테 줘라. 알겠지."
제천대성은 킬킬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제천대성은 화과산에 근두운을 타고 갔다와서는 웬 빛나는 갑옷, 투구, 신발을 팔선에게 주었다. 저것이 바로 삼룡금갑이란 것으로 본래 사해용왕이 지니고 있던 보물이라고 했다.
나는 이제 준비가 다 된 것을 깨달았다.
" 그럼 이제 해신을 토벌하러 가겠습니다."
" 가자!"
파앗!!
우리는 제천대성의 근두운을 타고 다같이 고려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천대성은 구름을 타고 가다가 상공에서 해신의 거대한 신형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 제길, 저 새끼... 단단히 작정한 모양이군."
" 뭐가 말입니까?"
" 마력의 파장을 보니 천지의 바다와 공명(共鳴)해서 [부름]을 일으키고 있어. 전 세계의 바다에서 해신족을 불러들이는 건가."
전 세계에서?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십이율주에게서 들은 해신 근거지의 정보였다.
[ 내가 파악하기로 이 반도와 대륙, 동영 일대의 바다에는 해신(海神)의 근거지가 총 6곳이 있어. 그 6곳은 육망성(六望星)의 형태를 이루며 강한 마력의 근원지가 되고 있지. 나는 지금부터 너와 함께 그 어인의 도시를 차례차례 뭉개러 갈 것이다.]
그랬다.
이 근처에 있는 해신의 근거지만 해도 6군데나 되었다. 해신은 전세계의 바다를 돌아다닐 수 있으니 실질적인 해신족 부락 숫자는 그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었다. 해신은 근처의 근거지 6곳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해신족을 불러올 생각으로 보였다.
나는 혹시하는 생각에 말했다.
" 해신족이 다 몰려오면 몇 마리 정도 될까요?"
" 그걸 생각해서 뭐하게? 최소한 백만 마리는 될텐데 생각하면 의미가 있냐?"
" ......"
" 시간싸움이 되어버렸군. 저걸 놔두면 고려는 물론 중원까지 해신족의 침략때문에 문명이 파괴되겠어."
나는 제천대성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해신을 쓰러뜨려야 부름을 멈춘단 말이군요."
" 좋아, 그럼 한 번 가 볼까!"
말이 끝나자마자 제천대성이 근두운 위에서 뛰어오르더니 여의봉을 거대화시켜서는 단숨에 휘둘렀다.
" 죽어랏!"
부우웅 -
쿠콰쾅!!
일천 장이나 되는 길이로 늘어난 여의봉은 그대로 해신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초전박살의 원칙에 따라 그의 전력을 다한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해신은 여의봉을 맞자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윽고 여의봉을 한손으로 붙잡고는 던져버렸다.
휘이잉
제천대성은 여의봉을 잡고 뒤로 날아가면서 외쳤다.
[ 저새끼 돌머리구만!!]
그와 동시에 팔선들이 하나둘씩 근두운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있는걸로 봐서는 해신의 강함을 짐작한 듯한 기색이었다. 팔선 중에서 종리권이 푸념하듯이 말하는 게 들렸다.
[ 이런이런... 뭐 저리 말도 안 되는 주술방벽이 있단 말인가... 저 자의 방벽 자체가 하나의 세계와 다름없구나.]
[ 종리권. 우는 소리만 하지 말라. 우리가 힘을 합치면 된다.]
[ 그다지 자신없습니다만...]
[ 이 놈! 등선한 지가 몇 년인데 우리가 언제까지 네 우는 소리를 들어줘야 하느냐?]
[ 으윽, 이철괴 선배... 알았다구요.]
이철괴의 호통에 종리권은 찔끔했다. 나는 근두운 위에서 동료들을 돌아본 후 말했다.
" 어떻게 하지? 바로 흉신의 언령을 쓰는 게 좋을까?"
" 아니. 잠깐 상황을 지켜봐라. 이 정도 전력이면 해신을 상대로도 바로 밀리지는 않아.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제갈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정말 너, 백련지종 천뢰신무의 일섬을 쓸 수 있겠냐? 그게 우리 공략의 시작이자 끝인데."
" ... 할 수 있을거야, 아마."
