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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공손씨!
그것은 천여 년 전, 여동빈의 기억을 봤을 때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어린 여동빈이 패왕의 무덤에 갔을 때 공손세가의 가주인 공손벽이 등장했고, 그는 이후 강호의 공적이 되어서 가문째로 멸문당하고 말았다. 그것뿐이라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공손벽의 공손세가가 대대로 헌원검을 전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신투지존도 당시에 공손벽과 손을 잡은 걸로 알려졌었다. 결국 내가 공손벽의 영혼을 직접 초혼해서 물어본 결과 헌원검의 진본은 실종되었으며 그의 후예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사실밖에 알 수 없었다.
' 하지만 여기서 공손씨가 왜...?'
이미 나는 신투지존에게서 '헌원검'은 뻥이라는 사실을 확정짓듯이 들었다. 그래서 가짜 헌원검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마저도 분실해버린 공손세가에는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사공린이 공손씨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제갈유룡에게 말했다.
" 사공린은 사공씨(司空氏)다. 사공씨는 엄연히 존재하는 성씨고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녀가 공손씨라니 난데없이 무슨 말이지?"
" ......"
" 그리고 그녀가 종말에 대비한 안배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내 연속된 질문에 제갈유룡은 잠시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 사실 흑요석을 받은 이후 계속 고민했었다."
" ......?"
" 아무리 네가 전생자라고 하지만 현세를 살아가는 내게는 생뚱맞은 소리. 흑요석에 박혀있는 실감(實感)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널 배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정보들이 쏟아졌으니... 이성적으로 네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도출된 결론을 부정한다면 제갈무후의 후예라 할 수 없지.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한숨을 쉬었다.
" 네게 모든 비밀을 알려준다는 건 결국 전생 후반으로 갈수록 네게 홀대당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섣불리 내 모든 패를 알려주는 게 계속해서 망설여졌던 이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홀대라니 무슨 소리야? 그렇게 하지 않아."
"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능력과 재능이 부족한 자들은 네 근처에서 내쳐졌고 최대효율에 맞춰서 동료들의 진영이 꾸려진 상태. 전생자 입장에서 모든 전생동료를 평등하게 대할 순 없다. 아니, 애초에 전생자에게 동료가 생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걸지도..."
" ......"
" 내가 모든 비밀을 공개한다면 결국 그건 네 흑요석에 흡수되는 기억이 될 뿐. 그 때부터는 나는 네 밑의 일개 수하에 불과하다.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자들도 이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될 것이다."
" 음... 미안하다."
" 미안할 것 없다. 이런 사소한 문제를 생각하기에는 네 앞길이 지나치게 가시밭길이라서 여태껏 따질 수가 없었던 것 뿐. 신격들과 드잡이질 하는데 이런 불만을 말할 여유가 어딨겠는가? 다른 모두가 그랬겠지..."
그렇게 말한 제갈유룡이 말을 이었다.
" 그러나, 현이와 사는 이미 널 믿고 가장 중대한 비밀과 비전까지 다 밝힌 것 같더군. 그들이 너를 그토록 신뢰한다면 나 또한 더 이상 감출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래서 네 전생에 큰 단서가 될 수 있는 사실을 오늘 공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 고마워."
" 이야기는 진천휘가 죽었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갈유룡은 잠들어 있는 사공린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 나는 수십 년 전 진천휘와 약조했던 계획대로 대명제국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종말에 처한 인간의 운명을 구하고자 마음먹었지만, 그 계획에는 중대한 헛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 헛점?"
" 내 계획대로 나는 손쉽게 [어둠]의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연금술과 마도의식을 이용해 초상기인까지 도모할 수 있었으며 팔부신중과도 손을 잡아 일대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세상의 강대한 신과 맞서싸울만큼의 힘을 갖고있지 못했다."
" ......"
" 너도 종종 느꼈을 것이다. 삼대세력의 수장 중에서 나, 제갈유룡의 순수한 무력이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그러나 나는 이걸 자력으로 보완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 생각했고 스스로 강해지려는 노력을 덜 들였다. 그래서 네 전생시작시점에서는 내가 가장 약할 수밖에 없었지."
" 무의미하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 제갈유룡 너도 천재잖아.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불로불사를 얻는 것도 가능했을텐데 계속 노력했으면 신선보다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았겠냐."
" 그럴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 말로(末路)는 뻔히 정해져 있다."
