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0====================
사신지혼(四神之魂)
우웅!!
나는 일단 아군을 데리고 황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서산대사와 유정을 황궁의 내궁에 머물도록 한 후 제갈 일족들을 불러서 크리슈나의 행방을 말해줬다. 그러자 제갈부가 심사숙고하며 듣고 있다가 말했다.
" 아라사 제국에는 현재 미친 아라사의 황제가 신화(theosis)를 겪으면서 사악한 존재의 손에 의해 개조되어 있다. 그 존재는 아마 팔부신중(八部神衆)일 것이며 천인(天人)이 배후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 음."
" 즉 크리슈나는 팔부신중 천인과 모종의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그 자와 뭔가 담판을 지으러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리고 제갈부의 말을 받아서 망량이 말했다.
" 그렇다면 신중할 필요가 있소. 만일 크리슈나 뿐만 아니라 천인까지 적으로 돌려서 적지에서 싸우게 된다면 아무리 천령단의 보유자가 많아도 위험에 처할 수가 있소. 천인은 팔부신중 중에서도 최강의 술법사이기 때문에 충분히 우리를 전멸시킬 함정을 짤 수 있을 것이오."
" 흠!"
" 만에 하나, 팔부신중에게 당해 백련교주와 호법사자들이 전멸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이 국면에서 당신은 차라리 자살하고 다시 시작하는게 나을 것이오."
" 하지만 이 상황에 변수 그 자체인 크리슈나를 만나지 않을 수도 없잖소? 그리고 크리슈나가 꼭 천인의 편이라는 보장도 없고."
" 그렇소. 그렇기에 정공법을 씁시다."
" 정공법?"
제갈유룡이 불쑥 나섰다.
" 팔부신중과 연결고리가 있는 것은 나다. 내가 팔부신중에게 연락해서 크리슈나를 만나고 싶다고 전할 것이다."
" ......!! 위험하지 않겠어?"
나는 제갈유룡이 아직까지 팔부신중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그건 이쪽의 입장일 뿐, 팔부신중 측이 제갈유룡을 배신자로 규정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 아직까지 접촉하지 않았기에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으나 섣불리 연락했다가 이중의 덫에 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 얼마 전부터 팔부신중 야차의 사역마(使役魔)가 내게 접촉해오고 있었다."
" 그 자식, 살아있었나."
제갈유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야차는 내가 황궁에 잠입한 이중첩자로 일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나는 그 요청을 수락했다."
" ... 이중첩자라."
" 팔부신중들은 이미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중첩자로 활동하는 한, 전면전을 걸어오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겠지. 그런 입장을 살려서 크리슈나와의 만남을 주선해 보겠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 그건 영락없이 팔부신중한테 아라사 수도에 함정을 파 달라고 말하는 격이잖아? 내가 놈들이라면 그걸 빌미로 무조건 함정을 팔 거야. 그러면 무의미한데."
" 함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 되받아치기는 간단한 법이지. 그리고 내가 이중첩자의 입장에서 알아서 조정해 줄 테니 손해 볼 건 없다."
" 흠, 알았어. 부탁한다."
나는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갈유룡을 아군으로 삼은 덕에 팔부신중과 엇나가더라도 그를 중재역으로 앞세워서 큰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는 제갈유룡이 팔부신중의 수족이 되어서 나를 궁지로 몰기 마련이었기에 몇십 배는 성가셨는데 그가 우리를 도와주니 크게 시름을 던 느낌이었다.
제갈유룡이 말을 이었다.
" 그럼 일단 월요를 얻었으니 다음으로 할 일은..."
" 화요의 봉인을 풀러 갈까? 그러면 단숨에 월요, 화요, 수요 3개를 손에 넣는 셈인데."
" 아니. 그렇게 하면 정말로 천계에게 집중감시당해버린다. 율주를 상대하기에는 칠요 두개로도 충분해."
" 으음."
" 당장 이 낙양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지."
나는 낙양에 있는 상관세가의 지하로 갔다. 그리고 곧장 전시안을 응용해서 화룡신검을 뽑아내고 여동빈을 통해서 화룡진인의 넋을 일깨우고는 대동해 온 제갈사가 서산대사와 유정의 도움을 받아서 수월하게 봉인을 재봉인했다.
그 작업을 마치자 화룡신검이 내 손에 들어왔다. 다만 이 상태로는 수백 년동안 봉인에 쓰여서 피폐해진 화룡신검이라서 제대로 쓸 수 없었고, 제대로 쓰려면 화요의 수호자인 공공에게 걸려있는 봉인을 깨주면서 함께 화기(火氣)를 흡수해줘야 일거양득이다.
그렇게 해야 화룡신검이 최대의 힘을 얻게 된다.
' 하지만 지금 화요를 얻고 공공을 풀어주기에는 시기상조다.'
