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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55화 (953/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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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가면을 찾았다고.

그렇다면 설마 눈 앞의 이 놈은...

나는 순간적으로 저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저건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었으며 신(神)이었다. 또한 이번 생에 내가 가장 조심하고 두려워했던 존재 그 자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는 놈을 노려보며 외쳤다.

" [기어오는 혼돈]!! 이제 와서 뭐 어쩌게!!"

" ......"

틀림없다!

신투지존이 스스로를 가면이라고 밝혔고, 그 가면의 주인이 [기어오는 혼돈]이라고 밝힌 이상 상대의 정체는 세 살 어린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죽음을 각오했다.

" 이제 세상이 망하는데 날 죽이려고?! 할 테면 해 봐!!"

내 외침에 상대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대꾸했다.

" ... 그건 못 해."

" 뭣?"

못 한다니?

나는 뜻밖의 대답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안 하는 것도 아니라 못 한다니. 내가 의혹어린 표정으로 놈을 쳐다보자 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 나는 재미가 없는 길은 선택할 수 없다. 절대로."

" ......"

" 내 유일한 단점이지."

재, 재미?

이게 무슨 개풀뜯어먹는...

아니 그것보다 재미가 없다면 '안 하는'게 아닌가? 왜 못 한다고 표현한 거지?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 그것보다 필멸자여. 넌 자신의 삶을 충분히 즐겼나?"

" 무슨... 즐기긴 뭘 즐겼다는 거냐!"

" 엄청 재밌어 보이는군. 부러워."

그는 다소 선망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나는 너희처럼 되고 싶어서 세상 여기저기에 가면을 뿌렸던 걸지도 모르지."

" ......!!"

가면!

역시 저 놈은... 내 최종적수일지도 모른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보를 얻으려고 질문했다.

" 가면을 뿌린 이유가 뭐지? 당신의 가면은 얼마나 있는 건가."

그러자 놈은 [나]의 모습을 한 채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 앞에 갖다댔다.

" 당연히 그런 건 비밀이지."

" 뭐라고!"

" 말해주면 재미가 없잖아."

" ......"

" 후후, 더 이상 자잘한 정보를 캐내려고 하지 마. 재미없어."

또 재미냐...!!

나는 속에서 부글거리는 걸 느끼면서 외쳤다.

" 그놈의 재미!! 재미를 찾고 싶으면 네놈은 신적 존재니까 혼자서 쾌락의 궁전이라도 만들어서 천년만년 살면 되잖아! 왜 애먼 사람들을 괴롭히냐고!!"

정말 민폐 그 자체다!

나는 저 놈에게 맞아죽는 한이 있어도 이런 말은 하고싶었기에 속시원하게 털어놓았다. 다음 순간 놈의 권능에 일격에 분쇄될 거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놈은 뜻밖에도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 대신에 내 외침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 흐음... 그러게. 왜 괴롭히는 걸까. 그게 재밌어서 아니겠나?"

" 이런 변태새끼!!"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 실제로 그렇다고. 너는 방금 전에 나보고 쾌락의 궁전을 만들어서 혼자서 놀라고 했잖아? 그거 이미 해 봤어."

" ... 해 봤다고?"

" 그래. 23조 년에 걸쳐서 우주의 중심에 궁전을 만든 후 9492182674번 정도 부쉈다가 재생성하면서 그 안에 모든 쾌락을 때려넣고 논 적이 있지. 식욕 색욕 지식욕 등등 이것저것 다 해봤지만 부질없었어, 하하하..."

" ....."

뭐라는 거야...

나는 저 놈이 뻥도 정도껏 쳐야 믿어줄텐데 비현실적인 소리를 하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저 놈이 허풍쟁이라고 생각하며 놈을 비웃으며 말했다.

" 웃기고 있군. 그래서 인간을 괴롭히는 게 제일 재밌다? 황당한 소리도 정도껏 해라!!"

" 딱히 인간을 괴롭히는 게 제일 재밌는 건 아니야. 그런 건 이미 많이 해봤거든. 단지 이번 놀이는 나로서도 꽤 진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지. 그래서 바둑알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듯 하나씩 기초를 쌓아올리는 중인데, 그 과정에 인간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 ......?"