" 아마가 아니지 크크크... 당장 쓸 수 없나 보군."
" ......"
나는 침묵했다. 제갈사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 자신있게 말은 했지만... 그걸 쓰려고 해도 되지를 않아.'
감각은 몸에 분명히 남아 있다. 그러나 천뢰신무를 발현하려고 하면 나 자신의 무술경지가 다른 영역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실감이 들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모양새는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겠지만 신살의 위력이 그대로 드러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하지만 생사의 경계에 도달한다면 예전처럼 한 방에 해신정도는..."
" 무슨 그런 소리가 다 있냐? 그 확률이 얼마나 희박한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죽을거같으면 정말 죽게 될걸."
" 윽..."
" 다른 때 같았으면 네 멍청한 소리도 해볼만하다고 맞장구쳐줬을 거다. 그것도 경험이 되지 않겠냐? 하지만 이번 생은 [추적자]가 존재하지. 세계를 통일해서 법문을 모으는 게 절대명제이니까, 너는 최대한 죽을 고비를 안정적으로 넘겨야 해."
" ......"
" 그래서 내가 제안하고싶은 건 이거다. 되지도 않는 천뢰신무를 시도한다고 어이없이 죽는 것보다는, 그 사대신기를 이용해 보자."
" 사대신기?"
" 그래."
제갈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지금 마련한 전력이라면 어떻게든 해신의 틈을 만들 수 있을 거다. 너는 해신의 방어가 가장 약해진 틈에 놈의 심장으로 접근해서 사대신기를 박아넣어! 그게 제일 현실적인 공략법일 거다."
" ... 알았어!"
그 때였다.
쿠오오오 -
" 으갸갸갸갹... 이 새끼 진짜 무지막지한데..."
위잉
쿠콰콰콰쾅
제천대성이 수천 개의 분신을 소환해서 해신을 공격하고 있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해신이 갑자기 괴성을 내지르더니 입에서 거대한 파괴광선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그 파괴광선은 단숨에 수평선 너머까지 날아가더니 번쩍이는 폭발과 함께 바다를 통째로 말려버리고 말았다.
[ 하압!!]
슈콱
여동빈이 근처에서 날아들며 화룡신검으로 해신의 손가락을 베어내었다. 처음으로 해신에게 그럴듯한 상처를 준 셈이었으나 해신은 간지럽다는 듯이 여동빈을 도리어 공격했고, 여동빈은 팔선의 도움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콰과광
계속해서 제천대성과 팔선이 해신을 공격하면서 빛과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었으나 정작 위에서 볼 때는 해신이 파리를 쫓는 듯 손을 허우적대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직 해신의 방어가 건재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타격을 주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망량에게 말했다.
" 망량, 정말 괜찮겠소?"
" 물론이오. 나 또한 시해지술을 연마하면서 수준이 많이 올랐소. 불사초래의 버팀목이 될 수 있을 것이오."
그는 힐끔 옆을 보며 말했다.
" 게다가 제갈유룡도 도와주니 부담이 한결 덜하겠지."
" ... 알았소. 그럼 바로 들어가겠소!"
나는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흉신의 언령을 외웠다.
" 멸망의 때에 흐르는 성좌(星座)여! 나, 그대의 권능을 빌리노라. 다가올 천 년의 때를 경배하노라!!"
후와아악
그 순간 해신의 몸을 휘감듯 거대한 촉수가 솟아올랐다. 해신은 크게 당황한 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 좋았어!'
해신에게 흉신의 언령을 사용했을 경우 저 놈의 주술방어는 일정시간동안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 시간 동안은 놈의 신급주술을 신경쓰지 않고 마음껏 팰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틈에 대라멸진을 시전하기로 했다.
쿠구구구
대라멸진
불사초래(不死招來)
생명력 공유!!
키잉 -
그와 동시에 내 몸에 대라멸진의 힘이 깃들었고, 내 옆에 있던 망량과 제갈유룡에게 생명력이 이어지는 게 느껴졌다. 대라멸진을 쓰면 본래 죽을 수밖에 없지만 최상급 술사와 생명력을 공유해서 고갈을 최대한 늦추고, 그릇이 깨지는 걸 막는 금술! 이걸 쓰면 대라멸진의 힘은 끌어내면서도 죽지 않을 수가 있었다.
