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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선지자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 신체가 뭔지는 알고 있다...'
신의 몸.
나는 세이메이에게서 아마테라스오오카미의 신체를 절반 넘겨받은 적 있었고, 그 힘은 음신지력과 융화되어 내가 음신지력을 대성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이미 죽은 신의 몸뚱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신력을 품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나는 선지자에게 물었다.
" 그 말은, 이 흑요석이 [월요의 수호자]의 신체란 말인가?"
[ 아니... 그렇지 않다. 그저 품고 있었을 뿐.]
" 품고 있었다고? 무슨 뜻이지?"
[ 맡아두고 있다는 게 더 옳은 말이겠지. 이건 수호자의 신체가 아닐 뿐더러, 수호자 본체의 신체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신의 신체다.]
" ......?!"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선지자의 말이 너무 뜻밖이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왜...? 이 흑요석이 다른 신의 신체라면 뭐하려고 월요의 수호자가 그걸 품고 있는가?"
[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지만, 이 진체(眞體)의 가치는 말해 주마.]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 이건 일반적인 제물과 달리 그저 바치는 것으로는 무의미하다. 신이 눈독들일 정도의 제물은 애초부터 강력한 영기(靈氣)나 신기(神氣)를 품고 있으나, 이건 그렇지 않다. 아무리 신체라고 해도 이대로는 쓸모가 없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제물로서의 가치는 무(無)에 가깝다.]
그러더니 선지자가 왠지 으스대며 말했다.
[ 이 물건의 진가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우주를 통틀어 몇 되지 않으리라. 우리 종족 또한 이런 물건을 다뤄본 경험이 있다... 아주 희소한 경험이었지.]
" ... 그럼 제대로 쓰려면 어떻게 해야하지?"
선지자는 잠시 뚫어져라 흑요석을 살피다가 말했다.
[ 초기설정되어 있는 인과율(因果律)을 이어야 한다. 인과를 엮는 순서가 옳다면 이건 그제서야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매우 까다롭지... 까다롭고 말고.]
" 인과율은 어떻게 잇지?"
[ ......]
선지자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 전생자여.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인과율을 읽고 조작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된다 생각하느냐...?]
" 음... 별로 없겠지."
[ 방금 전의 질문은 내게 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과율은 우리 종족조차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그 질문을 받아줄 수 있을만한 존재를 찾아가라...]
" 알았다."
[ 우리 종족만의 비전(秘傳)이 있긴 하지만 그건 우리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쳐줄 수 있는게 아니다. 그건 우주 전체에서도 다루기 까다롭다 정평이 난 제물이다.]
정말 특수한 것이긴 한 모양이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흑요석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 난 감정을 위해 많은 대가를 바친 것 같은데, 단서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은가?"
[ 단서... 단서라기 보다는 그 물건을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가르쳐 주마...]
선지자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본디 존재하지 않았던 선택지(選擇肢)가 생긴다... 존재하지 않는 운명의 인도자가 객인(客人)을 이끌게끔 되지...]
" 어?"
[ 말 그대로다... 자세한 건 나중에 직접 쓸 수 있게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선택지가 생긴다고?
하도 엉뚱한 말이라서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 뭐 좋은 거겠지...'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니 다음에는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도 감이 왔다. 나는 대충 이 곳의 상황이 정리된 것을 느끼고는 물러나왔다.
파앗!
나는 동료들에게 선지자에게 들은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자 대뜸 제갈사가 말했다.
" 3인칭 기억전승같은 건 지금으로서는 할 필요 없다."
" 응?"
" 아니, 앞으로도 그다지 필요없을 듯 하군. 그건 그냥 잊어도 좋다."
" 아니 왜..."
제갈사는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망량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 숙부의 말이 옳소. 특별한 상황에서 응용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의미없구려. 3인칭 전승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필요 없소."
" 음, 뭐 그렇다면야..."
" 율주를 해치우는 문제는 순수한 무(武)로만 접근하지 않아도 좋소. 안 되면 물량으로 밀어붙여서 없앨 수 있으니 천의무봉의 격파에만 집착하지 마시오."
" 알았소."
" 그보다, 월요의 수호자에게서 얻었다는 그 흑요석 신체... 어쩐지 스승님을 찾아가야 할 문제로 보이는구려."
"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인과율을 제대로 읽고 조작할 수 있을만한 존재.
