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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10만 어림군을 금주성에서 쉬게 하고는 다시금 동료들과 회의를 가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이제 두 시진 정도만 진군하면 황연이 고려와 대치하고 있는 전선(戰線)이 나오는데, 그냥 오늘 밤에 바로 행군을 시작하는 게 좋겠소?"
" 아니, 그건 좋지 않소. 너무 빠르게 황연과 본대가 합류하는 건 전략적으로 좋은 결정이 아니오."
" 왜 그렇소, 망량?"
" 적이 일망타진의 계책을 벌이려 할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이오. 상대가 십이율이니 더욱 그렇지."
" ......"
" 황연을 앞세워서 상대의 수를 먼저 읽어보고 그 후에 나서는 게 상책. 어차피 황연의 군세 또한 대군이니 굳이 10만을 더 합류시켜도 병력우위의 효과는 그다지 볼 수 없소."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제갈부가 말했다.
" 백웅, 이 금주성을 병참기지로 삼고 그냥 여기서 주둔해라. 주공(主攻)을 전부 황연에게 맡기는 게 낫다. 금주성은 1만의 군대가 평상시에 주둔할 정도로 큰 성이니 병참기지로 충분할 것이다."
" 그럼 이 군대를 끌고 온 의미가 없는데..."
" 제길... 그냥 황연의 군대에 10만을 더하려고 온 거라면 뭐 하러 이렇게 요란하게 왔다 생각하느냐? 당연히 중간에 병참선을 연결하고 적이 황연의 후미를 끊어서 퇴로를 막는 걸 방지하려는 거다. 뿐만 아니라 여기는 중원의 북단이며 요족, 장족을 비롯한 북방민족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역. 황제가 친정하러 와서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포석이 된다. 10만 어림군이 여기서 버티지 않으면, 잡세력들이 일어나서 황연이 위험해질 게 아니냐."
" 음."
" 다만 10만을 그냥 놀려두기도 아까운 노릇이니 좌군 1만, 우군 1만을 편성해서 황연에게 별동공격대로 지원해주는 게 좋겠군. 어림군은 물자와 장비가 출중하니 황연이라면 잘 써먹을 것이다. 좌장군은 사신위 현무, 우장군은 사신위 백호에게 맡기면 지휘관이 암살당할 걱정도 한결 덜하리라 본다."
" ......"
" ...왜 그런 눈으로 보느냐?"
" 아니 뭐..."
청산유수 같은 제갈부의 말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좔좔 입에서 솓아내는 말이 모두 논리 정연했고 뛰어난 전략적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제갈부 또한 책략과 무공 등이 모두 초일류 수준에 도달한 천재, 중원지보라고 칭송받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옆에서 제갈유룡이 말했다.
" 북방은 그리 쉽게 치고 내려오지 못한다. 황연이 어떻게 고려 정규군과 싸우느냐에 따라서 이 전쟁의 승패가 갈릴 것이다."
" 쉽게 치고 내려오지 못한다고? 아라사의 10만 대군이 이미 미발성을 쳐서 승리했고 지금은 남하중이잖아.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짓지?"
" 한 시진 전에 전령이 북 방의 대치상태를 전달해 왔지. 그 때 고려 측 지휘관 이름을 들었는가?"
" 흠.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 그래. 누르하치(努爾哈赤)라는 젊은 만족 장수라고 들었어."
" 정확히는 아이신기오르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 그 자는 명목상 고려의 휘하사령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만족(滿族)의 왕(王)이며 최상의 지휘 실력을 지닌 명장이다. 내가 한 때 요동 북방의 정세를 살필 때 가장 요주의 인물로 꼽았던 존재."
" ......!!"
" 고려는 요동을 통일한 것 같지만 실상은 수많은 북방민족과의 협력으로 다스려가는 연맹제국에 가깝다. 흉노나 만족, 몽골잔류왕족 등에게서 조공을 받고 있으나 자치권을 보장하고 있지. 그래서 그 자 또한 일족의 왕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설명한 제갈유룡이 말을 이었다.