" 수요여, 가자!"
투학
나는 대라멸진을 최대한 끌어내며 말 그대로 모든 힘을 다해서 수십 리를 격하고 해신에게로 돌격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수요가 영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우오오오오오!!"
노리는 건 심장!!
여동빈과 해신을 토벌했을 때의 경험으로 저 놈의 급소가 어딨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그 곳을 한번에 베어버리고 그대로 사대신기를 꽂아버리면,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죽을 것이다!
퍼어억!!
내 몸통박치기가 해신의 심장을 들이받는 순간, 해신이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청혈(靑血)을 입에서 내뿜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내 몸이 통째로 해신의 피와 살덩어리에 휘말리면서 놈의 몸뚱이로 파고드는 걸 알 수가 있었다.
' 으아... 아아아...'
너, 너무 세게 돌격했나...?!
쿠콰콰콱
돌진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계속해서 해신의 몸을 밀어내며 몸통박치기를 계속했다. 나는 대라멸진을 끌어낸 상태인데도 가공할 압력때문에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이를 악물고는 검을 들어서 그대로 올려베었다.
뇌신검무(雷神劍舞)
역천단(逆天斷)!
푸콰콱
내 몸을 중심으로 상하로 무려 칠십 장이나 되는 종참(從斬)이 해신의 뼈와 살을 동시에 베어냈다. 단숨에 절벽을 베어버리듯 절세무비한 검기였고, 나는 역천단의 초식을 발휘한 찰나에 필사적으로 해신의 심장을 찾았다.
' 시, 심장 어딨지?!'
빨리 못 찾으면 큰일나는데...!!
제천대성과 나머지 팔선들이 해신의 주위를 끌어주고 있기에 이 공격이 성립될 수 있다. 해신이 내게 신경쓰게 되면 아무리 대라멸진을 썼어도 나는 한 방에 죽는다!
그리고 나는 시간을 멈춘 듯한 순간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귓전으로 들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 ... 안 된다...]
뭐야?
[ ... 아무리 너라도... 이번엔... 안 돼... '그' 신기(神器)를 내 종복에게 쓰면... 나도 곤란할 터...]
나는 환청인가 싶었다.
뭐지? 해신놈이 죽기 전에 구걸하는 건가?
[ 뜻을... 돌리지 않는가... 어쩔 수 없지...]
" 흥, 개소리 작작해!"
그리고 심장이 약간 옆에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그대로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해신의 살갗에서 엄청난 속도로 가시가 뿜어져 나왔다.
퓨뷰뷰뷰븃!!
" 큭!"
대라멸진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이 가시함정에서 그대로 즉사했을 것이다. 나는 엄청난 신체능력으로 다 쳐내면서 피했는데, 뒤따라 올라오던 여동빈이 호령하듯 외쳤다.
[ 연자여! 조심하라! 해신이 그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 알았소! 놈의 심장을 빨리 베어야 하오."
[ 좋다... 그걸 노리는 건가? 내가 그대를 인도하리라!]
타닷
이윽고 여동빈이 내 등쪽으로 뛰어들며 기습적인 해신의 가시공격을 모두 쳐냈다. 나는 여동빈 덕에 움직임이 많이 편해졌다고 생각하며 바로 옆으로 뛰어서 심장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곳을 베었다.
푸콰콱
' ... 이거다!!'
살갗을 크게 베어내자 두쿵거리는 해신의 심장이 눈에 보였다. 심장만 해도 무려 오십 장이나 되는 크기라서 이런 걸 심장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나는 머릿속에서 사대신기를 구현화시킨 후 그대로 손 위에 소환했다.
" 와라, 바즈라!!"
파지직
나는 불꽃을 튀기는 바즈라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해신의 심장을 향해 돌격했다.
" 우오오오오!!"
이대로 심장을 수요로 찌르고 몸통박치기로 심장을 들이박아 뚫어버린다! 그리고 바즈라를 심장 깊은 곳에 박아 주마!
바즈라는 마(魔)에 극상성이니 아무리 해신이라 해도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 넌 끝장...'