제갈유룡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 내가 아무리 노력해서 강해져봤자 네 19번째 전생에서 사도급 강함을 손에 넣었던 백련교주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게다가 문제는 기를 쓰고 그만큼 힘을 강화시켜봤자 결국 진정한 [옛 지배자]나 직속화신의 힘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그렇지 않은가?"
" ... 그렇긴 하지."
" 순수한 인간에게는 정해진 한계가 있다. 인간들 기준에서 나는 천재이며 기린아라고 불리겠지만 결국 하위종족일 뿐. 나는 [어둠]의 지식을 잘 알고 있었기에 빠르게 포기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백련교주는 그걸 시도하고 있어."
" 그건 그가 전생자 달마대사의 적통(嫡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당시의 내게는 그런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제시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 으음."
" 백련교주가 인간마도사 중에서도 무척 특이한 경우라는 건 알아두어라."
그렇게 말한 제갈유룡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 인간의 그릇으로는 일정수준 이상으로 강해지지 못한다... 그렇다면 신(神)의 혈통을 빌리는 수밖에 없어. 그것도 최강(最强)의 혈통을."
" 설마..."
" 그래. 나는 삼황오제 중 최강은 황제 공손헌원이라 생각했고, 그 존재가 신대(神代)에 인간과 교합하여 지상에 남긴 혈족이 존재할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둠의 제사장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정파삼대기인(正派三大奇人)인 태산노옹(太山老翁)으로써 황제의 혈족을 계속해서 찾아다녔지."
그는 사공린의 손목을 잡았다.
" 그 결과, 현재의 사공씨 중에서도 사공표국이야말로 천 년 전에 멸망한 공손세가의 진정한 후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어떻게 알아낸 거지?"
" 간단하다. 고문(古文)을 모조리 뒤지고 천여 년 전부터 무림의 기록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탐문해 나갔다. 그리고 삼백오십여 년 전, 공손세가의 후예가 사실은 사공씨로 변했다는 자료를 찾아내었던 거지."
" 으음."
그렇게 된 건가.
' 공손세가의 혈통이 공손헌원의 힘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신의 힘을 확보하려고 했던 거군...'
여기까지는 제갈유룡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말했다.
" ... 하지만 사공린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야. 사공린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오빠, 그리고 아버지인 사공표국주도 특별할 것 없는 그냥 인간이지. 심지어 용중일의 황산파에도 대들지 못할 정도로 약한데 어찌 그들이 신의 혈통이라 할 수 있어?"
" 그래. 네 말대로 사공씨 일족은 공손세가의 후예 치고는 지나치게 무공이 약하지.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을 상징하는 검법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제갈유룡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그래서 나는 태산노옹으로써 또 하나의 작업을 행했다. 그건 바로 공손검보(公孫劍普)를 찾아내는 거였지."
" 공손검보?"
" 너는 잘 모르겠지만 강호에는 과거부터 공손검보의 전설이 떠돌고 있었다. 전설적인 강호의 여고수, 공손대랑(公孫大娘)의 절세검공이 강호 어딘가에 검보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전설이었지."
" 자... 잠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져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말했다.
" 공손대랑이면 당나라때 사람이잖아? 그럼 공손세가가 멸문하기 이전인데."
" 그렇다. 공손대랑은 공손벽보다 약 두 세대 전의 인물. 공손벽에게는 작은 종조모가 되는 인물이다."
" 헉..."
" 천하제일세가라 불리던 공손세가를 뛰쳐나와서 자기 힘으로 검문일가를 이룬 절세천재였지. 그 덕분에 공손세가의 본가(本家)는 천 년의 세월동안 강호인들에게 추격당하며 공손검법을 잃어버렸으나, 본가와 절연(絶緣)해버린 공손대랑의 검보가 남아서 명맥을 이어져 오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 ......."
" 어찌되었든 나는 몇 년간 비급을 찾다가 결국 공손검보를 찾아내긴 했지... 그리고 공손검보를 익혀서 사공린을 제자로 삼아 공손검결을 전수해줬다. 하지만..."
" 하지만?"
제갈유룡은 문득 사공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 응?"
" 내가 사공린에게 공손검결을 가르친 건 이 아이를 강호의 고수로 키우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황제의 후예가 공손검결을 갖추게 되면 신의 힘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지. 그러나 너도 알다시피 사공린은 아무런 인외의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 ......"
