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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귀혼일파를 찾기 위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단서를 일단 정리하기로 했다.
' 귀혼일파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벽력삼존 중 하나인 녹월(綠月)이다.'
녹월은 또한 묵월단이라는 문파를 이끌면서 예전부터 귀혼일파의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은 이청운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낸 것으로, 그 당시엔 귀혼일파보다 더 중요한 일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녹월에게 그 이상의 정보를 알아내지 않고 넘어갔었다.
묵월단의 위치 또한 대략 알고 있다. 나는 이 일을 하는 게 혹시 큰 일을 그르치는 원인이 아닐까 염려되어서 먼저 제갈사에게 순어구로 연락했다.
[ 그래서 묵월단을 뒤집어엎고 녹월을 생포해서 귀혼일파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거군.]
" 안 될까?"
내 계획을 들은 제갈사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맘대로 해! 이제 와서 그깟 뇌신류 퇴물들 좀 건드린다고 무슨 걱정이냐. 어차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던 놈들이니.]
" 알았어."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순어구를 얻을 때 대충대충 남궁세가의 가주와 남궁환을 죽여버렸는데 제갈사는 그 일도 딱히 문제될 것 없다는 반응이었던 것이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예전에 알고 있던 묵월단의 본거지로 이동했다.
파앗
묵월단의 본거지에 오자 여기저기에 무인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의 수준을 기감으로 얼추 감지해 보았다.
' 강호에서는 다들 한가닥한다고 불릴 정도인가... 물론 초절정은 아니지만 상당한 전력이긴 하군.'
벽력삼존 녹월이 묵월단을 신경써서 키웠다고 했는데 확실히 그랬다. 아무래도 뇌신류의 절기를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전수했을 듯 했다. 이 중에서는 뇌신류의 전승자라고 불릴만한 자들도 꽤 있으리라. 나는 이들 또한 뇌신류라는 생각에 살수(殺手)를 자제하며 녹월에게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쉬익
" 어..."
투욱
투둑
내가 이십여 장을 음풍(陰風)처럼 날아가며 수도(手刀)로 일격에 한 놈씩, 총 여덟 명을 기절시켰다. 그들은 모두 무엇을 당하는지도 모른 채 그대로 풀썩 쓰러졌고, 아홉 명째에 이르러서야 묵월단은 이상(異常)을 눈치챈 듯 했다.
" 죽여!"
그리고 내 앞에 있던 다섯 명이 거의 동시에 내게 덤벼드는 순간 나는 기로 분신을 만들어서 빠르게 발출시켰다. 기의 환영으로 만들어지는 분신은 굉장한 집중력과 기력을 필요로 했으나 잠깐 펼치는 정도는 상관이 없었다. 다섯의 분신이 그들에게 달려들자 그들은 제각기 뇌신류 무공을 펼치며 분신과 싸웠다.
투두둥
나는 그 틈에 빠르게 파고들어서 한 명씩 수도로 기절시켰다. 별다른 수법을 쓴 것도 아니었으나 제압하는 건 그저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걸로 족했다.
' 예전에는 몰랐던 기분인데... 왜 상대의 빈틈이 저절로 보이는 걸까?'
초절정 시절이라면 이렇게까지 쉽게 제압할 순 없었으리라.
외우주에서 흉험한 결전을 치른 후 절대지경에 올랐고, 그 이후부터는 내가 무예를 시전할 때 긴장감이 많이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빈틈이 눈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특별한 초능력같은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내가 상대의 무(武)를 파악하는 실력이 늘어난 듯 했다. 이것 또한 아마 절대지경의 효과일 것이리라.
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묵월단의 내당으로 뛰쳐들어갔다. 그리고 미처 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녹월이 두세 명의 호위와 함께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고, 녹월이 찰나간에 내 기척을 눈치챘는지 번뜩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역시 벽력삼존. 일격에 기습해서 제압할 만한 실력은 아니군.'
저 자는 뇌신류의 원로이자 종사의 제자였다. 백여 년 전에도 강호를 풍미하는 초고수로 이름을 날렸던 자들이었는데 현재는 말 그대로 강호의 노괴일 것이리라. 독고성이라고 해도 벽력삼존 중 둘 이상이 덤벼든다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에는 너무 멀리 온 게 아닐까? 적어도 신(神)이 그저 환상속의 존재였을 때였다면 그저 이런 만남 하나하나가 재밌었을텐데...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장내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녹월에게 말했다.
" 녹월! 나는 백웅이라고 하오."
" ... 엄청난 고수군. 그대는 내게 무슨 일인가?"
역시 녹월은 초절정에서도 굉장히 높은 실력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내가 딱히 내공을 흘리지 않음에도 의념에서 내 격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그에게 말했다.
" 나 또한 뇌신류의 전승자이자 종사를 노리고 있소."
" 그럴 것 같군. 그래서?"
