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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녹월을 따라갔다. 녹월은 앞서서 경공을 쓰며 단번에 수십 장을 날면서 내게 전음으로 말했다.
[ 그 분과 첫 대면에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소?]
[ 왜지?]
[ 어느 한 쪽도 성치 못할 것이오... 적어도 나는 당신의 패도(覇道)에 굴복할 터이니 그 분께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시오.]
묘한 말투였다.
' 아무래도 녹월은 단순한 힘의 우위때문에 그 자에게 복종하는 게 아닌 모양이군.'
복잡한 사정이 있는 건 틀림없었다. 패도지향적인 뇌신류의 무인이 진심어린 존중을 논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나는 녹월을 당장 다그쳐서 물어보고싶은 게 많았지만, 그렇게 하면 향후 녹월의 신뢰를 얻는 건 불가능해졌기에 참기로 했다. 녹월 입장에서도 뇌신류의 원로로써 내게 복종하는 것만으로도 많이 참고 있는 것이리라.
[ 좋다.]
[ 고맙소.]
이제부터는 상하관계가 이뤄졌으니 나는 녹월을 부르는 호칭을 바꾸기로 했다. 녹월 또한 별다른 반발이 없는 듯 했다.
타닷
그렇게 녹월의 경공속도에 맞춰 약 한 시진 정도를 경공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지역 하나를 넘을 정도의 거리를 이동했을 때, 녹월이 웬 인적없는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산이 좀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저기에 돌무더기로 쌓은 조그마한 더미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산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챘다.
' 진법(陣法)!'
저 돌무더기 하나하나가 진법의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물론 저런 돌무더기 몇 개 부순다고 해서 진법이 와해되지는 않으며 그저 영역표시에 불과했다. 나는 진법이 펼쳐진 장소는 강력한 술법사의 본거지라는 상식을 알고 있었으므로 순간 망설여졌다.
혹시 이게 함정이라면?
하지만 나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설령 녹월이 나쁜 마음을 먹었다 해도 겨우 일개진법으로 절대지경의 고수를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또한 녹월이 배신한다면 그 뿐이다.
' 배신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
마치 남궁세가 놈들과 해적들처럼, 전생(轉生)해서 그대로 되갚아줄 뿐이다.
몇 번이고.
내가 마음내킬 때까지.
우우우우
좀 더 안으로 들어오자 마치 심산유곡에 새하얀 안개가 정적과 함께 흘렀다. 신기하게도 별로 춥지는 않았고 그저 끝없는 적막이 느껴졌다. 또한 풀이나 나무도 음침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생기를 잃지 않았다.
마기(魔氣)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앞에 녹월이 멈춰서더니 말했다.
" 여기 계시오."
" 흠."
조그마한 동굴이 있다. 나는 그 동굴을 향해 기감을 뻗치며 동시에 화안금정을 시전했다. 그러나 무언가 두터운 막으로 막아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강력한 술법결계군...'
화안금정을 막을 정도면 저 결계는 어지간한 대요괴도 막을 정도일 것이다. 내가 내심 상대의 역량을 재어보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
녹월의 몸이 한 차례 떨리더니 그의 눈이 흐리멍텅해졌다. 그리고는 녹월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 눈빛은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 ... 매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군... 그대는 누구지...?"
녹월에게 빙의한 것인가.
녹월 또한 강력한 고수이자 술법사일 텐데 이렇게 쉽게 빙의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녹월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 나는 뇌신류의 종사가 될 자, 백웅이오. 녹월과 겨루어 그를 제압했고 그대들 귀혼일파까지 접수하고자 여기 찾아왔소."
" ... 호오..."
" 녹월은 귀혼일파의 수장이 자신이 아니며 따로 있다 하더군. 당신이오?"
상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그렇다... 내가 수장이다..."
" 당신의 이름과 명호를 알려 주시오."
" ......"
그 자가 침묵하다가 말했다.
" ... 이런... 예상보다 더한 놈이 왔군... 설마 뇌신류의 사대신기 바즈라를... 갖고 오다니..."
흠칫
' 녹월의 기억을 읽은 건가? 나와 방금 전 대면했던 기억을...'
뜻밖이다. 빙의술이라 해도 대부분은 몸을 일시적으로 빼앗을 뿐 대상의 기억까지 읽지는 못했다. 그 2가지는 별개의 술법이었으며 한번에 할 수 있는 게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상대는 빙의상태에서 기억을 읽어내었으니 굉장한 경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자가 녹월의 눈을 시꺼멓게 물들인 채 나를 주시했다.
