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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대 위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망량이 슬그머니 단상 위에 이미 올려져있는 두루마리를 가리켰고, 나는 두루마리를 폈다. 두루마리에는 내가 해야 할 말이 이미 쓰여져 있었기에 나는 일단 읽기로 했다.
" 나는 오늘부터 무도한 황적(皇敵)과 난흉(亂凶)을 물리치고 이 나라의 만민(萬民)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노라!"
쓰여있는 글귀는 그게 끝이었다. 내가 그 글귀를 읽고 나자 다시 한 번 망량이 부채를 흔들었고, 그 동작에 맞춰서 대 밑에 있던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폐하 만만세!!!
우우오오오 -
어마어마한 함성이 몰아쳤다. 나는 고작 한 마디 한 것 뿐이었는데도 천지가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황제가 보는 풍경을 계속 보고 있자 머리가 어질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 우와...'
겨우 한 마디 했을 뿐인데 무슨 반응이 이렇단 말인가? 그리고 슬며시 망량이 내 용포를 잡아끌자 나는 뒤로 물러나서 마련된 상에 앉았고, 망량이 대신 단상에 걸어나와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 낙양의 백성들이여. 전(前) 황조의 잔인함과 사악함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이전의 황제는 자신이 다스리는 이 낙양만큼은 풍요로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공과(功過)를 떠나, 전 황제인 주후총(朱厚熜)이 벌인 인간 이하의 만행을 오늘 나 제갈현이 황제폐하를 대신하여 천하 만민에게 고하고자 하노라."
잠시 숨을 들이쉰 망량이 슬며시 손짓을 했고, 뒤에 도열해 있던 금의위 중 백호가 직접 거대한 상자를 가지고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상자에서 무언가를 꺼냈는데, 그것은 바로 번데기였다.
" ......!!"
저, 저건 대뢰옥에 있던 인간번데기 아냐?
" 이걸 보아라!!"
내가 흠칫 놀라서 쳐다보자 망량이 인간번데기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서 허공에 들어올렸다. 그러자 인간의 머리가 달렸으나 팔다리가 괴물의 것으로 변해있으며 촉수를 낼름거리는 무언가가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 으아아악!!"
" 뭐, 뭐야 저건!!"
" 히익."
낙양의 양민들은 인간번데기를 보자 끔찍해하며 더러 구토하는 자들도 보였다. 또한 망량이 인간번데기를 하나 뿐만이 아니라 여럿 가지고 와서 금의위사들에게 치켜들게 하자, 사람들이 크게 당혹하는 게 느껴졌다.
웅성웅성...
그리고 망량은 천천히 인간번데기 하나하나를 보며 말했다.
" 보아라. 이 자는 바로 한림원(翰林院)의 정6품 학사인 진원균(晉源鈞)이다. 그리고 이쪽은 통정사(通政司)의 대참의(大參議)인 붕가섭(鵬假涉)이다! 이들 모두가 본디 황실의 고위관료이자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나, 최소한 사십여 명 이상이 대뢰옥이라고 불리는 황실의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으며, 결국 이런 괴물이 되고 만 것이다!"
드르륵
망량은 금의위를 시켜 인간번데기를 미리 만들어 둔 거대한 기둥 위에 올리게끔 했다. 기둥 위에 번데기들이 올라가자 사람들은 좋든 싫든 번데기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족(異族)이란 도저히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웬만한 요괴보다 생긴 게 끔찍하기 때문에 보는 이들의 정신력을 갉아먹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집중하기 시작하자 망량이 말했다.
" 전 황제인 주후총은 이 인간번데기를 괴물으로 변태시켜서 황실을 수호하는 수호병으로 쓰려 했으며 동시에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칼으로 키우려 했다. 또한 지금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들에게 보복하려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는 결국 낙양의 성민(城民)들 또한 괴물군대로 만들려고 했노라!"
웅성...
웅성...!!