그렇게 하면 확실히 아군의 힘은 급격히 강해지겠지만 천계와 정면충돌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판이 커질수록 적의 힘도 급격히 강해지는 걸 알고 있는 나로서는 진도조절이 필요했다. 지금은 일단 화룡신검부터 얻어두고 나머지 과정을 차분히 하는 게 나았다. 피폐해졌다 해도 화룡신검은 최상위 보패 중 하나이니 큰 전력강화였다.
내가 황궁으로 돌아오자 제갈유룡이 말했다.
" 야차의 답변이 돌아왔다."
" 뭐라고 하지?"
" 크리슈나라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더군..."
... 잉?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 설마 네가 돌아선 걸 눈치채고 정보를 숨기는 건가?"
" 아니... 그건 아니었다. 도리어 내게 크리슈나가 정말로 아라사 제국에 있는지를 되물었으니까."
" 그 말은 야차도 크리슈나를 알고 있긴 한다는 말인가?"
" 그렇게 되겠지. 일단 크리슈나란 자는 아수라의 친구니까."
나는 제갈유룡의 말에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 무사의 자비인가?]
[ 내 힘으로 이긴 게 아니다. 그대에게 유언을 말할 기회 정도는 줘야겠지.]
[ 쿠흑... 내 인간으로서의 이름은 파순(波旬), 천축무림의 지배자... 너희가 만일 암천향에서 되돌아간다면 내가 죽었음을... 내 친구 크리슈나에게 알려다오... 부탁한다.]
[ 크리슈나는 누구지?]
[ 천축의 수호자... 구자라트의 사원에...]
[ 좋다.]
아 맞다...
" ....."
내가 침묵하자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 이 쓰레기같은 놈... 아수라가 크리슈나한테 유언을 전해달라고 했는데 안 전해줬잖아."
" 아, 아니 그게. 깜박했다고! 일부러 안 전해준 것도 아니고 뭐... 그 생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고 해주냐..."
당황한 내 항변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 뭐 상관은 없지. 창힐의 명령으로 널 암살하러 왔던 놈 아니냐? 죽어라 싸우던 놈의 유언을 들어주는 게 더 웃긴 노릇이기도 하고. 그 덕에 크리슈나란 자의 단서를 알게 된 게 다행이지."
" 아수라의 친구라고 했지, 분명."
" 그래. 크리슈나가 진소청에게 말했던 '친구'도 십중팔구는 아수라일 것이다. 그 말에서 유추해보자면 현재 아수라는 주군을 잃고 언제 대량학살을 벌일지 모르는 불안한 심리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
" 근데 그건 좀 이상해."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 창힐이 사라진 현 시점에서 아수라는 가만히 놔두면 몇 년 후에 서방 팽조의 진영에 용병으로 고용되어서 동방으로 침략해 오잖아. 아무리 봐도 대량학살을 할 인상은 아니던데."
" 크리슈나도 이번 생 이전에는 끼어든 적이 없었다. 감이 오지 않냐?"
" 뭐가?"
" 또 뭔가 변인(變因)이 생겨서 네 초반 전생전개를 뒤틀어버렸다는 뜻이다. 즉, 이번 생은 지난번 생과 여러모로 같아보이지만 다르다는 뜻이지."
" ......"
" 이유는 아마 네가 황제가 되어서 백련교와 황궁을 통합한 것 때문이겠지만... 사대신기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지."
제갈사가 말했다.
"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일단 크리슈나가 팔부신중과 연대하는 건 아닌 듯 하군."
" 흠. 바로 쳐들어가지 않기를 잘 했나."
" 백웅. 일단 상황을 봐야 하니 아라사 수도 근처에 있던 동방정교회 무리들과 합류해라. 그리고 흑룡(黑龍)을 깨워라."
" 흑룡을?"
" 멀린에게 다시 보수를 받아도 좋고, 네 맘대로 운용해도 될거라 생각한다. 우선은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봐라."
" 알았어."
파앗
나는 제갈사의 계책대로 아라사 수도 근처에서 미친 황제를 토벌하고자 주둔하고 있던 동방정교회 연합군에게 갔다. 그리고 그대로 음신지력을 미친듯이 불어넣어서 얼음 속에 갇혀 있던 흑룡을 깨웠다.
쿠구구구
그러자 예전처럼 머릿속에 두 종류의 음성이 동시에 메아리쳤다.
[ 그만두게! 세상에 재앙을 풀어놓지 말게!]
[ 흐으... 흐으... 나를 풀어주려는 건가?]
[ 그대가 필요한 게 무엇인가? 무엇이든 간에 나, 왕의 마법사이자 성검의 안식자, 성배의 수탐자가 원하는 보물을 주리라! 봉인의 해제를 멈춰라.]
[ 계속 하라... 날 풀어준다면, 나는 네 적수를 핏빛 말뚝에 꿰어죽이리라.]
나는 그만두라는 쪽이 멀린이고 풀어달라는 흑룡이 드라큘라 대공(大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 두 개의 선택지를 다 한 번씩 선택해본 적이 있는데...'