" 누르하치가 이끄는 7만 병력이 아라사 제국군을 막는다면 절대 단기간에 승리할 수 없다. 특히 평야의 만족이 총포병까지 운용하고 있다면... 북방의 지원은 기대하지 마라. 도리어 아라사 제국친위군이 질 수도 있다."
" 그 정도인가."
" ...대명 제국이 이대로 썩어갔다면 반세기 내에 만족의 힘만으로 중원제국을 도모할 정도의 영웅이다. 쉽게 볼 자는 아니다."
제갈유룡이 이렇게 높게 평가하다니 누르하치란 자는 대단한 명장인 듯 했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말했다.
" 아라사와 동영의 협력 없이 단독으로만 고려를 치려 했다면 졌겠군."
" 그렇겠지. 하지만 적을 대단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 여기까지 네가 왔다면 이미 고려는 멸망의 위기에 놓인 거나 다름없다."
제갈유룡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 황연 대장군에게 신병기를 준 이상 질 확률은 없다. 그는 중원역사 그 어느 때를 놓고 보아도 빠지지 않는 명장.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으니 고려 측에서 반칙을 쓰지 않는 한 필승이다."
" 반칙이라면..."
" 그 반칙, [단의 일족]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기 위해 여기서 주둔하는 것이다."
" ......"
단의 일족.
나는 그 이야기를 듣자 좀 더 마음이 복잡해졌다. 과연 그 놈들은 이 전쟁에 나올 것인가?
그 때 동석해 있던 백련교주가 말했다.
[ 백웅이여. 말할 것이 있다]
" 무슨 일이지?"
[ 얼마 전부터 금주성 주변에 심상치 않은 선술(仙術)의 소유자가 떠돌고 있다. 원영신으로 감지했다.]
" 뭐하는 놈이지? 잡을 수 있겠나?"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잡을 순 있겠지만 모른 체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 뭐라고?"
이어진 백련교주의 말에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팔선(八仙) 조국구(曹國舅)로 보인다. 네 기억에서 보았던 인상착의와 보패를 지니고 있었다.]
" ......!!"
팔선!
그들은 현 천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뛰어난 대라신선들이었다. 나는 전생하면서 팔선과 몇 번이나 마주쳤고 도움을 받아왔기에 그들의 진면목을 알고 있었다. 특히 여동빈과의 인연은 너무 깊어서 잊어버리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당황을 가까스로 감추며 말했다.
" 팔선이 금주성을 정탐하고 있단 말인가? 조국구 말고 다른 자는 없나?"
[ 없는 것 같다. 다만 팔선 정도의 대라신선이라면 내 원영신의 감지를 피하는 술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 ...으음."
천계가 우리를 주목하는 단계인가?
나는 일이 뭔가 꼬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망량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 백웅. 크게 신경 쓰지 마시오."
" 천계의 감시가 들어왔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순..."
" 정말로 당신의 의도와 정체를 알고 있었다면 고작 팔선 하나를 얼쩡거리게 하는 게 아니라 진즉에 투선들이 몰려와서 당신부터 때려잡았을 거요. 백련교주의 눈에 띌 정도로 어슬렁거리게 한다는 건 깊은 주시가 아니라 그저 감시의 일환이라는 뜻."
" 음."
" 할 말이 있다면 그 쪽에서 올 거요. 우리가 할 일은 가능한 역량을 숨기며 천계에 빌미를 주지 않는 것이오."
나는 망량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약 하루가 지나자 망량의 말대로 되었다.
" 황제여."
금주성에 머무른 지 하루가 지났을 때.
스스스
오색구름과 함께 팔선 조국구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전반적으로 새까만 관복을 입고 있었으며 한 손에 옥판을 들고 있었다. 나는 침상에 앉아 있다가 조국구의 기척을 알아채고는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조국구를 쳐다보았다.
' 힘을 숨기자...'
