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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88화 (985/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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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즉시 비등을 써서 세이메이와 아라사 황궁을 한 번씩 방문해서 직접 병력파견과 참전을 요청했다.

' 겉으로 망량한테 시키기는 했지만 내가 직접 왕복하는게 수십 배는 빠르지.'

세이메이는 당연히 승낙했으며 5만 군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일단 미호가 천황을 손에 넣은 상태인데다가 도쿠가와 막부에 장생불로의 술법을 가르쳐주면 손쉬운 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만 아라사 쪽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죽은 이반 4세의 뒤를 이어 섭정에 오른 보리스 고두노프란 인물이 현 아라사의 정계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내 요청을 듣자마자 떫은 얼굴로 말했다.

" 그대가 웅 제국의 황제라고? 믿을 수가 없군... 소년 황제라니..."

" 보리스 고두노프. 내 신분은 옆에 있는 벨로프가 이미 인증했을 텐데."

" 흥..."

" 내 요청을 거절할 셈인가?"

" 그렇다. 10만 대군이라니, 귀국과 본국 사이에는 그 요청을 들어줘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우리는 고려와도 원한관계가 없다.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말고 물러가라."

" 흐음..."

나는 웃으면서 검집에 손을 갖다대었다.

' 주제도 모르는 허수아비 놈! 그냥 이 황궁에 존재하는것들을 싹 다 죽여버리고 아라사를 내가 가져야겠군.'

제갈사의 계책대로 할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그렇게 하면 10만 정도가 아니라 아라사의 40만 병력을 모조리 고려에 때려박을 수 있으리라.

그러자 갑자기 머릿속에 말이 들려왔다.

[ 그만두시오! 외교가 그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여 무력행사를 할 생각이오, 황제여!]

보리스 옆에 섭정보좌로 나와있던 벨로프가 초능력을 쓴 듯 했다. 그는 서방에서 텔레파스(telepath)라고 불리는 선천능력의 소유주였기에 따로 술법을 쓰지 않아도 타인의 정신에 말을 걸 수가 있었다. 전음과는 다른 능력이었다.

나는 벨로프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 벨로프. 본디 이반 4세를 척결한 시점에서 내가 억지로 이 나라를 집어삼킬 수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더 이상 아라사를 먹으려 하지 않는 대신 10만 대군을 파병하라는 게 그렇게 못할 요구인가.]

[ 황제여. 그건 그저 힘의 논리일 뿐이오. 그대에게는 인도(人道)란 게 없단 말이오?]

[ 그럼 너희가 힘의 논리를 벗어난 존재라는 걸 증명해봐라. 내 눈에는 너희가 그렇게 선량하며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처럼 보이진 않는다.]

[ ......]

[ 정 그렇다면 네가 보리스 섭정을 설득해라.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몇 배나 되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 하루만 시간을 주시오.]

[ 좋다.]

쉬익

나는 그 자리를 비등으로 벗어났다. 벨로프를 압박했으니 웬만해서는 보리스 또한 내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망량선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 이 신체(神體) 흑요석의 사용법을 알아내야 해.'

선지자는 신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과율을 읽거나 조작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고, 그건 필멸자가 아닌 초월자 -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자들 몇몇에게만 허용된 능력이었다. 망량선사는 그 조건을 만족하고 있기에 아마 알고 있으리라.

타닷

내가 망량선사의 마을에 걸음을 내딛자 천우진이 내 앞에 나타났다. 천우진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 왜 또 왔냐?"

" ... 나만 보면 왜 틱틱거리지? 흑요석을 통해서 너도 이득을 좀 얻었을텐데."

" 필요없는 거라 말했을 텐데. 네 멋대로 선물을 안겨놓고 혼자 만족하는 건가?"

" 됐고 난 망량선사를 만나러 왔다."

" 스승님을 왜?"

천우진과는 이미 흑요석도 공유했기에 나는 신체 흑요석을 보여주며 선지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전말을 들은 천우진은 잠시 후 말했다.

" 그 흑요석을 줘 봐."

나는 순순히 천우진에게 흑요석을 넘겨주었다. 천우진은 뚫어져라 보았지만 특별한 뭔가를 느끼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정말 여기에 뭔가 비밀이 있긴 한 건가...?"

" 세이메이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그럼 술법사의 힘으로는 진가를 알 수 없는 보물인가 보..."

어...

휘청

나는 급속히 잠이 오는 걸 느끼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꿈의 세계.

나는 익숙한 오솔길의 맞은 편에 새까만 고양이가 앉아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 기린(麒麟)이 내게 요청을 해 왔다.]

망량선사가 문득 지붕 위로 뛰어 올라갔다. 놈은 점잖게 배를 깔고 앉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아 달라고...]

" ......?"

뭔 소리야?