사람들의 동요가 크게 심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정상이었으나 인간번데기가 뿜어내는 묘한 분위기의 마력이 사람들의 정신을 헤집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과 지나치게 괴리된 [무언가]가 현실에 튀어나와있다는 것만으로 이면의 세계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망량이 잠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 이 잔학무도한 계획에 대해서는 구국의 영웅이신 황연 대장군께서 마저 말씀해주실 것이다."
저벅
저벅
천천히 황금빛 갑옷을 입은 노인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내가 대뢰옥에서 구한 후 제갈사 등에게 그 신병을 맡겨두었던 황연 대장군이 틀림없었다. 완전히 흉신의 축복의 영향에서 벗어났는지 황연의 눈에는 정광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몸 또한 건강해 보였다.
황연 대장군이 앞으로 걸어나오자 백성들이 그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 황연 대장군이다."
" 황연 대장군께서 나오셨다!!"
오오오오
아까 내가 모습을 드러낼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하며 진심이 담긴 함성이 백성들에게서 울려퍼졌다. 나는 그 함성을 듣자 씁쓸한 감정보다는 황연이 대단한 인물이란 걸 알 수 있었다.
' 진정한 구국의 영웅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면 이런 반응은 나올 수가 없다.'
내가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자 황연 대장군이 천천히 말을 했다.
" 나 황연의 이름을 걸고 재상 제갈현 님의 모든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다. 전 황조와 주후총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악한 행위를 거듭했으며, 그건 결국 낙양의 성민들은 물론이고 천하만민을 도살(屠殺)하려는 비인외도의 길이었다. 우리 모두는 개돼지처럼 도살당할 뻔 했노라!"
잠시 말을 끊은 황연 대장군이 단상을 크게 쾅하고 주먹으로 내려치며 말을 이었다.
" 이는 불충(不忠)도 반역(反逆)도 아니다. 대명제국과 황실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충의의 대상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왕이었을 때였다. 전 황제 주후총이 인간의 길을 버리고 백성을 도살하기로 한 이상 나는 군인으로서의 양심,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새로운 황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용...
" 새로운 황제께서 대륙에 머무는 암운(暗雲)을 몰아내 주실 것을 이 황연은 확신하고 있다. 위대한 대륙의 기운이 세상을 제패할 것이리라."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황연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연은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을 맺었다.
" 황제 폐하 만만세!"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백성들이 다같이 연호를 했다.
황제 폐하 만만세!
만만세!!
만만세!!!
그리고 나는 그 외침을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 인정받은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꾸역꾸역 몰려나와 있던 군웅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신기한 일을 쳐다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황제에게 연호하는 것도 그냥 해야하니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망량이 사악한 존재들을 현실에 끄집어내어 경악하게끔 만들고, 나아가서 구국의 영웅이 그 정당성을 설파하자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후 모든 연설과 의식이 끝나자 나는 사람들과 함께 걸어서 황제의 궁으로 복귀했다. 나는 걸어가면서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 ......"
내 앞에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는 건 실로 희한한 기분이다. 숨소리도 내기 버거워하다니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나는 몰래 망량에게 순어구로 물었다.
[ 망량. 아까 인간번데기들은 왜 인간으로 되돌리지 않았소?]
[ 그 자들은 현직에 있을 때 뇌물을 받아먹은 쓰레기들이었소. 흉신의 축복을 치유할 필요가 없는지라 숙부의 말대로 최대한 써먹기로 했소.]
[ ......]
[ 편하게 없애줄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망량도 부패관리를 혐오하는 건가.
잠시 후 도착해서 용상에 앉자, 망량이 황좌 곁에 서서 부채로 좌중의 대소신료들에게 말했다.