" 이런이런. 못 알아듣는 너의 우둔함조차 부럽다고 느껴지는군. 나도 머리를 비우고 살고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지?"

저 개자식이 나를 놀리는구나!!

슈욱!!

나는 이를 으득 악물고는 선검을 들어서 놈의 목 앞에 갖다대었다. 놈이 내 칼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나는 놈에게 외쳤다.

" 이제 와서 가면을 찾으러 온 이유가 뭐야!! 하필 진공가향이 이뤄져서 다 멸망할 때 여기에 나타난 이유가 뭐냐고!!"

" ......"

" 말해!! 난 그 정도는 들어야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놈에게 세게 나가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놈이 [옥좌]에 있었던 그 놈이라면 이렇게 까부는 게 무의미했지만, 왠지 저 놈한테 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계속 드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씩 웃으며 말했다.

" 그렇군. 진공가향의 마지막에 선 자로써 그 정도는 들을 자격이 있겠군, 필멸자여."

놈은 손가락을 슥 하고 움직여서 내 선검을 옆으로 밀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 움직임에 반해서 그대로 검을 휘두를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마치 애초부터 공격의지를 차단하는 결계같은 게 발생한 것 같았다. 절대지경에 이른 내 검술은 반사신경 이전의 영역에서 베는 게 가능했기에 일반적인 암시나 최면 수준이 절대로 아니었다.

" 별 거 아니야. 내가 이 가면을 찾으러 온 이유는 [좌]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워서였다. 그저 심심풀이로 세상에 뿌려둔 가면 중 하나였는데 뜻밖에도 무신(武神)이 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줬거든. 절대 안 받아줄 줄 알았는데."

" ......!!"

" 그런데 회수작업을 하기도 전에 창힐이 난리를 치는 통에 이 가면이 외우주로 빠져나가는 걸 잡지 못했지. 외우주는 내 영역 바깥인지라 쉽사리 오지 못했어. 뭐, 이렇게 진공가향이 일어나게 되면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게 되니 출입할 수 있게 되지만."

" ......"

나는 잠시동안 놈의 말에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는 뭔가를 깨닫고는 놈에게 외쳤다.

" 설마 너... 신투지존을 이용해서... 무신의 [좌]에 침투하려는 거냐!!"

놈은 내 질문에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런 건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소한 계책에 불과하거든."

" 이익...!!"

나는 순간적으로 절망적인 감정이 덮쳐왔다.

' 이, 이걸 어떻게 하지?!'

눈 앞의 저놈은 정말 무지막지한 존재다. 자타가 공인하는 가공할 [옛 지배자]인데다가 엄청난 음모의 주재자! 끝을 알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인 자가 만일에 무신의 좌에 침투하게 된다면!!

' 신살(神殺)을 할 수 있는 단서인 무신의 좌가 [기어오는 혼돈] 때문에 망가져버릴지도 몰라!!'

만일 저 놈의 무예의 영역을 지배하여 혼돈으로 물들이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 수천 번 전생해봤자 무의미하다. 신살의 힘이 없다면 아무리 혼돈과 술법의 힘을 쌓아봐야 외신들의 음모를 절대 분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초조해하고 있자 놈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 흐음... 정말 이런 건 가능성조차 생각할 필요 없는 농담이었는데... 넌 정말 머리가 나쁘구나. 머리회전이 좋은 인간이었다면 애교있는 농담으로 받아줬을텐데."

" 뭐?!"

" 그 놈들은 무극(武極)의 집념으로 가득찬 자들... 이 정도 계책으로 흔들릴 녀석들이 아니니까... 나는 훌륭한 적수를 인정하는 편이거든. 하긴 필멸자인 너는 모를려나?"

" ......"

나는 계속 놈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자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놈이 말했다.

" 현실이 붕괴되기 시작하는군..."

쿠구구!!

놈의 말이 끝나는 순간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이 붕괴되어 선이 떨리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이 붕괴된다는 표현답게 모든 물질의 구성이 혼돈으로 변하면서 제멋대로 일그러지는 게 육안으로 보였다. 이 단계까지 왔다면 이제 세상의 파멸이 진정으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끝이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내가 눈을 감자 놈이 서서히 말했다.

