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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크리슈나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는 걸 보자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하는 거야?'
나는 영락없이 크리슈나가 마법의식이나 제물이라도 바치고 있는 줄 알았기에 상정외의 상황이란 걸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크리슈나는 선해보이는 인상의 미청년이었기에 이 또한 생각과는 다른 듯 했다. 그래서 내가 머뭇거리자 크리슈나는 마저 갓난아이의 기저귀를 차분하게 갈았다.
으아앙 - 아앙 -
" 그래그래. 착하지."
기저귀를 갈고 나서 크리슈나는 갓난아이를 다독여서 울음을 그치게 한 후 안아서 둥기둥기 달래주었다. 아이가 잠시 후 조용해지자 크리슈나가 아이를 좁은 침상에 눕힌 후 근처에 몰려있던 소년소녀들에게 말했다.
" 잠시 방에 들어가 있거라."
아이들이 모두 들어가자 나는 크리슈나에게 말했다.
" 당신이 크리슈나인가? 내가 백웅이란 건 어떻게 알았지?"
" ......"
크리슈나는 대답하지 않고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눈빛은 엄청난 현기를 담고 있어서, 나 또한 수양을 오래 쌓았다 생각했지만 마치 그 눈빛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천년묵은 천호(天狐)의 요안(妖眼)도 대수롭지 않게 이겨내고 [옛 지배자]와도 정면으로 맞서는 나였지만 크리슈나를 대하자 뭔가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 이건 대체 뭐지...'
위압감? 패기?
강함에 대한 경악?
... 그게 아니다.
삼황오제의 본체를 보았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명백히 다른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 격(格)이 다른 존재다...'
나는 한참후에야 내가 느끼는 감정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초고도의 수양을 거친 존재라는 게 느껴졌다. 또한 지금 내게 느껴지는 것은 우주적인 포용감을 체현(體現)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외경(畏敬)! 바라만 보고 있어도 내면이 채워지는 듯한 이 느낌은 공포나 절망의 감정과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투선이나 대라신선들을 보았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은 - 상대가 지닌 영혼의 격(格)이 그들을 몇백 배나 초월하고 있다는 뜻. 나는 섣불리 한 마디를 했다가는 크리슈나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멍하니 서 있을 때 크리슈나가 말했다.
" 혹시나 해서 아르쥬나(अर्जुन)를 보내지 않고 직접 오기를 잘 했구나. 백웅 그대의 투기(鬪氣)가 생각했던 것보다 매우 강맹하니, 하마터면 싸울 뻔 했어..."
" 뭐? 무슨 소리지?"
내가 반문하자 크리슈나는 탁자에 앉아서 잔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 그대는 지금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지니고 있는가?"
" ......?"
스윽
크리슈나가 내게 물이 가득 담긴 잔을 내밀었다.
"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게. 그대가 뿜어내는 투쟁의 기운이 주변의 다른 존재들을 자극하고 있으니..."
나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서 잔을 받아들어서 수면(水面)을 잠시 들여다보자, 놀랍게도 그 순간 내 정신이 다른 곳으로 전송되는 걸 알 수 있었다.
' 앗!'
슈우우욱!!
" ......!!"
나는 그 순간 사방에 투귀(鬪鬼)가 가득한 평원에 와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마치 고대의 마물처럼 생긴 투귀들은 뿔이 나 있었고 뼈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은 채 무기를 들고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족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염라계의 옥졸들과 비슷하게 생긴 듯 했다.
' 이런 제길! 함정인가?!'
파바밧
이윽고 수백 마리의 투귀들이 땅을 박차고 나를 공격해 왔다. 나는 사방에서 몰아치는 투귀들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무공을 발휘해서 맞섰다. 꽈광 하는 소리와 함께 뇌령인이 날아갔고 화경으로 공격을 흘리면서 검뢰로 적들을 베어나갔다.
퍼억!
쿠콰쾅
" 핫하, 어떠냐!!"
나는 처음엔 투귀들의 실력이 제법이라 긴장했다가 그럭저럭 할만한 걸 깨닫고 광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미친듯이 내 무공을 동원해서 깨부수고 때리고 몰아쳤다. 뼈라서 그런지 더욱 부수는 맛이 있었으며 투귀들의 살점이 튀기면서 부숴지는 게 너무 재밌었다.
콰광
그렇게 백오십여 마리의 투귀를 해치웠을까? 나는 이 정도면 다 해치웠다 생각했지만 아직도 평원 너머에서 끝도 없이 투귀군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내공이 그다지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숫자가 최소한 천여 마리를 넘는다는 걸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 뭐가 이렇게 많아...?'