그런 존재는 [옛 지배자]급 존재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내가 그나마 찾아갈만한 존재란 하나뿐이었다.
' 망량선사에게로 가야 할 문제.'
망량선사라면 어떻게 해야 흑요석 신체를 사용할 수 있을지 알려줄 것이다. 차례대로 해법이 보이는 걸 깨닫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때였다.
" 폐, 폐하. 승상전하..."
" 무슨 일이냐?"
" 그것이..."
망량에게 급히 문관(文官) 하나가 다가와서 무언가를 속닥거렸고, 망량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약간 안색이 바뀌었다.
" 알았다. 물러가라."
" 무슨 일이오?"
망량은 관리가 물러난 후 말했다.
" 고려에 보냈던 사신들이 도착했소. 허나 숫자가 줄었소."
" ......?!"
" 그대가 황제로서 조정에 나가서 제대로 보고를 들어야 할 것 같소, 백웅."
이게 뭔 소리야?!
" 아, 알았소."
나는 황제의 옷을 갖춰입고 잠시 준비한 후 망량 등과 함께 조정에 출석했다. 그리고 옥좌에 앉자 이윽고 사신단 일행이 조정에 다같이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사신단의 부단장이었던 옥두경(沃荳警)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고려 왕의 답변을 가져왔사옵니다."
" 옥두경. 단장인 천구변(踐邱弁)은 어디 갔는가?"
천구변은 이번 사신단의 단장으로 임명한 자이자 정 4품의 고위관리였다.
옥두경 부단장은 입술을 꾹 깨무는 듯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옆에 있던 커다란 사각함을 앞으로 밀었는데, 보자기로 싸인 그 사각함은 불길함을 품고 있었다. 옥두경이 천천히 말했다.
" 천구변 단장의 목이 담겨 있사옵니다... 폐하의 미관을 해칠까 저어되어 감쌌사옵니다."
" ......!!"
뭐?!
나는 깜짝 놀랐다.
" ... 다, 당장 그 보자기를 열어라."
스르륵
보자기가 풀리고 함의 봉인이 뚜껑을 열자, 그 곳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천구변의 수급이 담겨 있었다. 천구변이 죽을 당시에 느꼈던 곤혹감과 절망, 공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수급을 본 신하들이 다들 주춤거렸다.
" 으, 으윽."
" 저럴수가..."
나는 도리어 냉철해져서 옥좌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고려왕이 천구변을 죽였는가?"
" 그렇사옵니다."
" 이유가 무엇인가?"
" 고려 조정에서 천구변 단장이 폐하의 암살을 종용한 고려왕의 사죄를 요구했사옵니다. 허나 고려왕은 도리어 화를 내면서 자색 옷을 입은 무사들을 시켜 천구변 단장을 그 자리에서 주륙(誅戮)했사옵고... 그, 그리고..."
옥두경은 목소리를 떨며 말을 이었다.
" 폐, 폐하의 목 또한... 곧 상자에 담기게 될 것이라... 전하라 하였사옵니다..."
" ......!!"
웅성...
웅성....!!
조정의 중신들은 모두 하나같이 크게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는 그 침착냉철한 황연 대장군과 등곽 조차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는지 동요를 숨기지 못한 듯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조정의 너구리처럼 굴던 등곽이 감정을 그대로 표출했다.
" 폐하!!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어찌 천하의 주인에게 고려 따위가...!! 고려정벌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근처에 있던 황연 또한 앞으로 나와서 내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 폐하... 출진을 명하여 주시옵소서!!"
고려를 멸하소서!!
고려를 멸하소서!!!
잠시동안 조정중신들 모두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소리를 쳤다.
' 으음...!!'
나는 모두가 격앙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동방 최대의 제국(帝國)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
아무리 고려가 당대의 대국 중 하나라고 하더라도 수천 년에 걸쳐서 이 동방의 패권(覇權)은 바로 중원제국의 것이었고, 천지사방의 잡스러운 국가들은 모두 중원에 복속해야 할 하류배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작해야 요동과 반도를 차지하고 있는 고려가 명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정면승부를 걸어왔다는 것에 화가 나면서도 중대한 위기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격앙하는 것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 자색 옷의 무사들이라면 틀림없이 십이율의 호국동맹(護國同盟) 소속의 고수들이다. 고려 귀족가에서 엄선된 자들이 일류무공을 익혀 왕실을 수호하는 존재들... 또한 호국동맹은 명목상 고려왕의 호위를 맡고 있으나, 실제로는 십이율의 수족(手足)이나 다름없다. 호국동맹의 주인은 십이율주의 충복이야.'