" 전생자(轉生者)가 혹시 있지 않을까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허사였군. 역시 내 능력에 제약을 너무 많이 둔 건가...? 뭐 이 정도는 되어야 노는 재미가 있겠지."

" ......"

" 그럼 안녕. 다음 우주에서는 나랑 재밌게 놀자, 필멸자여."

스스스스

놈의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약간 안도의 감정이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 저 놈은 몰라!!'

내가 전생자라는 걸 모른다!!

분명히 저 놈의 화신으로 추측되는 놈들에게 몇 번인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들킨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왜인지 저 본체놈은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번 생에 끈질기게 전생자라는 사실을 숨긴 결과 마지막 순간까지 저 놈은 내가 우연히 이 자리에 남은 필멸자라고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희미한 목소리가 흘렀다.

[ ... 웅... ]

" 응?"

[ ... 백... 웅... 들리... 냐...]

" ......!!"

끊어질 듯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흠칫했다.

' 신투지존!!'

신투지존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흘러들어왔다.

[ 난 아직... 가면의 자아를... 본체에게... 완전히 뺏기지... 않았다... 무신(武神)의 도움으로... 저항하는 중이지...]

" ......"

[ 저 놈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니... 부탁이... 있다...]

부탁?

이어진 신투지존의 말에 나는 손이 부들거릴 정도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저 놈의 가면을... 훔쳐다오...!!]

내, 내가?!

저 놈은 [옛 지배자] 중에서도 강력하기 짝이 없는 놈인데 어떻게 덤빈단 말인가! 화신이 와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본체일 텐데 어떻게 저런 괴물의 가면을 뺏을 수가 있을까. 저 놈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는 방금 전 손가락으로 칼날을 치울 때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저건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을 뿐 그 속은 우주적 존재였다.

[ 내가 모은... 모든 업(業)을 네게 넘기겠다... 그러면... 한 순간이겠지만... 신역절기(神域絶技)를 쓸 수 있을 것이다...]

" ......"

[ 마지막 부탁이다... 후배.]

후배.

나는 그 한 단어에 알 수 없는 감흥이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 ... 하는 수밖에 없겠군.'

사실 안 하는 게 맞다. 전생자라고 하는 최고의 비밀을 안 들키고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을 수는 없다. 어차피 이번 생에 얻을 걸 다 얻은 상태인데 더 무리를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자리에서 그냥 죽어도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굳이 저 괴물놈을 도발하듯 공격해서 주의를 끌어봤자 남는 게 없었다. 신역절기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추궁당하기밖에 더 하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대도(大盜)에게는 의리가 있다. 그렇기에 좀도둑과는 다른 것이다!

스으으으!!

잡념이 소용돌이치는 동안에 알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나는 내 눈앞에 새파란 '끈' 같은 게 물줄기처럼 흐르는 걸 볼 수 있었고, 그 끈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다만 그것은 왠지 일반적인 기력이나 영력, 마력과는 달라서 직접적으로 내 힘이 강해지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심지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저 괴물놈조차 자신에게서 '끈'이 흘러나와서 내게 통하고 있는 걸 모르는 듯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 '끈'을 볼 수 없는 건가?

이윽고 나는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 제길! 난 왜 맨날 어리석은 선택만 반복하는 거지?'

약자의 비통한 염원.

나는 도저히 그걸 지나치기 힘든 것 같았다. 때때로 내 이기심 때문에 그걸 무시해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상황에서 계속 인정에 끌리게 되는 것이다. 무의미한 정의를 추구하던 끝에 개죽음을 당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나는 원래 좀 이기적인 놈이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런데...

... 그렇군. 망량을 만난 후부터였어.

" 야. 이 새끼야."

" 흠?"

나는 침묵 속에서 상대를 불렀다. 그리고 외신(外神)일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대존재가 내 육체를 가진 채 힐끔 나를 쳐다보는 순간 나는 달려들었다.

" 가면 내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업(業)이 발동하면서 저장되어있던 신역절기가 끓어오르듯 펼쳐졌다. 업(業)이라고 불리는 게 내게 특화된 신역절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려왔다. 좌(座)의 주인이 내게 허락을 했기에 단 한 번의 사용이 가능한 것이다.