그 때였다.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촉수?
해신의 심장 바로 앞까지 수요를 들고 도달한 찰나에 나는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쉬리리리릭...
그리고 꾸물거리는 한 조각의 촉수가 해신의 심장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오더니 어디선가 본 듯한 형태를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은 마치 악몽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졌으며 피빛의 어둠이 사방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다지 크지 않아보인다.
이윽고 인간형을 갖춘 [그 존재]가 마치 자기소개를 하듯 말했다.
[ 귀하여... 나의 주께서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심이오. 이리 뵙게 되어 유감이오.]
" ......"
[ 해신... 정말 약해빠진 녀석... 이런 일로 주의 심려를 끼치다니... 차라리 내가 없애고싶은 마음이구려...]
지금 해신이 약하다고 한탄한 거냐?!
저 놈의 말투는 아주 정중하고 차라리 옛스러운 말투였다.
휘리리릭
휘리리릭
해신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듯한 그 괴물과 인간이 섞인 듯한 존재는 자신의 양 손 사이에 무한히 회전하는 듯한 구체를 만들어냈다. 나는 이 순간이 무한히 이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이윽고 이게 절대고수들의 시간영역과는 완전히 다른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무예가 아니다. 주술이며 마법이다.
그것도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이윽고 시간을 멈춘 존재가 자신의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 나는 주를 모시는 신자(信者)의 왕이자 [별을 뒤트는 자]. 주의 명에 따라 귀하를 퇴치하겠소.]
즈즈증
[ 뒤틀리노라, 먼 별의 메아리여. 은하의 군주가 원하는 명성(明星)이 될 지어다.]
큭...
[ 울러퍼져라... 백억의 한숨... 황충(黃蟲)의 권세여... 죽음을 삼키는 뱀이여...]
파직!
잠시 후 나는 그 존재가 허공에 구현화된 언령을 다섯 개 만들어내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언령은 마법의 상징으로 굳어지더니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고, 그건 언뜻 봐도 엄청난 대주술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 제길! 왜... 시간정지가 안 풀리는 거야!'
이상하다. 웬만한 시간정지에도 나는 면역이 있는걸로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 상태가 풀리지 않지? 나는 궁극의 초상기인한테도 맞선 적이 있는데, 설마 저 놈이 진보다 강하다는 말인가?
그 순간 나는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랜 세월 강적들과 싸워왔던 실전경험이 내 머리카락을 쭈뼛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상대방의 강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 놈은 뭔가 달라.
격이 다르다...?
하지만 이윽고 내 옆에 있던 여동빈이 화룡신검을 이끌고 노갈을 내질렀다.
[ 이노오오오옴!!]
무형검(無形劍)
쉬칵!!!
여동빈의 심검(心劍), 무형검이 단숨에 시간이 강제로 멈춰져서 왜곡된 공간을 잘라내었다. 그는 그와 동시에 나를 장풍으로 밀어냈는데, 도망치라는 뜻인 걸 알아차린 나는 급히 그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쿠구궁
나와 여동빈이 급히 해신의 심장 근처에서 물러나서 허공에 떠서 난데없이 출현한 새로운 적을 쳐다보았다. 나는 여동빈에게 물었다.
" 여동빈이여! 저 놈은 대체 뭡니까?"
여동빈의 얼굴은 납빛으로 굳어있었다.
[ ... 어둠의 세계에 흐르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존재다. 탕마행을 하면서 꿈에도 만나고싶지 않았던... 설마 저런 존재가 이 현실에 나타날 줄은...]
" 알고 있습니까?"
[ 저 자의 모습을 보라.]
나는 여동빈의 말에 해신의 심장 앞에 서 있는 괴물을 잘 살펴보았다. 그리고 놈의 모습이 인간과 팔초어(八梢魚)를 뒤섞은 것 같은 모습이며, 등 뒤에 거대한 날개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나는 저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설마하는 생각이 들었다.
" 앗... 저건..."
[ 저 모습을 하는게 용납되는 건 흉신에게 측근중의 측근 뿐이라 들었다...]
이어진 여동빈의 말에 나는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 저 존재가 바로 [흉신(凶神)의 후예]들의 왕(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