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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후우우
나는 흑룡의 목덜미 위가 심하게 흔들려서 안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뇌신류의 무술에는 당연히 극한의 상황에서도 무게중심을 잡는 기술이 있었고 화경 또한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수도의 건물이 먼 발치에서 보이는 정도의 거리에 오자 흑룡 드라큘라가 말했다.
[ 여기서 더 들어가면 위험하다.]
" 그래 보이는군."
화안금정을 밝혀보니 여기서 백여 보 정도만 더 들어가면 강력한 감지결계가 있는 듯 하다. 범위 내의 적은 모조리 감지당하는 듯 하니 섣불리 들어가면 이반 황제와 일전을 피할 수 없으리라. 물론 싸워서 이길 수 있겠지만 지금 내 목적은 크리슈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쓸데없는 전투를 해서 이득될 게 없었다.
' 흠... 저 결계를 피해서 크리슈나만 만날 수는 없을까? 분명 저 안에 있는 건 확실한데.'
크리슈나는 이미 찾았다.
전국옥새의 검색기능으로 크리슈나를 찾으니 확실히 수도 안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위치도 명확해졌다. 다만 크리슈나는 어떤 조그마한 건물에서 가만히 있을 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크리슈나의 행동까지 보기는 힘들었으므로 그가 뭘 하는지 궁금해졌다.
' 팔부신중도 아라사의 수도에 있는 크리슈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 다른 놈들이 찾기 전에 만나봐야 하는데...'
나는 고민하다가 흑룡에게 말했다.
" 용이여. 너는 크리슈나란 존재를 알고 있는가?"
[ 모른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역시나인가.
" 그럼 돌아가자."
여기서 오래 서성여서 좋을 건 없다. 마땅한 방법을 찾을 수 없다면 책사들의 힘을 빌리는 게 나을 것 같다.
파앗
나는 동방정교회 본부에 돌아와서 제갈사에게 순어구로 통신을 했다. 상황을 들은 제갈사가 말했다.
[ 동방정교회 측에 흑룡을 빌려줘라. 그리고 놈들로 하여금 아라사의 수도를 치게 만들어.]
[ 수도를 공격시키라고? 하지만 팔부신중과 이반의 힘이라면 동방정교회 측이 못 이길텐데...]
[ 그걸 왜 신경 써? 네가 알 바 아니지? 놈들의 시선이 동방정교회 연합군과 드라큘라에게 몰리는 틈에 크리슈나를 만나러 가라. 그렇게 하려고 일부러 흑룡까지 봉인에서 풀어준 게 아니냐.]
[ ......]
[ 또 속이 불편하신가보군. 동방정교회의 희생을 놔둘 수 없다 그 소리를 하고 싶나?]
[ 희생이 아니지. 내가 부추겨서 공격하는 거라면...]
제갈사가 비웃듯 말했다.
[ 어차피 네가 관여하지 않았다면 동방정교회 그것들은 팔부신중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이반 4세도 어찌할 수 없는 놈들이다. 가만히 놔뒀어도 모스크바에 들이박다가 죽었을 하루살이 놈들을 네가 좀 이용하면 어떻다는 거냐?]
[ 하지만...]
[ 글쎄. 지금으로서는 그 유인책 외에는 더 좋은 방법이 안 보이는군. 굳이 다른 계책을 내놓자면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을 다 끌고가서 팔부신중이랑 전면전을 벌이는 거다. 물론 이게 개소리란 건 너도 알 것 같다만.]
[ 음... 크리슈나의 위치를 알았으니 일단 내버려두는 건 어떨까? 당장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잖아.]
[ ...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크리슈나처럼 강력한 초반 변수가 초반에 뭘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는지 마는지에 따라서 네 전생초반의 전략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죽는 한이 있어도 크리슈나한테 접촉해야 하는 거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어이없다는 듯 말하던 제갈사가 한숨을 쉬었다.
[ 제길... 넌 양심양심 지껄이면서 늘 우리에게 그 짐을 다 넘겨버리는 걸 알고 있냐? 나는 악업을 쌓아도 별 상관없다만, 네가 전생자가 아니었다면 다른 제갈세가 책사들은 진작에 너부터 계책을 세워서 죽여버렸을 것이다.]
