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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제갈사는 나와 교주의 싸움이 끝나자 안심했다는 듯 말했다.
" 후, 이제야 뭘 해볼 만 하겠군. 인간계의 반석을 다질 수 있겠어."
" 지금까진 아니었단 말이냐?"
제갈사의 얼굴이 잠시 당황으로 굳었다.
" 그걸 굳이 물어보다니..."
" ......"
" 아무튼 흑요석은 갖고 왔겠지."
" 응."
나는 흑요석을 꺼낸 후 기억을 불어넣었다. 제갈사는 흑요석을 확인한 후 앞에 서 있던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 백련교주. 나는 현 배교주이자 마도사인 제갈사라고 한다."
[ 그대는 백웅의 동료인가?]
" 그렇다. 이제 백웅이 당신에게 모든 걸 설명하기 위해 흑요석으로 기억을 줄 텐데 그 전에 내가 백웅의 책사로써 당신에게 다짐받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야..."
[ 기억이라... 저 흑요석은 마법의 일종인가 보군. 어떤 다짐인가?]
제갈사의 눈이 잠시 빛났다.
" 우리 편이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배신하지 마라. 차라리 우리의 동료가 되지 않겠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하도록."
[ ......]
나는 힐끔 제갈사를 보며 말했다.
"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굳이 다짐받을 필요는..."
" 필요는 있다. 본인의 입으로 다짐받고 아니고는 천지차이거든. 저 자 같은 경우는 특히..."
제갈사는 내 말에 가볍게 대꾸하곤 계속해서 백련교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백련교주는 팔짱을 낀 채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말했다.
[ 기억을 준다는 건 그대들의 엄중한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는 뜻이기에 위험을 느낀다는 말인가? 그 위험에 대비하고싶단 말이군.]
" 대답을 해라."
[ ... 좋다. 약속하지.]
그제서야 제갈사는 내게 눈짓을 했다. 다른 동료들에게 흑요석을 넘길 때는 제갈사가 이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백련교주를 영입한다는 건 그만큼 중대한 일인 듯 했다. 나는 천천히 흑요석의 술법을 발동시키며 백련교주에게 흑요석을 넘겨주었다.
우우웅
[ ......!!]
파앗!!
잠시 후 백련교주가 크게 굳은 듯 했다. 나는 백련교주가 말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약 반 각 가까이 그저 침묵만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백련교주가 하도 안 움직이길래 저 상태로 혹시 죽거나 큰 내상을 입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그러던 백련교주가 문득 화급한 목소리로 내게 외쳤다.
[ 배, 백웅이여!! 바즈라를... 바즈라가 아니라도 사대신기를 직접 내 눈앞에 보여다오!!]
백련교주가 저 정도로 평정을 잃는 일은 거의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세계에서 바즈라를 소환해서 손바닥 위에 소환했다.
쉬익
[ 오오... 이... 이것이 바로 사대신기...]
교주는 떨리는 손으로 바즈라에 손을 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갈사가 날카롭게 외쳤다.
" 손을 떼라 교주!! 죽는다!"
파지지직!!
[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즈라에서 어마어마한 뇌력(雷力)이 치솟아 오르더니 교주의 몸을 휘감았다. 교주는 원영신의 내공을 일으켜서 바즈라의 뇌력을 견디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이윽고 숨기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 크아아아...!!]
파지지지직!!
파지직!!
' 이, 이런!!'
정말 엄청난 번개다! 내 눈이 멀 정도로 토해지는 바즈라의 뇌전은 교주가 만다라를 일으킬 때마다 만다라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듯 했고, 교주의 몸을 한올한올 지져버리는 것 같았다. 원영신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뇌전인 것이다. 나는 급히 교주의 몸을 장력으로 크게 밀어내었다.
투웅
파지지직...
어느 새 바즈라는 사라져 있었고 백련교주는 땅바닥에 꿇어앉은 채 시꺼멓게 지져져 있었다. 나는 크게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 괜찮은가?"
[ ... 후... 우우... 진짜... 진짜 사대신기가... 돌아왔구나...]
넋놓고 중얼거리는 백련교주에게 뒤에서 보고 있던 제갈사가 이죽거렸다.
" 크크크!! 교주 당신은 마력을 지니고 있으니 사대신기에 타죽을 걸 모를 리는 없을 터. 저 죽을 걸 알면서도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보려 했던 건가? 죽어도 아쉬움은 없다 이건가?"
[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하겠지... 내 목숨보다는 사대신기의 진위여부가 훨씬 중대하니.]
그렇게 대꾸한 백련교주가 고요히 나를 쳐다보았다.
[ 백웅이여... 정말 고맙다. 사대신기를 이 땅에 되돌려주어서.]
" 으음. 기억은 다 읽은 건가?"
[ 그렇다...]
잠시 침묵하던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 그러나... 나는 아직 완전히 그대의 동료가 되겠다고 확답을 줄 수 없다.]
엥?!