하지만 나를 죽일 정도의 수준은 아니야!!
" 이야아압!!"
나는 계속해서 미친듯이 검을 휘두르며 싸웠다. 뼈를 베고 번개가 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내 눈빛이 살의로 가득차서 빛났다. 내가 지금까지 어떤 역경을 헤치고 왔는데 고작 물량때문에 겁먹고 절망할 것 같은가!!
' 내 내공은 무진장이나 다름없어! 조금만 아끼면 도로 채워지니까 반쯤 무한으로 싸울 수가 있다고!'
조금만 체력과 내공을 분배하면 천 마리도 두렵지 않다!
졸개들을 다 처치하면 각오해라 크리슈나!
......
......
하지만 그렇게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나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촤앗
" 크윽!"
나는 신경질적으로 투귀 한 마리를 검뢰로 베어버렸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등허리 쪽을 한번 크게 베이고 말았다.
' 어... 뭐가 이렇게 많아...'
쓰러뜨린 투귀의 숫자가 벌써 천 마리도 넘겼다. 그런데도 평원을 가득 채우는 투귀의 숫자는 줄어들 줄을 몰랐고 끝도 없이 날 공격해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싸우는 게 질리는 느낌이 들어서 이제 슬슬 비등을 써서 탈출하려 했다.
' 안 되네?!'
비등이 작동하지 않았다.
' 음... 이 공간 자체가 크리슈나의 함정인가.'
이런 경우도 겪어본 적 있다. 나는 이게 아공간이며 함정이라면 틀림없이 음신지력을 폭주시켜서 깨어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음신지력을 가득 끌어내어서 몸 밖으로 발산했다. 흑웅이 없어서 정밀하게 제어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힘을 파도처럼 발산시키는 것만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후와악
하지만 음신지력이 파도치며 뻗어나가자 일순간 투귀들이 멈칫거리긴 했지만 공간이 부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투귀들이 계속 덤벼들자 나는 질려서 허공답보를 써서 하늘으로 피신했지만, 이번에는 하늘에서 투귀들이 날개를 달고 내려와서 내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 ......"
이윽고 천지사방이 투귀로 가득차서 나는 정말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이젠 일만 마리도 넘어보인다.
' 제, 젠장...'
전욱사도의 권능이라도 써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가는 어차피 산통 다 깨지는 건 같은데... 차라리 자살을 하는 게 나을까?
내가 크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 삼황오제의 인과율도 소환할 수 있는가...? 잠재력이 굉장한 자로군...]
슈우우우
나는 갑자기 주변 풍경이 크게 뒤바뀌면서 현실세계로 돌아온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물잔을 받아든 그대로였으며 등허리를 베였던 상처도, 투귀들을 쓰러뜨리느라 땀으로 범벅이 된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우진에게서 비슷한 술법을 당해본 적이 있었기에 크리슈나를 노려보았다.
" 세계를 속이는 환술(幻術)인가? 하지만 나는 그 정도에 당하지 않아!"
" ... 환술이라."
크리슈나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 그대가 방금 싸웠던 환영들은 그대 자신의 투쟁심이다. 세계를 속이고 말 것도 없지. 내게는 모든 이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할 권능이 있으니."
" 빌어먹을, 개소리하지 말고 싸울 거면 확실히 해! 당신이 무슨 꿍꿍이로 내 일에 참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함부로 건드리면 각오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시돋친 말투로 이야기하자 크리슈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 흐음... 백웅이여. 그대에게는 특별한 원한이나 적대감을 지니고 있지 않다네. 다만 내가 읽은 천기(天機)의 중심에 중원대륙의 황제가 있었으며, 나는 그 운명의 힘에 대항할 대적자(對敵者)로 진소청을 골랐지."
나는 냉막한 인상으로 이를 갈았다.
" 크리슈나. 왜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거지? 나는 이 세상에 해를 끼친 적 없다. 너희가 멋대로 나를 적대시할 뿐이다."
" 나중에 알아보니 그대는 백련교와 황궁을 무릎꿇려 중원을 평정했더군... 나는 그대가 영락없이 천하를 피빛으로 물들일 악몽의 별이라 생각했다. 원래라면 수천만 명 이상이 마도(魔道)에 희생당하고 세계의 명운이 뒤흔들릴 터,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어."
크리슈나는 고요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더니 말했다.
" 허나 내가 읽은 운명은...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그대의 곁에 있던 백련교주 독고운천의 운명이더군."
" 뭐?"
" 나는 잘못 읽은 거였어... 그 자가 머금은 파멸의 빛이 강해서 그를 통솔하는 또 다른 존재를 읽을 수 없었지. 그래. 바로 그대 말이지. 별의 운명이 종속된 이상 그 천기는 이미 왜곡된 것."