" 당신에게 재밌는 걸 보여주겠소. 당신이 뇌신류의 원로라면 뇌신류의 역사 또한 전승할 터, 이걸 알아볼 수 있겠지."
츠즈즈즈
나는 손바닥을 펴 보인 후, 거기에 신기 바즈라를 소환했다. 잠시동안 바즈라에 강렬한 뇌전이 파직거리며 일어났고, 그 모습을 본 녹월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나는 바즈라가 소멸되자 손바닥을 말아쥐며 말했다.
" 이건 뇌신류의 사대신기, 바즈라요. 일천 년 전 이군악이 종말의 거룡과 싸울 때 소실되었던 것을 내가 되찾아 왔소."
녹월이 크게 몸을 떨더니 입술을 짓씹었다.
" ... 믿을 수 없다. 어떻게 그럴수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 ......?"
녹월의 반응이 뭔가 좀 이상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이상한 반응이다.
나는 위화감을 느꼈지만 말을 이었다.
" 나는 신기 바즈라를 찾아왔으며 현 뇌신류에서 최강이라 자부할 수 있소. 나라면 종사(宗師)의 자격이 있다 생각하니, 오늘 그대를 휘하에 거두고 신생 뇌신류를 일으켜 세우도록 하겠소."
녹월은 안광을 번득였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뇌신류의 내공이 흘러나왔다.
" 백웅! 그대가 석년의 이청운에 버금가는 절대고수란 건 인정한다. 그러나 본좌는 무인으로서 한 번 겨뤄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다!"
파지지직!!
나는 녹월의 기세에 사방에 뇌전의 폭풍이 일어나는 걸 눈깜짝하지 않고 정면을 쳐다보았다.
" 굳이 길고 짧은 걸 대어봐야겠다는 말인가?"
" 왜? 자신이 없나?"
" 그럴 리가..."
나는 피식 웃으며 편하게 장검을 말아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 다섯 수까지 양보해 주지. 편하게 들어오시오."
" ... 좋다!"
녹월이 원하는 건 자신과 귀혼일파를 거둘 자의 무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리라. 또한 이런 싸움에서는 격 차이를 확인시켜줘야 하기에 나는 일부러 다섯 수의 양보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였다면 아무리 그래도 벽력삼존급 고수를 상대로 양보를 할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은 왠지 자신이 있었다.
위잉...!!
첫 수는 녹월의 자전귀도(紫電鬼刀)였다. 그가 굴곡진 도를 뽑아드는 순간 그의 도첨에 시공간이 빨려들어가는 착각이 일어났고, 그의 몸이 도신합일(刀身合一)을 이루며 전신에서 자줏빛의 번개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 도신합일의 무공을 보며 생각했다.
' 자전귀도... 진짜 이름은 자전귀왕살천도(紫電鬼王煞天刀).'
대충 형(形)만을 배울 때는 몰랐던 것이지만, 이청운이 직접 녹월 등을 제압해서 내게 그들의 무공을 전수해 줄 때 알게 된 지식이었다. 자전귀도는 본디 자전귀왕살천도라고 불렸으며 실질적인 뇌신류 최강의 도법(刀法)이었다. 물론 창(槍)을 최강의 무기술로 치는 뇌신류의 특성상 비주류이긴 했으나, 자전귀도를 극성으로 익힌 뇌신류의 도객은 강호에서 패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쩌엉!!
녹월의 일격이 상단세로 천하를 베듯 나를 베어왔다. 물론 내 실력이라면 녹월이 베어올 때 피하거나 반격할 수 있었으나 다섯 수를 양보하기로 했으므로 공격을 그대로 받아보기로 한 것이다. 정면으로 검과 도가 부딪히는 순간, 나는 자전귀도에서 자줏빛 뇌전이 흘러나와 내게 암경(暗經)처럼 침투하는 걸 알 수 있었다.
' 땅으로 힘을 흘려보내자.'
나는 왼발을 땅에 심지처럼 박으며 의념으로 기의 흐름을 통제했다. 그러자 자전귀도의 뇌력으로 이루어진 암경이 내장을 헤집기 전에 땅으로 흘러갔고, 나는 상대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나는 태극권(太極拳)의 달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런 화경에 있어서는 도가 텄다고 자부할 수가 있었다.
투웅
" ......!!"
첫 수를 교환하는 순간 녹월의 낯빛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 또한 고수이기 때문에 내가 일순간에 어떻게 그의 강격(强擊)을 부드럽게 흘려냈는지 알아챈 것이다.
채앵!
채앵!
다시금 연거푸 녹월의 강력한 도강과 살천도막(煞天刀幕)이 살벌한 기세로 의념을 품고 나를 공격해 왔으나 나는 그 때마다 모든 초식을 읽어내서 흘려내었다. 석년의 녹월은 살천도막을 전개해서 수백 명의 강호 절정고수들로 시체의 산을 쌓았다 했지만 내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이윽고 주춤거리며 물러난 녹월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 자... 자전귀도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인가!"