" ... 거기에 절대지경의 무공... 그리고 아마도 저 눈의 '힘'은 화안금정(火眼金睛)... 순간이동의 마도구... 굉장히 사연이 복잡한 자로군..."
"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분명 당신의 이름과 명호를 알려달라 했소."
" 이런... 후후... 미안하군... 그대같이 특이한 존재를 보는 게... 굉장히 오랫만이라서... 나도 모르게 넋을 놓았군..."
녹월의 얼굴로 히죽 웃던 그 존재가 말했다.
" 다시 소개하지... 나는 귀혼일파(鬼魂一派)의 수장... 명호는... 아주 많고... 이름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내 이름을... 밝힐 수 없군..."
" ......"
장난하냐!
나는 짜증이 나서 선검을 소환하며 말했다.
" 아, 그렇소? 말하기 싫나보군. 그럼 됐소."
" 흐음... 성급한 자군..."
나는 위협하듯 그에게 선검의 극을 겨누며 말했다.
" 보아하니 술법 깨나 쓰는 자인가 본데, 뭘 원해서 녹월과 묵월단을 암중에서 움직이고 있었소? 그리고 당신이 귀혼일파의 수장이라면 뇌신류가 축출당할 때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 ......"
귀혼일파의 수장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 우리 귀혼일파가 원하는 건... 하나 뿐이지... 바로 그건..."
" 그건?"
" ... 좀 있다가..."
그러나 놈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엉뚱한 말을 꺼냈다.
" ... 그리고... 뇌신류가 축출당할 때... 나는 나름대로 뇌신류를 위해 힘을 썼다... 내 술법으로 뇌신류 전승자들이 도주하는 걸 도왔고... 곳곳에서 풍신류와 수신류의 추적자들을 묻어버렸지...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
" 그렇다 치지. 근데 어째서 이청운을 도와서 뇌신류를 위해 일하지 않았던 거요? 당신이 도왔다면 이청운도 교주에게 당해서 어이없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눈 앞의 상대가 굉장한 실력자란 걸 느낄 수가 있다. 벽력삼존의 몸에 저토록 쉽게 빙의술을 쓰면서 한 눈에 내가 가진 힘의 내역을 알아보는 능력자는 그리 흔치 않았다. 저런 자가 이청운을 도왔다면 뇌신류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
그러자 그가 말했다.
" ... 나는 현재의 백련교주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지..."
" 뭐?"
이건 무슨 소리인가.
내가 황당해할 때 귀혼일파의 수장이 말을 이었다.
" ... 나는... 백련교주 독고운천이 뭘 하려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원영신과 천령단을 이뤘는지 내막을 파악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지... 독고운천이야말로 초대교주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자라는 걸... 진공가향을 이루려 하는 자..."
" ......"
" 그래... 비록 내가 원하는 귀혼일파의 염원과는 좀 다르지만... 나는 그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백련교주는 초조(初祖)의 뜻을 잇는 자... 이청운보다 둔재일 지언정... 그야말로 백련교의 교주에 가장 어울렸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 그 말대로라면, 당신은 본래 뇌신류의 소속으로 암중에서 뇌신류를 돕고 있었지만 백련교주 독고운천이 더 교주에 어울린다 생각해서... 이청운이 죽도록 방관했단 말이오?"
" 그건... 내 탓은 아니지... 이청운이 교주보다 약했을 뿐 아닌가..."
" 강자지존(强者之尊)의 논리를 내세울 생각인가? 하지만 당신은 뇌신류이니 이청운을 돕지 않았다는 건, 결국 배신을 한 셈이오."
내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보자, 그는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 아까부터... 뇌신류 소속이니 마니 하는데... 우리 귀혼일파는... 딱히 뇌신류 소속은 아니다..."
" 뭐라고?"
" 귀혼일파는... 뇌신류에서 출발한 게 아니다... 바로 내가 만들었고... 어쩌다보니 뇌신류 소속의 귀혼일파가 가장 많을 뿐이지..."
" ......!!"
" 후후... 얼굴이 일그러졌군... 힘자랑을 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한가?"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바로 맞췄소!"
콰과광
더 이상 개소리를 듣기 싫었던 나는 그대로 동굴을 향해 돌진하며 검뢰를 때려박았다. 어차피 녹월이야 빙의당한 것 뿐이니 녹월을 베어봤자 그저 꼭두각시가 쓰러질 뿐이었다. 놈의 본체가 있는 동굴을 무너뜨리는 게 훨씬 타격이 가는 것이다.
검뢰때문에 산이 통째로 무너지는 그 순간이었다.
