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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950화 (948/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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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가향(眞空家鄕)

가면.

내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특별한 통찰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눈 앞의 신투지존이 보여주는 불가사의한 기행 그 자체는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그가 신적인 존재인 건 아니다. 그렇다면 가면술사로써 수련을 쌓아 온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 뿐이다.

신투지존, 그 자신이 원래부터 가면 그자체였다는 것.

어떻게 인간의 형질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론은 그것뿐이다. 가면이 다른 가면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 가면술사는 가면을 '써야' 하지만 가면은 그 과정조차 필요없기 때문에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진다.

...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모험을 겪어오면서 이 세상에는 별별 존재가 다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투지존이 인간이면서 가면인 존재라고 해도 납득할 수 있다. 외계인도 신도 있다는 걸 알고있는 판국에 그 정도의 기이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렇다면 신투지존은 어떻게 절대지경의 무공을 성취하고 신역절기까지 얻은 거지?

인간이 아니고서는 태허의 힘을 그렇게까지 통찰할 수 없을 텐데...

내 말에 신투지존이 정령의 몸을 빌린 채 대꾸했다.

[ 그래, 맞아 후배. 나는 인간이자 가면. 신투지존이면서 가면이지.]

"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게다가 지금 당신은... 고대신의 영육을 빼앗았어."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신투지존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질적인 마(魔)의 존재라는 건, 저런 존재도 있다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이면의 세계에 얼마나 사악하고 기이한 괴물이 많은지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세상에 괴물은 많을지라도 고대신의 몸뚱이를 빼앗을 수 있는 존재는 결코 많지 않다! 고대신 또한 성좌를 주무르고 우주의 법칙을 움직일 수 있는 초월적 존재였다. [옛 지배자]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는 고대신에게 기습을 가했다지만 어떻게 신의 육체를 찬탈할 수 있는 걸까?

[ 간단해. 가면의 원 소유주가 지닌 격(格)이 이 정령보다 훨씬 높을 뿐이야. 어찌나 높은지 내가 가면으로 변했을 때 우주에서 몸을 뺏을 수 없는 상대는 거의 없지... 내가 가면 본연의 능력을 특출나게 각성한 편이지만.]

" 격? 원 소유주?"

[ 설명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군.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가 하라는대로 따라해라, 후배.]

" 뭐?"

츠츠츠츠 -

신투지존이 화의 정령의 몸을 움직였다. 양쪽 팔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형상에서 서서히 내려와서 수인(手印)을 맺었다. 나는 그 수인의 형태를 보자마자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있었다.

'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권인(智拳印)!'

틀림없다!

창힐의 기록이 담긴 그 서(書)에 수록되어 있던 형상이다. 나는 창힐의 서를 달달 외웠으므로 잊어먹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신투지존이 저걸 쓸 수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신투지존의 등 뒤에서 만다라(曼茶羅)가 퍼져나와서 마치 후광처럼 일렁였다. 신투지존은 지권인을 유지한 채 내게 말했다.

[ 달마가 내게 의뢰한 것은 정령들을 차례로 사대신기에 봉인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들의 몸을 빼앗아서 신기에 집어넣을테니, 너는 봉인이 끝난 사대신기를 차례로 네 것으로 만들면 된다.]

" ......!!"

[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후배.]

나는 뜬금없는 말에 당황했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 정령들을 사대신기에 봉인한다고?!'

달마가 그걸 의뢰했다는 건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인가?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신투지존이 크게 진언을 외쳤다.

[ 사바하(娑婆訶)!]

슈와아악!!

화의 정령이 마치 시뻘건 광선의 춤처럼 허공에 흩날리더니, 이윽고 하나의 신기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봉인되었다. 나는 급히 그 신기를 마력의 팔으로 붙잡았는데, 그 순간 마력의 팔이 녹아내렸다.

" 으아아악."

끔찍한 고통때문에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이내 이게 거부반응이란 걸 알아차렸다.

' 정령이 봉인된 신기가 마력(魔力)을 거부하는 거야!'

정령의 본질이 우주의 질서에 연관된 정령신이자 고대신이라면 [옛 지배자]의 힘인 마력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마력의 팔을 떼어내고 멀쩡한 팔을 뻗어서 신기를 잡았는데, 이번에는 녹아내리는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 윽..."

들 수가 없어!

그저 가벼워보이는 기다란 철통 모양의 병기였는데 이 몸의 순수한 근력으로는 들 수가 없었다. 나는 기(氣)를 써서 근력을 강화시켜서 들어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들려지지 않았다. 내가 낑낑대고 있을 때 뒤에서 신투지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사대신기쯤 되면 힘으로 들 수 있는 무기가 아니겠지. 또 다른 자격조건이 필요할지도?"

