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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선지자에게 갔다.
슈슛!
" 선지자, 거래다!"
[ ......]
선지자가 특유의 느릿한 움직임으로 고건물의 어둠 속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선지자에게 말했다.
" 보면 알겠지만 나는 전생자다. 예전에 네가 나를 알아보는 표식을 찍어두었다."
선지자를 괜히 기만하려 들다가 더 안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으므로 일단 밝혀두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선지자는 가만히 나를 관찰하다가 그제서야 표식을 알아본 듯 했고,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 호오... 그렇군...]
" 내가 알고 싶은 건 두 가지다. 하나는 흑요석의 술법에 대해서이고, 또 하나는 그걸 먼저 설명한 다음에 물어보려 한다."
[ 우선 질문해 봐라. 그 질문의 가치를 판단하여 네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측정해주마...]
" 먼저 흑요석의 술법을 이용할 경우 절대지경의 잠재력이 낮아지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은데."
[ 무슨 말이지...?]
" 그러니까..."
나는 검마와 했던 이야기를 선지자에게 설명했다. 나는 선지자한테 설명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 선지자는 외계종족이잖아... 무술이나 절대지경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를텐데 알아들을 수 있을까?'
내가 설명을 끝내자 선지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 즉... 기억전송을 통해서 네가 가진 무술의 경험치를 전승하는 건 좋으나... 업(業)을 개척해서 스스로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보다는 약하기에... 흑요석 술법의 한계가 거기까지인지를 알고 싶어서 온 것이구나.]
" 그래."
[ 흐음... 너는 그 술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토록 오래 사용했음에도 술법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니. 넌 정말 재능이 없군...]
" 뭐?"
[ 조금만 숙련된다면 바로 깨달을텐데...]
아쉬운 듯 중얼거리던 선지자가 말했다.
[ 기억을 전송한다는 건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즉 술자(術者)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이 전해진다는 것... 네가 기억을 전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을 뿐 술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무슨 소리야?
내가 이해가 잘 안 되는 표정을 짓자 선지자가 말했다.
[ 시험삼아 내 기억을 너에게 넣어주지...]
" ... 아, 아니 괜찮은데."
[ 해는 끼치지 않을 터. 직접 겪어본다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읏!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내 미간에 선지자의 촉수가 이미 닿여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지경의 감각으로도 언제 선지자가 촉수를 들이댔는지 알 수 없었기에 오싹했다. 말 그대로 깨닫고 보니 선지자에게 접촉당해 있었다.
' 이... 이건 뭐지?! 속도가 아니야... 시간을 정지시킨 낌새도 없었는데 대체 무슨...'
이게 [옛 지배자]에 준하는 존재, 마도왕(魔道王)의 마법이란 건가?!
내가 놀라고 있을 때, 갑자기 내 머릿속으로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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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은하부족연맹의 맹주(盟主)와 대면하는 날이 찾아와서 일족을 대표해서 회의에 나갔다. 맹주는 중언부언하면서 내게 [위대한 종족]이 [옛 지배자]를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야하는 이유를 설명했으나, 내게는 무의미하기 짝이 없는 일. [진실]을 알고 나면 모든 게 하잘 것 없을 뿐이며, 우리 입장에서는 그저 방관하는 것만이 최고의 전략이다.
" 꼭 다시 와 주십시오, 마도왕이여."
맹주는 지구에 존재하는 초신위정령체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수천 년 전부터 감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내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 게 눈에 보인다.
' 크크크.'
무의미한 짓을 하기는... 무지몽매한 놈들! 그런다고 너희가 인과율의 일말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느냐? 외신(外神)들이 존재하는 한 어차피 너희는 거대한 놀이판의 말에 지나지 않는데. 하긴 우리보다는 나은가?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지. 최후의 승자를 지켜볼 수 있는 자격은 우리에게만 있다는 걸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위대한 회귀가 빨리 찾아오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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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왕은 은하부족연맹의 중역들이 모여있는 회의장소, 적색거성 인근의 파루람 요새에 거침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맹주이자 의장인 칼비오그는 마도왕에게 절실하게 [옛 지배자]에 대항하여 과학기술을 결집시켜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도왕이 말했다.
" 결국 무창(無窓)의 탑에 존재하는 기술을 공유해 달라고 거지처럼 빌고 있는 것이냐?"
" 마도왕이여! 말이 심하오."
마도왕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 너희가 요구해서 영자포립차단막(靈子捕粒遮斷幕)의 기술도 전해줬을 터. 0.9로탈 이하의 혼돈은 이제 너희 힘으로도 가볍게 잡을 수 있지 않으냐?"
칼비오그가 두 개의 머리에 있는 4개의 눈 중에서 2개를 데굴데굴 굴리며 항변했다.