치리리링
청명한 맑은 빛과 함께 가부좌를 튼 어떤 존재가 그 안에서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그 자의 모습이 잘은 보이지 않았으나 머리를 산발해서 눈코입이 확인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허공에 둥둥 뜬 그 자가 육합전성을 써서 말했다.
[ 그대가 뇌신류의 종사가 되고싶다면 마음대로 하라. 녹월을 데려가던가 말던가. 그대는 그럴 자격이 있군.]
" ......"
[ 하지만 내 일을 방해하진 말도록... 그럼 이만.]
" 잠깐!"
쉬익!!
다음 순간 귀혼일파의 수장이 순간이동같은 술수를 써서 사라졌다. 나는 눈을 뻔히 뜨고 상대가 도망치는 걸 놓칠 수가 없었으므로 그 찰나에 의념천주를 세워서 눈을 반개한 채 선검을 휘둘렀다.
츠아앗!
검뢰가 시공간을 스치고 갔다. 나는 완전히 시공간의 본질에 도달하기 전에 검뢰가 튕겨나간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찰나의 감각을 느끼며 생각했다.
' ... 설마 이게 무사시가 [시공간의 단면]이라고 했던 그건가.'
이걸 제대로 베려면 수백 년 단위의 수련이 필요할 것 같다...
쩌억
[ 으음...]
허공에 다시 귀혼일파의 수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왼쪽 팔죽지에서 피가 흘러서 옷을 적시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부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쪽 손으로 그 상처를 감쌌다. 그러자 바로 피가 멎어버렸다.
' 치유술인가?'
내가 상대의 능력을 생각하고 있을 때 귀혼일파의 수장이 말했다.
[ 대단하군. 검뢰의 힘만으로 술법을 깰 수 있다니... 역대 종사 중에서도 서너 명이나 가능했던 일인데.]
" 왜 도망치려는 거지? 나와 힘을 합칠 생각은 없다는 건가?"
[ 당연한 것... 네가 나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내 이상(理常)을 이뤄줄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 뭐라고."
[ 그대가 어떻게 바즈라를 찾아왔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대를 믿을 수가 없다. 그대가 사악한 신의 권속이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
스스스스
다시금 그가 사라지려 했다. 나는 저 자가 더욱 고차원적인 술법을 부리려 한다는 걸 직감하고는 다급해졌다. 화안금정으로도 저 술법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이니, 저 자는 대단한 술법사가 분명했다.
' 이런 제길! 이런 식으로는 안 되는데...'
내가 힘으로 으름장만 놓는 걸로는 눈 앞의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동시에 나는 내 접근방식이 많이 서툴렀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 절대지경에 이르고 나서 계속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건가...!!'
어찌보면 쉬운 길이 있는데도 나 자신의 오만함 때문에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는 외쳤다.
" 기다려!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다!"
[ 바즈라를 또 보여주려고...? 미안하지만... 그런 건 내게 별로 의미가 없다...]
" 아니야. 내가 보여주려는 건 다른 거다."
나는 눈을 번뜩이고는 있는 힘을 다해 보법을 시전했다.
멸혼보(滅魂步)
극성(極成)
파천일보(破天一步)!!
파아앗
나는 파천일보를 발휘한 순간 상대의 등 뒤에 도착해 있었다. 그는 잠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멸혼보... 그것도 극성인가...]
나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말했다.
" 그래. 주능통이 내게 전수해 줬다!"
[ ......!!]
주능통이라는 이름이 들려오자 그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 이야기를 들려다오... 그대가 어찌... 주능통의 진전을 이어받을 수 있었는지.]
" 맨입으로는 안 되지. 자꾸 나를 피하려고만 하는데, 당신 또한 흉금을 터놓고 내게 말할 건 말해줘야겠다."
내가 으르렁거리자 상대가 고민하다가 말했다.
[ 좋다. 정 그렇다면 내 이름을 밝혀두지. 그 후에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는 건 어떤가.]
됐다.
어느 정도 상대가 마음을 연 것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쉬었다.
" 쳇, 뭐 대단한 이름이라고 그렇게 비싸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귀혼일파의 수장이란 게 따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그렇다 치고, 이런 은거기인 하나 만나려고 대체 얼마나 힘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해도 주능통에게서 들었던 멸혼보의 조언이 없었다면 아마 저 자의 이름조차 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윽고 상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 내 이름은 성진(星辰)이다...]
달마의 다섯 제자 중 한 명.
멸망한 소국(小國)의 왕자이며, 동시에 진공가향의 최후까지 함께했던 이의 이름이 난데없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