" 네가 전생하면서 나와 대적할 때 황궁의 수장 제갈유룡이 사공린을 데려오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해. 실패한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풍신류 용중일이 황산파를 이용해 사공세가를 겁박할 때도 너무 심하게 하지 말라고 언질이나 해놓는 정도였지."
결국 아무 의미없단 말인가.
나는 제갈유룡의 말을 듣다가 허탈해져서 말했다.
" ... 아니 그럼 무의미하잖아. 사공린은 신의 혈족이 아니고 계획은 실패했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될 걸 뭐 이리 길게 이야기해?"
" 네 흑요석 덕분에 그게 아니란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지."
" 뭐?"
" 백웅. 네가 50년 동안 실종되고 나서 귀환했던 삶을 기억하는가? 23번째 생이었지."
" ... 물론."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복잡한 표정을 짓자 제갈유룡의 말이 이어졌다.
" 그 당시에 귀환했을 때 궁왕 연종휘의 보고를 기억하고 있는가?"
" 50년 동안 있었던 일과, 그가 조사한 십대고수에 대한 보고를 해 줬어."
" 그 중에서 천마(天魔)에 대한 내용을 잘 떠올려봐라."
" 으음..."
천마?
나는 그 말에 곰곰히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 천마(天魔)라는 인물은 현재 홀로 나인교에 맞서서 싸우고 있다고 짐작되고 있습니다.]
[ 어찌된 일인지 나인교의 사술과 마법이 천마에게는 하나도 효과가 없습니다. 또한 도리어 나인교인을 죽일 때마다 그의 힘이 강대해진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교 한 명을 뜯어먹어서 패퇴시키기까지 했습니다.]
[ 모든 종류의 마(魔)가 그에게 효과가 없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속하가 그의 정체를 캐 보았으나 확실한 것은 그의 성이 공손씨(公孫氏)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 그의 실력은... 확실한 절대지경입니다. 먼 발치에서 보았습니다만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 서, 설마."
"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 설마겠지."
제갈유룡은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사공린을 쳐다보며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 50년 후에 출현할 십대고수 천마가 바로 사공린, 아니 공손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 ... 그, 그럴수가. 아니, 잠깐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리며 말했다.
" 네 말대로 사공세가가 공손세가의 후예라면 천마가 될 수 있는 건 사공린 뿐만이 아니야! 그녀에게는 오빠와 혈족이 많이 있는데 그들 중 하나일수도 있지 않은가?"
" 나머지 사공세가 인물들의 무술재능은 버러지나 다름없다. 다들 평생 가도 초절정은 커녕 절정무공도 얻지 못할 자들. 그러나 사공린만큼은 다르지. 그녀는 전 대륙에서 손꼽힐만한 무공의 천재다. 내가 제대로 키웠다면 진작에 천하에서 손꼽히는 초고수가 되었을 터."
" ......"
" 연종휘의 보고에 따르자면 천마는 절대지경에 이른 자였다. 그리고 사공세가에서 그 정도 재능을 지닌 건 사공린 외에는 존재치 않아."
제갈유룡이 단언하는 말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 ... 사공린이 천마라고?'
천마라는 칭호는 결코 좋은 칭호가 아니다. 하늘(天)에서 내려온 악마(魔)! 그런 흉흉한 칭호를 얻는 일은 강호역사상 거의 없었으며,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하여도 얼마 가지 않아 다른 고수들에게 토벌당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천마라는 존재는 내 첫번째 생에 생생하게 악몽처럼 날뛰는 망나니라는 인식이 강했다. 저 단아하고 고결한 사공린이 천마라는 존재가 된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나는 일단 침착하며 말했다.
" 사공린이 천마라고 치지. 그렇다면 지금부터 50년 후에 사공린이 황제의 혈통을 각성하여 힘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되는 건가?"
" 그렇겠지."
" 그렇다면 황제 공손헌원의 피를 각성한 자의 힘은, 그 어떤 마법이나 사술도 통하지 않으며 마(魔)를 해치울 때마다 더욱 강해진다는 거군..."
더욱이 나인교의 주교 하나를 산 채로 뜯어먹기까지 했다는 건 마(魔)에 대한 저항력이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내가 곰곰히 생각하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그래서 내가 백웅 너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 뭐지?"