" 종사를 자처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소?"
" ......"
" 다섯 초식이 끝났군. 그러면 나는 십 초 안에 당신을 제압하겠소."
" 크윽!"
촤악
나는 명왕수(冥王手)를 써서 녹월을 공격해 들어갔다. 녹월은 내가 귀혼일파의 수공을 쓰는 것에 놀랐는지 멈칫하다가 자전귀도로 내 손목을 베려 했는데, 그 순간 나는 명왕수의 요결 중 명라불불연(冥羅拂佛淵)의 절초를 써서 녹월의 몸에 장풍(掌風)을 날렸다.
터엉!
척경(斥經)을 쓸줄은 몰랐는지 녹월이 장풍을 맞고 크게 허공에 떠오르자, 나는 허공을 향해 천뢰인(天雷印)을 연거푸 날렸다. 녹월이 급히 도풍을 수십 줄기 날려서 천뢰인의 장심을 베어버리자 장력이 와해되었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이기어검(以氣御劍)을 날려서 그의 어깨에 있는 요혈을 점했다.
" 컥!"
삽시간에 녹월의 왼쪽 팔이 봉쇄되었으나 그는 짧은 비명만 흘리고는 허공에서 세 바퀴를 회전하며 도로 도신합일의 기세로 나를 향해 쏘아져 왔다. 나는 냉막한 눈으로 그의 반격을 쳐다보다가 절기를 시전했다.
삼보절기(三步絶技)
천지인의 삼보(三步)가 부드럽게 녹월의 반격을 흘린 후 내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원래 이렇게 쉽게 제압할 순 없었을 테지만 방금 녹월의 반격은 초절정고수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약점이 크게 드러나 있었다.
콰악!
" 크어억..."
순식간에 내게 제압당해 버린 녹월은 목을 제압당한 채 컥컥거렸고, 나는 그의 목을 천천히 놓아주며 말했다.
" 실력차를 알면서도 내게 끝끝내 반격을 하려하다니, 건방지군. 어깨도 제압당한 상태에서 심기체가 불완전한 도신합일 따위를 내가 못 막겠소?"
" ......"
녹월이 고개를 푹 숙였다.
" 믿기지 않는군... 그대는 이청운의 환생인가? 이렇게 강한 고수가 있을줄은... 그 백련교주에 버금가는 자가 있을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약속을 지키시오."
" 좋다. 그대 백웅에게 복종하겠다."
" 그것만으론 안 되오."
" 뭐라고?"
나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았다.
" 귀혼일파의 비밀과 역사 모든 것을 내게 내놓으시오! 그대 개인의 복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소."
" ......!!"
녹월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후 고개를 떨구었다.
" 그대같은 절대고수는 천하에 백련교주 외에는 없을 터... 기껏 우리 귀혼일파의 무공 따위를 알아봤자 어디 쓰겠는가? 쓸데없는 짓이다..."
" 무공만이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술법도 모두 알아야겠소."
" 그... 그건..."
" 닥치시오. 당신이 패배한 이상, 귀혼일파의 수장으로서 모든 비밀을 내어놓으시오."
내가 으름장을 놓자 녹월이 할말을 잃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충격적인 말을 했다.
" ... 나는 귀혼일파의 수장이 아니오..."
엥?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잠시 후 녹월이 몸을 꿈틀거렸고,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진짜 우리 귀혼일파의 수장은 따로 있소. 당신을 그 분께 안내해 드리겠소."
녹월은 내게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인지 눈빛에 기가 죽어 있었다.
" 헛소리!"
나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그리고는 말했다.
" 대외적으로는 벽력삼존이자 귀혼일파를 이끌고 있다고 버릇처럼 말하고다니지 않았던가? 어디서 되지도 않는 잔꾀를 부리고 있소."
" 정말이오..."
" 당신의 말은 개소리요. 그 말 대로라면 뇌신류가 붕괴하던 그 날, 어째서 그 수장이란 자는 뇌신류를 수습하지 않고 수신류에게 패배해 일패도지하도록 놔두었소? 그 결과 백련교를 통째로 빼앗겨버렸는데 말이 된단 말이오?"
내가 성질을 내자 녹월이 힘겹게 말했다.
" ... 그것 또한 그 분께서 설명해주실 것이오. 제발... 나를 더 이상 추궁하지 마시오. 나는 하수인에 불과하오."
" ......"
" 지난 오십여 년 간 그 분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오."
말도 안 돼.
천하의 벽력삼존을 졸개로 부릴 수 있는 암중의 실력자가 있었단 말인가?
' 제길. 거짓말이야.'
하지만 녹월이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한다는 건 좀...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만일의 경우 녹월에게 이혼대법을 걸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좋소. 안내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