[ 윽...]
[ 좋아. 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정 그렇다면 차선 내지는 차악책을 가르쳐 주지.]
나는 동방정교회의 총주교좌(總主敎座), 벨로프에게 접촉했다. 그리고 그에게 흑룡 드라큘라를 넘겨주며 말했다.
" 당신들의 수도 모스크바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 오오... 동방의 기인이여, 정말 감사하오!"
" 감사의 말로 끝낼 일은 아니고, 나는 두 가지를 받고자 하오."
" 두 가지?"
" 하나는 당신들이 가진 최고의 성유물(聖遺物), 십계비(十戒碑)의 일부를 내게 주시오. 그리고 비장되어 있는 성창(聖槍)도 내게 줘야 하오."
" ......"
" 또 하나.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總大主敎)를 만나고 싶소."
" 너무 바라는 게 많군!! 그 중 하나 정도라면 들어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우두둑
나는 주먹에서 소리를 내며 벨로프를 노려보았다.
" 나는 저 흑룡의 봉인을 부수고 힘으로 복종시켰소.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떤 후환이 있을지 두렵지 않소?"
" 혀... 협박이오?"
" 내가 하는 요구가 정말 무리한 건 아닐텐데? 어차피 갖고있으면서 제대로 쓸 일도 없잖소. 그 보물을 제대로 쓸만한 역량을 지닌 자도 변변히 없을 터. 하지만 그것들을 내게 준다면 충분한 도움을 주지."
" 하지만..."
" 합!!"
나는 의념천주를 실어서 강대한 위력의 사자후를 터뜨렸다. 그러자 벨로프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 십여 명은 물론이고 사방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 수천 명이 한 번에 눈을 새하얗게 뜨며 서서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그 중에서 뛰어난 기사 한두 명은 간신히 기절하지 않고 버틴 듯 했으나 그들도 바스타드 소드에 겨우 몸을 실어서 버틸 뿐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 아닛..."
벨로프만은 격이 다른지 일단 잘 버티기는 했다. 벨로프가 경악하자 나는 그에게 말했다.
" 당신들은 너무 약하오. 내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에 당신들은 이 산야의 고혼이 되었을 것이오."
" 힘의 차이는 알겠소. 그러나 이렇게까지 사람을 겁박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오!"
" 흑룡의 봉인을 풀어서 통제해준 것만으로도 지나친 은혜를 베푼 것 같은데? 나는 내 조건이 과하다 생각지 않소. 내 요구에 이제 답하시오."
" ... 받아들이겠소."
" 좋소."
나는 벨로프에게 말했다.
" 카트린느 드 메디치 태후한테 주는 편지도 나한테 줘 보시오. 어차피 해야 할 일일 테니 배달해 주지."
" 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 난 뭐든 알고 있지. 설명하기도 귀찮으니 내놓으시오. 내 이름을 걸고 꼭 태후에게 전해 주지."
" 으으... 오만한 자!"
벨로프는 질색하는 기색이었으나 이윽고 어쩔 수 없이 내 요구대로 했다. 나는 십계비의 조각과 성창을 받아서 목갑에 집어넣었으며 벨로프에게서 편지도 받았다. 그리고 벨로프가 품에 있던 자기만의 성상(聖像)을 꺼내서 주문을 외우며 말했다.
" 본 정교회의 총대주교님은 인간이 아니시오. 내게 한 것처럼 무례한 짓을 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 인간이 아니라니? 이족(異族)이란 말이오?"
" 그렇지 않소. 당신도 이면의 세계에 대해 알건 다 아는 듯 하니, 그 분을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오."
파앗
이윽고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보러 갈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역시 총주교좌는 총대주교를 보좌하는 차상위직이라서 공간이동문을 열 수 있는 듯 했다. 나는 제갈사의 말을 떠올렸다.
[ 우선 성유물과 성창 등 받을 건 다 받아라. 전부 쓸만한 제물이고 장비용 무기야. 그리고 편지도 하는김에 전해준다고 해. 그렇게 한 다음에는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만나고 싶다고 해.]
[ 편지랑 총대주교는 왜?]
[ 넌 그 편지에 막상 어떤 내용이 있는지 전혀 모르잖나? 중간에 빼돌려서 여기에 갖고 와. 그걸 해석해 보게.]