" [옛 지배자] 중에서도 강력한 존재가 나서면 불가항력이오. 아직도 우리 문명체들은 사악한 혼돈의 신격들 때문에 멸망의 위기에 처해있소. 위대한 종족이시여, 제발 우리를 도와 주시오."
" 거절한다. 이미 너희는 생존에 필요하고도 남는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초광속 우주선도 갖고 있다. 행성을 부숴서 광물자원까지 채취하고 있지 않으냐? 너희는 더 이상 우리가 돌봐줘야 할 약자가 아니다."
" ... 정 그러시다면 언제든 마음이 바뀔 때 연락을 주시오. 우리는 8천년 전부터 지구에 존재하는 초신위정령체, 삼황오제를 감시하고 있소. 늘 지켜보고 있으니 언제든 원하시면 극진히 모시겠소."
" ......"
" 꼭 다시 와 주십시오, 마도왕이여."
위잉
마도왕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돌아갔다. 칼비오그를 비롯한 서은하부족연맹의 중역들은 이후 지구에 존재하는 필멸자들을 구원할지 말지에 대해서 논의하다가, 파우스트 박사라는 뛰어난 인간 마도사와 접촉하기로 한 후 회의를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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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이게 뭐여?!
나는 한 순간에 2가지의 상반된 기억을 보자 혼란을 느꼈다. 전자와 후자의 기억은 완전히 상반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같은 시점의 기억이었고 등장인물도 똑같았다. 내가 멍하니 있자 선지자가 말했다.
[ 그건 예전에 은하부족연맹에 출석했을 때의 내 기억이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겠나...]
" 무슨 차이인데?"
[ 전자는 1인칭... 내가 갖고있는 생각과 감정, 경험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술자(術者) 위주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후자는 3인칭... 마치 제 3자가 관찰하는 것처럼 외계(外界)에서 관찰한 정보가 흑요석을 통해 전해진다...]
" ......!!"
[ 너는 여태껏 흑요석에 1인칭으로만 정보를 담아 왔다... 보는 이는... 마치 장편 대서사시나 소설을 읽어본 느낌으로 네 삶을 알게 되겠지... 그게 문제인 것이다.]
" 왜 문제가 되는데?"
선지자가 촉수를 잠시 출렁거리더니 말했다.
[ 1인칭의 장점은... 네 삶의 기억을 아주 직관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으나 네가 말했던 대로 상대에게 미치는 주관(主觀)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내가 너에게 전해준 게 왕족 전용 기억전송술이라서 보호장치가 잘 되어있어서 망정이지... 본디 너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전해주는 건 위험해... 결국 절대지경의 잠재력이 깎이는 건 1인칭으로 기억을 전송하기 때문이지...]
" ......"
[ 너에게 권하는 것은 3인칭 시점으로 기억을 전송하는 것이다... 이 방식이면 기억을 전송할 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 방법은 네게 알려주마. 본디 그 술법을 쓰다보면 안 가르쳐줘도 깨닫는 응용방식일 테지만...]
" 야, 잠깐."
[ 문제가 있나...?]
" 이상한 게 있는데."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후 선지자에게 궁금한 걸 질문했다.
" 방금 전 후자인 3인칭 시점의 묘사를 보면, 네가 알지 못하는 정보들이 잔뜩 있었잖아. 마치 전지적 시점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잡스러운 정보가 설명되었는데 그건 그 시점에서 네가 모르는 정보 아니야?"
[ 그렇지...]
" 기억이란 건 자기가 보고 들은 것만 알 수 있는 거 아냐? 어떻게 그런 식으로 기억이 전해질 수가 있지? 인칭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거!"
[ 그래... 아주 좋은 질문이다...]
선지자가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 그렇다면... 묻지... '기억'에 전지적(全知的) 시점이 불가능하다 생각하는가...?]
" 당연하지! 그럼 신이게?"
[ [옛 지배자]는 신이지...]
그 말에 나는 버럭 외쳤다.
" 아니! 놈들은 드럽게 강한 괴물일 뿐이야! 실제로 놈들도 한계가 있고! 신과 차이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절대신은 아니야!"
[ ... 제법 주관이 서 있군... 그렇다면 아직 초기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선지자가 말했다.
[ 우리 종족의 술법으로 3인칭의 기억전송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허공록(虛空錄)] 때문이다.]
" 허공록...?"
[ 너도 허공록에 대해서 몇 번 정도는 들어봤겠지... 우주의 기록... 가장 위대한 지혜... 그 존재의 도움이 있기에 3인칭의 기억전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 그게 무슨 상관이야?"
[ 우주의 기록이란 것... 그게 무슨 의미라 생각하는가...? 과연 생명과 비생명,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우리 따위가 규정할 수 있다 생각하나... 그 위대한 존재를...]
" ......?"
[ 후후... 하긴 크게 상관은 없는 일... 이해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지금은 네 실용적인 용도만 생각하도록...]