" 사공린이 각성하게 되는 계기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쪽에서 인위적으로 그녀의 힘을 깨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걸 해줄 수 있는 건 네가 지닌 음신지력 뿐이야."
" ......!!"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 서문혜한테 하듯이 음신지력을 사공린에게 불어넣으란 말인가?"
" 그렇다. 음신지력은 신의 힘이니 충분히 영향을 받겠지."
" 빌어먹을... 음신지력은 기공(氣功)처럼 안정된 힘이 아니야. 기경팔맥으로 움직여볼 수는 있지만 보통 인간이 음신지력을 받아들이면 단번에 피와 살이 새하얗게 얼어붙는다! 서문혜가 신족의 혈맥이 아니라면 그녀도 진작에 죽었을 텐데, 사공린이 죽을 가능성이 너무 높잖아!"
나는 호통치듯 제갈유룡에게 외쳤다. 음신지력을 타인에게 불어넣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고 보통 인간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흑웅도 없는 상태라서 별다른 제어도 하지 못하고 운에 맡기는 느낌인데, 그걸 사공린에게 하라니?!
내가 화를 내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그 때는 다음 생에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라. 간단하지 않은가."
" ... 뭐?"
" 흑패를 이용해서 죽은 사공린을 살려도 좋다. 중요한 건 신의 힘을 발현시키는 거니까 흑패가 아깝진 않겠지."
" ......."
나는 기가 막혀서 머릿속이 정지되는 기분이 들었다.
' 이 놈은... 사공린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그녀 입장에서는 믿고 있던 은사의 부름으로 황제에게 왔더니 뜬금없이 습격당해서 죽는 셈이리라. 그런데도 제갈유룡은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 정보를 말해준 건 고맙다. 하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거다."
" 왜지? 네가 그렇게 여유로운 처지인가? 만일에 운이 좋아서 사공린이 지닌 천마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네가 가장 두려워하는 동영무사의 습격에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단방법 가릴 때가 아닐 텐데."
" 닥쳐!! 난 그러지 않을 거다."
나는 홱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그 자리를 걸어나왔다.
' 빌어먹을...'
큰 단서를 얻은 건 사실이다. 제갈유룡의 말대로 사공린에게 음신지력을 시험해볼 필요성도 충분하지만, 나는 사공린이 희생당하는 건 안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밖으로 걸어나오자 망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백웅."
" 망량. 당신도 알고 있었소?"
그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사공린이 천마일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제갈세가 사람들은 거의 다 하고 있었을 거요. 다만 그녀의 스승인 제갈유룡 본인이 말해줘야 할 일이라서 놔뒀을 뿐."
" 나는 사공린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소. 없던 일로 하겠소."
" 무작정 그런 식으로 거부할 필요는 없소, 백웅. 두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
" 두 가지 방법?"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 첫 번째는 바로 사공린에게도 흑요석을 주어서 전생동료로 끌어들이는 것이오. 그리고 모든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한 후 음신지력을 주입하는 거지. 스스로 납득한 상태의 죽음이라면 상관없지 않겠소?"
" ... 그, 그건."
" 두 번째는 당신이 하루바삐 음신지력을 모아 흑웅을 재생성하는 것이오. 흑웅이 생기면 음신지력을 정밀하게 다스릴 수 있으니 사공린의 몸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음신지력을 조절할 수 있겠지."
" 지금 당장은 못 하는 일이오."
" 그렇겠지. 하지만, 백웅."
그는 나를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 이 선택을 다음 생으로 미뤄봤자 결국 똑같은 선택지에서 또다시 방황할 뿐일 것이오... 여태껏 그대가 비슷한 선택을 몇 번이고 미룬 탓에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을 낭비했었다는 걸 기억해 주시오."
" ......"
" 타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건 좋소. 허나 그게 무작정 동정심이어서는 안 되오. 그 어떤 선택에도 최소한의 합리성이 존재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오."
" 하지만..."
" 사공린이 억울하게 희생되는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 그렇소. 결국 그녀는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내 사정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강요받는 셈이 되기 때문이오."
그러자 망량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 모순이오, 백웅."
" 모순이라니?"
"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당신은 이번 고려와의 전쟁을 일으켜서는 아니 되었소.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수천 수만의 병사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이오? 그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오?"
" ......!!"
나는 장침으로 폐부를 찔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뜨끔해서 순간 억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묘하게 불편하던 마음의 폐색을 망량이 단번에 긁어버린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 하, 하지만, 십이율주가 먼저 도발했으니..."