기와 의념을 최대한 억제하며 평범한 사람인 척을 해야 한다.
내가 조국구를 쳐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듣기 위해 천계에서 파견된 팔선 조국구다."
" ......"
" 어째서 고려와 전쟁을 하는가?"
나는 조국구의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 고려 측에서 먼저 내게 암살범을 보내었소. 나는 목숨을 위협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답변을 요구했는데 고려왕이 내 사신의 목을 잘라 보내었으니, 그 누가 화가 나지 않겠소?"
" 그 경과는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암살 시도가 있었따하더라도 전쟁은 다른 문제다."
조국구는 차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 이 전쟁으로 수많은 인간이 살상당해 차가운 시체가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추기를 권한다."
" 그건 천계의 의지요?"
그러자 조국구가 고개를 저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 아니. 이건 나의 의지다. 천계는 내게 그저 이유를 알아보고 정세를 살피라고만 했다."
" ...전쟁을 멈췄으면 좋겠소?"
" 그렇다. 이 전쟁은 모두를 상처 입힐 뿐이다. 전쟁 때문에 무수한 인간이 죽게 될 것이고 고아가 흘러넘칠 것이며 비극이 반복된다. 나, 조국구는 양심을 걸고 이 전쟁을 멈추고 싶노라."
" ......"
조국구의 눈에는 강한 결의가 맺혀 있었다.
" 부탁한다, 황제여. 여기서 멈출 지어다."
진정으로 선량한 대라신선이다. 나는 팔선 조국구의 말에서 진정으로 민초를 생각하는 따뜻하고 착한 마음을 느끼고는 먹먹한 마음이 들었다.
' 팔선은 이런 존재들이었구나. 그렇기에 여동빈이 죽을 때까지 신뢰하는 동료들이었던 거구나.'
천계는 결코 정의가 아니다. 배후에 있는 서왕모, 여와는 [옛 지배자]나 다름없으며 옥황상제였던 요순도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런 천계와는 별개로, 팔선이라는 존재들은 도력을 쌓아서 등선한 후 인간 내면의 선을 믿으며 대의를 추구했기에 온 누리에 존경받을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약자를 돕고 정의를 관철하는 강자!
그건 내가 언제나 부러워하며 바라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조국구의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기에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 그럴 수 없소."
" 어째서인가?"
" ......"
실상은 배후에 있는 십이율과 십이율주를 치고 놈의 진정한 비밀을 알아내서 복종시킬 셈이지만, 그런 속사정을 팔선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 팔선이 보고들은 것들은 모두 천계에 보고되니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내 기휘(忌諱)를 범한 놈들을 가만 놔둘 수 없소."
" 옹졸한 자여... 그 마음을 다스리면 만세의 평화가 찾아올진대 이토록 어리석을 줄이야."
" 잔말 말고 이만 나가시오. 아무리 신선이라 해도 대륙의 황제를 겁박할 순 없소!"
" 후우."
조국구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다음에 올 때는 내 동료들과 함께 오겠다. 모두의 힘을 동원하는 한이 있어도 이 전쟁을 멈추겠노라. 그 때, 황제 그대는 섣불리 내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
" ......"
" 이 참극을 벌인 그대의 죄업은 결코 간단히 벌하지 않겠다."
쉬익!
조국구의 신형이 오색구름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백련교주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만일을 대비해서 내 주변에서 기척을 숨기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련교주가 말했다.
[ 백웅. 일이 성가시게 되었구나.]
" ...그렇군."
나는 백련교주의 말 대로라는 걸 느꼈다.
' [모두]라는 건... 틀림없는 팔선(八仙) 전원을 의미하는 거다.'
조국구는 동료인 팔선을 다 끌고 와서라도 나를 제압하겠다고 경고하고 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천계의 명이 없으므로 나를 놔두지만 나중에 명을 받으면 결코 봐주지 않을 기세였다.
제길... 아무리 내가 전력을 다해도 팔선 전원과 싸우면 절대 못 이겨...