" ... 알았어."
[ 기억전송의 3인칭 전송법은 따로 대가를 받지는 않겠다... 이미 가르쳐줬음에도 네가 멍청해서 응용하지 못하는 것 뿐이니...]
" ......"
차라리 욕을 해라.
나는 투덜거렸지만 일단 이득이었기에 별 말 하지 않았다.
위잉!
잠시 빛이 나더니 나는 이윽고 3인칭으로 기억을 전송하는 법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예전에 선지자가 전수해 준 술법의 응용이었고 파고들면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단지 내가 1인칭을 쓰는데만 익숙해져서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을 안했던 듯 했다.
선지자가 말했다.
[ 단... 3인칭으로 기억전송을 하게 되면 단점이 몇 가지 있다.]
" 뭐가 단점인데?"
[ 1인칭에 비해서 경험의 전송이 줄어들기 때문에 상대는 책을 암기한 듯한 인상을 받을 뿐... 결코 체득에 유리하지 않다.]
" 1인칭보다 경험치 계승이 줄어든다는 건가."
[ 그래... 네 생각보다 더 큰 폭으로. 또한 전생자인 네 입장에서의 단점을 말해보자면... 1인칭으로 전송할 때 상대는 네 감정과 신념에 상당히 큰 영향을 받게 되지만... 3인칭일 경우 상대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 그게 왜 단점이야?"
[ 크크크... 직접 해 보면 왜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흠. 알았어."
나는 선지자에게서 새로운 비법을 전해받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용건을 꺼냈다.
" 그럼 다음 이야기인데... 이 흑요석에 어떤 내력이 있는지 알려 줘."
스윽
나는 선지자에게 월요의 수호자를 잡고나서 얻은 흑요석을 내밀었다. 선지자는 흑요석을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이윽고 놀라워했다.
[ 호오... 이거 어디서 얻었지?]
" 월요의 수호자를 잡고 얻었다. 왜 [옛 지배자]의 화신에게서 흑요석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물어보러 왔어."
[ 흐음...]
선지자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 이거... 네가 쓰기에는 까다로울 것이다... 그다지 좋지 않은 물건이니 내게 주면 책임지고 처분해주지...]
" ......"
이 놈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고는 말했다.
" 감정을 해 달라고 했잖아. 어떤 물건인지부터 말해줘."
[ 감정... 감정이라... 그럼 대가를 내놔라.]
" 좋아. 이 정도면 어떠냐."
나는 흑백련을 내놓았다. 그러자 선지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 장난하는가...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면 나가라.]
선지자가 휙 뒤돌아서자 나는 다급히 말했다.
" 아니 장난은 아니고... 뭐 어느 정도 대가를 바라는데?"
[ 흐음... 일단 차례대로 내놔 봐라...]
" 그러지."
나는 거기에 수요의 유적에서 얻은 금괴, 수요의 유적에서 퍼온 식토, 요도 무라마사, 가짜 삼종신기를 내놓았다. 거기까지를 살펴 보던 선지자가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 가치는 있다만... 왠지... 별로 네게 필요없는 것들을 내놓는 것 같은 느낌이군...]
나는 뜨끔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따져보았다.
" 감정이 너무 비싼 거 아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 아니... 부족하다... 지금까지 만큼 더 내놔봐라...]
" ......"
으으... 어쩔 수 없지.
이제 전생 초기라서 최대한 보물을 아끼고 싶었지만 내놓을 수밖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다가 쌍고검과 청룡언월도, 그리고 황궁에 있던 미완성 상태의 현자의 돌, 백련교의 성련, 신투지존의 비급서까지 내놓았다. 여기까지 내놓자 선지자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 흐음... 조금만 더.]
" 야!! 너무하잖냐!! 단골인데 좀 싸게 안돼?!"
[ 싸게 해 줘서 이 정도거늘... 싫으면 나가라.]
" 으으으!!"
나는 결국 피눈물을 머금고 여기에 인면지주의 내단과 십계비의 조각을 얹었다.
[ 부족해...]
" ......"
[ 더 없나...?]
" 잠깐 기다려봐라."
결국 나는 급한대로 여산에 가서 안에 있던 신혈(神血)을 직접 바위 하나 무게만큼 캐서 가져왔다. 그리고 전욱의 동상도 내놓았다. 음신지력 흡수를 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진짜 필요한 보물까지 내줘야 할 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꼭 필요한 걸 빼고는 다 준 셈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것들 하나하나가 가치가 있었기에 몹시 아쉬웠다. 그리고 그제서야 선지자가 말했다.
[ 좋아... 그럼 감정해주마... 이 흑요석의 정체와 가치를 알려주지...]
" 빨리 알려줘!"
이어진 선지자의 말에 나는 약간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이 흑요석은... 흑요석이 아니다. 이건 신체(神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