" 그럼 정예만 추려서 수성하다가 단번에 십이율주의 본거지에 쳐들어가 그 자의 목만 따면 되었을 일이오. 아니면 흑패로 십이율주 목숨을 날려버리던가. 허나 당신은 십이율주의 도발에 정면으로 맞서는 걸 택했소."
" ......"
" 물론 우리는 책사이니 당신의 결정을 무조건 존중하오. 당신의 선택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에 거기에 맞춰서 책략을 짜줄 뿐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우리의 변치않는 주군이며 왕이니까... 당신이 걷는 패왕의 길이 피와 살육의 길일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함께할 것이오. 하지만!!"
망량은 힘을 주어 말했다.
" 왕이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자신의 신념이 깔려있기 때문이오. 그 신념은 섣불리 경중을 두어서는 아니되며 최소한의 공평함을 품고있어야 하며, 자기모순을 확고히 떨쳐낼 수 있어야 하오. 그래야만 왕도(王道)를 논할 수가 있소."
" ......"
" 선(善)과 악(惡)의 문제가 아니오. 당신이 대책도 없는 온정을 무작정 베풀며 목숨에 합리적이지 못한 차등을 둔다면, 앞으로 다른 동료들이 당신을 주군으로써 신뢰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망량의 말을 어쩐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 알겠소.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알겠소."
" 그럼 어찌할 생각이오?"
" 당신이 말한 첫번째 선택대로 하겠소."
" 사공린에게 흑요석을 주겠단 말이군."
" 그렇소. 하지만 그녀에게 음신지력을 불어넣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그녀를 우선 절대지경으로 키우도록 하겠소."
내 말에 망량은 부채를 촥 펴며 말했다.
"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의 명령대로 전쟁을 수행하며 죽어나가는 병사들에게는 미안하지 않소?"
" 당연히 미안하오. 내가 하는 일은 죽을 죄요. 하지만..."
나는 눈을 번뜩였다.
" 이미 선택한 이상 망설이지는 않겠소. 이 전쟁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거나 희생이 커질 것 같으면 중단시키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오."
" 좋소."
망량은 훗하고 웃었다.
" 그거면 된 거요. 당신이 지옥불에 떨어질 때는 내가 함께 가 주지."
" 망량..."
나는 망량의 말에 내가 얼마나 미숙한지를 깨달았다.
' 전쟁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쟁을 치른다는 건 그 자체로 수많은 인간의 인생을 휘말리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전쟁에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죽게 되는 것. 또한 나를 도와서 계책을 수립하고 국가를 운영해주는 다른 책사들 또한 그 업(業)을 짊어지게 된다는 뜻이니, 그 자체로 거대한 원죄가 되는 것이다.
" ......"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미 일어난 전쟁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시작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내가 해야할 일은... 언젠가 만신(萬神)을 파멸시켜서 모든 이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 뿐이다.'
달마가 내게 맡긴 숙업.
외신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진정한 진정가향을 성공시키는 것!
그 업보를 달성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저지른 숱한 잘못을 반성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리라. 죽어서도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지금의 희생을 양해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리라.
나는 이윽고 사공린을 깨워서 그녀에게 흑요석을 전달했다. 그리고 사공린은 모든 기억을 얻은 후 말했다.
" 폐하. 제게 음신지력을 그대로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제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옵니다."
" ......"
" 하지만 대신에 하나의 대가를 요구하고 싶사옵니다."
" 대가?"
이윽고 사공린은 차분한 눈으로 말했다.
" 다음 생부터는 제가 제갈유룡의 목을 언제든 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걸 허락해 주신다면 영겁토록 충성을 바치겠나이다."
" ......!! 꼭 그래야겠나?"
" 본인에게 허락을 구하셔도 좋사옵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제갈유룡을 불러서 사공린의 말대로 허락해도 될지를 물어보았고, 제갈유룡은 뜻밖에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도 좋다."
" ......"
" 천마를 손에 넣는 대가치곤 싸겠군."
자기 목이 걸렸는데도 아무런 감정변화가 없어보였다.
'본인도 동의했다면 어쩔 수 없지.'
설마 동료들끼리 살육을 허가하는 계약을 맺게 될 줄이야.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다, 사공린. 네가 제갈유룡의 목을 치려 해도 앞으로의 전생에서 결코 막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