내가 뒤를 돌아보니, 신투지존이 방금 전과 같은 인간의 형상을 한 채 나타나 있었다. 정령을 봉인시키고 자신은 고스란히 빠져나온 듯 했다. 엄청난 능력이었기에 나는 내심 놀라면서 대꾸했다.

" 자격조건이라니?"

" 그건 우리 세계의 사대신기와 아직 같다고 할 수 없는 무기다. 그저 고대신을 잠시 봉인해뒀을 뿐인 거지. 그걸 무기로 만들기 위해선 뭘 해야할지 나로서도 잘 모르겠어."

" ......"

"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냐?"

" 신투지존. 아까 했던 말이 무슨 뜻이지? 당신이 가면이라는 건 잘 알겠지만, 자기자신을 훔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내 질문에 신투지존이 눈에 이채를 띄었다.

" 후배. 네 목표는 그 사대신기 아니었냐? 목표를 눈 앞에 두고 내 목적까지 물어볼 여유가 있나보군."

" 여유는 없어. 하지만, 당신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면 더 후회할 것 같아."

신투지존은 위험하다.

또한 중요하다.

이 자의 진의(眞意)를 모르고 사대신기를 탈환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해도 무의미한 일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시간낭비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에게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신투지존이 히죽 웃었다.

" 어이. 일단 신기부터 들고 나서 얘기해.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인데 거르면 어쩌겠다는 거야."

" 내공을 아무리 쏟아보아도 조금밖에 들 수 없어."

" 내공만으로 들어서 그렇겠지?"

" 아!"

나는 그 순간 내가 뭘 간과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챘다. 그리고는 곧장 의념을 집중해서 천주(天柱)를 곧추세운 채 의지를 만들어냈다.

이걸 들겠다.

그와 동시에 절대지경의 의념천주가 세계의 법칙을 일시간에 왜곡하며 내게 알 수 없는 힘을 부여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서서히 신기를 들기 시작하자 아까와는 달리 신기는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손에 잡혀서 들렸다.

내가 신기를 드는 데 성공하자 신투지존이 말했다.

" 역시 그렇군. 의념(意念), 혹은 태허(太虛)를 다룰 수 있어야 신기를 사용할 수가 있는 거야."

" ......"

" 자, 다음 놈을 봉인하러 가자구."

" ... 이해가 안 돼."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 정령 넷이 힘을 합쳐서 흉신을 비롯한 [옛 지배자]들을 막아주는 판국이야. 이 상황에 정령을 차례로 봉인해서 신기에 집어넣는다는 건 자살행위 아닌가? 진공가향은 커녕 바로 결계가 뚫려서 죽을 텐데."

" 그건 네가 아무것도 안 했을 때의 얘기겠지. 그냥 받아먹지만 않으면 돼."

신투지존은 뚜벅뚜벅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 백웅. 다음번 흉신의 공격이 오면 네가 신기로 맞서라."

촤아악!!

신투지존은 말이 끝나는 순간 다시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번에도 다른 정령을 습격해서 봉인시킬 생각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모습을 감추자마자 하늘에서 거대한 비명소리같은 게 들리는 걸 알아챘다.

키오오오오오 -

거대한 [옛 지배자] 한 마리가 현신해서 꿈틀거리며 결계 주위를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쪽의 결계는 화의 정령이 빠져서인지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그 놈의 뒤편에서 흉신이 주먹을 들어서 결계를 가격할 준비를 하는 듯 했다.

' 안돼!'

흉신이 이번에 공격하면 확실히 뚫릴 것 같다!

그런 직감이 든 나는 지금 결계를 공격하고 있는 [옛 지배자]부터 처리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다란 철통 모양의 신기를 들어서 바깥쪽을 겨누었다.

" 음...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쓰지."

화염의 정령이 깃든 사대신기.

형태로 보아서는 뭔가를 발사하는 듯 했다. 하지만 발사가 되는 구멍의 안쪽에는 어떠한 기계장치도 없었다. 형태로 보아서는 총포와 유사하지만 이걸 어떻게 해서 사용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발사를 위해 누르는 뭔가가 전혀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 인간이여... 감히 위대한 정령을 한낱 사물에 봉인하다니...!!]

화염의 정령이 노해서 내 머릿속을 터뜨릴 듯 버럭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그 노갈성을 듣다가 말했다.

"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십시오! 지금 도와주시지 않으면 진공가향이 실패합니다."

[ ......]

" 당신들에게 누군가가 임무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 임무는 우리를 도와 의식을 수호하는 것일 터, 도와주셔야 할 겁니다!"

[ 이기적인 놈들... 너희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신조차도 능멸하겠다는 것인가... 역시 혼돈의 종족이구나.]