" 황제폐하께서는 아직 심신의 피로가 심하셔서 오늘은 이만 퇴정(退政)하실 것이다. 오늘부터의 대소사(大小事)는 본인과 내황각주, 그리고 신임 도독(都督)인 황연 대장군이 중심이 되어 보고를 받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한 망량이 슬그머니 부채로 내게 나갈 것을 알려주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내 주위로 동창의 내시들이 따라붙었다. 나는 내시들이 생각보다 말끔한 외모이고 비열하게 생기지 않자 신기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가 몇 걸음을 옮기자 내 곁에 있던 동창제독 현무가 말했다.
" 폐하. 내궁(內宮)으로 드시지요. 연회와 가인들이 준비되었사옵니다."
" 음..."
나는 전생하면서 몇 번 부딪히며 싸우기도 했던 동창제독 현무가 고개를 숙이고 존댓말을 하자 희한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 놈이 나를 황제로 모실 날이 올 거라고 언제 생각이나 해본 적이 있을까? 나는 아무튼 오늘은 황제의 삶을 경험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무를 따라서 걸어갔다.
두둥
" 헉..."
나는 거대한 내궁에 으리으리하게 마련된 연회석을 보자 순간 놀라서 입을 벌렸다.
' 타, 탁자가 몇 개야?'
어지간한 연회를 봐 왔다고 생각했지만 격이 달랐다. 최소한 수십 수백개 이상의 탁자들이 붙어있었으며 그 위에 수많은 산해진미가 올려져 있었고 숙수들이 곁에서 대기하며 음식을 추가로 조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하나 맛있지 않은 게 없어보였으며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음식도 많았다.
' 이거 언제 다 먹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제일 상석에 가서 앉자, 잠시 후 근처에서 고요한 금(琴) 소리를 시작으로 풍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거리의 잔치에서 울리는 풍악과 달리 마냥 경박하게 흥겹지가 않았으며 고아함과 청명함을 함께 담고 있는 음률이라서, 문외한인 나조차도 뛰어난 실력의 음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시비들이 앉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궁인들이 도열해서 내 주위를 감싸듯 했는데, 누구 하나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내가 멍하니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자 동창제독 현무가 말했다.
" 폐하. 편히 드시면서 오늘 승은을 입을 자를 골라 주시옵소서."
" 승은? 아...."
나는 그 말이 방사(房事)를 의미하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사방에 서 있는 미녀들이 내가 고르는 대로 안방에 들어온다는 걸 알게 되자 황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게 주지육림인가?!
나는 엄청난 호사에 정신이 나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어떻게든 맛있는 걸 챙겨먹기로 했다. 그리고 동창제독 현무에게 말했다.
" 전부 데리고 나가있어. 호위는 필요없다. 그리고 승은같은건 됐다."
" 알겠사옵니다."
동창제독 현무는 잠시 후 동창요원들을 모두 데리고 밖으로 빠져나갔고, 내부는 오로지 연회장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차려졌다는 걸 생각하니 싱숭생숭하기까지 했다.
' 음... 일단 안 먹어본 거나 먹어볼까나.'
내가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궁인들이 손가락질만 하면 원하는 접시를 가져와서 편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40 접시째를 비운 나는 알 수 있었다.
전부 맛있다.
정말 대단한 솜씨의 요리였다!
' 슬슬 배가 부르는데... 조금만 더 먹을까.'
나는 20접시 정도를 더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갔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창제독 현무가 말했다.
" 폐하. 재상 제갈현이 폐하를 알현하기를 원하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 어디 있지?"
" 내황각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가자."
나는 망량이 기다리는 내황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창요원들을 모두 물리고 내황각 안으로 들어서서 5층으로 올라가자, 최상층에 망량을 비롯한 기존 동료들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망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 황궁의 음식은 어떻소? 궁중요리에 동원된 숙수들은 청홍흑백(靑紅黑白) 중 청천주사이니 전 대륙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이 만든 요리였소."
" 아, 아주 맛있었소."
그리고 옆에 있던 미호가 미모의 여성의 모습으로 깔깔거렸다.
" 아하하. 수많은 미녀를 취하고싶은 만큼 취할 수 있겠구나. 좋겠구나."
" ... 그건 됐어."