다만 녀석의 말에서 나온 단어가 신경쓰였기에 말했다.

" 기린이라는 건 사대신수(四大神獸) 린봉귀용(麟鳳龜龍)의 기린을 말하는 건가?"

[ 그렇다.]

" 그 부탁은 무슨 뜻인데."

[ 균형을 어지럽히는 자를 찾아서 척결해 달라는 뜻이다.]

" 그게 누군데?"

망량선사는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

" ......?"

어?

어... 설마?

나는 설마하는 생각에 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 나... 나?"

[ 현재의 인과율을 읽어보면 그렇군...]

" ......!!"

[ 이전에는 확실치 않아서 널 만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으나, 모든 정황이 너를 가리키고 있다. 세계를 어지럽히고 대흉(大凶)으로 뒤덮을 자는 바로 너다.]

" ......"

내가 대흉을 불러일으키고 균형을 뒤흔드는 자라고?

' 억울해!'

난 그저 백련교와 황궁을 통합해서 황제가 된 것 뿐이지 않은가? 물론 십이율측에서 시비를 걸어서 싸울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그 또한 정당방위에 속한다. 지금까지 큰 우환없이 잘 넘겨온 것 같은데 이런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망량선사를 보면 이미 내가 범인이라고 확신한 듯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망량선사에게 말했다.

" 그, 그래서 기린의 요청대로 날 죽일 건가?"

[ ... 아니. 죽이는 건 무의미하다.]

" 뭐?"

[ 예지(豫知)에 따르면 넌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 도리어 죽음으로써 생을 얻는 자. 그런 너를 죽여주는 건 도리어 자비로운 일이겠지.]

" 잠깐... 설마..."

망량선사가 하품하며 말했다.

[ 너를 봉인(封印)하는 게 옳은 일 같다.]

" .....!!"

아, 안 돼!!

' 제기랄!! 생각했던 최악의 경우가...!!'

내게 있어서 최악의 경우는 고문당하거나 죽는 게 아니다. 바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눈뜬 상태로 봉인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태껏 누구도 나를 제대로 봉인하지 못했지만, 눈 앞의 망량선사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안 그래도 제갈사 또한 망량선사만큼은 절대로 적으로 돌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하지 않았던가?

[ 명심해. 망량선사는 절대 네 적이 되면 안 돼. 네가 1천번을 전생하는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것만은 안 돼.]

내게 수많은 자살법을 전수했던 제갈사의 말이었다.

[ 자살하면 안돼?]

[ 그 어떤 자살법을 써도 망량선사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에게 필멸자의 얄팍한 수법 따위는 의미가 없다. 다른 [옛 지배자]들은 네 자살법을 쉽사리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이겠지만...]

[ 그 고양이가 그렇게 대단해?]

[ 그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가볍게 지울 수 있어. 또한 인과율도 조작할 수 있지. 네가 행한 자살법을 모조리 무효화시키는 건 일도 아냐. 죽음조차 환몽(幻夢)에 묻혀버리겠지.]

[ ......]

[ 어째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초상위 존재가 현실에 떡하니 나와있는지가 의문일 정도지. 저런 건 우주의 종말에나 잠시 얼굴을 비출 높으신 분인데...]

투덜거리던 제갈사가 말했었다.

[ 만일 그런 상황이 오면 말이다... 방법은 딱 하나 뿐이야.]

나는 지금이 그 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을 꿀꺽 삼키고는 바로 땅에 머리를 박았다.

쿵!!

" 한 번만 봐줘!! 난 이대로 봉인당할 순 없어!!"

[ ......]

" 그 기린이라는 놈한테는 내가 가서 잘 설명할게!! 진짜 한번만 봐줘!!"

그렇다.

머리 박고 용서를 구하는 것 뿐!

내 가슴이 터질것처럼 세게 뛰었다. 이대로 망량선사에게 봉인당하는 것은 전생자인 내게 있어서 [영원하게 이어지는 죽음]이나 다름없다. 망량선사라면 우주가 멸망한 후에도 나를 계속해서 봉인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 옳은 일인 것과 해야하는 일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지.]

" 응?"

[ 아직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너를 봉인해야 할지를.]

서, 설마!

왠지 저 고양이 심드렁한 표정인가 싶었는데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거였나! 나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 망량선사를 쳐다보았는데 녀석은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펴면서 말을 이었다.

[ 만일 크리슈나가 네게 손을 잡자고 하면 넌 동의할 것이냐?]

" 크리슈나? 놈과 만나기로 약속은 했는데..."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네 처우를 결정하도록 하겠다.]

" ......"

음... 이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 크리슈나가 여기서 왜 나오지?'