뜻밖의 말에 내가 그를 쳐다보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 사대신기가 아직까지 그대의 손에서 멀쩡하게 구현되지 않는 이유... 그것이 명징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 그대의 본의가 아니지만 외신(外神)같은 존재에게 농락당하고 있을 위험성을 생각하게 된다.]
" ......"
그러자 듣고 있던 제갈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 지나치게 깊게 생각하는군. 당신 스스로도 말이 안되는 의심인 건 알고 있지? 그걸 의심하려 한다면 돌멩이나 물 한 방울까지 의심해야 할텐데."
[ ... 그렇다.]
" 사실 당신 입장에서는 사대신기가 회수되었으며 백웅이 달마와 진공가향을 진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하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 ......]
제갈사가 으르렁거렸다.
" 돌다리를 두들기다가 깨질 정도라면 민폐다. 작작하고 백웅한테 엎드려서 절이나 해. 당신네 사조(師祖)와 큰 일 하신 분이니까!!"
그는 정말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련교주가 말했다.
[ 백웅이여... 나는 그대를 대은인(大恩人)으로 여기겠다. 그리고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노라. 이걸로는 안되겠는가?]
" 뭐 나야 백련교주 당신이 날 도와준다면 아무 상관 없소. 다만... 왜 그렇게 최소한의 거리를 두려고 하는지는 알고 싶구려."
내 말에 백련교주가 무면탈을 약간 옆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 난 그 날 이후로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미안하다...]
" 당신도 흑요석의 기억을 읽어서 알고 있겠지만, 과거에 당신 자신의 입으로 진소청 앞에서 [사대신기를 가져오는 자에게 복종하겠다]라고 선언했소."
[ 그 말은 진심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망설임이 생긴 것이다.]
" 흐음."
나는 뭔지 알 것 같았다.
' 사대신기가 완벽하게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백련교주의 의심암귀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거구나.'
백련교주가 방금 전 죽음을 무릅쓰고 바즈라에 손을 댄 이유도 자신의 의심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를 측정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일단 사대신기인 게 진짜인 게 판명되었으니 그는 나를 은인으로 받들기로 했으나 최소한의 의심만큼은 떨치지 못한 듯 했다.
' 도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모든 걸 믿지 못하는 성격이 된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걸로 좋소."
" 백웅!!"
" 왜, 제갈사."
크게 나를 부른 제갈사가 잔뜩 성이 난 표정을 지었다.
" 넌 열받지도 않냐! 네가 사대신기를 가지고 귀환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줄 아냐? 원래 백 번 죽어도 이루기 힘들 위업(威業), 설령 천상의 신조차도 엄두를 못 낼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
" ......"
" 그런데도 저 놈은 완전히 우릴 믿지 못한다고! 이게 열받지 않으면 사람이란 말이냐!"
나는 제갈사의 말에 내 목언저리를 긁적이며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 어쩔 수 없지."
" 어쩔 수 없다고?"
" 너나 다른 동료들도 처음에는 날 못 믿었잖아. 한 번에 모든 게 다 될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 ......"
" 난 앞으로도 증명해나갈 거다. 너희가 날 믿을 가치가 있다는 걸."
제갈사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잠시 후 크큭, 하고 광소를 흘렸다.
" 크... 흐흐흐... 미쳤군... 다른 의미로 미쳐버렸어... 그래... 이래야 내 주군이라고 할 수 있지!"
" 별 말씀을."
나는 가볍게 받아넘겨 주고는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 백련교주 독고운천. 그럼 앞으로 우린 전생동료요. 당신을 믿고 모든 전생을 진행하도록 하겠소."
[ 좋다.]
" 잠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얘기를 했으면 하는데."
[ 날 따라오라.]
쉬익
우리는 예전에 한 번 왔었던 듯한, 교주전에서 떨어진 인적없는 장소에 도착했다. 근처의 나무등걸에 각자 걸터앉자 이야기할 분위기가 된 듯 했다. 나는 백련교주에게 말했다.
" 백련교주.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대한 일이 뭐라고 생각하시오?"
백련교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 그대의 특이점이다.]
" 특이점이라..."
[ 그대는 27번째 삶에서 엄청난 일을 겪고 큰 수확을 얻었으나, 정작 외우주로 움직이는 원인이 되었던 [특이점] 그 자체를 해결한 것은 아니다.]
백련교주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제갈사가 거들었다.
" 말 잘 했어. 이렇게 된 김에 지금 해야할 일을 좀 정리하고 가도록 하지."
제갈사가 자신의 무릎에 턱을 괴고 말을 이었다.
" 예전에 선지자가 했던 말을 생각해 보지. 놈은 [사대신기를 찾아내면 무생노모의 법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법문과 사대신기는 인과율으로 이어져 있으며 공명(共鳴)한다고도 했었어."
" 그랬었지."
" 그리고 법문을 제물로 바치면 법문에 깃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이용해서 네 [특이점]을 유예할 수 있다는 원리였다. 여기까진 이해가 가나?"