[ 아하.]
[ 또 총대주교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 놈이 실질적인 동방정교회를 통솔하는 교황(敎皇)이나 다름없다. 서방최대의 종교지도자 중 한 명이란 소리지. 그리고 휘하의 수도사 실력도 범상치 않으니 앞으로 세계단위로 놀아야 하는 네게 있어서는 한 번쯤 만나볼 만한 상대라고 할 수 있다.]
[ 크리슈나를 만나는 문제는?]
[ 벨로프가 결국 그 자의 부하겠지. 총대주교에게서 벨로프의 생사여탈을 허락받아라. 그 정도면 네 죄책감도 줄어들겠지.]
여기까지는 제갈사의 계책대로다. 나는 이윽고 '문'에 몸을 실었고, 공간을 이동해서 웬 거대한 흰색 대리석 기둥이 가득한 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궁전 내에 벨로프와 함께 걸어들어가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 이곳은 현실이 아니군. 아공간인가?"
" 대단하군. 어떻게 눈치챘소?"
" 좋은 [눈]이 있으니까."
화안금정은 현실과 아공간의 위화감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벨로프는 감탄하더니 말했다.
" 현실의 대지에 거주하기 힘든 분이시오. 그래서 총대주교께서는 이천오백 년 전부터 독립이계를 만들어서 지내고 계시오."
" 도대체 뭐하는 자요?"
" 그건 총대주교님을 직접 만나보시오... 내 안내는 여기까지요."
파앗
벨로프는 웬 금빛이 쏟아지는 방문 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성큼 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러자 안쪽에서 기이한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 ......!!"
거대하다!!
' 이, 이건 무슨...'
마치 여동빈의 기억에서 보았던 종말의 거룡을 연상시킬 정도의 크기!!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보니 그저 대륙이 넓게 펼쳐져 있는 듯 했으나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꼬리가 길고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덩치의 알 수 없는 짐승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이 정도로 거대한 짐승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들은 응룡이나 거룡 등 신화적 존재들이었으므로 일개 총대주교를 만나면서 이런 존재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저, 저게 고래야 용이야...?'
어느 쪽으로도 특정짓기 힘든 희한한 모습이었다.
휘이이이
마치 휘파람같은 소리와 함께 태양처럼 거대한 빛 열두 개가 떠오르더니 그 짐승을 감싸고 유영하는 듯 했다. 신비스러운 바람이 그 존재를 감싸더니 마치 물결치듯이 흘렀고 그 장대한 기류는 우주공간과 같았다. 인간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기에 나도 잠시 장엄함에 휩싸였다.
이윽고 나는 장신을 차리고 놈에게 말했다.
" 이봐!! 당신이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인가?"
내가 말을 걸자 그 존재가 정신으로 대화했다. 다소 목소리에 이채가 담겨 있었다.
[ 호오... 전혀 정신력에 영향이 없다니... 그대같은 인간은 오래 살아왔으나 처음 보는군... 그렇다. 내가 동방정교회의 총대주교이다.]
" 내 이름은 백웅이다!! 네 이름은?"
[ 위대한 존재께서 지어주신 나의 이름은 [생명을 끌어올리는 자]... 인간의 세계에서는 베헤모스... 라고 불린다.]
" 베헤모스라는 거군."
나는 총대주교 베헤모스에게 말했다.
" 베헤모스여! 넌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옛 지배자]인가?"
그러자 베헤모스는 거체(巨體)를 일렁이며 웃었다.
[ ... 흐하하... 정말 재밌는 인간이군... 내가 [옛 지배자]로 보이는가...? 알다가도 모를 존재로군...]
" 어... 아니야?"
[ 나를 보고도 멀쩡한 힘을 지닌 존재들은... 보통 나같은 존재와 [옛 지배자]를 착각할 수가 없지... 왜냐하면 그들은 혼돈의 존재이지만... 나는 질서의 축에서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
[ 나는 질서의 신수(神獸)... 필멸자의 구원을 위하여 위대한 존재가 남긴 잔재... 베헤모스일지어다.]