" ......"
" 그걸 깨달은 나는 진소청을 가르치던 걸 멈추고 떠났네. 더 이상 개입하는 건 더 큰 왜곡을 불러올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허나 진소청과 청룡무관 무인들을 성장시킨게 결국 그대에게 폐를 끼친 모양이군."
그래서였던가.
크리슈나가 그냥 진소청을 몇 년만 가르쳤다면 진소청은 당연히 절대지경에 이르렀을 것이고, 그의 성장속도면 나를 크게 뛰어넘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그런데도 크리슈나가 고작 3개월만 가르치고 홀연히 떠나버린 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빌어먹을!! 왜 멋대로 운명이니 마니 하면서 끼어드는 거냐?! 네가 대체 뭔데!!"
나는 듣다가 화가 머리 끝까지 뻗쳐서 외쳤다.
" 어차피 너는 이 세상에 도래하는 멸망의 운명을... [옛 지배자]가 세상을 파멸시키는 종말을 막지 못하잖나!! 지금까지 [옛 지배자]들이 실컷 설치게 놔두고서는 고작 내가 중원을 먹었다고 파멸이니 뭐니 헛소리를 해?!"
나는 진심으로 사대신기를 완성시키고 진공가향을 이루려고 별 짓을 다하고 있는데 이 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뭔가 있어보이는 말만 하고 괜히 사람 일에 끼어들어서 방해만 하고 있으니 복장이 터진다!
" ......"
" 이제 됐어. 이 참견쟁이야. 네가 뭐든간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니까 천축으로 꺼져! 두 번 다시 내 일에 끼어들지 마!"
다음부터는 이 크리슈나 놈이 끼어들기 전에 천축에 있는 사원인지 뭔지를 미리 찾아가서 경고하면 되겠지!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크리슈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 내가 이 곳에 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 뜸들이지 말고 말해."
" 그대가 이 곳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였네."
" 오냐... 함정을 팠다 이 말이지?"
죽었어!
내 전생을 걸고 엿먹여 주마!
내가 이를 으득 악물자 크리슈나는 고개를 저었다.
" 그게 아닐세."
" 그럼 뭐야?"
" 아라사 제국을 구원해 주게. 그리고 이 땅에서 팔부신중을 몰아내 주게. 그걸 부탁하고 싶네."
" ... 그것 때문에 날 끌어들이려 여기에 머물렀다고?"
" 그렇네."
나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코웃음을 쳤다.
" 웃기지 마. 네 뜻대로 놀아날 이유는 없어. 팔부신중과 지금 목숨걸고 싸울 이유도 없고 놈들한테 내 전력을 노출시킬 생각도 없다! 그리고 그렇게 중대한 일이라면 잘나신 크리슈나님이 직접 하라고!"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죽은 게 벌써 28번이 넘었다. 이딴 수작에 당하면 나는 절지동물만 못한 것이다.
" 할 수 있다면 하겠지... 하지만..."
크리슈나는 왠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황제(黃帝) 공손헌원(公孫軒轅)과 계약을 했기에, 그의 계획에 방해되는 일에는 결코 개입할 수가 없네. 그게 내 한계일세."
" ......?!"
크리슈나를 무시하고 가 버리려던 나는 비등을 들고 흠칫했다.
' 뭐? 공손헌원?'
저 놈의 입에서 그 얘기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나는 이게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비등을 쓰려던 걸 멈추고 말했다.
" ... 자세히 말해봐. 무슨 계약인데?"
" 자네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나는 본체가 아닌 화신(化神)일세. 그리고 계약이란 내 본체와 공손헌원 사이에 맺어졌지만 화신인 나 또한 그 계약에 종속되어있지."
이 놈은 신의 화신이었던가.
나는 사실 잘 모르고 있었지만 티내지 않고 계속 물었다.
" 네 본체가 뭐지?"
"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던 자일세... 우주의 성립 때부터... 신좌(神座)의 일원으로써 [창생]을 도맡은 자."
넋두리를 하듯 중얼거리던 크리슈나가 말을 이었다.
" 내 본체는 정령신들과 힘을 합쳐 이 대지를 지키고 싶었으나 어버이인 질서의 축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해도 전 우주에서 [계시]를 듣고자 몰려오는 수많은 [옛 지배자]를 상대할 순 없으니까... 그래서 방법을 모색하던 중, 황제 공손헌원이 손을 뻗어왔지..."
" 공손헌원이?"
" 자신과 [계약]하여 도와준다면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체계를 공고히 하여 파멸의 시간을 늦춰줌과 동시에 필멸자들이 생존할 길을 열어준다는 제안이었어."