하필 미호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호를 좋아하는 한 다른 여자와 자거나 섣불리 정을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 망량. 나는 아무래도 황제가 안 맞는 것 같소. 황제는 관두고 다른 사람이 황제하면 안 되겠소?"
" ......"
망량은 눈에 묘한 이채를 띄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설마 바로 그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소. 저 호화로운 연회를 즐기고도 당신은 그저 황제 자리를 귀찮다고만 생각하는구려."
" 음, 귀찮다기보단... 맞소. 귀찮소."
음식은 엄청나게 맛있었고 미녀들이 쏟아지는 저 상황은 엄청난 행복감을 가져다줘야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게 그저 귀찮다는 생각만 들었으며 다음으로 뭘 해야할지부터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망량의 질문이 이어졌다.
" 그건 달마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오? 그래서 인간세상의 부귀영화를 맘놓고 즐기기 힘든 것이오?"
" 죄책감..."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지 않소. 외우주에서 내가 만났던 그는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고 죽은 거니까... 나와 달마는 서로 빚진게 별로 없소."
망량이 훗하고 웃었다.
" 백웅. 보통 인간이라면 저 엄청난 권위와 호화스러운 생활을 잠시라도 느낀다면 결코 황제자리를 놓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소. 아니,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처럼 단칼에 말해버릴 수는 없다오."
" ......?"
"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오. 손가락 하나로 무수한 인간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질 수 있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써도 인간들이 복종할 것이오. 그게 끌리지 않소?"
" 글쎄..."
그냥 맛있는 게 많고 미녀가 많은 게 그리도 좋나?
다들 미녀이긴 했지만 단언하건대 서문혜, 사공린이나 미호, 화룡진인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녀들이 봉황이라면 황궁의 여인들은 닭처럼 보였다.
또한 천하인을 다스리는 권위는 살짝 혹하긴 했지만 그나마도 크게 끌리는 건 아니었다. 내가 진심으로 망량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이윽고 듣고 있던 제갈부가 보기 드물게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 하하하하!! 정말... 특이한 자로구나! 이런 황제의 재목도 있을 줄이야..."
제갈유룡이 담담하게 말했다.
" 현. 저게 망량으로서 네가 선택한 군주인가."
" 아까부터 너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
망량이 평소와 같은 히죽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내 말에 대꾸했다.
" 별 거 아니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 걱정이라니 무슨 걱정?"
" 당신이 인간세상의 부귀영화에 타락하여 뜻이 꺾일 염려였소. 나를 비롯해서 제갈가 일족 모두는 황궁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화려한지 알고 있었으니 걱정할 수밖에 없었지. 당신을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은 건 오로지 숙부 뿐이라는 걸 알아 두시오."
제갈사가?
내가 힐끔 제갈사를 돌아보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현이 말대로 별거 아니다. 넌 그럴 놈이 아냐."
" 훗, 내가 좀 대단한가보군..."
나는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표정이 일그러졌다.
" 난 처음부터 니가 미친 놈인 걸 알고 있었거든."
" ......"
" 미친놈한테 부귀영화가 뭐가 중요하겠어. 안 그래?"
이건 좋은 말인지 나쁜 말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 하지만 백웅. 그렇다 해서 당신이 바로 수련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으면 하오."
" 무슨 말이오?"
" 황궁에서 황제로서의 삶을 좀 더 겪어보란 말이오. 다른 꼭두각시를 세울 수 있었음에도 굳이 당신을 황제로 내세운 것은, 바로 당신이 전생자이기 때문. 황제를 해 본 경험은 앞으로 당신의 전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오. 천하만민의 군주가 되는 경험은 굉장히 희귀하오."
" 으음... 주지육림은 그리 끌리지 않는데."
" 그건 황제로서의 락(樂)에 속하오. 오늘은 쉬게 두었으나 내일부터는 당신도 정무(政務)에 참여하시오."
엥?!
내가 황당해서 망량을 쳐다보며 말했다.