그, 그러고보니 저 녀석에게서는 마력(魔力)이 느껴지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신력(神力)은 감지되지만 [옛 지배자]나 이족에게서 느껴지는 사악한 힘이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엄청난 크기에 필멸자는 위압당할 수밖에 없지만, 나는 이런 존재와 [옛 지배자]는 결코 비슷할 수가 없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 질서진영의 초월자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는 질문했다.
" 그럼 너는 고대신인 것인가?"
[ 아니... 나를 창조하신 분이 고대신의 반열에 존재하신다... 나는 그 분께서 창조한 신수일 뿐...]
" 음... 그렇군. 아무튼 네가 종교단체의 수장으로 활동하는 이유가 뭐지? 너 정도면 이미 인간세상같은 건 아무 의미 없을텐데."
베헤모스는 자칭 신수라며 겸손해했지만 아무리 봐도 엄청난 힘을 지닌 존재였다. 현실세계에 존재하기 힘든 크기의 신수라면 인간세상 따위는 뚜껑에 불과했다. 그러자 베헤모스가 대답했다.
[ 질서의 신격들은 혼돈의 힘이 가득한 이 대지에 더 이상 관여하기 힘들어서... 모두 떠나가셨다... 우주의 법칙이 혼돈에 우세한 것도 그 이유였지... 허나 나의 주인께서는 필멸자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생명을 끌어올리는 자]인 나를 창조하셔서 필멸자들에게 최소한의 구원을 이끌어줄 것을 명하셨다...]
" ......"
[ 그러나 인과율 때문에... 난 어지간해서는 현실세계에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서방의 수호자와 힘을 합쳐서 신을 믿는 자에게 힘을 하사하고... 동방정교회를 창설하여 북방대륙에 이족이 창궐하는 걸 막은 것이다.]
" 말하자면 너는 북방의 수호자란 거군."
[ 그렇게 볼 수 있겠지...]
고대신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남겨둔 신수이자 북방의 수호자가 바로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베헤모스였던 셈이다.
' 인과율에 제약받는다면 이 녀석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기는 힘들겠군...'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베헤모스에게 말했다.
" 베헤모스여. 수도를 점거하고 있는 게 팔부신중이란 걸 알고 있는가?"
[ 당연히 알고 있다...]
" 그럼 네 부하인 벨로프나 밑선에는 어째서 알려주지 않는 거지?"
[ ... 벨로프에게는 이미 배후에 강력한 신적 존재가 있으니 수도탈환은 포기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 큰 애정을 갖고있는 그는 포기하지 못하는 듯 하다.]
" 흠, 벨로프의 독단이란 말인가."
[ 그는 러시아 제국의 국사(國師)이기도 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봐왔던 이반이 타락하여 마도진영에 들어간 게 자기 책임이라 생각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걸 알면서도 도전하는 거였던가.
" 네가 직접 강신해서 싸우면 팔부신중 정도는 이길 수 있잖아?"
[ 그렇겠지... 허나 팔부신중은 비교적 인과율의 제약을 덜받지만 나는 모든 제약을 받고 있다. 팔부신중을 상대한다고 종말의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주객전도다.]
" ......"
[ 인세의 마왕인 팔부신중 따위를 쓰러뜨린다고 종말이 늦춰지는 건 아니니까... 내 입장에서는 놈들을 무시할 수 밖에 없다.]
나는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 베헤모스. 크리슈나란 자를 알고 있는가? 나는 사실 크리슈나가 아라사의 수도에 있는 걸 알고 그를 찾으러 왔다."
[ 크리슈나...!! 그 분께서 와 계셨던가.]
" 알고 있나?"
[ 그 분은... 음....!!]
베헤모스는 크게 놀란 듯 몸을 진동시켰다. 그러더니 말했다.
[ 크리슈나 님을 왜 찾는 것인가?]
" 그 자가 중원의 황제인 나를 견제하려고 필멸자들에게 무공의 깨달음을 전해주었다. 그 자의 진짜 의도를 알고 싶어서다."
[ 그렇군... 백웅이여, 그대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대는 세상의 전면에 드러나는 게 싫어서 우리 동방정교회를 이용해서 시선을 끌고 싶은가 보군...]
" ......"
윽, 뭐가 저리 똑똑해?! 바로 알아차리다니...
이윽고 베헤모스가 말했다.