내가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저건 허세다.]
" 허세?"
[ 겨우 이런 전쟁 하나 때문에 팔선이 다 출동할 리는 없다. 수십만 대군의 충돌은 흔하지는 않았으나 중원의 역사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 그 때마다 천계와 팔선이 개입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물며 이 전쟁에는 아직 마(魔)의 힘도 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충분한 인과율과 명분이 없는 것이다.]
" 아."
[ 저런 허세를 부려서라도 전쟁을 막고 싶은 것이다... 조국구의 독단에 가깝겠지.]
" 그런가. 흠..."
나는 일순간 조국구의 기백에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멋쩍어졌다. 나는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 조국구가 우리 군을 공격하거나 방해하진 않을까?"
[ 그건 모르겠다. 환술을 이용해서 혼란시키는 정도는 할 수도 있겠지.]
" 윽, 귀찮군..."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 지금 황연에게 가자."
어차피 [단의 일족]이 개입할지 아닐지 두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조국구 때문에 잠이 깬 김에 전장에 가버리는 게 나을 듯 했다.
[ 알았다.]
파앗!
나는 동료들을 데리고 황연에게 갔다. 그리고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황연은 나와 막사에서 밤새 이야기하다가 서서히 투구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출진하겠사옵니다."
" 황연. 건승을 기원하오."
뿌우-
뿌우우우-
전장의 기상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황연이 이끄는 24만 대군이 고려 접경지역의 요새를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군세가 마치 해일처럼 움직이는 걸 최후미에서 보고 있자 장관이었다.
' 고려는 5만 대군으로 막고 있다. 숫자는 이쪽이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빨리 깨지 못하면 안 돼.'
4배의 병력차이니 질 수는 없다. 그러나 제갈부의 말대로 공성에서 이 정도 병력 차는 흔히 있는 일이니, 최단 시간에 적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도리어 24만 쪽이 큰 피해를 입고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 대군을 이끄는 공성만큼 지휘관의 역량이 필요한 분야는 달리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적의 성벽에서 화포가 쏘아져왔다.
쿠쿵! 쿠콰쾅
콰쾅
' 뛰어난 성능이다.'
나는 멀리에서 화포가 떨어질 때마다 이쪽의 병력에 상당한 손실이 일어나는 걸 보자 다소 놀랐다.
저 정도면 내가 남만에서 보았던 서양열국 직수입 화포와 대등한 수준이 아닌가?
운용사거리나 화포의 정밀도, 위력을 보면 결코 화승총이나 운용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화포의 기술이 과학기술의 발달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보면 고려군은 이미 전세계 병력 중에서도 수위권의 화력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저 정도 화포는 이쪽도 지니고 있었따.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황연이 직접 지휘하는 북룡대가 최전방까지 가더니 포병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잠시 동안 굴러다니던 거대한 포신을 지닌 수레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것은 2종류의 신병기 중 하나로써, 공성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공성전용 병기였다. 지휘관이 깃발을 들며 크게 소리를 높였다.
" 만광포(萬光砲) 일발 장전."
제갈사의 과학기술에 의해 특별 제작된 20여 문의 공성포가 서서히 화약을 머금고 살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윽고 명령이 터져 나왔다.
" 발사!!"
쿠콰콰콰쾅
콰아앙!!!
" 으아아아악!!"
" 말도 안 돼!!"
아비규환!!
공성포가 불을 뿜는 순간, 5만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요새의 거대한 철문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정확히는 포의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압력에 찌그러지며 뒤로 날아간 것이지만, 무려 높이가 삼 장이나 되는 철문이 부서진 것이었으므로 고려병사들이 혼비백산했다.
' 시작되었군.'
만광포.
저것은 귀뢰포(鬼雷砲)와 함께 만들어진 2대 신병기의 하나로써, 제갈사는 만광포를 설명할 때 늘 자신감 있게 이야기했었다.
350년 후에나 등장할 수 있을 시대착오적인 화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