신선한 선택지를 골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멀린의 말대로 그대로 봉인시켜놓고 안정적으로 보수를 받는 쪽이 옳다. 왜냐하면 흑룡 드라큘라 대공을 깨워봤자 폭급하고 성질더러운 놈이라 결국 나와 싸우기만 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혼대법의 요결인 탈혼을 이용해서 나를 배신한 흑룡의 영혼을 얻어냈고, 그걸 귀중한 보물 겸 제물로 썼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멀린인지 드라큘라인지 선택하기 힘들다. 뭘 하든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 ... 드라큘라 쪽을 선택하자.'
멀린은 왠지 싫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힘을 불어넣어서 드라큘라의 봉인을 풀었고, 이윽고 강대한 흑룡이 껄껄 웃었다.
[ 크하하하! 날 풀어주는구나.]
이번엔 귀찮게 계약 따위는 맺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차갑게 웃으면서 완전히 봉인을 깨트렸고, 드라큘라 대공은 아무런 제약이나 이혼대법의 효과도 받지 않고 해방될 수가 있었다.
콰칭!!
흑룡 드라큘라 대공은 얼음에서 풀려나자 바위산의 위에 착지한 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 나를 풀어준 보답으로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꺼져라.]
" 무슨 소리지?"
[ 말을 못 알아 듣는건가? 흠... 미천한 놈...]
" 이제부터 네가 목숨구걸을 해야할 텐데."
[ 뭐...? 크흐흐흐, 살려준다 해도 스스로 기회를 날리는구나!]
쿠와아악
흑룡이 거대하게 날개의 홰를 치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절대지경의 검뢰를 써서 놈의 한쪽 날개를 베어버리고 말았다.
스칵!!
[ 크흐으으으!! 동방의 고명한 무술인가! 하지만 이까짓 것!!]
츄와악
드라큘라 대공은 그대로 날개죽지에서 순식간에 자신의 날개를 재생시켜버렸다. 최상위 마물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재생력이었고 이윽고 놈이 사악한 주문을 외우며 나를 공격하려 했다.
꽈앙!!
[ 크아악.]
내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서 용의 배를 걷어차자 놈은 재차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인간이 아닌 용이라서 내 발차기를 맞고도 한 번은 버틴 듯 했으나 순식간에 전의를 잃은 표정으로 보였다. 놈은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았는지 급히 날개를 펄럭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나는 따라서 뛰어오르며 공격했다.
쿠콰콰쾅
콰쾅
그렇게 약 2백여 초를 미친듯이 공격하자, 드라큘라 대공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되는 비늘의 내구력과 재생력을 갖고 있었지만 내가 계속 공격하자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주먹을 뻗어서 다시 공격하려 하자 드라큘라 대공이 급히 외쳤다.
[ 잠깐!!]
내가 주먹을 멈칫거리자 드라큘라 대공이 말했다.
[ 넌... 인간이 아니군... 무시무시한 힘을 갖고 있구나! 원하는 게 뭐냐?]
" 내 소원...?"
[ 그렇다! 들어 주마.]
용의 제안에 나는 주먹을 꾹 쥐며 말했다.
" 내 소원은... 네가 살려 달라고 비는 것이다."
[ 아니 잠깐...]
퍼억
[ 카하아악.]
나는 용의 머리를 때려서 지상으로 떨군 후 뇌신류의 절학을 응용해서 계속 팼다. 물론 화룡신검을 쓰면 한방에 재생력을 무효화시키고 끝장낼 수도 있었지만 이 괘씸한 놈은 예전에 날 배신한 적이 있었기에 용서할 수가 없었다.
퍼퍽!
콰쾅!!
' 역시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단단하군...'
인간이라면 호법사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 맞았으면 진작 죽었으리라. 안 죽을 정도로 계속 패고 있자 마침내 드라큘라 대공이 포효했다.
[ 사, 살려다오! 제발 살려 다오!!]
" 좋아. 이제야 그 말을 하는군!"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 살려줄 테니 내 부하가 되어라!"
[ 부... 부하라고?]
" 그렇다. 그냥 널 죽여서 용의 영혼을 취하는 건 쉽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별로라서 말이야... 한 번 네놈이 부하로 쓸모 있는지 살펴봐야겠어."
용의 영혼이 귀한 제물이긴 하지만 그만큼 귀한 제물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데서도 구할 수가 있다. 이 흑룡이 쓸만한 놈인지를 한 번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했기에 이번에는 힘의 차이를 증명하고 내 부하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내가 대충 내 이름과 위치, 상황 등을 설명해주자 잠시 후 흑룡은 내게 무릎을 꿇으며 언령으로 맹세했다.
[ 나 드라큘라 대공, 대륙황제 백웅의 부하가 되어 죽는 날까지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나이다...]
" 좋아!"
나는 흑룡의 목덜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명령했다.
" 날아라!!"
후우웅
나는 흑룡에 타고 하늘을 날며 생각했다.
' 용을 탄 김에 아라사의 수도를 정찰해 볼까.'
전시안과 전국옥새를 써서 근처에서 날아다니다 보면 크리슈나의 위치를 쉽게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