" 나, 나는 정치같은 건 하나도 모르오. 그리고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흑웅을 회복시켜야 하니 폐관수련을 해도 모자랄 판에..."
" 지금 이 시점에 흑웅을 빨리 되살려서 뭐할 생각이오?"
" 강해지지 않겠소."
" 현재 상황은 당신 개인이 약간 강해진다고 딱히 좋아지는 국면이 아니오. 전투를 할 시기도 아니고 은인자중하는 때이지. 그리고 예상되는 수련시간이 이 년 남짓이라면 전생자로서 그리 서두를만한 시간이 아니오."
망량이 확신하듯 말했다.
" 황제로서 이 나라를 한 번 경영해 보시오. 단순히 개인의 무력을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안목을 당신이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 으음."
" 수련은 어차피 경문을 외우는 것이니, 수련시간을 절반으로 줄이고 나머지 시간을 활동하면 되리라 생각하오."
하긴 지금 당장 음신지력을 강하게 통솔할만한 언령이 없는 이상 맨땅에 때려박기식 수련을 맨날 하기도 그렇다. 예상으로는 이 년이라고 해 두었지만 언령의 통솔력이 약한 이상 신력이 극치에 이를수록 반발력이 강해져서 대성 자체가 불가능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 망량 말대로 지금 당장 막힌 수행에 힘쓰기보다는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좋을지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소."
황제, 어디 한 번 해볼까!
나는 그 다음 날부터 정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루의 절반은 음신지력 경문수련에 사용했고 나머지 시간은 용상에 앉아서 용포를 입고 대소신료들의 보고를 받는 일이었다. 나는 황제일을 하면서 생각했다.
' 음... 생각보다는 알아들을 만 하네.'
내가 못 알아듣는 소리가 난무하면 어쩔까 고민했었지만, 첫 날의 정무보고는 의외로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완전히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관료는 한 명도 없었으며 다들 알아듣기 쉽게끔 간추려서 보고를 했다. 물론 상소문을 제대로 펼쳐보면 어려운 이야기가 잔뜩 있었으나 황제가 그것까지 일일이 다 알아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첫 날의 정무가 끝나자 나는 생각보다 안 어렵고 할만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직접 정무를 하거나 회의를 주도하는 게 아니라 나는 가만히 용상에 앉아있고 사실상 재상으로 임명된 제갈현과 내황각주 제갈부가 모든 일을 처리하는 걸 지켜보는 식이었다. 간간히 군무(軍務)에 관련된 일이 나오면 황연 대장군이 회의에 끼어들고는 했다.
그렇게 약 오 일 가량 황궁에서 황제로 지내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 황제, 할 만 하네!'
그나마도 내가 정무를 많이 보는 편이었고, 관료들의 말에 의하면 전대 황제인 주후총은 일 년 중에 사십 일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마도의식과 술법, 그리고 주색잡기 등에 빠져서 황제 일을 거의 하지 않은 것이리라.
망량이 말했다.
" 백웅. 이런 식으로 석 달 정도만 더 황제의 삶을 체험해 보시오. 그 정도면 황제를 해 봤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 흠, 알겠소."
" 정말이지... 당신같은 황제가 기존역사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질 지경이구려."
망량은 농담을 말하며 껄껄댔다. 나도 피식 웃었다.
" 그래도 당신을 재상으로 임명했겠지."
그렇게 또 다시 칠 주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 ......"
나는 용상에 앉은 채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나를 알현하러 찾아온 뜻밖의 인물 때문이었다.
" 황제폐하를 뵈오."
눈 앞에 있는 세 명의 사내들은 나를 보자마자 예를 갖추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예절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찾아온 것 자체가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 일어나라."
내 말에 성큼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장년의 사내는 청수한 외모였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으며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양 옆에 대동한 제자, 진소청과 극호를 힐끔 한 번씩 쳐다보다가 말했다.
" 전대 청룡(靑龍)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나이다!"
이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