한탄하듯 중얼거리던 화염의 정령이 이윽고 말했다.

[ ... 나의 이름은 #*%&*@&*$다.]

" 네?"

[ 필멸자 백웅이여. 그대가 알아서 나의 이름을 그대들의 언어로 변환시킬지어다. 그렇게 한다면 나는 이 무기에 종속되어서 무기에 힘을 빌려주는 계약이 성립할 것이다.]

" 으음!"

나는 화염의 정령이 어째서 이름을 가르쳐줬는지를 알아차렸다.

[이름]의 계약!

고대신 또한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기에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밝히는 것으로써 계약을 허가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으로 인지하는 건 가능했지만 막상 인간계의 언어로 바꾸려 하니 곤란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워낙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고위차원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곤란해 할 때였다. 머릿속에 희미한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 아그니(अग्नि)...]

앗?!

내가 그 심어(心語)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가슴팍이 혼돈에 녹아내리고 있는 달마의 모습이 있었다. 달마는 다시 한 번 내게 심어를 보내왔다.

[ 백웅이여... 그 존재의 이름을... 아그니로 정의하면 될 지어다... 그것이 가장 손실없이 그 분의 힘을 신기에 담아낼 수 있는 이름... 이다. 수만 번의 시도 끝에 알아 낸... 계약명이다...]

[ 달마! 괜찮은가?!]

[ 어서... 해라...]

[ 알았다!]

나는 달마의 목소리가 꺼져가는 걸 알아채고는 급히 외쳤다.

" 당신의 이름은 아그니! 계약은 성립했다!"

[ 좋다... 나 신기(神器)가 되어 계약에 따라 힘을 빌려주겠노라!]

후와악

그 순간, 철통에서 윤기가 흐르더니 가공할 신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뭔가 할 틈도 없이 철통에서 거대한 화염이 발사되었다. 고대신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 나의 이름은 아그니! 만마(萬魔)를 파괴하는 염앙(炎殃)일 지어다!]

사대신기(四大神器)

발동(發動)

쿠콰콰쾅!!

[ 크아아아아아악!!]

다음 순간, 결계를 칭칭 감고 있던 다리 백 개 달린 뱀 모양의 [옛 지배자]가 허리통부터 일격에 박살났다. 그 [옛 지배자]는 발버둥치며 몸을 회복하려 했으나 마력이 솟아오르기 전에 신기의 힘이 지배자의 머리통까지 한 순간에 불태웠고, 잠시동안 백염(白炎)이 머무르더니 지배자가 통째로 소멸되고 말았다.

후와아아악!!

사대신기 아그니의 열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뒤에 있던 흉신에게까지 날아갔다. 흉신은 자신의 박쥐같은 날개를 펄럭여서 열염을 튕겨냈으나, 그의 박쥐날개가 크게 그을린 듯 했다. 흉신이 다소 놀랐는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주문영창을 멈추고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 ......!!"

사대신기의 위력이 이 정도라니!

나는 경악해서 내 손에 들려있는 철통을 바라보았다.

' 칠요조차도 이 정도 위력은 아니었어!'

시각적으로 보이는 효과는 칠요와 비슷한 수준일지 몰라도 사대신기는 [옛 지배자]에게 직접 타격을 줄 수가 있었다. 아건 엄청난 차이였다. 칠요 또한 사용자의 역량이 마왕급 이상이라면 [옛 지배자]에게 타격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상승률이 크지가 않았는데, 사대신기는 대놓고 신살(神殺)이 가능해 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우주급 정령신들이 봉인된 것이니 당연한 것이리라!

달마의 말이 또다시 들려왔다.

[ 어서... 움직여라 백웅... 그대가 사대신기를 모두 얻어야 최소한의 승산이... 생긴... 다. 그냥 정령신들이 유지하는 결계만으로는... 결코 진공가향이 끝날 때까지 버틸 수가 없어...]

나는 기가 막혀서 외쳤다.

[ 달마!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 진작 말해줬어야지!]

[ 미안하다... 그러나... 이미 내 주변에는 [옛 지배자]들의 감시가 맴돌고 있었다... 특히 내 사도인 그대에게는 더 심각한 영시(靈示)가 감돌고 있었지... 작전이 시작된 후에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 ... 서(書)가 완성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지? 즉시 세계가 멸하는 것인가?]

[ ......]

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대답 속에는 즉시 멸망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백웅... 본디 그 신기를 쓰려면 엄청난... 엄청난 대가가 필요... 지금처럼 남발하는 건 본디 불가능한... 세계최강의 신기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현재 제단을 유지하고 있는 내가 모두 감당하고 있다... 그대는 힘을 아끼지 말고 [옛 지배자]를 격퇴하는데 모든 힘을 쓸지어다...]