전후사정을 당최 알 수가 없다. 책사들에게 지혜를 구하고 싶은 국면이지만 이 곳은 꿈의 세계라서 전음이나 순어구로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크리슈나와 손을 잡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크리슈나는 아마 고대신의 화신(化神)일 것이다. 또한 [질서] 진영에 속해 있으며, 나름대로 그 진영에서도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 증거로 동방정교회의 수장이자 신수인 베헤모스는 크리슈나를 경외하고 존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크리슈나와 손을 잡는 게 나쁠 리가 없다. 내가 크리슈나에게 화를 버럭버럭 내긴 했지만 그건 난데없이 튀어나온 놈이 내 일을 방해하고 청룡무관 사람들에게 인과율에 휘말리게 해버렸으니 짜증이 났던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나쁜 놈이 아니라 도리어 선(善)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뭐가 정답일까?

크리슈나와 손을 잡는 것일까?

손을 잡지 않는 것일까?

저 고양이의 표정이나 감정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겉으로는 인격체인 척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놈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신(神)에 가장 어울리는 놈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궁극의 양자택일 상황에서 뭘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잠시 후 말했다.

" ... 손잡지 않을 거다."

내 운명을 이 대답에 건다!

[ 어째서지? 크리슈나는 창조신 비슈누의 화신이니 현재 세상에 나와있는 [질서]의 존재 중 가장 강력한 편이다. 또한 네게 호의적일텐데.]

" ......"

[ 대답해라.]

" 이유라면... 놈은 그냥 껄끄럽고 싫어."

[ 그 이유가 끝인가?]

망량선사가 몰아붙이자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봉인되든 말든 할 말은 해야겠다!

" 아니 자꾸 왜 나한테 대답을 강요하는 거야? 그 놈이 어떤 놈인지 일단 얘기해봐야 알 거 아냐! 좋은 놈이면 친구먹고 나쁜 놈이면 멀어질 거고! 근데 지금으로서는 그 놈 인상이 완전히 거지같으니까 손잡기가 싫단 거 아냐!"

[ 그렇다면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얘기군.]

" 그럴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 없어! 뜬금없이 튀어나와서 사람 일에 초쳐먹은 놈이 뭐가 이쁘다고 손을 잡겠냐!"

내 말에 망량선사가 잠시 후 말했다.

[ 크리슈나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해도 말인가?]

" ......"

[ 마지막 질문이다. 신념대로 대답하면 된다.]

에잇, 제기랄. 이놈의 고양이 새끼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경질이야.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서 짜증이라도 내는 건가?

나는 내심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며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 어. 손 안 잡아!"

[ 이유는?]

" 종말 갖고 날 꼬시는 놈 치고 괜찮은 놈 없었으니까... 그렇게 좋은 방법이 있으면 지는 지금까지 그 강력한 힘을 가지고 왜 안 했다냐? 그게 의심스러워서라도 끝까지 그 놈을 믿지는 못할 것 같다. 날 이용하려는 게 뻔하니까."

[ ......]

" 내가 할 말은 다 했어! 봉인할 거면 빨리 해."

나는 그 자리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 제길... 내 전생 여정도 여기서 끝인가.'

일단 되는대로 말해보긴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이런 무모한 양자택일에서 그 누가 제대로 된 확신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생이란 건 결국 양자택일이고 선택이다. 뭘 택하든간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면, 아쉬움이 남지 않게끔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모순된 말이지만 그렇게 선택하는 게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걸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깨달아온 것이다.

그러자 망량선사가 한참 후 말했다.

[ 봉인은 없었던 일로 하지.]

" ......?"

[ 그런 생각이라면 봉인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군.]

어?

망량선사가 날 봐준 건가?

내가 얼떨떨해서 눈을 꿈벅이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 그러나 린봉귀용 모두가 너를 주목하고 있다는 건 알아두어라. 크리슈나가 네 앞에 나타난 것 또한 결코 우연이 아니란 걸 알아두는 게 좋을 것이다. 특히 기린은 네게 강렬한 적의(敵意)를 품고 있다. ]

" ... 그건 무슨 소리지? 크리슈나가 일부러 내 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 ......]

침묵하던 망량선사가 말했다.

[ 네가 내게 찾아온 목적을 말해라. 그걸 듣고 널 내보내 주마.]

" 그, 그거야 이 흑요석 때문이지."

나는 품에서 신체 흑요석을 꺼냈다. 그걸 본 망량선사는 냄새를 킁킁하고 맡더니 말했다.

[ 태양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신의 육체인가.]

" ......!! 그래. 맞아."

[ 내게 사용법을 물으러 찾아온 것 같군.]

대체 이 고양이의 능력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내가 내심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끄덕이자 망량선사는 흑요석을 발으로 밟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꿀꺽

" ......?"

[ 음, 맛있군...]

망량선사가 흑요석을 삼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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