... 2천 년의 염원이 담긴, 무림사상 최고의 대도 신투지존의 최종절기를.

신역절기(神域絶技)

일수탈혼(一手奪魂)!!

파캉!!

다음 순간, 상대의 머리 뒤편에서 가면이 떠오르더니 정확하게 반쪽으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내가 펼치고도 이게 무슨 기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손 끝이 모두 깨져서 박살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손가락 뼈가 죄다 깨졌어!!

나는 삽시간에 또 장애를 떠안게 되자 내심 비명을 질렀다. 유독 이번 생에 사지를 자주 훼손당하는 것 같아서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문제는 내가 펼치고도 이게 무슨 위력이 있었던 건지 몰라서 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우우우우 -

상대가 마치 호기심을 느낀 듯 소용돌이치는 얼굴으로 지근거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처럼 천 개의 가면이 겹쳐져 있는 느낌이라서 그 얼굴은 눈으로 보이지만 인식하는 게 불가능했다.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놈이 말했다.

[ 아주 재미있군... 재미있어... 하하하하......!!]

쉬쉬쉭

그리고 다음 찰나, 나는 놈과 내가 몸이 뒤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투지존과 내가 한 차례 교환했던 몸이 또다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몸이 바뀐 찰나에 황금빛 새가 크게 소리지르며 날아올랐다.

[ 내 영혼을 의탁할 곳은 백웅일지언저! [기어오는 혼돈] 그대가 아니다!]

후우우웅

그리고 황금빛 새와 함께 사대신기 또한 내 쪽으로 날아와서 저절로 내 몸에 달라붙었다. 영혼으로 인정한 주인을 따라가려는 듯 했다.

혼돈의 눈빛이 냉엄하게 번득였다.

" 그래? 넌 인과율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겠군. 죽어라."

퍼벅

황금빛 새가 내게로 날아오려는 순간, 황우의 몸으로 옮겨간 놈이 손가락으로 황금빛 새를 가리켰다. 그리고 황금빛 새 케찰코아틀은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지고 말았다.

" ......!!"

고대신이자 [옛 지배자]급의 힘을 지닌 케찰코아틀을 손가락질 한 번으로?!

크기와 상관없이 케찰코아틀은 엄청난 힘의 소유자인데!

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자 놈이 서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 더 놀아주면 좋겠군... 백웅이라 했던가..."

" ......"

나는 놈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동안 딱 굳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저 놈과 싸워서 이길 확률이... 전혀 없어.

그러다가 갑자기 놈이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내저었다.

" 뭐어... 아쉽긴 하군. 인과율을 다 써버렸잖아."

" ......"

" 아주 좋은 작전이었어. 재밌었다!"

쉬리리릭!!

뜬금없이 포기하듯 말하자마자 놈의 몸뚱아리가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들듯이 허공의 혼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서 사라졌다! 나는 놈이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에 어리벙벙한 느낌이 들었다.

' 이... 인과율을 다 써서인가?'

나는 지금 상황이 명확히 이해가 가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마지막에 신투지존의 복수를 해 주었고, 그 도박의 대가로 내 원래 몸을 되찾았다는 점이었다. 나는 내 몸을 잠시 더듬어보다가 신투지존에게 말을 걸었다.

" 선배. 내가 해 냈어."

정적이 흘렀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대도는 그 한을 풀고 사라진 것이리라.

"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 제길. 울면 뭐 해.'

눈물을 흘리는 게 추하게 느껴져서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그리고는 대신에 씩 웃었다.

제갈사의 조언대로 하는 게 차라리 마음은 편한 듯 했다.

잠시 후 눈 앞이 서서히 환해지기 시작했다.

' 진공가향의 마지막...'

이제 죽는 건가.

아주 길었던 것 같다.

나는 말없이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쿠구구구구구

[ 나는 끝까지 그대와 함께 하리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황금빛 새, 케찰코아틀의 유해에서 뿜어져나온 빛이 신기 바즈라에 깃드는 게 보였다.

번쩍!

그리고 세상은 멸망했다.

그것이 나의 27번째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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