[ 알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다음 방위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장소로 향하자, 그 곳에는 신투지존이 막 바람의 정령의 몸을 빼앗고 있었다.

슈우우욱!!

신투지존이 웬 뿔피리인지 나팔일지 모를 신기에 바람의 정령을 봉인했다. 그는 신기를 내게 던져주며 말했다.

" 두 번째 신기다."

" ... 아직 당신의 진짜 의도를 말하지 않았어."

내가 허공에서 신기를 잡아채며 말하자 신투지존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어이가 없군... 신투의 후계자인 주제에 질문한대로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네가 나를 믿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딱히 널 믿지 않아. 그리고 오기가 생겨서라도 말해주기 싫겠지. 안 그러냐?"

" ......"

"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너 정도 역량을 쌓았는데도 아직도 순수한 일면이 있다는 게..."

푸념하듯 중얼거리는 신투지존이었다. 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약속해."

" 뭘?"

" 이 사대신기를 다 모으고 나면 내게 진짜 의도를 말해주겠다고."

" ... 방금 전까지 뭐 들었냐? 난 딱히 너한테 말해줄 이유도 생각도 없다고 말했을 텐데?"

" 말해줘."

나는 신투지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그렇지 않으면 난 당신을 결코 신투지존, 도둑의 지존으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 ......"

신투지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말했다.

" 웃긴 놈이군. 그게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 안될 게 뭐야?"

" 뭐?"

나는 팔짱을 꼈다.

" 난 당신이 인간계에 남겨둔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후배다. 신투지존의 모든 것을 전승한 존재는 천지천상에 오로지 나 뿐이야. 그리고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 가면이라면, 당신이 최고의 도둑이라는 걸 인정해줄 수 있는 건 세상에 오로지 나 뿐이야. 더욱이 곧 세계가 끝장나는 마당이라면 말이지."

" ......"

"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당신은 신투지존인 채로 목적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일개 가면으로 끝날 뿐이야. 내 말이 틀렸으면 어쩔 수 없고."

그러나 내 말은 딱히 틀리지 않은 듯 했다.

" ......"

신투지존은 크게 동요하는 것 같았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통하네...!!'

사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게 협박이 될 수 없어야 정상이다. 기껏 내가 인정해주고 아니고가 신투지존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처음에 말할 때 긴가민가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만 왠지 신투지존이 지금까지 행동하는 걸 보면 아닌 척 해도 내게 신경쓰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묘한 집착과 호의가 무엇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게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신투지존.

[가면]이기도 한 그는 자기자신의 정체성을 위해서 그걸 남겨두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계에 [후배]가 따라올 수 있도록 자신의 유진을 남긴 건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동안 침묵하던 신투지존이 말했다.

" 좋아... 마지막에 말해 주지."

그는 약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 빌어먹을 후배놈아."

파앗!

신투지존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다시 사대신기와 계약을 마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유라고 이름을 명명한 사대신기를 써서 허공에 나팔을 불었는데, 그러자 거대한 흐름의 결계가 생겨나며 근처를 단단하게 감쌌다.

우우웅

이건 공격으로 쓸 수도 있지만 주 용도가 방어와 보조인 신기로 보였다.

' 그렇군. 내가 사대신기를 얻으면서 비어있는 정령들의 자리를 보충하면서 진공가향의 시간을 버는 계획이야...'

나는 힐끔 뒤를 쳐다보았다.

파지직!!

서(書)가 네 번째 조각을 이루고 있었다. 곧 있으면 절반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만 가면 진공가향까지 버티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세 번째 신기를 얻으러 갔을 때였다.

쿠구구구...

" 뭐지?"

바깥에서 심상치 않은 울림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까지 결계를 둘러싸고 무수한 마법을 쏟아내던 [옛 지배자]들이 뒤로 물러서며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도열하는 형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신투지존이 중얼거렸다.

" 마침내 올 게 왔군."

" 뭐가?"

신투지존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 만유(萬有)의 지모(至母)가 [옛 지배자]들의 숭앙에 따라 머지않아 강림한다..."

후우우우

형언할 수 없는, 마치 검은 뿔과 사악한 양떼의 모음같은 이계(異界)가 우주의 저편에서부터 초록빛 광채와 함께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옛 지배자]는 공격조차 잊은 채 그저 납작 엎드려서 곧 강림하게 될 그 존재에게 지고의 존경을 표하고 있었다. 이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경엄(敬嚴)에 흉신조차 고개를 조아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지배자들이 꿇어 엎드리는 건 언뜻 웃긴 광경이었으나, 나는 그게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아채고는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곧 외신(外神)이 강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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