나는 고려 땅에서 십이율을 충분히 돌아다니며 내부사정을 알아낸 적이 있었다. 용상의 팔받이를 톡톡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 그렇다면 호국동맹 고수들이 천구변을 베었다는 것... 이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고려왕의 명령이라도 호국동맹은 십이율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다. 고려왕이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 그 모두는 배후에 십이율주가 모든 걸 조종하고 있으며, 고려왕 또한 꼭두각시라는 뜻... 이번 일은 십이율주가 내게 정면승부를 하자고 요청해온 것이다!'
보인다.
어둠 속에서 나는 기(基)를 두고 있다.
어둠 속에서 십이율주가 천천히 한 수를 두며 바둑알을 반상에 놓는 게 보인다.
그는 내게 말하고 있다.
이 한 수로 네 집에 침범했다.
화가 나는가?
이제 네가 둘 차례다.
" ......"
예전이었다면 길길이 날뛰면서 십이율주의 목을 따는 망상이나 하며 감정에 휘둘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구변의 처참한 모가지를 보고도 화가 나기는 커녕 그저 흥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처참한 광경일텐데도 마치 재밌는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든다.
이것이 수장이 된 자가 보는 풍경인가.
집단이 너무 거대한 단위가 되면, [개인]따위는 그저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의 지략과 용맹을 겨루는 작업.
나는 보이지 않게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합종연횡(合從連衡)이 되겠구나."
" 폐하...?"
나는 옆에 있던 망량을 돌아보며 말했다.
" 승상. 아라사와 동영에 사절단을 보내어라. 그리고 아라사에서 10만, 동영에서 5만의 병력을 일으켜서 먼저 고려를 치라고 요청하라."
망량은 내 말을 듣자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 등곽. 그대는 제갈현 승상을 보좌하여 내외의 우환이 없도록 하라."
내가 등곽을 다소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등곽은 움찔하는 듯 했다. 이윽고 그는 영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내 명에 따르기로 했다.
" 명을 받들겠나이다."
등곽은 야당의 수장이며 청류계를 꽉 잡고 있다. 전쟁 때문에 이상을 추구하는 고매한 학사나 야인들이 황권을 비방하려 나서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등곽에게 명을 내린 나는 연이어서 황연에게 말했다.
" 황연 대장군. 북룡대(北龍隊)에 최신무기와 물자를 지원할 예정이다. 현지에 가서 병력을 정비하고 신무기(新武器)를 숙련시켜라. 또한 아라사 제국의 지원이 올 경우 그들과 연대하여 요동을 정벌하고 곧장 압록강(鴨綠江)을 남하하라."
" 존명."
" 또한 섣불리 신시와 두만강 쪽은 공격하지 마라. 최단시간에 개경을 쳐서 차지할 것을 명하노라."
" ......!!"
" 적의 약점은 송림(松林)과 곡산(谷山)에 있다. 그 곳에 적들의 정예병이 항시주둔중이니 그 곳부터 격파하라."
" ... 존명!!"
송림에는 십이율 풍원류가 있으며 곡산에는 허검류가 있다. 이들은 유사시에 고려 정예병을 도와 외적과 싸우게 되어있으나 정작 본인들이 공격받으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황연에게 정예철기병과 총병을 주면 하루아침에 씨몰살시킬 수 있으리라. 그리고 송림과 곡산은 곡창지이며 요지이니 그곳을 제압하면 고려는 버티기 힘들다.
나는 날카로운 눈으로 말을 맺었다.
" 이번 고려정벌은 짐이 친정(親征)할 것이다. 또한 국사(國師)와 호법사자들이 승전을 위해 참여할 것이니, 반드시 승리하리라!!"
" 황제폐하 만만세!!"
정면승부에는 정면승부로 받아주겠다.
' 나를 도발한다고?'
이제 막 수립된 황조라서 힘이 없을거라 생각한 것인가.
' 하지만... 네가 실수한 것이다.'
이게 바로 내 한 수다.
내게 불리할 요소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십이율과 드잡이질 하면서 그 어떤 첩자보다도 고려라는 나라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따위, 석 달 만에 멸망시켜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