" ......."
" 나... 그리고 우리는 그 제안에 응했지. 그리고 세상의 균형을 억지로 맞추어 생자의 터전을 만들어내었으나 그 대신 우리는 공손헌원을 방해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네. 신들의 전쟁을 치르는 대신 평화를 얻어냈지만 결국 황제가 이 세계를 제패하게 놔둘 수밖에 없었던 것..."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알아들은 만큼 크리슈나에게 말했다.
" 팔부신중을 방해하는 게 황제의 계획을 방해하는 게 되기 때문에, 넌 끼어들 수가 없다는 건가?"
" 그렇다."
" 왜 그렇게 되지? 팔부신중이 대체 뭔데."
" 그들은 창힐의 수하... 그리고 창힐은 황제에게 직접 사황(史皇)으로 임명받은 존재이니 팔부신중의 모든 움직임은 간접적으로 황제의 계획에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우린 팔부신중을 건드릴 수 없어."
" ......"
" 인과율을 소모하면 가능이야 하겠지만 그건 자살행위지..."
" 창힐은 실종되었어. 현 시점에서 창힐이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말인가?"
" 그건 상관없는 일일세. 창힐이 죽었든말든..."
" 음..."
나는 곰곰히 생각했다.
' 저 말대로라면 황제 공손헌원의 영향력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팔부신중을 건드릴 수 없는 거야.'
비교적 인과율에서 자유로운 마왕급이라 해도 너무 이 세상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게 이상하다 했는데 이런 배경이 숨어있었던 건가?
나는 정말 궁금한 걸 물었다.
" 황제의 계획이란 게 뭐지?"
그러자 크리슈나가 말했다.
" 그건 말해줄 수 없네. 그걸 누설하는 것 또한 황제의 계획을 방해하는 셈이 되는 거니까. 하지만..."
" 하지만?"
" 만일 내 부탁을 들어줘서 아라사 제국을 탈환하고 천인을 물리쳐준다면 자네에게 그 단서 정도는 남겨줄 수 있네. 그건 [계약]에 위배되지 않으니까."
" ... 생각할 시간을 줘. 잠깐 다녀오지."
" 얼마든지."
파앗
나는 이런 중대한 일을 순어구로 설명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황궁으로 귀환해서 빠르게 책사들과 백련교주를 모으고는 그들에게 동시에 흑요석으로 기억을 공유했다. 나는 동료들이 기억을 공유하자 말했다.
" 어쩌는 게 좋을까?"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유룡이었다.
" 상식적으로 결코 받아들여선 안 되는 제안이다. 천인 하나를 쓰러뜨리고 끝일 리가 없지. 설령 놈을 쓰러뜨린다 하더라도 팔부신중 대부분은 아수라를 제외하고 연대의식이 있으니 우리를 정면으로 적대하여 연합하게 될 것이다. 아직 제대로 전력을 쌓지도 못한 전생 초반시점에 팔부신중과의 전면전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팔부신중을 어찌어찌 쓰러뜨린다 해도 급격히 판의 규모가 커져서 결국 적 또한 급격히 강력해질 터. 우리는 머지않아 몰살하게 될 것이다."
" 음... 역시 그렇지?"
제갈유룡의 말이 매우 논리정연해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가 말을 이었다.
" 하지만 크리슈나의 제안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건 사실... 황제 공손헌원의 계획과 그 단서를 알아내는 것 또한 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알아내야 할 일이다."
" 흠."
내가 고민할 때 제갈사가 말했다.
" 내가 볼 때는 크리슈나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 그냥 무시하고 나중에 다시 전생한 다음에 크리슈나를 내가 직접 찾아가면 안 될까?"
" 안 돼. 지금 상황은 크리슈나가 먼저 네게 제안을 했다는 게 중요하다. 네가 먼저 찾아가면 크리슈나는 그냥 방관하거나 네게 일을 맡기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 그런건가?"
" 그래. 할 수 있을 때 한번에 해버리는 게 낫지, 죽음의 횟수를 쓸데없이 늘리는 건 좋지 않아. 그렇게 중대한 단서라면 우리의 전략 자체를 달라지게 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 음."
" 우리가 고민해야 할 건 제안을 받아들이는지 마는지가 아니라 확전(擴戰)을 최대한 방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팔부신중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데 어떻게?"
" 거래다."
" 거래?"
제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 백웅. 너는 이제부터 중원대륙의 황제로서 천인과 거래해서 놈을 아라사의 수도에서 순순히 물러나게 만들어라. 싸울 수가 없다면 그게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