" 그래."
" 그럼 우리가 해야할 일은 바로 이 세계에 흩어진 법문을 찾는 것이다. 네가 가진 사대신기를 이용해서 말이다."
" 아."
" 그렇게 본다면 이번 28번째 삶은 네게 있어서 법문을 찾는 생애이자, 특이점을 유예하는 것을 성공조건이라고 볼 수가 있다."
제갈사의 설명에 나는 복잡하게 엉켜있던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는 듯 했다.
' 그렇군... 내 정신세계에 새겨져 있는 사대신기가 법문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고, 법문이 근처에 있으면 공명을 하게 되어 있는거군. 그리고 이번 생에 법문을 다 찾으면 특이점의 유예가 가능해진다는 건가...'
이번 생에는 무생노모의 법문을 찾아야 한다.
전 세계를 돌아다녀서라도.
내가 제갈사의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자 교주가 말했다.
[ 그대들이 법문을 찾으려 함은 사실 내 뜻과도 일치하는 것... 전력을 다해서 돕도록 하겠다.]
" 그건 당연한 일이고. 교주 당신, 무생노모의 법문 중에서 한 조각을 갖고 있지?"
제갈사의 질문에 교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다...]
" 지금 당장 보고싶군. 안내해."
[ 천암의 제단으로 가면 된다.]
파앗!
나는 둘을 데리고 비등으로 이동해서 천암의 제단으로 향했다. 이윽고 정상에 있던 제단의 석관에 이르자, 그는 석관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말했다.
[ 수신의 마도서... 이 또한 최상위의 마도서인 건 틀림없으나... 사실 진짜 중요한 법문을 감추기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쿠궁
교주는 돌상자에서 커다란 두루마리를 꺼냈다. 나는 예전에 그 두루마리를 보고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엄청난 울렁임을 느꼈던 적이 있었으므로 반사적으로 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때와는 달리 강한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 응...?'
왜 이러지? 그 때는 두루마리를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이 혼미했고 잡으려 하니까 기절했었는데...
내가 의아한 눈빛이 되자 교주가 씁쓸한 듯 말했다.
[ 지금은 내 마력을 써서 제단의 권능을 꺼둔 상태다. 그대들도 혼돈의 힘에 큰 영향을 받지 않겠지.]
" 흐음. 이 두루마리가 수신의 마도서라고 치면 법문은 어디에 있지?"
[ 그대 눈 앞에 있다.]
" ......?"
눈 앞?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래서 두루마리를 쳐다보았는데 교주는 그게 아니라는 듯 옆을 보라는 턱짓을 했다. 내가 교주의 시선이 닿이는 곳을 바라보자, 그 곳에는 뚜껑이 열린 석관이 있었다.
나는 석관에 가까이 다가가서 내부를 들여다보자 석관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바닥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의아해서 교주를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 달마대사께서 최후를 맞이하셨을 때 한 조각은 이 제단에 그대로 흡수되었다. 일체화된 제단은 본래 가진 마력보다 훨씬 강력해졌지...]
" ......!!"
[ 이 석관 자체가 현재로서는 법문의 한 조각이다.]
천암의 제단 최상층의 석관!!
그것이 백련교가 보유하고 있던 무생노모의 법문 중 한 조각이었다니!
무생노모의 법문, 그 첫 단추가 끼워진 것이다.
제갈사가 석관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 확인했다. 그러면 나머지 법문의 행방은 알지 못하는 건가?"
[ 그렇다... 알았다면 백련교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 회수했겠지...]
" 선지자의 말로는 법문은 총 6조각. 그 중에서 1조각이나 2조각 정도는 [옛 지배자]의 손에 있을거라고 했다. 달리 말하자면 나머지 절반은 아직 인간계에 뿌려져 있을 가능성이 높단 말이지..."
[ 그러나 찾는 일은 지난할 것이다... 그대들도 전생하면서 알았겠지만... 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의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찾으려 했다... 그러나 신들은 결코 쉽사리 그 행방을 가르쳐주지 않겠지...]
백련교주가 답답한 듯 중얼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 백웅이여...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옛 지배자]라고 하는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것으로도 이룰 수 없고... 그저 사대신기의 공명에만 의존해서 이 세상 전체를 뒤지고 다녀야 하는 것이다. 가약없는 고난의 길이리라.]
" 해야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포기하지만 않으면 뭐든 어떻게든 된다!
그것이 바로 내 신념인 것이다.
제갈사가 크큭 웃더니 말했다.
" 뭐, 그렇게까지 맨땅에 꼴아박는 작업은 아닐 거다. 지금까지 네 녀석이 쌓아놓은 게 많아서..."
" 제갈사. 방법이 있어?"
" 물론 있지."
제갈사는 말했다.
" 우선은 미뤄둔 일부터 한 후에 백련교로 와라. 본격적인 얘기는 그 때부터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