[ 좋다... 이용당해 주겠다... 벨로프를 시켜서 수도를 공격하게끔 하겠다. 그대는 그 틈에 크리슈나님과 만나면 될 것이다.]
딱 제갈사의 계책대로였다. 아니, 베헤모스는 제갈사의 계책을 순식간에 읽어내고 자진해서 손을 내밀어준 셈이다. 두 책사가 나를 사이에 두고 계책을 견줘본 듯한 느낌이었다.
" ... 괜찮은 거냐? 벨로프나 인간들은 죽을 텐데."
[ '종말'의 때에 쓰려고 했던 내 인과율을 써서 벨로프에게 내 힘을 전해주겠다... 그렇게 하면 그대를 위해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 음."
[ 벨로프에게 충고는 해 줬다... 죽을 자리를 찾는 것... 하고싶은 일을 하다가 죽는 건 그의 몫이겠지...]
"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지?"
[ 크리슈나님을 만나려는 자를 도우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베헤모스가 냉정한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게 일단 협력해주기로 마음먹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벨로프의 희생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 베헤모스. 그리고 나랑..."
[ 그대와 연(緣)을 맺는 건 거부하겠다. 그대의 소환수가 되기 싫다.]
" ......"
눈치가 너무 빠른데!
' 쳇. 이 녀석과 소환계약을 맺으면 엄청나게 큰 힘이 될 텐데...'
말은 신수라지만 웬만한 [지배자]에 버금가는 힘을 갖고있을 것 같았다. 나는 베헤모스에게 말했다.
" 왜?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나 정도면 지상에서 나보다 강한 놈은 별로 없어."
[ 그래 보이는군... 그대가 지닌 신력도 매우 뛰어나다... 자격은 충분하다.]
" 근데 어째서?"
[ 허나 나는 질서의 축에서 파생되었기에 느낄 수 있다... 그대는 결코 상서롭지 못한 존재... 그대와 얽히는 건 결국 파멸로 향하는 길일지도 모르겠군... 나는 그대같은 존재와 인연을 맺어 나 스스로를 구속하고 싶지 않다.]
" 무슨 소리야? 상서롭지 못하다니..."
[ 혼돈의 존재들이라면 그런 그대를 흥미로워하고 사랑스러워하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대와는 성향이 맞지 않는다.]
단정짓듯 이야기한 베헤모스는 잠시 후 말했다.
[ 그럼 나가라... 혼돈에 사랑받는 존재여...]
파앗!!
나는 바깥 현실세계로 나왔다. 그리고 이윽고 옆에서 벨로프의 몸뚱이가 불덩이같은 열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게 보였다.
" 크윽... 으아아아....!!"
신열(神熱)이다.
아마 베헤모스가 신력을 그에게 전해줬을 것이고, 저 신열을 이겨내고 나면 벨로프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벨로프가 흑룡과 시선을 끌어주는 틈에 크리슈나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 ......"
혼돈에 사랑받는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된 거지?
' 천암비서만의 능력인 건가?'
어쨌든 이번 일로 알게 된 게 있다.
앞으로도 내가 질서에 속하는 자들의 복종을 얻는 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협력 정도는 해주는 모양이었지만 그들은 내게 존재하는 거대한 혼돈의 속성을 매우 싫어하는 듯 했다.
이윽고 벨로프가 신열을 이겨내자, 그들은 군을 정비하고 벨로프와 흑룡 드라큘라를 앞세워서 수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벨로프는 자신에게 새로 생긴 힘에 큰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 이런 반역자 놈들!!]
수도 상공에 이반 4세가 마치 새하얀 구름덩어리처럼 떠올라서 호통을 치자, 벨로프가 응수했다.
" 황제 이반이여...!! 오늘 그대, 마도의 존재를 멸하겠소!"
콰콰콰쾅
나는 격전이 일어나는 틈에 시내로 잠입했다. 어쩌면 내 움직임을 팔부신중이 감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연히 이반과 동방정교회 측의 싸움을 더 중시할테니 내 쪽으로 올 확률은 적다.
그리고 나는 크리슈나가 있는 조그마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왔는가? 백웅."
앉아서 갓난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청년, 크리슈나가 내게 말을 걸었다.
건물 안에 있는 건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시선도 동시에 내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크리슈나는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